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교회가 설치, 운영하는 문화기관의 총칭. 선교대상에 따라 농민회관, 근로자회관, 학생회관, 청소년회관, 군종회관, 여성회관 등이 있다. 교회는 이들 회관의 문화시설을 통하여 사회교육을 실시하며 각종 편의를 제공한다. ~회관, ~센터, ~문화관, ~문화원, ~교육원, ~교육회관이라고 하기도 한다(가톨릭회관들의 개관은 부록 참조).
가톨릭학생운동 [한] ~學生運動 [영] Catholic Student Movement
가톨릭 교회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보편적 성사라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강조하였다. 따라서 어떠한 특수한 사람이나 특수한 계층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며 모든 계층이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구원의 역군으로서 봉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한 봉사자로서 젊음과 지성의 은혜를 받고 있는 학생들이 책임은 그 누구보다도 크다고 할 수 잇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톨릭 학생운동은 가톨릭 교회의 여러 가지 운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가톨릭 학생운동의 역사를 보면, 각국이 제 나름대로의 특수한 여건 속에서 독자적으로 복음 전파에 앞장서 왔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 서구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본당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타종파가 우세한 국가에서는 교리의 전파 등 선교활동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청년 레지오 활동과 성가대 활동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의 활동 등이다. 특히 비가톨릭 국가에서는 학생들이 봉사활동이 없이는 선교의 실효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은 교회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사귐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서로의 인간적 사귐이 있어야 하므로 학생운동단체는 학생 상호간의 인간적 사귐을 촉진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신앙과 사랑의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더구나 현대세계가 물질만능주의와 금전만능주의에 흐르고 있을 때 참다운 인생의 의미를 대화를 통해서 인식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각국의 가톨릭 학생운동은 교구별 국가별로 연합체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교회는 그 지역 그 국가에서 구체적으로 토착화해야 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어떤 사회에서나 엘리트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며 진보적 세력의 핵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때때로 보수적 세력에 의해서 위험시되거나 비난받은 일도 있었다. 각 국가별 연합회가 모든 나라에서 조직되자 세계적 국가적 규모의 단체로 조직화되는 움직임이 생겼다. 그리하여 이미 2차대전 이후부터 국제적 규모의 가톨릭 학생운동이 시작되었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교회일치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교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팍스(Pax)의 사상은 가톨릭 학생운동의 근본적 이념이 되었다. 팍스의 사상은 세계평화와 정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여 국적 · 인종 · 국경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랑과 일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시아 · 아프리카 등 후진국을 중심으로 부정(不正)하고 불공정한 사회체제에 대한 예언적 비판, 국가의 독립을 위한 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공헌하고 있다. 아시아의 경우 이미 각국의 대표들로써 연합회(P.A.A.)가 조직되어 3년마다 총회를 개최하면서 아시아 각국의 공통된 관심사를 분석 검토하고 있다. 그러한 연구의 결과를 기초로 하여 각 나라에서 가톨릭 학생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과 소외당한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쏟고 있다.
가톨릭 학생운동의 어려움은 일반적인 학생운동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전개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즉 가톨릭신자 학생들만의 고립된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타종파나 비그리스도교 학생운동과 제휴하면서 비인간적 체제와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학생운동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사회참여는 어디까지나 교회적인 방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운동방법과는 다른 면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진통을 겪고 있다. 학생은 진리와 정의와 자유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 특히 대학은 자유와 권리와 정의의 전당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톨릭 학생운동은 대학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 보여야 하며 때로는 수난과 박해가 있다 하더라고 교회?대학?세상안에서 복음의 증거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초기 가톨릭 학생운동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본당 안에서 주일학교 교사화 합창단 및 청년 레지오운동 등으로 시작되었다. 