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신 [한] 刷新 [라] renovatio [영] renewal

일반적으로 묵은 것이나 폐단을 없애고 새롭게 하는 것을 가리키나,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신도 개인이나 수도회는 물론이고 특히 교회가 그 모형인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신인(神人)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인양성(神人兩性)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교회헌장 8, 전례헌장 2 참조). 따라서 교회는 신적 존재라는 점에서 오류가 있을 수 없으나 인적(人的) 실재라는 점에서 교회 안에 과실과 죄악이 현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교회는 인간 성화(聖化)를 이룩하는 원죄를 가지고 있으며 성화되는 과정에서 있는 신자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거룩하지만, 순례하는 교회는 바로 죄인을 구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뜻대로 죄는 거부하지만 죄인은 맞아들인다. “그리스도는 거룩하시고 무죄하시고 죄를 모르시며 다만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오셨지만, 교회는 그 품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성스러운 동시에 항상 정화되어야 하며 회개와 쇄신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이다”(교회헌장 8).

이러한 신학적 결론은 성서적 근거(갈라 2:11-14)도 가지고 있다. 바울로는 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서 이방계 그리스도 교인의 집회에 참석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계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도착한 후에 갑자기 불참하였을 때 그의 교회 최고 지도자들로서의 모호한 거취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난한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의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다.

교회가 계속 정화되고 쇄신되어야 할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의 무한성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실천 능력의 유한성에 있다. 그래서 신자 각자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제도의 차원에서도 반성과 쇄신이 계속되어야 한다. 복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그 실천의 유한성 때문에 어느 특정한 시대나 지역이나 인간들의 제도나 방법이, 모든 시대의 인간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로서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래서 교회는 시대와 환경과 대상과 인물이 변함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정확하고 유효하게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방법을 쇄신하고 제도를 개혁하며 생활을 현실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교회의 쇄신은 모두 본질적으로 교회사명에 대한 충실성에 있는 것이므로 … 나그네 길에 있는 교회는 인간 적이며 현세적인 제도로서 언제나 필요한 이 혁신을 계속하도록 그리스도께 불리움을 받았다”(일치교령 6).

교회는 이러한 쇄신의 능력을 주님의 약속(마태 28:20)과 성령의 도우심으로(요한 16:13) 이미 갖추고 있다(교회헌장 9). 쇄신의 원리는 더욱 더 복음정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신앙의 유산을 거룩히 보존하고 성실히 진술하기 전에 경건하게 들어야 한다(계시헌장 10). 신앙의 원천인 복음에로 돌아가야 거기서 쇄신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이 원래에서 연역할 수 있는 방향은 전통과 진보의 조화, 초월성과 내재성의 조화, 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 내용과 표현의 일치, 대화와 협력의 자세 등이다.

[참고문헌] 鄭夏權, 敎會論 II, 분도출판사, 1981 / F.J. Murpuy, Renewal in the Church, New Catholic Encyclopedia, vol. 16, McGraw-Hill, 1967~1974 / 金聖泰, 敎會의 刷新과 信仰人의 反省, 司牧, 78호 / Karl Rahner 著, 정한교 역, 교회의 미래상, 부산교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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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본당 [한] 松禾本堂

황해도 송화군 송화면 읍내리에 위치했던 송화본당은 일찍부터 황해도 장연(長淵)본당의 공소였는데, 1939년 본당으로 승격, 강원도 이천(伊川)본당에서 전교하던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2대 이보환(李普煥, 요셉) 신부가 1944년 3월에 강원도 평강(平康)본당으로 전임된 후 6개월 동안은 본당신부가 공석이어서 이웃의 본당신부가 성사를 집전 했으며, 그 당시 송화본당의 신자수는 517명이었다. 그 해의 9월, 평양교구 서포(西浦)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던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 신부가 3대 본당신부로 부임해 왔다. 서 신부는 8.15광복 후 공산치하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중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성당을 군사동원부 건물로서 징발당하였다. 그 해 9월 10일경에서 서 신부는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었고, 그 10여일 후 유엔군의 북진 때 정치보위부 방공호 속에서 학살당한 서신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송화본당이 침묵의 성당이 되었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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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리본당 [한] 松汀里本堂

