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 [한] 攝理 [라] providentia [영] providence

하느님이 우주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배려와 애정으로 그의 뜻을 이루는 활동, 맹목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일정한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하는 세계관이다. “하느님은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섭리를 가지고 지켜보며 지배하신다. 하느님은 자비로써 모든 것을 하신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DS. 3003). 인간의 개인적인 결단까지 포함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분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하느님의 섭리는 보편적이다. 하느님은 우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궁극적 목적을 반드시 이룬다는 뜻에서 섭리는 그릇됨이 없다. 하느님 자신이 변하지 않는 존재이므로 섭리는 부동의 것이다.

그러나 계몽기 이후의 근대신학에서는 ‘이신론'(理神論)의 형태를 취하였고, 여기서는 자연신학이 섭리신학을 대신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주의 신학에서는 인간 중심의 섭리론으로 기울어져 인간의 혼란을 가져왔다. 20세기부터는 다시 성서의 섭리신앙을 새로운 형태에서 해석,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John A. Hardon, S.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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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집 [한] 說敎集 [라] homiliarius, liber homiliarius

설교를 모아 묶은 책들. 역사를 통하여 성직자나 일반 신자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설교들은 고대 교회부터 수집되어 왔다. 예를 들면, 모세의 설교는 신명기에 수록되어 있고 복음서는 예수의 설교집이라 하겠으며 그 중 산상수훈은 특히 유명하다. 고대 교부들 가운데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us, 354-430), 요한 크리소스토모(St. John Chrysostomus, 349∼407) 및 오리제네스(Origenes, 184?∼253?) 등의 설교집이 유명하고 중세에는 베다노(Bedanus, 672?∼735)의 편집본, 아우구스티노와 레오의 설교가 대종을 이루는 에지노(Egino, 8세기) 설교집, 막시모(Maximus)와 다른 14명의 설교가 인용되어 있는 바오로 디아코노(Paulus Diaconus, 720?∼799?)의 설교집을 들 수 있다. 근세 이후로는 명성 있는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를 모아 자기 이름을 붙인 설교집을 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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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說敎 [라] homilia [영] homily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예언직 수행의 의미를 지닌 행위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인 예수 그리스도는(히브 1:1 참조) 모든 이가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받도록 하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였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면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로마 10:14).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는 모든 신도의 의무이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특히 교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직책을 맡은 이가 신도들에게 구원의 신비나 신앙생활의 원리를 가르치는 일을 설교라 한다. 설교는 구원의 메시지를 생활 안에서 받아들이게 할 목적으로 “구원 경륜 즉 그리스도의 신비에 있어서 하느님의 기묘한 업적들을 선포”(전례헌장 35)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설교가 구비하는 내용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회개하기를 요청할 뿐 아니라, 회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받아들인 말씀에 따라 살도록 지도하며 나아가 예배와 연관을 지음으로써 일생 동안 회심의 정을 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들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성장하게 하고 교회와의 일치를 굳게 하며 자신들을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로 바치게 하는 것이다(로마 12:1, 계시헌장 7, 교회헌장 23, 주교교령 13).

설교의 기원은 유태교 회당에서 이행된 성서주석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그리스도교의 설교는 성서주석에 그치지 않고 성서를 일상생활에 적용시키며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권고한 점에서 전자와는 달랐다. 교부시대에 오리제네스(Origenes)를 비롯하여 베르나르도(Bernardus)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설교가가 배출되었는데, 이들의 설교는 대부분 주일이나 축일 미사의 말씀의 전례에서 봉독하는 성서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중세에는 전례와 관계없이 설교가 행해진 경우가 많았는데, 트리엔트 공의회를 계기로 하여 교부시대의 전통으로 점차 복귀되어 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에서, 설교가 전례 집전의 한 부분이므로 말씀과 전례가 긴밀히 결합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설교의 직책을 성실히 이행하도록 당부하고 있다(35항).

설교의 전형적인 모습은 주일이나 축일에 신자들이 함께 거행하는 미사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선포하기 위한 말씀의 전례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현존케 하는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는 미사에서, 설교는 양자의 신비를 연결지으며 미사 참여자로 하여금 성찬의 전례에서 그리스도와 효과적으로 만나도록 준비시킨다. 설교는 주교의 의무이며 주교를 돕는 사제나 부제가 설교의 직책을 수행하나, 주교에게서 권리를 받은 사람이 이를 이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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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 [한] 善行 [라] opera bona [영] good works

일반적으로 착하고 어진 행실을 가리킨다. ‘선행’ 말고도 ‘선업'(善業) 또는 ‘가행'(嘉行)이라는 용어가 쓰이는데 모두 마찬가지 뜻이다. 다만 ‘선업’은 좋은 과보(果報)를 받을 수 있는 착한 일을 가리키는 불교용어다. ≪한불자전≫(韓佛字典, 1880)에는 ‘션행후언'(선행후언, 善行厚言)이라는 단어가 수록되어 있는데, 정숙한 행동과 너그러운 말을 의미하는 숙어이다. 여기서 ‘선행’이라고 함은 ‘어진 행동'(action vertueuse)을 지칭한다.

인간적 행위 또는 인간행위(human act)는 도덕의 규범으로 되는 표준에 부합되고 있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따라서 선 또는 악이 될 뿐이다.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행위란 순전한 이론상의 것이지, 현실에서는 모든 의식적인 행동은 도덕적으로 선 또는 악의 그 어느 쪽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으로 착한 행위 즉 ‘선행’은, 은혜의 상태에서 해해졌을 때 초자연(超自然)의 상(賞)을 받음에 합당한 것이다. 이 때문에 초자연적인 선행은 초자연적인 목적 즉 의화(義化), 완덕(完德), 진복팔단(眞福八端)을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므로 ‘구령적(救靈的)인 행위'(actus salutaris)라고 부른다. 이 ‘선행’이라는 용어는 종교개혁 시대에 격렬한 논쟁의 초점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지도자들, 특히 루터는, ‘선행’이 아니라 ‘신앙’만이 사람을 의화한다고 주장하였다.

‘선행’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에는,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타락에 의해 전면적으로 부패되어 버린 것은 아니라는 신앙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서 신의 은혜와 협력하여 선행을 수행할 수가 있다. 인간의 자유는 죄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예속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다. 성서는 선행의 필요를 강조하며, 이를 구령상 필수적인 것으로 삼고 있으며(마태 2:34, 7:21, 16:27, 19:17, 갈라 6:9, 1디모 6:18, 아가 2:13),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선행의 목표로 하고 있다(마태 5:16, 요한 15:8, 필립 1:10).

[참고문헌] J. Mausbach, Katholische Moraltheologie I, Aufl. 7, 1936 / O. Schilling, Apologie der christlichen Moral, 1936 / C. Journet, The Meaning of Grace, tr. A. V. Littledale, New York 1960 / John A. Hardon, S.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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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한] 先知者 [관련] 예언자

예언자의 옛말. ⇒ 예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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