그후 각 대학에서 대학단위의 가톨릭 학생회가 조직되어 상호간의 친목과 신앙의 심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가톨릭 학생운동이 연합체로서 시작한 것은 1954년 가톨릭 학생연합회가 창립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때는 교회 내의 보조협의체로서 레지오 중심의 청년 활동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그 활동도 심신 위주였고 그 조직도 지극히 폐쇄적이어서 개인구령주의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참여나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1955년 전국대회의 주제가 자기 성화였고, 1956년은 학생사도직, 1957년은 평신도사도직, 1959년의 주제는 조직과 재정이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1960년의 4.19혁명을 계기로 가톨릭 학생운동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이 무렵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어 새로운 교회상이 정립되고 교회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됨으로써 교회의 사회참여의 필요성이 지적되어 가톨릭 학생운동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전파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1961년의 전국대회의 주제가 교회와 공산주의였고, 1962년의 주제는 사회정의와 산아제한이었으며, 1963년의 주제는 요한 23게의 회착인 지상의 평화였다. 또 1964년의 주제가 에큐메니컬운동이었다는 것은 바로 한국 가톨릭 학생운동이 교회의 현대화와 쇄신에 보조를 맞추어 발전해 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제들을 연구하고 탐구한다는 것은 과거의 가톨릭 교회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조직면에서도 필리핀에서 도입된 ‘셀 테크닉’(cell technic)이 도입되어 새로운 이념에 따라 과학적인 활동방식이 보급되었다. ‘셀’이란 어떠한 단체나 공동체가 소그룹으로 나누어져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거기에서 어떠한 표지를 발견하고 그 다음에 복음의 빛에 따라 판단하며 마지막으로 행동에 롬기는 활동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발전과정 속에서 한국의 가톨릭 학생운동은 현실적 정치상황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육화(肉化)하느냐하는 문제에 봉착하였다. 드디어 1967년의 전국대회에서 우리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항거함으로써 이 세상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1969년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아 가톨릭학생지도자 세미나에 참석한 맥노튼(McNaughton,羅吉) 주교(당시 가톨릭 학생연합회 총재주교)는 지난 수년 동안 아시아 대학생들은 대학개혁과 사회적 개혁을 위하여 그 힘을 행사함으로써 사회개혁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 왔으나 그 활동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제기되었으며, 그것은 교회지도자들이 학생운동의 중요성과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데 있다고 지적, 학생사목은 일반사목과는 다르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당시 학생회 지도신부인 나상조(羅相朝) 신부도 가톨릭 학생운동이 본당의 주일학교 교사 정도의 역할에 그쳐서는 안되고 대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70년의 전국대회는 제도화되고 권위주의에 빠진 오늘의 교회는 시대의 갈망에 응답할 숭 벗다고 결론짓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 당국에 의해서 백안시되어 임원이 전원 교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70년 4월 16일에는 기독교학생연맹이 주최하는 ‘부활과 4월혁명’이라는 행사에 가톨릭 학생들이 참여하여 교파를 초월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구체적으로 역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행사에서 학생들은 오늘날 공포와 패배의식의 강요 속에 역사 앞에 방관자가 될 수 없음을 자각, 4월혁명의 참다운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것을 다짐하고 우리 그리스도교 학생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역사인가를 말하기 전에 무엇이 악마의 역사인가를 먼저 고발해야 한다고 밝히면서 하느님의 계획 속에 기록될 4월의 영광은 조국의 번영과 인류의 평화를 위한 끊임없는 투쟁과정에서 더욱 찬란히 빛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우리들은 4월의 영광을 미래의 지평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 아무런 동요도 없이 용기와 진리를 가지고 진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편 1970년의 11월 청계천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全泰壹)의 죽음을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자의 권익옹호에 앞장서게 하였으며 가톨릭 학생연합회도 ‘전태일의 추도식’을 거행함으로써 노동 3권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1971년의 전국대회는 역사적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장기계획을 작성하였고 학생기획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와 함께 전국적 규모의 사업으로 ‘비인간화를 향한 도전’과 사회정화 캠페인을 개최하고 J.O.C.와 공동으로 ‘크리스천 사회 행동협의회’를 결성하여 사회정의 구현 세미나를 개최함과 동시에 개신교측과 합동으로 청계천에 살고 있는 100여 가구의 철거민을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이주시키는 둥 구체적인 사회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1년 12월에는 전국 학생지도 신부단 임시총회가 개최되어 가톨릭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으며, 가톨릭 학생회 지도교수들의 모임도 있었다. 1972년 2월 대한 가톨릭학생 총연합회 회장단은 <연합회백서>를 제출하여 교회 당국의 간섭을 배격하였는데 여기에서는 학생사무국의 설치를 제안하면서 학생운동의 자율성을 주장하였다. 1972년 8월의 전국대회는 지도신부단의 단독결정인 전국기구 개편안에 대해 반대하고(10대 1) 총연합회 회장선거에서 대의원 상호간의 불일치가 드러나 총연합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국의 학원탄압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한편으로는 교회내의 보수적 경향과 연결되어 있다.
