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한] 大邱大敎區

안동(安東) 교구 관할 일부지방을 제외한 경상북도 일대를 관할하는 교구. 신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교세가 급격히 늘어나자, 1911년 4월 8일 조선 대목구에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부지방을 분할하여 대구 대목구로 설정, 같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고, 당시 경향신문 사장이던 드망즈(Demange, 安世華) 신부를 초대 대목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드망즈 신부는 그 해 6월 11일 서울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고 6월 26일 대구에 부임함으로써 새 교구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① 전사(前史) : 이승훈(李承薰), 권일신(權日身) 등을 중심으로 창설된 조선 교회는, 권일신의 제자인 유항검(柳恒儉)이 스승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전라도의 처음 신자가 되었고, 그의 전교로 전라도 지방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파되었었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 닥친 1801년 신유(辛酉)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는 한편, 경기 · 충청 · 전라도의 살아남은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강원도와 경상도의 산협지대, 즉 태백산과 소백산중으로 피신하여, 화전(火田)을 일구며 연명하면서 한 사람 두 사람씩을 귀화케 함으로써 경상도에도 비로소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전파된 천주교는 신자들의 근거지가 심산유곡(深山幽谷)인 까닭으로 별다른 박해를 받음이 없이 늘어나 차차 상주(尙州), 청송(靑松), 영양(英陽), 진보(珍寶) 등지에 교우촌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의 손길은 이곳까지 찾아와 1815년에 청송의 포졸들이 모래산의 교우촌을 습격하여 많은 교우들을 체포해서 경주(慶州)옥으로 압송하였다가 6~7인은 대구감영으로 인도되어 처형되니 경상도에서도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이어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에도 몇몇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1849년에 신부가 되어 입국한 최양업(崔良業) 신부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을 숨어 다니며 전교에 힘썼고 1857년에 보좌주교로 성성된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는 경상도 지방의 전교를 담당하여 교우촌이 여러 곳에 생겨났는데, 특히 양산(梁山), 동래(東萊) 지방의 교세가 그 중 가장 번성하였다. 따라서 1866년 병인년(丙寅年)의 대박해령이 내려지자 예천(醴泉), 밀양(密陽), 진주(晋州) 등 각처에서 많은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이렇듯 천주교가 경상도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음은 병인년을 전후해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가 경상도 전교에 힘써, 멀리 거제도(巨濟島)까지도 찾아가 전교한 데도 기인한다.

병인박해 이후 지하에서나마 꾸준히 신앙을 지켜 내려온 삼남(三南)지방은, 한불조약의 체결로 선교사들의 활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자, 1886년 경상도 지방은 로베로(Robert, 金保祿) 신부가, 전라도 지방은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가 각각 전교를 담당하여, 1889년에 대구본당을 창설한 것을 비롯해서 조조(Jozeau, 趙得夏), 보두네(Beaudounet, 尹沙勿), 라푸르카드(Lafourcade, 羅)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연이어 각 지방으로 진출하여 성당을 건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교사업을 전개함으로써 교세는 급격히 늘어나 거제도와 제주도에까지도 뻗게 되었다.

② 교구 설정 후 : 이렇게 해서 대구 대목구가 마침내 독립되기에 이르렀고, 초대 대목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는 우선 1913년에 대구에 주교관 건물을 비롯해서, 유스티노 교구 신학교와 성 바오로수녀원 등을 차례로 설립하여 모든 조직을 갖추고, “신뢰하고, 일하자”라는 표어 아래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31년과 1934년에는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각각 감목대리구로 하여 교구 설정을 준비케 했고, 이어 1937년 4월 13일에 전라북도 지방을 전주 지목구로 승격시켜, 벌써부터 이곳에 진출하여 선교하던 아일랜드계 골룸바노회 신부들에게 그 전교사업을 위임하였다.

