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리시즘 [라] Catholicismus [영] Catholicism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고 세상 끝까지 존속토록 정해진 역사적 현실로서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믿음,전례(전례), 도덕. 이 말은 구령(구령)과 성화(성화)를 위해 믿고 실천해야 되는 가톨릭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포함한다. 이 가르침과 전례, 실천의 모든 것이 가톨릭(보편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전 인류를 위하고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며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생활의 모든 상황에 알맞은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개신교 사상)이라는 말에 대하는 말로서 가톨릭 교회의 외부적인 여러 활동(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 활동)을 가리켜서 사용되기도 한다.

가톨릭 교회는 신학적으로 말할 때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산 유기체이기 때문에 그 생명력은 여러 방면으로 발동된다. 예를 들어 그 신앙생활의 예술적 표현으로서 그림 · 조각 · 건축 · 음악의 숭고한 아름다움은 유럽 예술사에서 고대예술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문학에서도 여러 나라에서 가툴릭 문학이라는 장르를 이루고 있을 정도이다. 교회는 또한 도덕의 기준을 순수하게 보전하고 이를 실천토록 그리스도로부터 위탁되었으므로 교회는 인간의 사회생활이나 국가생활에 관해서도 그것이 종교와 도덕과 관련되는 한 지도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이 때문에 교회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에 관해서도 때때로 지침을 제시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교황의 회칙(回勅)이다. 정치에 있어서는 국가를 그저 불가피한 악(惡)이니까 그것에 참고 순종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고 자연법(自然法)적인 건지에서 그 존재를 인정하나 국권남용(國權濫用)의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인 운용을 제한하려 한다. 경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어느 것도 긍정치 않고 제3의 길로서 직분적(職分的) 사회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경제질 공동선(共同善)을 실현키 위한 경제 질서를 건설하고자 노력한다. 또한 사회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의 사회성을 인정하여 사회는 인간 완성을 위해 불가결한 것이기는 하나 결국은 인간 인격의 완성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인격주의(人格主義, personalism)의 입장을 취하며, 문화에 대해서는 각 문화영역의 상대적인 자율성은 인정하되 그것을 구령(救靈)이라는 최고의 종교 목적에 통합시키는 완전 휴머니즘(integral humanism)의 입장에 선다. 이리하여 가톨리시즘은 하나의 사상체계로서 세계사조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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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리나 [라] Catharina, Senensis [영] Catherine of Seina [이] Catharina, Senensis

Catherine of Seina(1347?~1380).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 축일은 4월 29일. 원명은 카테리나 베닌카사(Caterina Benincasa)이며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시에나(Siena)의 염색집 출신으로 일찍부터 발현(發顯)을 보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16세에 도미니코 제3회에 가입, 3년 동안 명상과 병자 및 빈자간호, 그리고 죄인의 개종(改宗)에 힘썼는데, 특별한 정성으로 귀족층을 비롯해 많은 추종자가 생겼다. 1376년 아비뇽의 그레고리오 11세를 찾아가서 교황에게 대항해 무장해 있는 피렌체인과 화해하도록 간청하였고 마침내 그를 설득하여 프랑스로부터 로마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 뒤 다시 시에나로 돌아가 이전의 생활을 계속,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미니코회 개혁에 기여하였다. 가타리나의 제자들은 이 성녀의 영성, 재능, 무아(無我)의 기도, 성혈(聖血)에 대한 특별한 헌신, 죄인을 회개시키는 사도적인 능력 등에 매료되었다. 가타리나는 1378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서거하고 서구 대이교(大離敎)가 생기자 우르바노 6세를 적극 지지, 추기경과 제후들로 하여금 그에게 순종케 하여 교황의 위치 확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전하는 글로는 중요한 영성서인 ≪대화≫(Dialogo)와 다수의 편지가 있다. 1461년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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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철학 [한] 價値哲學 [영] philosophy of value [독] Wertphilosophie

