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자전 [한] 韓佛字典 [프] Dictionnaire Coreen Francais

원명은 ≪한불자뎐≫. 우리나라에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한 사전. 최초의 시도는 19세기 중엽 다블뤼(Daveluy) 주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수집해 놓은 원고가 모두 소실되고 편찬계획도 무산되었다. 이후의 편찬사업은 리델(Redel) 주교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리델 주교는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의 상해(上海)와 차쿠(岔溝) 등지에서 재입국을 기다리는 동안 자료수집에 종사하였다. 이 때 김여경, 최지혁 그리고 권치문 등의 조선인 교우들도 편찬작업에 참여하였다. 리델 주교에 의해 ≪한불자전≫과 문법서인 ≪한어문전≫(韓語文典)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이 1876년 조선교구에 코스트(Coste, 한국명 高宜善) 신부가 배속되었다. 리델 주교는 원고를 코스트 신부에게 넘기고 자신은 조선전교에 전념키로 하였다. 코스트 신부는 원고를 갖고 일본에 건너가 1877년 요코하마(橫濱)에서 인쇄에 들어갔다. 그래서 1880년 <일본의 소리>(Echo du Japon)라는 잡지를 간행하고 있던 레비(Levy) 인쇄소에서 사전을 출판하게 되었다. 판형(版形)은 4 · 6배판으로 694면에 약 11만 단어가 수록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서설, 본문, 부록으로 이루어졌다.

서설에는 범례(凡例)와 한글의 불문자화(佛文字化)에 관한 설명을 실었다. 615면에 이르는 본문에는 우리말을 알파벳순으로 나열하고, 그 옆에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한자를 제시했으며, 다음에 그 말뜻을 프랑스어로 나타내고 있다. 부록은 ‘∼하다’와 ‘∼이다’의 활용법(活用法)과 한국 지명사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불자전≫은 이 땅에 도입된 천주교가 토착화하는 데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말과 문법의 연구에 선구적인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Choi Andreas, L’Eglise Catholique au service de la langue Coreenne au cours du XIXe siecle, Neue Zeitschrift fur Missionswissenschaft, Schweiz 1961 / 홍이섭, 다블뤼 신부의 조선연구에 대하여, 향토서울, 2 / 강충호, 19세기초에 있어서 서양인 선교사의 한국어연구, 동서문화,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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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들본당 [한] ∼本堂 [관련] 진안본당

1921년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연장리(全羅北道 鎭安郡 馬靈面 延章里)에 창설된 전주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모 무염시태. 한들본당은 진안본당의 공소로 출발하여 1921년 진안본당 주임이던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본당을 진안군 연장리로 이전함으로써 진안본당의 후신으로 창설되었다. 1922년 성당이 건축되고, 1936년에는 한들 해성학교가 개설되어 교우 자녀와 빈민아동들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 후 폐쇄되었던 진안본당이 1943년 다시 본당으로 재출발하게 되자 당시 주임이던 이기수(李基守, 야고보) 신부가 진안본당으로 전임되고 후임으로 허일록(許日錄, 다두) 신부가 부임하였고, 1951년 다시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진안본당에 병합,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1978년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어 소순형(蘇淳炯, 베르나르도) 신부가 부임, 사제관을 신축했고, 1981년 범영배(范永培, 라파엘) 신부가 부임하여 현재까지 사목하고 있다. 1983년 말 교세는 교우 수 1,167명, 공소 12개소임. 역대 주임신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1대(1921. 11∼1931. 2) 이상화, 2대(1931. 2∼1940. 6) 권영조(權永祚, 마르코), 3대(1940. 6∼1943. 4) 이기수, 4대(1943. 5∼1951. 4) 허일록, 5대(1951. 4∼1952. 4) 김반석, 6대(1978. 1∼1981년) 소순형, 7대(1981∼현재) 범영배. (⇒) 진안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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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운 [한] 韓德運

한덕운(1748∼1802).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 1790년 윤지충(尹持忠)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다음해 10월에 경기도 광주(廣州) 산골로 이사하여 옹기장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1801년 3월에 서울에 올라왔다가 우연히 서소문 밖 길가에 버려진 시체가 2월 26일에 순교한 홍낙민(洪樂敏)임을 확인하고 그의 아들 홍재영(洪梓榮)에게 연락하여 함께 그의 시체를 고이 매장하였다. 그는 용감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배교자들을 엄하게 꾸짖었는데, 1801년 11월 12일에 그도 체포되어 1802년 1월 30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참수되어 치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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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사 [한] 限大赦 [라] indulgentia partialis [관련] 대사

잠벌(暫罰)의 일부만을 사해 주는 대사(大赦). 부분대사(部分大赦)라고도 부르며, 대사를 주는 사람이 특별히 정한 바가 없으면 같은 기도와 선공을 계속함으로써 하루에도 여러 번 한대사를 받을 수 있다. 한대사에는 보통 40일 대사, 100일 대사, 1년 대사, 7년 대사 등이 있다. (⇒)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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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근 [한] 韓基根

한기근(1868∼1939). 신부. 세례명은 바오로. 경기도 양지 추계(秋溪)에서 부(父) 한 안드레아와 모(母) 방 바르바라의 아들로 출생. 3세 때 모친을 여의고 9세 때 부친을 여읜 뒤 서울의 사촌형님 집에서 기거하면서 교우인 백부(伯父) 한영직에게 사사(師事), 그의 감화로 1883년 8월 15일 영세, 입교하였다. 그 뒤 명동 주교관 글방에서 공부하다가 성직(聖職)을 희망, 1884년 신학생으로 말레이반도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으나 기후와 풍토를 이겨내지 못하고 1886년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다시 학업을 계속하여 1897년 12월 뮈텔(Mutel) 주교의 주례로 약현성당(지금의 중림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1902년부터는 황해도 황주 적은동본당 주임신부로 전임되어 일선 사목을 담당하였는데 바쁜 일선사목 중에서도 성서의 한글 번역사업에 깊이 관여하여 1907년 간행된 ≪예수진교사패≫(耶蘇眞敎四牌), 1908년 간행된 ≪천주경≫(天主經), 1910년 간행된 ≪사사성경≫(四史聖經)과 ≪요리강령≫(要理綱領), 1911년 간행된 ≪성분도언행록≫과 ≪성바오로수녀회규구≫, 1913년 간행된 ≪고해지침서≫ 등을 번역했고 이로 인해 뮈델 주교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1914년 제2대 경향잡지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경향잡지>(京鄕雜誌)와 성서출판소(聖書出版所)의 실무를 전담, 경향잡지를 교우들에게 널리 인식, 보급시키고 성서의 번역에 힘을 쏟는 한편 1918년 ≪묵상법≫, 1922년 ≪종도행전≫(宗徒行傳), 1923년 ≪성체조배≫(聖體朝拜) 등 많은 책을 저술하여 교우들의 신심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1910년 성서 번역 당시 모든 출판물의 띄어쓰기와 문장기호가 사용되지 않고 있었던 상황에서 실제로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사사성경≫에 띄어쓰기와 문장기호를 사용하려 했다는 사실과 1910년의 친필 원고인 <우리말 띄어쓰기의 원칙>은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국문법연구 결과였고 또 시기적으로도 유길준(兪吉濬)과 주시경(周時經)의 연구활동 시기와 거의 동시대였다. 1924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신부를 겸하게 되어 일단의 저술활동은 중지하였으나 경향잡지사를 계속 맡아 보다가 1937년 윤형중(尹亨重) 신부에게 맡기고 은퇴, 2년 뒤인 1939년 10월 21일 지병인 기관지천식으로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 중 71세로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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