교구창설 이후 27년 동안 대구교구 발전에 지대한 공을 남긴 드망즈 교구가 1938년에 별세하자, 그 뒤를 이어 무세(Mousset, 文) 신부가 제2대 대목으로 임명되어, 1939년 5월 7일 대구 주교좌 성당에서 성성식을 갖고 주교위에 올랐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종교활동마저 통제하기에 이르러, 무세 주교는 압력에 못 이겨 사임하고, 1942년 8월 30일 일본인 하야사까(早坂久兵衛) 신부가 대목으로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1945년 민족해방과 함께 하야사까 주교가 별세하자 1946년 1월 16일 주재용(朱在用) 신부가 대구 대목구의 임시 관리자로 임명되어, 교육사업을 통한 전교에 힘쓰고자 대건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세확장에 노력하였으나 곧 사임하고, 노기남(盧基南) 서울대목이 약 8개월 동안 대구대목을 겸임하게 되었다.

1948년 12월 9일 최덕홍(崔德弘, 요한) 신부가 주교위에 서임되어 대목에 취임하자 그는 가톨릭청년연합회에서 간행하던 <천주교회보>를 <가톨릭시보>로 개제(改題)하여 속간하는 한편, 1950년 12월에는 <대구매일신문>을 인수 경영하였고, 효성(曉星)여자대학의 설립 인가를 받아 교육사업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한편 덕원(德源)에 있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관내인 왜관(倭館)에 수도원을 재건하자 대구대목구의 감목대리구의 성격으로, 왜관을 중심으로 몇몇 군(郡)의 전교사업을 전담케 하였다. 이어 1954년 6월 18일에는 경상남도 지방을 교구로 독립시킬 준비로 감목 대리구를 설정하였다.

1954년 12월 14일 최덕홍 주교가 별세하고, 그 후임으로 서정길(俆正吉, 요한) 주교가 취임하였다. 한편 경남 감목대리구는 1957년 1월 21일 대목구로 독립되어 분할되었고, 대구 대목구는 경상북도 일원만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1958년 6월 2일에 다시 안동 감목대리구를 설정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촉하여 교구를 준비케 한 결과 1969년에 교구로 승격되었다. 1962년 3월 10일 한국 가톨릭 교계제도의 설정에 따라 대구 대목구는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 서 주교는 대주교로 승격되었다. 대구 대교구 관구는 관하에 부산, 청주, 마산, 안동 등 4개의 속교구(屬敎區)를 갖게 되었다.

1972년 11월 30일에 이문희(李文熙, 바오로) 신부가 성성되어 보좌주교로 취임하였는데 1983년 말 현재 교세를 살펴보면 신자 수 16만 6,414명, 본당 수 72개소, 공소 134개소, 한국인 신부 144명, 외국인 신부 18명, 한국인 수사 78명, 외국인 수사 6명, 한국인 수녀 581명, 외국인 수녀 12명, 남녀 수도단체 17개, 양로원 3개소, 병원 3개소, 초등학교 1개교, 중 · 고등학교 16개교, 특수학교 2개교, 대학교 2개교, 주일학교 72개소 등이다.

[참고문헌] 崔正福, 大邱天主敎會史 / 한국천주교주소록 1983~1984, 1984 / 敎區年報. 釜山敎區史編纂委員會編,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 천주교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편, 교구사연대표, 1984.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대구교구총람 [한] 大邱敎區總攬