일정(日政) 때 전남 광산군(光山郡) 송정읍(松汀邑) 상도산 1000번지에서 광주 북동본당(北洞本堂) 소속 송정리 공소로서 발족한 뒤 8.15광복 후인 1950년 4월에 송정리(松汀里) 571번지에 성당을 건축하고, 성 요셉을 주보로 모시고 본당으로 승격, 1965년 4월 광주교구 관하의 송정리본당에서 신동본당이 분리 설립될 당시까지 이 호칭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 때부터 모본당(母本堂)을 승계한 새 명칭사용으로 전남광산군 송정읍 원동 579의 14 소재 원동본당(元洞本堂)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자수는 1983년 12월 말 현재 4,114명이다.

1대에서 5대까지의 주임신부가 모두 성 골룸바노전교회 출신 신부인데, 역대 연혁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대(1959~1956년) 만건(Kevin Mangan, 萬) 신부, 2대(1956~1956말) 라이언(Eugene Ryan, 成) 신부를 거쳐 3대(1956~1962년) 라이언(Thomas D. Ryan, 羅) 신부 때 임곡, 하남, 본량, 서창, 동곡 등 공소를 설립하였다. 4대(1962~1963년) 오닐(Noel O’neil, 于) 신부, 5대(1963~1967년) 매귀어(Desmond Maguire, 梅) 신부를 거치는 동안 원동본당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6대(1967~1970년) 이상철(李相哲, 힐라리오) 신부 때는 ‘성모유치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을 역임하였고, 사제관, 수녀원, 기타 부속건물도 신축하였다. 7대(1970~1973년) 박상수(朴常洙, 고스마) 신부는 본당숙원사업이던 성전을 신축 완공하였고, 8대(1973~1975년) 서상채(徐相彩, 유스티노) 신부 때는 노안본당(老安本堂)으로부터 상도공소가 원동본당에 편입됨에 따라 신자수도 360명이 늘어나게 되었고, 1975년 7월 20일에는 본당교우와 김상직 공군준장의 지원 협력으로 철제 종탑의 준공을 보았다. 9대(1975~1979년) 김무웅(金武雄, 율리오) 신부, 10대(1979~1983년) 강영식(姜永植, 안드레아)신부, 11대(1983. 2~1983. 4) 장옥석(張玉石, 루치오) 신부, 12대(1983. 4 현재) 우르비나(J. Ch Ulrbina, 한창우) 신부로 이어지며 우르비나 신부는 과달루페 외방전교회(Guadalupe Missioners)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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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기 [한] 宋再紀

宋再紀(?~1802).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사학징의≫(邪學懲義)에는 이름이 ‘宋再紀’로 나온다. 서울에서 태어나 황정동(黃井洞, 현재의 동대문(東大門 부근)에서 각수장(刻手匠)[돌에 글자나 무늬를 새기는 직업]을 하며 살았다. 1800년 입교하여 김의호(金義浩), 김한빈(金漢彬), 황사영(黃嗣永) 등과 고유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이듬해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고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이 일어나자 황사영의 피신을 도와주어 이로 인해 체포되어 1802년 1월 29일(음 1801년 12월 26일) 김의호, 변득중(邊得中), 장덕유(張德裕), 이경도(李景陶), 김백심(金百心), 홍익만(洪翼萬), 최설애(崔雪愛) 등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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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가다 이력서 [한] 宋~履歷書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넷째 제수인 송 아가다의 전기(傳記)로 1927년에서 1933년에서 1933년에 걸쳐 저술되었다. 내용은 송 아가다의 집안 내력에서부터 시작하여 출생, 유년시절, 최신정(崔信鼎)과의 결혼, 그리고 사망하기까지의 고난스러운 생애가 주를 이루고 있고, 제일 끝부분에 ‘뒷날에 덧붙임’이라는 제목으로 송 아가다의 증언으로 인해 성인 최경환(崔京煥)의 묘지가 발굴되었음을 부기(附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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