1973년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서울 대교구 가톨릭 학생회연합회가 ‘서울대 구속학생 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이 무렵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추방운동, 지주교 납치사건, 3.1명동기도회 사건, 전주교구의 7.6사태 등이 일어났다. 이에 호응하여 1975년 2월 과천 영보수녀원에서 3년만에 처음으로 전국대회를 개최하여 총연합회의 부활을 선언하고 혼탁한 사회를 화해와 쇄신으로 이끌고 부정과 불의를 극복할 것을 다짐하였고 그 후 계속적으로 민주회복과 인권운동을 전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사정과 교회지도자의 학생운동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아직도 가톨릭 학생운동은 그 방향을 정립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하루속히 젊은 학생들이 모임인 가톨릭학생 연합회가 활성화되어 대학이나 교회나 사회 안에서 정의와 진리의 기수가 되고 사랑과 일치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며, 젊은 학생들이 교회를 외면하거나 무기력한 집단이 되지않도록 고무해야 할 것이다. (韓庸熙)
가톨릭평신도사도직운동 [한] ~平信徒使徒職運動 [영] Apostleship Movement of Catholic Lay poeple [관련] 가
1.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운동이란, 세례와 견진에 의하여 파견된 하느님의 백성인 완전한 그리스도인인 신도가 사제이며 예언자이며 왕인 자로서 그의 직무를 가지고 위계적 성직자적이 아닌 방법으로 교회의 사명 전체에 참여하는 신앙의 실천이며 복음의 증거활동이다. 바꾸어 말해서, 신도가 교회 공동체와 인류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기 분수대로 수행하는 신도의 신앙행위와 신도단의 조직적인 사도직 수행으로서의 운동이다. 확실히 복음은 행동적인 신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 민족의 생활 속에 깊이 침투할 수 없다(선교교령 21). 또한 성직 위계와 함께 참뜻에 있어서 신도단이 존재하며 활동하지 않으면 교회도 참으로 건설될 수도 없고, 충분히 살고 있는 것도 아니며, 사람 사이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표지도 아닌 것이다.(선교교령 21). 그러기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도 사도직의 촉진을 강력히 제기하면서 조직적인 사도직의 중요성에 비추어 “스스로 자유로이 선택하여 가입한 단체에 있어서 신도들은 사도가 되어야 한다”(평신도 사도직 교령 18)고 권장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공업화 도시화해 가는 세상 또는 사회 안에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급격한 발전과 변화로 날로 새로운 현실이 눈앞에 닥치고 있다. 이런 복잡다단하고 거의 무한대로 넓어져 가는 역사적 현실에 대응하여 사도직도 역시 그 폭을 그만큼 넓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신도의 사도직운동은 신도가 인간으로서 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당국으로부터의 명확한 위임이 있기에 앞서 신도들이 하느님의 백성, 예언적 백성으로서 일체가 되어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인수하고 해석하고 그 계획의 실현을 시대의 표지에 따라 하는 것이다.
2. 신도의 사도직운동은 부활 후의 교회인 초대교회에서부터 존재하였다. 복음의 진리 가운데에서 로마 제국의 국가 권력과 대처하면서 성서작가 루가가 사도행전에 서술했듯이 공동체를 형성해 갔다. 사도시대 직후 교회를 처음으로 전파한 신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그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선교적 사도직 운동을 하지 않았던들 이웃 이교인들에게 복음이 그렇게 눈부시게 전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도 후 시대 및 교부 시대의 신도 사도직운동은 또한 교회의 신학 건설에로 발전하여 그 시대에 있어서 위대한 교부들과 교회를 대표하는 신학 사상가들로서 훌륭한 능력을 가진 신도였던 것이다. 정말 사도 시대 이후의 신도들이야말로 밖으로는 박해와 대항하고 안으로는 이단과 싸워야 하는 신도 사도직 운동을 통해 격동기의 교회를 지하 묘지에서 끌어내어 세계로 발전시킨 것이다. 후기 교부 시대에서는 사도의 사도직운동은 약해지고 한편 신도는 교회내에서 하등의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교회법상 다만 미사성제에 참여하는 권리 이외는 어떤 권리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중세 전기에는 황제, 국왕, 제후 등 상층 지배계층의 신도가 성직자와 지배권의 대립으로 긴장관계를 일으키고 가톨릭 내부에서 속권(俗權)이라는 세속적인 권위와 교계적인 권위와의 갈등을 자아냈다. 그러나 일반신도는 성인 공경, 성물 예배의 시대라고 일컬었을 정도로 신심운동에 열중했고 그와 동시에 사회적 부정과 육체적 고통, 불구자, 농미, 기아에 허덕이는 도시 빈민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한다.
