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Viel, Emile Constant(1863-1893).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명 신삼덕(申三德). 1888년 12월 12일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5월 한국에 입국했다. 원래 몸이 허약했던 그는 오랜 여행으로 병이 도져 상해(上海)에서 홍콩으로 되돌아가 병 치료를 하였다. 약간 건강이 회복되어 1889년 5월말 경에야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원도의 조그마한 구역을 맡았으나, 그의 허약한 체질은 이 낯선 땅의 음식이나 풍습에 적응되기가 힘들어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를 본 코스트(Coste) 신부는 그를 용산신학교 선생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 도저히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직에서 물러나 제물포(濟物浦)로 갔다. 이 때 제물포는 교세가 날로 번창하여 새로운 교회건물을 필요로 했으므로 르비엘 신부는 손수 석수와 대목일을 하여 1890년 가을에는 이를 완성시켰다. 한편 그는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병원환자들을 날마다 찾아가 그들을 치료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병은 점점 심해져 이젠 기동조차 못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뮈텔(Mutel) 주교는 그를 홍콩으로 보내 요양케 하였다. 1892년 10월 홍콩에 도착한 그는 투병을 계속했지만 별 효과를 얻지 못하자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의 청원이 허락되어 고국으로 떠나기로 한 날, 심한 각혈을 일으켜, 그리던 고국에도, 그리고 한국에도 영영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1893년 4월 20일의 일이었다.
르메르 [원] Le Merre, Louis Bon Jules
Le Merre, Louis Bon Jules(1858-1928). 파리 외방전교회원. 서울교구 선교사. 한국명 이유사(李類斯, 루수). 프랑스의 플로트 망빌(Flotte-Manville)에서 태어났다. 1884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1886년 사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87년 12월 13일 내한하였다.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힌 후 1890년에는 원주(原州) 본당을 창설한 데 이어 평양, 수원 본당 신부를 역임하였다. 1928년 12월 25일 향년 71세로 서울 주교관에서 선종, 용산 성직자묘지에 안장되었다.
르네상스 [영] renaissance [프] renaissance
문예부흥이라고도 하며, 14-15세기 유럽 사회의 전체적인 운동을 가리킨다. 미술 · 음악 · 문학 · 철학 · 과학뿐 아니라 경제 · 사회 · 정치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과도기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renaissance란 말은 프랑스어의 renaitre(재생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프랑스의 역사가 미셀레(Jules Michelet)가 ≪프랑스사≫(1840)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좁은 의미로는 인문주의를 사상적 지주(支柱)로 하여 중세문화를 배척하고, 그리스 · 로마의 고대문학 및 예술에 강한 관심을 보인 복고주의적 경향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르네상스란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로서 취급되는 시기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와 비교했을 때, 지리(地理) · 과학상 발견, 새로운 계급의 도시문화 출현, 국민국가의 성장, 문학 · 예술에서 새로운 개념의 형성, 현세(現世)에 대한 치열한 관심 등이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당시의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세의 완전한 부정에 의한 것은 아니고 중세의 사상과 문화의 전통을 창조적이고, 비판적으로 수용 · 전화시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혼재된 상태이었다. 르네상스는 근대적인 도시가 가장 먼저 발전하기 시작한 북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정치적 혼란으로 봉건체제의 강도가 다른 곳에 비해 약한 편이었고, 동서 문화가 만나는 접경으로 오리엔트 지방의 자연과학과 철학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등이 르네상스 초기의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이들 도시에 새롭게 형성된 중산층들은 휴머니스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피렌체의 메디치가(Medici家)가 특히 두드러진 후원자였다. 이탈리아의 대표적 휴머니스트로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 1313-1375)가 있다. 휴머니스트들의 그리스 · 로마 고전의 연구는 비판정신을 촉진시켰고, 인간적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지적 분위기는 종교적인 초월적 역사관에서 탈피, 사실(事實)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객관적인 역사서술의 기반이 되었다. 귀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1469-1527)의 ≪피렌체 역사≫,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3-1527)의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관한 논고≫ 등은 대표적인 것들이다. 한편 르네상스 시대는 자연과학에도 중요한 기간이 된다. 코페르니쿠스(Nicholas Copernicus, 1473-1543)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nibus orbium caelestium, 1543)는 전통적 우주론(宇宙論)에 대한 혁명이었고, 베이컨(Francis Bacon)의 자연관(自然觀)은 근대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회화에서는 지오토(Giotto, 1276-1336), 보티첼리(Sandor Botticelli, 1447-1510),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등의 거장이 나왔고, 건축에서도 르네상스식이라는 독특한 양식이 이 시기를 대표한다. 이탈리아 반도를 휩쓴 르네상스의 물결은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 독일 · 영국 · 네덜란드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대체로 탐미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던 것에 비해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명백히 사회개혁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새로운 예술을 낳았다면, 북방의 르네상스는 새로운 종교를 낳았다”고 이야기될 만큼 윤리적 도덕적인 덕성(德性)을 증진시키는 것이 이들 지방의 휴머니스트들에게 주어진 과제로 인식되었다. 결국 후에 종교개혁이 이들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독일의 로이힐린(Johann Reuchlin, 1455~1522), 프랑스의 뷔데(Guillaume Bude, 1467-1540), 라블레(Francois Rabelais, 1495-1553),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 영국의 콜레트(John Colet, 1467-1519),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등은 특히 유명하다. 교회에서는 르네상스 교황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망각한 채 소국주의적 자세를 견지하여 족벌주의와 친족정치로 치달려 성직매매파문의 남용 등 불미스러운 행각을 일삼았다. 이러한 교회의 존재양태는 종교개혁의 전제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도 보여질만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Jacob Burckhardt,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 / Alfred von Martin, Die Soziologie der Renaissance / H.S. Lucas, The Renaissance and the Reformation.
르그레즈와 [원] Legregeois, Pierre-Louis
Legregeois, Pierre-Louis(1801-1866).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 극동지역 파리 외방전교회 경리부장.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 선교사로 중국에 입국하여 마카오의 극동지역 경리부에서 활동하였다. 1828년 경리부 부경리를 거쳐 1830년 경리부장이 되었고, 이듬해 교황청에서 조선교회를 교황대리 감목구(代牧區)로 설정함과 동시에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Bruguiere) 신부를 임명하자 브뤼기에르 주교를 지원하여 조선 전교를 도왔다. 1837년 마카오로 유학 온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3명의 조선 신학생을 맡아 리브와(Ribois), 칼레리(Callery), 메스트르(Maistre) 신부와 함께 교육시키는 한편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 신부, 샤스탕(Chastan, 鄭) 신부 등 조선 선교사들과 자주 서신연락을 취하며 조선 전교를 적극 지원하였다. 1842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로 전임되어 프랑스로 귀국했고 이후 1860년까지 제자인 최양업 신부와 모두 15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선 교회의 상황을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보고하였다.
[참고문헌] 李元淳 · 許寅 編著, 金大建의 편지, 정음사, 1975 /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中.下, 분도출판사, 1980 / 林忠信 · 崔奭祐 譯註, 崔良業神父書翰集,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