가치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인정되는 의미를 두고 하는 말로서 인간의 생활이나 활동등을 측정하여 등급을 마련하는 용어로 흔히 경제적 가치를 말한다. 이 때에 주로 주관적 유용성의 정도나 교환능력을 지닌(예컨대 화폐와 같이) 정도의 값을 의미한다. 철학적 의미로는 대상 자체를 두고 말하며, 가치 철학을 통하여 많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가치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철학자들의 공통 견해이다. 그러나 가치의 구분, 혹은 특성에 따라 형식상 ① 적극적 혹은 소극적 가치, ② 절대적 혹은 상대적 가치, ③ 주관적 혹은 객관적 가치, ④ 정신적 혹은 물질적 가치, 내용상 ① 논리적 가치[眞], ② 윤리적 가치[善], ③ 심미적 가치[美], ④ 종교적 가치[聖]로 분류한다. 인간이 가치를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의식하는 것은 항상 일정한 가치의 질서(秩序)를 포함시킨다는 점이다. 즉 어떤 것과 동등한 가치인지, 보다 못한 것인지, 보다 나은 것인지 파악하게 된다. 이 때문에 가치질서 전도나 가치 파괴 등을 말하게 된다. 참된 가치질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질서는 관계에서 특정되는 것이므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의 관계질서 유지다. 참된 관계질서에서 참 가치가 나온다.

1. 개관 : 가치철학이라면 흔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가간 독일에서 유행했던 신 칸트학파의 가치 이념에 의한 윤리철학이나 현상론자들의 이론에 의한 학설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가치철학이 가치의 근본적이며 중심적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면, 이는 이미 철학이 시작될 때부터 있던 학문으로 보아야 하겠다. 철학의 임무도 결국 존재와 본질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라벨(L. Lavelle)은 “모든 위대한 철학은 가치철학”이었고 따라서 “가치 철학을 새로운 학문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철학만이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철학자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최고 최후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에 이르는 길은 어떤 것인 지 탐구하고 설파하였다. 그러므로 영원이나 절대의 개념 없이, 또 종교적 차원의 이해와 인정이 없이 가치철학을 전개한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며, 가치 전도나 가치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가치철학이라고 하는 이론들이 많이 나왔으나, 결국 무신론적이냐 유신론적이냐의 인생관(人生觀)에서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무신론적이고 반종교적 가치철학 체계이다. 이들은 종교나 윤리적 가치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회의적 태도를 취하였다. 예컨대 니체(F. Nietzsche) 같은 사람은 기존 가치를 부정하고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쟁취하고 지배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발휘하여 초인(超人)이 되어야 한다고 하며, 이에 반대되고 이런 의욕을 약화시키는 종교나 기존 도덕률을 타파해야 한다고 절규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얼마나 위태롭고 인간을 파멸에 이끌 수 있는 지는 세계 대전이 잘 증명하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유신론적 가치 철학이다. 이들은 인간 안에 초월성 내지 절대성의 가능성을 두며 절대자와의 관련된 질서를 통해 참 가치를 추구하고 발견하고 또 성취시킨다고 본다. 여기에서는 공존(共存)과 조화를 통해 진정한 가치가 나타나고 제한성과 한계성을 초월하게 한다.

2. 가치철학 각론 : 철학사로 보면, 가치철학은 19세기부터 시작되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하나의 독립된 철학체계로 발전하였다. 이 학설은 당시까지 번창하던 실증주의(實證主義)나 과학주의(科學主義)와 같이 실제로 오관을 통해서 파악하고 평가할 수 있는 존재 외에도 하나의 독립된 실재로서의 가치를 확인하고 인정하려는 데서 출발하였다. 이는 일종의 이원론적(二元論的) 성격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학설이 대두되기까지는 오랜 발전 과정이 전제된다. 즉 중세 후기부터 움트기 시작한 개념론(槪念論)을 비롯하여 칸트에 와서 종결된 사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양분하여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으로 구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모든 것(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자연과 수학 같은 것)과 비합리적 현상들(윤리적이거나 종교적 사항들)을 구분하고 서로 상관이 없는 별개의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극단의 이원론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의미로서의 ‘가치철학’을 처음으로 표방한 학자는 소위 바덴학파(Badische Schule)의 창시자인 빈텔반트(W. Windelband)와 그의 후계자인 리케르트(H. Rickert)이다. 이들은 신 칸트학파의 분파로서 순수이성이 물질 자체에 대한 관찰 못지 않게 인류문화를 중요하게 보며 그 안에 인간 정신의 영원한 이상이며 절대적 요청인 당위성에 기본 가치를 두었다. 그러나 시대적 혼란으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오늘날 가치철학하면 쉽게 셸러(M. Scheler)와 하르트만(N. Hartmann)을 생각하며 이들의 가치윤리학을 든다. 이들의 정신적 기초는 칸트에 두고 있으며, 로체(H. Lotze)와 브렌타노(F. Brentano)를 거쳐 인간 안에 있는 가치 감각(價値 感覺, Wertgefuhl)이 강조 되었다. 이들에 의하면, 가치 감각의 대상인 가차는 절대적이며 자립적 존재로 마치 수학적 대상과 같이 구체적 존재에 근거를 두지 않는 관념의 대상이라고 한다. 이런 사상을 발전시켜 인간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유발시키는 힘이 가치라고 하였다. 셸러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적용하여 윤리적 가치 이면에는 초월적 존재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주장하였다. 관념론이 아니고 존재론에다 바탕을 두고 있는 하멜은 독특한 가치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존재의 세 가지 양식을 전제하고[I’Etre, I’ Act, I’ Esprit], 이 초월적 대존재(大存在)와 영원한 현동(現動)과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령(大靈)과의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대 최종의 가치로 말한다. 이것은 곧 초월적 빛과 힘에 의한 구체적 삶이라고 한다. 그의 사상의 배경은, 자기스스로가 말하듯이 유럽의 정신적 유산인 ‘영원한 철학’을 자기 나름대로 데카르트의 ‘코지토’(Cogito)와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Elan Vital)사상을 토대로 재조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崔昌武)