중세 중기에 있어 ‘신의 평화’, ‘신의 휴전’ 운동은 일반신도 대중의 광범한 사도직운동의 적극적 참가, 더 나아가서 사회 발전이 늦어진 일부 지방에서의 평화 보장을 위한 순수한 신도 사도직운동으로 말미암아 봉건적 권력에 고통을 받고 있던 하층계급의 사람을 자유 해방하고 보호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다. 실로 이 ‘신의 평화’ 운동이야말로 참된 신도 사도직운동의 실형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것을 교회의 위대한 공적이며 그의 문화적인 사명의 뚜렷한 증명이라고만 설명하고, 사도직운동으로서의 신도적 성격을 평가하지 않고 있다. 또한 최초의 십자군운동도 교황의 권위에 의해서 신도 대중들이 일제히 성지 회복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도 조직된 일반 신도의 사도직운동이 되었다. 12세기의 일반 신도들의 사도적 생활과 운동은 어느 면에서는 적극적인 복음적 생활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일반 신도들의 청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운동 즉 신도 사도직운동은 대단히 융성하였다.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 발전에 불가결의 요소가 되기도 하였으나, 이 신도 사도직운동은 성직자들이 돌보지 않음으로 해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부 신도들은 반봉건주의, 반성직자주의 및 부르주아들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의 관련에서 활로를 개척하려고 애를 쓰며 과격한 사도직운동을 전개하여 오류의 길로 빠져들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반교회적 반성사적인 방향으로까지 진전돼 그들의 순수한 그리스도적 동기와 이념은 비성서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중세 후기에는 대부분의 일반 신도의 신심은 놀랄만큼 열성적이어서 많은 점에서 좋은 것을 남겼는데, 특히 이 시대에 위대한 영원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신비주의가 번성하였던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신도로서 근대적 신심이라고 불렸던 새로운 신심운동의 신도단체인 공주형제단(共住兄弟團)의 원조이고 《준주성범》(遵住聖範)으로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에게 영향을 주었던 네덜란드의 제라르두스 그로테(Gerardus Groote)가 있다. 또한 일반 신도인 베르나츠아 등에 의하여 이탈리아 각지에서 자기 성화와 이웃을 사랑하는 신도 사도직운동을 위해 조직된 신애기도단(神愛祈禱團)이 있기도 하다.
17세기는 어느 의미에선 위대한 세기였다. 여론과 주교의 지지를 받은 가톨릭 엘리트들은 교육적 사도적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초기에서 세기 말까지 신도들의 신심생활에는 근본적 또 급격한 변화가 없는것같이 보이나 실은 신학, 영성, 신심형태 안에서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 진전이 있었다. 특히 사도직 수행 자선사업 교육활동은 오늘날 ‘가톨릭 액션’(가톨릭운동)이라고 불리는 신도 조직의 간접적인 시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에 있어서는 여러 사회계층과 그들의 정신을 사상의 시대적 맥락에서 봐야 할 것 같다. 이 시기는 데카르트 철학에 의하여 신도는 초자연에 의한 현실과 자연계의 현실, 국가와 종교를 구별하고 종교는 더욱더 내면화하여 사회 생활의 주류에서 유리돼 주변적 사회계층에 뿌리박고 자선사업에 종사하더라도 속세와도 성직자의 사회와도 판이하게 폐쇄적 사회가 되는 경향을 갖는 신심단체를 만들었다. 1630년 이전에 설립된 영성의 심화, 사회운동의 실천을 목적으로 한 성체회는 비밀보지라는 규칙을 갖고 국가와 성직자와의 연결이 없이 사회를 조직하여 성체라는 보이지 않는 핵을 중심으로 해서 기도 · 자선 행동에 의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재건을 목적으로 했었다. 자선과 구제의 대사업, 신변에서 먼 곳까지의 선교, 교육사업, 말과 저서에 의한 사도직운동은 17세기를 통하여 이 회원들이 발의하였거나 혹은 경제지원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성체회는 1660년 공격을 받고 해체되게이 이르렀다.
18세기는 가톨릭의 신앙생활로부터 일체의 정열을 몰아내고 교회는 정적주의를 겁내고, 모든 신비주의를 소심하게 피하고, 엄격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지나친 관용주의 쪽으로 흘러갔었다. 그리하여 신도의 신앙심과 사도직활동에 대하여 할 얘기가 별로 없다. 그러나 ‘좋은 벗’, ‘AA’라고 부르는 ‘벗 중의 벗’이라는 단체가 있을 정도이다.
