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 고통에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이 있으며 후자는 다시 걱정이나 두려움등과 같은 감정적인 것과 실의에 빠졌을 때와 같은 의지적인 것, 인생의 궁극문제와 관련하여 느끼는 영적(靈的)인 고통 등이 있다. 인간이 왜 이러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그 해답을 찾으려고 애써 왔다.
구약성서는 고통을 죄의 결과로 보며 그 궁극적인 원인은 원죄에 있다고 한다. 고통은 개인이나(출애 21:12) 국가가(신명 8:28) 저지른 죄에 대하여 하느님이 내리시는 징벌이다. 인류의 연대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죄 뿐 아니라 타인의 죄로 인해서도 고통을 당한다(여호 7:10-15). 고통은 치유의 목적도 아울러 가진다. 하느님이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의 백성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이다(레위 26:40-45).
고통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유배기 이후 새로운 계시로 인하여 발전되었다. 에제키엘은 말하기를 한 인간은 조상이나 국가의 탓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동 때문에 일생을 통하여 상이나 벌을 받는다고 하였는 데 이는 잠언과 시편과 집회서에서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의로운 자가 고통을 당하고 불의한 자가 현세적인 행복을 누리는 현실과 부합되지 않았다. 욥서와 시편의 일부는 의인의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와 조화시키려고도 했는데 이 문제는 후세에서 받게 되는 영원한 상과 벌에 대한 계시에 의하여 해결을 보았다(지혜 1-5장, 다니 12:1-3). 한편 고통에는 인간의 덕행과 하느님께 대한 성실성을 시험하는 측면도 있으며(집회 2:4, 지혜 3:5) 타인의 죄를 대신 보속하기 위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이사 42:1-4, 49:1-7).
신약성서에서 고통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분명해진다. 그리스도는 고통을 위한 고통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그는 고통을 생각하는 것이 괴로웠고(요한 12:27) 고통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도하며(루가 22:42)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고통당하였다(마태 27:46). 그렇지만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였고(요한 14:31), 고통이 인류의 구원과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르 8:31-33). 초기 케뤼그마와(사도 2:23-24, 3:13-14) 바울로와(로마 5:9,1고린 15:3) 베드로는(1베드 2:21-25) 이 같은 취지를 가르친다.
그리스도 교인은 스승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을 부정하며 기꺼이 고통당하기를 배워야 한다. 성세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교인은 죄에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으므로 구원받은 자이지만 그 완전한 모습은 종말에 나타난다. 더구나 성세로 새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 교인에게는 아직도 악에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신랑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 구원의 완전한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그리스도교인은 “신랑을 빼앗겨 버리고”(마태 9:15) 단식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처럼 단식과 고통을 당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남은 것을 채움으로써”(골로 1:24) 그리스도 교인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림이 가까워지도록 돕는다.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자발적인 고통의 감수와 고신극기(苦身克己)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방하는 수단의 하나로 여겨왔다. 그리스도 교인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현존하시는 모습을 시간과 공간안에 볼 수 있게 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기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 그리스도 교인은 주님안에 이미 형제가 되었거나 미래에 될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랑에 가득찬 고통을 자발적으로 당하기까지 하는 것이다(히브 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