[참고문헌] H. Rickert, Der Gegenstand der Erkenntnis, 1892; Kulturwissenschaft u. Naturwissenschaft,1899 / W. Windelband, Praludien, 1914, Geschichteu. Naturwissenschaft, 1894 / Ch. v. Ehrenfels, System der Wertethik, 1897 / M. Scheler, Der Formalismus in der Ethik und die materiale Wertethik, 1921; Vom Ewigen im Menschen, 1921 / J. Hessen, Wertphilosophic, 1937 / Fr. Klenk, Wert Sein Gott, 1942 / N. Hartmann, Ethik, 1949 / L. Lavelle, Traite des Valeurs I-II, 1950 / D. Hildebrand, Christian Eth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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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 [한] 價値觀 [영] value view [독] Wertanschauung

가치에 관한 관점, 또는 가피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을 ‘가치관’이라는 말로 흔히 표현한다. 가치라는 것은, 어떤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하거나, 혹은 값어치 없는 것으로 하는 성질을 말한다. 즉 가치는 사물의 객관적 · 절대적인 성질보다는 주관적 · 상대적인 측면을 강조하므로, 사물의 내재적인 우수성보다는 개인적인 평가가 어떤 것이냐를 의미한다. 어원은 라틴어의 ‘valere’, 즉 ‘~값어치 있다’, ‘강하다’에서 온 말이다. ‘가치’란 사물에 내재하는 완전성보다는 ‘가치의 계층’이라고 불려지는 가치체계에 있어서의 상대적인 위치를 의미한다. 사회의 구성원은 어린이 시절부터의 교육이나 일상생활을 통하여 가치체계를 내면화해서 몸에 붙인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충분히 자각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일정한 역사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지배적인 가치체계 이외에 지난 구사회의 가치체계가 어느 정도의 변모를 거친 모습으로 잔존할 경우도 있으며, 또한 사회의 변혁기에는 지배적인 가치체계와 대항하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낳게 됨도 사실이다.

가치를 중심으로 보는 관점, 즉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각각 여러 가지로 갈라질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실용적(實用的)이 아닌 것에서는 가치를 발견 할 수 없다”는 듀이(Joan Dewy)의 주장은 가치판단을 해석하는데 연관하여 제기되는 논리적인 문제만에 치우친 느낌을 갖게 한다. 오늘날의“정신적 가치를 너무나 등한히 하고, 전연 무시하거나 대체로 부정해 버린” 물질만능의 사고방식은 바로 이러한 한쪽에만 치우친 가치관에서 뿌리를 잘 못 내린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윤리적인 관심을 배제한 가치관은 절름발이 가치관을 만연시켜, 참된 의미에서의 가치를 중심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그릇된 가치관에 떨어지고야 만다.