19세기는 평신도 사도직운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던 시기이며 특히 자선활동과 사회활동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사실 가톨릭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신도운동은 이 세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01년에 설립된 파리성모회, 병원과 감옥을 방문하는 자선단체인 ‘소시에테 데 즈베르’, 근대적인 학생 그룹인 ‘소시에테 데 본누 제튜도’, 가톨릭 문학을 보급하기 위한 ‘소시에테 가톨릭 데 본리벨’, 고아에게 직업을 주는 회, 맹인청년강습회, 빈민구제회, 특히 리용 성모회는 신앙보급협회의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이 협회는 경이적인 발전을 하였다. 독일에선 선교와 이민을 후원하는 라파엘회, 개신교지역에 산재하는 가톨릭인을 지지하기 위한 보니파시오회, 가톨릭 학생이나 예술가의 단체, 농민 · 노동자를 모아서 직업적 이익을 옹호하고 동시에 도덕적 종교적인 유대를 도모하기 위한 단체들이 창단되었따. 그러한 신도단체의 통합조직으로 독일 가톨릭 협의회가 있었고, 이 협의회는 매년 가톨릭대회를 열었다. 이 최초의 가톨릭대회는 19세기에 있어서의 신도 사도직운동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프랑스에서도 신앙 · 연구 · 행동을 표어로 내건 프랑스 가톨릭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이 청년회는 주로 가톨릭의 영역에 머물러 회원의 신앙교육과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쇄신을 강조하였다. 이탈리아에서도 이탈리아 가톨릭청년회가 창립되고 그 수개월 뒤 ‘가톨릭 사업을 위한 로마 협회’가 실현되어 1874년 베니스에서 최초의 이탈리아 가톨릭회의가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1875년 이래 ‘회의 및 가톨릭위원회의 사업단’이 결성되었으나 평신도 사도직운동의 중앙조직에 관한 준비에도 많은 곤란이 있었다.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레룸 노바룸>에 의해 사회적 가톨리시즘이 등장하여 현실적으로 신도 사도직의 사회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토나올라가 지도하는 ‘사회연구 가톨릭연맹’이 이탈리아 주요 도시에 급속히 퍼져나갔던 것이 그 예의 하나이다.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사회과학연구회’, ‘사회주간’, ‘민중운동’, ‘사회사무국’이 온건한 진보적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황 성 비오 10세의 회칙 <이루페루모 프로포지트>는 가톨릭 액션에 새로운 기초를 주었는데, 이는 신도 사도직운동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교회가 신도의 중요성을 꺠닫게 되었다는 사실은 비오 11세와 비오 12세의 재위 중 교회의 발전으로 가장 특기하여야 할 사항 가운데의 하나임에 틀림 없다. 비오 11세는 ‘가톨릭 액션의 교황’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신도에 의한 사도직운동의 조직화는 나라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였다. 대개는 오랫동안 19세기부터 이어받은 단일형태에 여전히 충실하였으나, 그 형태는 단지 하나의 국민적 운동만을 포함하지 않고 장년의 남녀, 청소년의 남녀의 네 개 그룹으로 갈라졌다. ‘특수한 가톨릭 액션’ 즉 벨기에의 가톨릭 청년노동자동맹의 운동 영향 밑에 극히 한정된 생활권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이 시작되었다. 신도에 의한 사도직운동의 새로운 형태가 출현한 것은 낡은 정식(定式)에 새로운 정신을 주입하는 것이거나, 혹은 어느 새로운 방향 모색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였다. 아무튼 가톨릭 액션은 극히 중앙집권화하고 교회당국에 강하게 종속한 통일적 국민적인 규모로 조직형태가 나타났다. 다양한 가톨릭 액션을 국제적 수준에서 조정하기 위하여 중앙사무국을 로마에 개설하였고, 1951년 로마에서 신도 사도직운동을 위한 제1차 세계회의, 또 1957년에 제2차 세계회의가 개최되었다. 사실 가톨릭 액션의 각성은 그것이 문화적 혹은 사회적 분야의 것이었다 하더라도 1930년대를 통하여 서구세계의 여러 나라를 동요케 한 정치적 경제적인 위기와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도처에서 젊은 세대 사이에서 각양각색의 집단이 나타나고 인간과 사회와의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질서를 추진할 수 있는 정치이념이 추구되었다. 그러나 비오 11세와 가톨릭 액션의 조직화를 애썼던 추진자의 큰 뜻은, 작은 규모에서만 실현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가톨릭 액션이 사회계층 가운데 출현시킨 신도 엘리트의 향상에 의햐여, 또 신앙과 생활에의 일치를 실현하는 것을 활동적인 신도에게 가르칠 수 있음으로 인하여, 그리고 영향을 미친 신학적 사목적 현신의 전체에 의하여 가톨리시즘에 각인된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다. 파르디니의 인격에 의하여 고무된 청년운동, 오스트리아의 민중전례 사도직과 같이 민중적 성격이 강조된 전례운동, 신도들이 신심을 성서적으로 이끌려는 태도에 인한 성서에의 각성에 의한 성서운동 등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의 길을 예비케 하고 그 사업에 아이디어를 주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가톨릭 교회에는 일반 신도의 시대가 도래케 되었다.