1980년 천주교 대구 대교구에서 발행한 대구교구의 총람. 원 제목은 ≪교구총람≫이지만 서울 대교구 교구총람과 구별하기 위해 보통 ≪대구교구총람≫이라고 한다. 책의 체제는 양장본 4 · 6배판, 면수는 1,152면이다. 내용은 전체가 12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에는 15면에 걸쳐 현역교구장 사진, 교구사제들의 사진, 교구행사 사진 등 종합화보가 실려 있고, 둘째 부분에는 1979년 한 해 동안의 교구일지가 실려 있으며, 셋째 부분에는 대구교구 고유의 사업과 운동이 소개되어 있다. 이어서 넷째 부분에는 교구의 현황이, 다섯째 부분에는 교구사목계획 추진현황이, 여섯째 부분에는 교구산하 본당들의 현황이, 일곱째 부분에는 사도직단체들의 현황이, 여덟째 부분에는 신심운동단체들의 현황이, 아홉째 부분에는 각 교회기관들에 대한 현황이, 열 번째 부분에는 수도단체들에 대한 현황이, 열한 번째 부분에는 교구재단에 대한 현황이 각각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열두 번째 부분은 부록으로 교구 소속 사제 · 신학생의 명단과 수도단체 회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대구교구총람≫은 오늘날의 교회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나 각 본당, 교회단체, 수도단체 등의 약사와 각종 도표 및 통계표들은 빠져 있고 현황만이 서술되어 있어 실제로 연감의 구실만 할 뿐 총람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구교구에서도 이러한 단점을 파악하고 이의 보완을 위해 1982년 ≪대구대교구연감≫을, 1984년 ≪교구사연대표≫와 ≪교구사화보≫를 간행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대구교구지도서 [한] 大邱敎區指導書 [라] Directorium Missionis Taikou

1912년 성신강림 대축일에 반포된 대구교구 지도서이다. 1911년 대구교구가 설정됨으로써 한국 교회는 2개의 교구가 생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1887년 반포된 ≪한국교회지도서≫는 각 교구의 실정에 맞게 새로 편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12년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교구성직자 피정을 통해 성직자회의를 개최한 후, 지도서 초안을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작성하여 프랑스어 초안은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라틴어 초안은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보내 검토하게 했고, 이를 토대로 다시 9차의 회의를 통해 원문을 완성하여 1912년 성신강림 대축일에 대구교구 전지역에 반포하였다. 지도서 원문은 1914년 홍콩의 라자렛인쇄소에서 라틴어로 간행되었다.

≪대구교구지도서≫는 본문과 부록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문은 총 3편(篇) 20장(章) 291조목(條目)으로 되어 있으며, 부록은 18개의 항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1편은 사제의 행동에 관한 대목으로 장상, 동료신부, 교우, 외교인, 당국 등과의 관계가 5장 29조목에 걸쳐 언급되어 있고, 2편은 사제의 성무에 관한 대목으로 성무집행, 공소방문, 성사집전, 회장, 신심단체, 영해회, 연말보고 등이 11장 208조목에 걸쳐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3편은 교회재산 관리규정이 3장 54조목에 걸쳐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부록에서는 각종 교회문서 양식과 주교서품 예절, 신심단체 입회 예절, 새 신부들이 5년간 시험치러야 할 신학과목, 영해(嬰孩) 바치는 문서, 어린이들의 고해 · 영성체에 관한 칙령, 일몰 · 일출시각표, 성인축일표 등 모두 18가지의 사항들이 수록되어 있다. ≪대구교구지도서≫의 내용 중 회장에 관한 부분은 드망즈 주교에 의해 내용이 더욱 보강되고 체계화되어 1923년 ≪회장의 본분≫이라는 제목으로 저술 간행되었고, 이는 대구교구의 회장지도서로 쓰였다.

[참고문헌] Le Catholicisme en Coree, Hong Kong 1924.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대구가톨릭대학 [한] 大邱~大學 [관련] 선목신학대학

대구 대교구 관구의 신학교. 원 명칭은 선목신학대학이었으나 1985년 3월 1일자로 대구가톨릭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선목신학대학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대교구 [한] 大敎區 [라] archidioecesis [영] archdiocese [관련] 대주교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어 대주교가 다스리는 교구. 대교구는 일반적으로 산하의 여러 교구(속교구)와 함께 관구(管區)를 이루고 대도시 지역의 중심이 되고 있다.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은 우리나라에선 ‘대성당’으로 불려진다. 한국에는 서울, 대구, 광주 등 3개의 대교구가 있다. (⇒) 대주교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