칸트의 경우,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시장가격을, 취미를 만족시켜주는 것은 감정가격을 갖는데, 이것은 외적이며 상대적인 가치여서 등가물(等價物)의 존재를 허용하지만, 이에 반하여 도덕적인 한에서의 각자의 인간성은 아무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내적이며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고 보았다. 실질적인 가치윤리학(價値倫理學, Wertethik)을 전개한 셸러(M. Scheler, 1814~1928)는 가치 사이에 높고 낮은 서열 결정의 기준을 제시하여, 쾌적 가치보다 생명가치가, 생명가치보다 정신적인 가치가, 정신적인 가치 가운데서는 ‘종교적인 가치’가 최고라고 하였다. ‘도덕적 가치’나 ‘종교적인 가치’를 최고로 볼 때, 우리는 가치관에 있어서도 윤리적 · 종교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형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주관주의적 윤리철학이나 상대주의적 윤리철학에 있어서는 ‘공동선’(共同善, common good)이라는 생각보다도 ‘가치’라는 말에 더 역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가치 내지는 가치관이라는 용어에 객관적인 도덕기준이라는 개념을 담고 있을 경우 즉 물질적 소유가 ‘인생의 최고 가치’가 아니라는 가치관에 설 경우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이를 인정할 수 있고, 그럴 경우 회프너(J. K. Hoffner)가 지적 했듯이, 경제보다 높은 서열에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 결혼과 가정, 종교와 도덕 그리고 여러 문화적인 가치, 최후로는 ‘만물의 최종적인 끝이며 궁극적인 목적’ 즉 하느님 자신이 위치하고 있다는 가치관의 방향을 정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번창하는 과학, 기술 및 경제가 비록 ‘위대한 문명과 문화의 진보’를 의미한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데 이바지 할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가치관의 이해에 있어 깊이 연관시켜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참고문헌] W. G. Everett, Moral Value, New York 1918 / W. R. Sorley, Moral Values and the Idea of God, Cambridge, Eng. 1924 / S. C. Pepper, The Sources of Value, Berkeley 1958 / 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와 교사), 1961. / J. K. Hoffner, Christliche Gesellschaftslehre, Verlag Butzon & Bercker,1975; 朴永道역, 그리스도교 사회론, 분도出版社, 1979 / John A Hardon, S. J., Modern Catholic Dictionary, New York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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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계획 [한] 家族計劃 [영] planned parenthood

1. 개념 : 부부 또는 부모가 원만한 결혼생활, 적당한 수의 자녀, 가족의 건강 등을 계획하는 일. 그러므로 가족계획의 목표는 가족의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생활향상에 있다. 생활향상을 기하자면 결국 적당한 수의 자녀만을 가져야 하므로 수태조절을 하게 된다. 여기에 부모는 양육할 수 있을 만큼의 자녀를 가질 윤리적 내지 사회적 책임이 강조된다. 출산간격이나 수태를 조절하여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자녀를 가지는 것이다. 수태조절은 그 방법으로 피임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임신이 되지 않는 부부에게 수태할 수 있도록 치료하는 적극적 의미도 포함한다.

가족계획이란 말은 신 맬더스(1766~1834)주의에서 시작하여 미국의 마가렛 생거(1883~1966)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산아제한’이라는 용어로 일컬어져 오다가 조절을 하는 대상은 산아나 출산이 아니고 수태이므로 ‘수태조절’로 표현이 바뀌었고 근래에 ‘가족계획’으로 되었다.

2. 수태조절의 수단 : 수태조절에 등용되는 피임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각기 장단점을 다 가지고 있다. 피임법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크게 고전적 피임법과 현대적 피임법, 임시적 피임과 영구적 피임법, 자연적 피임법과 비자연적 피임법으로 분류한다. 여기서는 마지막 분류에 따라 각기 어떤 방법들이 있는가 그 종류만 제시한다.

① 자연적 방법 : 여성의 월경주기를 이용하여 가임기에 금욕함으로써 임신을 피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주기 금욕법이다. 1930년대에 와서야 일본의 오기노와 오스트리아의 크다우스가 배란기와 월경과의 관계를 밝혀냄으로써 수태시기를 예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까지 월경주기가 계속되는 동안(초경에서 폐경까지) 어느 때나 배란이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실, 다음 월경주기의 시작과 배란과의 관계를 발견함으로써 자연적 가족계획이 탄생되었다. 이 발견 이래 지금까지 자연적 방법에 대한 지식은 괄목하게 발전해 왔다. 오기노 학설에 의한 달력 주기법의 날짜 계산으로부터 최근에 등장한 기초체온법과 증상체온법 또한 1970년대에 들어서 배란법(점액관찰법 또는 빌링스법)이 발견되었다. 1970년대에 배란이 되는 시간, 배란 후 난자의 생존시간, 그리고 정충이 살 수 있는 일수에 대해서 실제적인 연구결과 개념이 많이 변하였다. 호주의 빌링스박사 부부팀에 의한 점액 관찰법으로 배란시기를 거의 정확히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적인 개념의 생식생리학에 발맞춘 자연피임법은 정확히 사용한다면 어느 방법보다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한 피임효과를 얻을 수 있고 여기에 더 한층 부부애를 증진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으면서 자기행위의 주인공으로서 부부가 가족계획을 실현할 수 있기에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랄 수 있다.