3. 한국 천주교회는 일반 신도들의 손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신도가 교회의 주축을 이루고 그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신도 사도직운동을 전개하여 온갖 고난과 박해를 견뎌 내면서 이땅에 복음을 심고 키웠다. 사도직 운동으로 한국 교회를 이 민족에 육화(肉化)시켰다는 말이다. 한국 교회의 초기시대에 신도단체로서 조직된 명도회(明道會)에 의하여 사제없는 교회는 유지 발전되었고, 특히 교우촌 공동체에서의 신도 사도직운동은 신앙을 지키면서 교회를 발전시켜 조선교구 설정에 이르게끔 하였다. 그런데 교구설정 이후 신도 사도직운동은 탈사회적으로 개인 구령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지도되었으나, 신도들의 민족운동은 교회당국의 의사와는 달리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조선교구 시대의 신도 사도직운동은 단체성을 띤 신도단으로서의 활동은 극히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1934년 8월 15일 평양교구 신도대표 100여명이 서포 교구본부에 모여 평양교구 평신자대회를 열고 가톨릭 운동 연맹을 조직하여 교구장의 지도 하에 전개했던 신도 사도직운동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가톨릭 청년운동으로 1937년 대구에서 전국 가톨릭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해 그뒤 그 운동을 전국조직으로 확대했었다. 그리고 같은 해 가톨릭 부인회연합회가 창립되었고 이런 바탕으로 1938년 가톨릭 여자청년연합회가 발족하여 여성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8.15 광복 이후는 1946년에 청년연합회와 여자청년연합회가 편성됐고, 1947년 11월 서울에서 평양교우대회를 개최했었다. 6.25동란과 아울러 휴전시기에 있어 신도들의 사도직운동이 활발했으나 특기할 것은 한국 가톨릭 노동청년회(J.O.C.)가 창설되었다는 사실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뒤 1968년 대전에서 한국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도 신도들의 활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주교회의는 그해 10월 ‘평신도의 날’을 제정하여 신도 사도직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각 본당에는 여러 형태이긴 하나 주임신부를 자문하는 신도단의 조직이 구성되었고, 또 각 교구에는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조직되어 교구 수준에서 사도직운동이 활발해졌다. 현재 농민회, 노동청년회, 실업인회, 여성연합회, 의사회, 간호협회, 빈첸시오회, 레지오 마리애, 학생회, 꾸르실료, 성령쇄신봉사회, M.B.W., 저널리스트 클럽, 학사회, M.E., 가톨릭학술원, 사회과학연구회, 크리스천 사상연구소 등 많은 신도단체가 활발하게 신도 사도직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4. 근래 급진적인 풍조가 여러 교회 내부에 발전한 것 같다. 그것은 신도 사도직운동이 복음의 이름으로 역사의 흐름의 방향을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행동에의 참가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이다. 오늘날 신도의 양심에 제기되고 있는 의문에는 너무나 긴급하고 중요성이 있는 사도적 참가의 문제가 있다. 신도 사도직운동이 그 적응의 노력을 새롭게 하고 각양각색의 문화와 사회적 범주가 분열되고 있는 다원적 사회 한복판에서 그리스도교적 현존에 불가결한 사도적 참가의 양식을 쇄신하고 다양화시키기 위해서는 기구의 가동성과 유연성을 살려야 한다. (⇒) 가톨릭운동 (梁漢模)
[참고문헌] 梁韓模, 信徒論, 가톨릭出版社, 서울 1982 / Daniel Callahan, The mind of the catholic layman, Charles Scribner’s Sons New York 1963 / Yves Congar, O.P., Lay People in the Church, Geoffrey Chapman, London 1965 / Hubert Jedin, Editor, History of the Church, Vol. 1~10,Crossroad, New York 19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