윤을수 [한] 尹乙洙

윤을수(1907~1971). 신부. 인보성체 수녀회 창설자 세례명 라우렌시오. 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禮山里)에서 윤상규의 아들로 출생.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12월 17일 사제로 서품되었고 서품 후부터 1938년까지 충북 장호원[현 충북 감곡]본당 보좌신부,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 교사 등을 역임하며 <가톨릭청년>지(誌)에 호교론과 성서신학에 관한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1938년 프랑스로 유학, 이듬해 소르본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다시 로마주재 일본 대사관 관리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자 1941년 로마에서 미국으로 탈출하여 미국 뉴욕문화원 교수, 뉴욕교회 보좌 신부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1948년 귀국하여 교황청 전교회 한국지부장, 聖神大學(성신대학)[현 가톨릭大學] 2대 학장, 1950년 서울 교구장 비서 겸 경향신문사 상임고문을 거쳐 1953년 인보회(隣保會) 한국 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사회사업에 투신, 서울 자하문 밖에 고아원과 결핵 요양원을 설립한 후 1956년 경기도 부천에 사회사업과 전교사업을 위한 인보성체수녀회를 창설했고 1960년 안양 성 나자로마을 원장에 부임, 병원 요양원 정착촌 등을 건설했으며, 1963년 오류동 본당 초대 주임신부, 성 골룸반 병원장, 경남 충무 충열여자중 · 고등학교장을 역임 하였다. 1964년 서울 대교구 부주교로 임명되어 교구행정에 관여하다가 1965년 신병치료차 도미(渡美)하여 1971년 귀국했으나 병이 재발, 성모 병원에 입원 중 5월 9일 사망하였다.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羅韓辭典≫(경향잡지사, 1936), ≪준주성범≫(譯, 경향잡지사, 1954), (소르본大學 博士學位論文, 1939) 등이 있으며 그밖에 <自由에 對한 見解>(가톨릭靑年, 1933. 8), <가톨릭의 勝利>(가톨릭靑年, 1933. 9), <聖書譯文의 歷史的考察>(가톨릭靑年, 1934. 8), <聖書解釋에 對한 考察>(가톨릭靑年, 1934. 8), <聖書에 對한 聖神感導>(가톨릭靑年, 1934. 11), <聖書의 固有한 特長>(가톨릭靑年, 1935. 1), <創世記>(가톨릭靑年, 1935. 1), <出埃及記 1>(가톨릭靑年, 1935. 4), <出埃及記槪要 2>(가톨릭靑年, 1935. 5), <레비記>(가톨릭靑年, 1935. 7), <民數記>(가톨릭靑年, 1935. 8), <申命記>(가톨릭靑年, 1935. 9), <우리의 現世生活>(가톨릭靑年, 1935. 11), <聖書硏究>(가톨릭靑年, 1936. 1), <룻기>(가톨릭靑年, 1936. 2) 및 ≪尹乙洙神父 遺稿集≫(인보성체수도회, 198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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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일 [한] 尹有一

윤유일(1760~1795).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여주(驪州) 출신. 권일신(權日身)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예비신자였던 1789년 북경주교에게 보내는 이승훈(李承薰), 권일신의 밀서(密書)를 전달하기 위해 동지사(冬至使) 일행에 끼여 북경으로 들어가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 이듬해에 또다시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밀서를 가지고 북경에 들어가, 로(Raux) 신부로부터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북경주교로부터 견진성사도 받았다.

17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할 때에는 지황(池璜)과 더불어 의주(義州) 변문으로가 그의 입국을 도와 12월 24일 무사히 서울까지 안내하였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인도한 죄로 1795년 6월 28일(음 5월 12일) 체포되어 그날로 옥중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가족 또한 그를 본받아 모두가 열렬한 신자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1801년 3월 16일 그의 아버지가 임자도(荏子島)로 유배된 것을 비롯하여 그의 숙부, 아우, 누이 등이 모두 순교하였거나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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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오 [한] 尹有五

윤유오(?~1801). 순교자. 세례명은 야고보. 경기도 양근(楊根) 출신. 윤유일(尹有一)의 사촌동생. 1791년경에 체포되어 6개월 이상이나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다 당했으나 끝끝내 신앙을 지켰다. 1800년에 다시 양근에서 그를 비롯해 7명의 신자가 잡혔는데 유한숙(兪汗淑)과 윤유오만이 끝까지 배교치 않으므로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양근으로 이송되어서 1801년 4월 25일(음 3월 13일) 참수 치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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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운혜 [한] 尹雲惠

윤운혜(?~1801). 순교자. 세례명은 루시아. 정광수(鄭光受)의 처. 윤유일(尹有一)의 사촌동생, 동정순교자 윤점혜(尹占惠)의 동생. 경기도 양근(楊根) 출생으로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으로 입교, 결혼 후 1799년 상경하여 살다가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3월(음 2월) 체포되어 5월 14일(음 4월 2일) 정철상(丁哲祥)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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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하 [한] 尹龍河

윤용하(1922~1965). 작곡가. 세례명은 요셉. 황해도 은율(殷栗)에서 윤상근(尹相根, 가롤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평북 비현(批峴)으로 이주하였다가 12세 때 다시 만주 봉천(奉天)으로 이주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고, 19세 때 만주작곡가협회 회원, 봉천 조선인합창단장, 신경(新京) 가톨릭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여 음악의 신동(神童)으로 불렸고 간도 사범학교에서 음악을 강의하였다. 8. 15광복 후 귀국하여 잠시 함흥 영생여고에 재직하다가 상경, 교향곡 <투쟁과 승리>, <농촌 풍경>과 교성곡 <조국의 영광> 등을 작곡 지휘하였다. 6.25동란 이후 가톨릭음악가협회 부회장, 한국작곡가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구산후생학교, 한양공업고등학교, 동북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한편 신당동본당 성가대, 인천답동 본당 성가대 등을 지휘하였다. 또한 동요도 200여곡을 작곡, 1960년 자작동요 ‘100곡 발표회’를 열기도 하였다. 작품은 <보리밭>, <광복절의 노래>, <도라지꽃> 등 수십 곡의 가곡과 200여곡의 동요가 있는데, 대체로 격이 높고 소박하고 단정하며 낭만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1965년 7월 23일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사망, 금곡본당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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