② 비자연적인 방법 : 이 방법들은 생식기관을 형태적으로 변화시켜 버리거나 이들 각 기관의 임신을 위한 생리기능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임신을 피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들은 임신이 언제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 생리기능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임신은 아무 때나 가능해도 무방하다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비자연적 방법들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경구용 피임제와 주사용 피임제, 자궁내 장치, 국소 물리적 및 화학적 장애법(콘돔, 질내격막, 살정충제)이 있다. 그런데 인공 임신중절술은 원래 가족계획의 방법이 아니다. 또한 불임수술은 단종을 뜻하므로 윤리와 종교적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방법이다. 수태조절에 있어 약물이나 어떤 기구를 이용하든 인공적으로 수정을 저지하는 것이나 수태를 저지하는 것은 다 같이 살생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방법들은 의학적으로 수많은 부작용을 발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윤리도덕적 차원에서 찬성할 수 없는 방법들이다.

3. 피임의 역사 : 피임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에서 그 자취를 볼 수 있다. 아주 넓은 의미에서 비의도적으로 출산의 억제가 특정지역에서 되어졌음을 포함시켜 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원시집단에서 특정기간에 성교를 금하는 터부에 의해서 임신이 비의도적으로 감소되기도 하렸고 중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수도회에 들어가 독신으로 수도생활을 하였으므로 의심 없이 구라파의 출산율이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도 사실이다. 또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가족의 크기를 제한한 사실도 오래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시인들과 고대 민족들 가운데 성교중절, 낙태, 영아살해로 제한이 시도된 것을 볼 수 있다. 기원전 2750년에 중굴 의서에 인공유산법이 실려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풀뿌리를 짓이겨 넣거나 솜을 틀어넣는 민간요법이 전해오고 있다. 이집트인, 희랍인, 로마인들도 마력이 있다는 약을 먹거나 또는 풀, 꿀, 고무, 기름 등으로 혼합된 물질을 질내에 삽입함으로써 피임을 시도하였고 이슬람인들은 다소간 희랍으로부터 전해 받은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피임술을 발전시켰다. 그리스도교 유럽국가들에 대해서는 별로 연구된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이탈리아인 해부학 의사인 팔로피우스(1523~1562)가 ≪프랑스인의 병≫(1564)이라는 저서에서 성병 치료에 린네르로 만든 콘돔을 사용한 것을 처음으로 보고하고 있다. 소위‘현대’라 일컫는 1800년대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인위적인 조절과 관계없이 다른 요인들에 의하여 인구가 조절되어 왔다.

현대적 피임운동의 기원과 발전을 보면, 초기단계는 확실치 않으나, 조직적이 아니지만 가족의 크기를 억제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18세기에 프랑스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 진다. 1875년 이후 서구의 전지역(아일랜드 제외)에 출산율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은 확실하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효과적인 피임의 방법 특히 동물의 얇은 막으로 만든 콘돔[1844년 이전에는 고무를 유황처리해서 만드는 방법]의 발견과 이후의 질내격막의 발견에 의함일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대한 지식이 신속하게 전파된 도시지역과 상류계층에 출산율의 감소가 나타났다. 그러나 낙태와 성교중절의시행도 병행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아제한을 위한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한 지적 인물들은 프랑스의 수학자, 철학자, 정치가인 콩도르세(1741~1794)로서 그는 인간성의 완전가능성을 주창하였고 영국의 실리주의자인 벤담(1748~1832)은 영국의 빈민율을 줄이려면 그 방법으로 스펀지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1797). 소위≪인구론≫(人口論, 익명으로 1798년 출판)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성직자이며 경제학인 맬더스는 그의 저서에서 “인간의 한없는 희망은 공허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인구는 식량의 증가한계를 항상 초과하려 하며 생계의 수단은 다만 산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비해 인구의 증가는 억제되지 않는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겠기 때문이다. 인구는 항상 생계의 한계를 넘어 팽창하게 되며 기근, 전쟁, 병고가 발생하여 추가 인구를 죽여 없애게 될 것이다(인위적으로 조절하지 않더라도)”. 그는 1803년 그 책의 재판에서 결혼을 늦추는 것과 결혼 전에 엄격히 자제를 하는 윤리적 자제가 추가적인 억제책이 될 것임을 제시하였고 생식에 간섭하는 어떤 류의 파괴적인 수단이나 인공적인 피임에 의한 제한은 비윤리적인 것으로 배척하였다.

4. 신 맬더스주의자, 이상향주의자, 우생학자들 : 플레이스(1771~1854)는 급진적 혁신주의자, 정치인, 노동운동의 지도자로서 영국에 있어 산아제한 운동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인구이론에 관한 증명과 예제≫라는 저서를 냈으며 산아제한에 대한 광고지를 노동자들에게 4년간(1823~1826)배포하였으며 윤리적인 자제는 바보스런 짓이라 부르고 인공적인 피임방법을 찬양하며 이를 ‘신맬더스주의’ 라고 불렀다. 미국의 이상향주의자인 험프리(1811~1826)는 성교 유보로 임신조절을 하면서 자유연애와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사람끼리 짝지우기를 주창하고 이러한 이상으로 모인 공동생활 단체를 처음으로 설립하였다.(1842~1847). 영국의 브래들러(1833~1891)는 맬더스협회를 조직하려다 실패로 끝나고 그 당시 ‘신 맬더스주의’의 가장 영향력을 발휘했던 잡지 <민족 개혁자>를 1860년부터 1893년까지 런던에서 발간하였다. 이 동안에 ‘신 맬더스주의’의 주장은 점점 지성층의 지지를 얻게 되어1865년 이후 지혜롭고 바람직한 성분계층은 윤리적 자제를 실행하고 반면에 천한 하층 군중은 출산을 계속함으로써 이른바 ‘비 우생학적인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신 맬더스주의는 더욱 세력을 펴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우생학의 창시자인 걸턴(1822~1911)경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졌다.

1878년에 마침내 영국에 맬더스협회가 창설되었고 이어 협회의 의학지부도 설립되어 신 맬더스주의의 주제들을 강의, 팸플렛, 잡지들을 통하여 전파시켜갔다. 이 협회는 1913년에 선보인 산아제한의 기술에 관한 소책자를 공공연히 배포하였고,1972년에 협회의 사업은 성취되었다고 생각하여 해산하였다. 1921년에 마리 스텁스(1880~1958)는 고전적인 경제적 이유 보다는 의학적이며 우생학적인 이유들을 강조하게 되자 여러 도시로부터 후원을 받아 런던에 처음으로 산아제한을 위한 의원을 개설하였고, 그후 1930년에 창립된 가족계획협회에 통합되어 영국에서 제일가는 산아제한 기구가 되었다.

한편 미국에 있어서는 헤이우드(1829~1893), 잉거솔(1879~1942), 골드만(1869~1940) 같은 자유사상가들이 여성의 투표권, 금주, 이혼법 완화, 자유연애, 무정부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이와 관련하여 피임을 주창하였다. 20세기 초에 들어서 생거 여사는 간호원으로서 뉴욕의 빈민가에서 보건사업에 종사하면서 신 맬더스운동에 조금은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의 실제의 체험을 통하여 가정의 빈곤 퇴치와 모자보건에 주안점을 두고 피임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중국, 하와이, 인도 등 저개발지역을 찾아다니며 운동을 폈고 전세계적인 기구로 확장되어야 함을 역설, 1952년 봄베이에 국제 가족계획협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여러 나라들에 센터를 설치하여 피임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보급하며 결혼상담도 하였다. 이리하여 이 기관들은 유엔의 경제사회이사회의 자문기관이 되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저개발 국가들에서 사망률은 저하되고 인구는 소위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많은 국가들이 효과적으로 인구정책을 추진키 위하여 가족계획 사업을 국가정책으로 펴게 되었다.

5. 한국의 가족계획 : 민간요법이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극수수이긴 하겠으나 개인적으로 비밀스럽게 피임이 행하여졌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최근에 이르러서 인구 억제라는 세계적인 조류는 완고한 봉건사상과 인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침입하였다. 1931년에 독신녀인 로젠버그가 태화사회사업관에 와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농촌부인들에게 피임을 권하였으며 원주 기독병원에서 머리 의사가 가난한 부인들에게 피임방법을 가르쳤다. 1960년까지 가족계획 계몽운동을 하였으며, 1957년에 레어드 여사가 대전에 있는 기독사회관 관장을 폈다. 1958년부터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산부인과가 이 대학의 사회사업과의 지원을 받아 가족계획상담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1960년부터는 대한 어머니회가 자체사업의 하나로 가족계획 사업을 시작하여 의원과 상담소를 개설하였다(윤동주 저, 인구학, 한얼문고, 1973).

우리나라에 가족계획이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961년 6월 ‘국제가족계획협회’에 가입한 이후 같은 11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제59차 상임위원 회의에서 인구팽창은 국가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저해된다는 점에서 인구정책의 한 방편으로 가족계획 사업을 채택하고서부터이다. 1962년에 가족계획 사업 10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이 끝날 때까지 인구증가율을 2.5%로 제2차 5개년 계획(1967~1971년)이 끝날 때까지 2.0%로 내리겠다는 목표를 세워(경제 기획원, 보건사회부 모자 보건과) 전국에 가족계획 상담소를 설치하여 1,432개 면마다 가족계획 요원을 배치하였다. 1973년엔 법률 제2514호로 전문 14개조로 부칙으로 된 모자보건법을 제정 공포하여 실시하기에 이르러 가족계획이랄 수 없는 인공 임신중절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리하여 제3차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76년에는 1.7%까지 낮추는 계획을 세웠는데 실제로 1.75%의 평균 증가율에 도달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개발도상국가들 중 가족계획 사업에 성공한 모범국가로 인정받고 있으나 이러한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반드시 가족계획 사업에 의한 것 만은 아니고 여러 가지 요인 중 인공 임신중절(약 100만건 추정)에 의한 요인이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6. 가족계획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태도 : 가톨릭 교회가 가족계획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상이나 목표를 달성하는데 사용하는 인공적 피임방법을 반대한다.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자연 자체에 내재하는 법칙 즉 생식생리에 내재하는 가임기와 불법을 권장하고 주장한다. 인공적 피임술이 이미 4,000년 전에 인류죄악사에 나타난[아브라함의 현손 오난이 레위법에 따라 형수를 아내로 삼았으나 임신되는 것이 두려워 성교중절(오나니즘)을 하여 신으로부터 벌을 받아 즉석에서 죽음을 당함] 이래 그리스도교 초기에서부터 혼인과 성에 관련된 여러 가지의 이단들에 대하여 교회는 가차없이 단죄하였으며(고인 5:1-8,갈라 5:1-26 등),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때마다 혼인과 가정을 수호해 왔다.

1930년 이전까지는 인공적 피임에 대한 제반 종교들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실제로 일치하였다. 그러나 1930년 1930년 이후 세계 대종교 및 프로케스탄 교파들은 인공적 피임법을 특정 상황하에서 인정하는 공식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제는 오직 가툴릭 교회만이 인공적 피임법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30년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순결한 혼인>은 인공적 피임은 하느님의 법과 자연을 거스리는 중죄로 단죄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는 출산간격이나 가족의 수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주기 금욕법을 이용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1951년에 교황 비오 12세는 ‘산파들에게 행한 담화문’(A.A.S. 43, 859)에서 심각한 경제적 · 의학적 및 사회적인 이유로 자녀를 갖지 않기 위하여 부부들이 불임기를 계획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이후 의학계에서 여성용 경구피임악을 개발하게 되자, 독일의 러이츠, 네덜란드의 반 델 마르크, 벨기에의 장센 같은 신학자들은 수태조절을 위하여 이 약의 사용은 이론적 정당성이 있다고 주창하였으나 1958년에 비오 12세는 이를 배척하였다(A.A.S. 50, 735). 그러나 이 문제가 계속 논란되자 1964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비오 12세의 규범을 바꿀 만큼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교황 요한 23세가 설치한 출생, 인구, 가정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위원회에 경구용 피임제의 사용문제를 연구토록 위임하였다. 1965년 역사상 처음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부부행위의 목적은 인간 대 인간의 부부애임을 밝혔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50). 마침내 부부들이 어떻게 수태조절을 해야 할 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교회가 가르친 것은 1968년에 발표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의 생명>에서이다. 또한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11월 22일 사도적 권고 ‘가정 공동체’에서 바오로 6세의 규범을 더욱 강경하게 재천명하고 있다. (方永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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