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구(1899~1981). 언론인, 극작가. 홍제동본당 초대 총회장. 본관(本貫)은 한산, 세례명은 요한. 서울에서 이관규(李冠珪)의 아들로 태어나 경기중학교(京畿中學校)와 일본대학(日本大學) 예술과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사 기자, 조선일보 동경 특파원을 거쳐 1926년 윤백남(尹白南)과 함께 극단 ‘토월회’(土月會)를 창단, 그 뒤 극예술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45년 한국극작가협회장, 1950년 한국무대예술원장 등을 역임하고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부인과 함께 영세, 입교한 후, 한국방송협회 이사, 가톨릭문우회 초대회장, 가톨릭저널리스트클럽 초대회장으로 1960년대 초반 교회의 언론 · 문화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81년 5월 25일 노환으로 사망, 경기도 시흥 소래면의 선산에 안장되었다. 작품으로는 희곡 ≪동백꽃≫, 라디오 방송극 ≪햇빛 쏟아지는 벌판≫, ≪장희빈≫, ≪강화도령≫, ≪민며느리≫ 등 50여 편이 있고, 1953년 화랑금성무공훈장, 1960년 방송문화상, 1964년 서울시 문화상, 1976년 대한민국훈장 동백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사야서 [한] ∼書 [라] Prophetia Isaiae [영] Book of Isaiah
주 예수님께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구약의 책은 이사야서와 시편집이다. 이사야는 그야말로 예언자들 중의 왕이다. 그의 영향이 지대하였으니 이사야의 제자들은 두 권의 책을 또 저술하여 스승의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첫 이사야는 기원전 765년경에 출생하였다. 기원전 740년 그러니까 우치야왕이 죽던 해에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예언자의 소명을 받았으니 그의 사명은 백성의 불충으로 인한 처벌의 결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었다(6:1-13). 그가 예언자의 직분을 행사한 세월은 무려 40년간이나 되며 또 당시의 국제정세는 아시리아의 세력이 지배하였으니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 세력의 위협 아래 풍전등화였다. 이사야의 신탁들은 다음의 네 시대로 구분되며 어느 정도 확실하게 그 신탁들을 시대별로 배치시킬 수가 있다.
첫째 시기의 신탁들은 그의 소명과 아하즈왕이 즉위한 해(736년)의 사이에 발설한 것들이다. 여기서 이사야는 유다의 번영이 초래한 윤리적 타락에 대해 큰 걱정을 하고 있다(1-5). 둘째 시기의 신탁들은 다마스커스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베가가 젊은 유다왕 아하즈로 하여금 아시리아왕 테글랏 팔라살 3세에게 저항하는 동맹에 가담하도록 종용하던 시대에 발설되었다. 아하즈가 이 동맹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하자 르신과 베가는 유다를 공격하였으니, 아하즈는 할 수 없이 아시리아에게 원군을 청하였다. 이사야는 유다왕의 이같은 정책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유명한 ≪임마누엘의 책자≫(7:1-11:9와 5:26-29(?), 17:1-6, 28:1-4)의 본문이 씌어졌다. 아하즈에 대한 개입이 실패하자 이사야는 제자들과 함께 은거한다(8:16-18). 셋째 시기의 신탁들은 다음의 역사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아하즈왕이 테글랏 팔라살에게 원군을 청한 것은 유다를 아시리아의 보호령으로 전락시켰고 북왕국 사마리아의 몰락을 재촉하였기 때문이다. 북왕국은 734년에 영토의 일부를 아시리아의 속령으로 내주었고, 드디어 외국세력의 압력으로 721년에 와서 사마리아는 아시리아인들의 손에 함락되었다. 유다에서 히즈키야가 아하즈의 대를 이었다. 새로 등극한 왕은 신심이 깊은 지도자로서 개혁을 서둘렀으나 그의 주변 정치인들은 아시리아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집트와 손을 잡도록 왕에게 조종하였다. 이 때 이사야는 이집트와 군사동맹을 맺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느님께 신뢰할 것을 주창하였다. 히즈키야왕 치세의 초기에 이사야가 발설한 신탁들은 14:28-32, 18:20, 28:7-22, 29:1-14, 30:8-17 등의 본문이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는 반군을 진압하였고(20장), 아쉬돗을 함락시켰다. 이사야는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넷째 시기의 신탁들은 705년경 히즈키야왕이 또 아시리아에 항거했을 때 발설된다. 아시리아왕 산헤립은 701년에 팔레스티나를 휩쓸었으나 유다왕은 예루살렘을 끝까지 지키려 하였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도움을 약속하며 유다와의 항거를 지지하였고 예루살렘은 함락을 모면하였다. 이 시대에 이사야가 발설한 신탁들은 1:4-9(?), 10:5-15:27b-32, 14:24-27, 그리고 28-32의 일부 본문들이다. 기원전 700년 이후의 이사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유다전승의 이사야가 폭군 므나세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이사야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의 문체는 뛰어난 시인의 것이요, 성서 히브리어의 고전에 속한다. 그가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하지만 종교인으로서 더욱 위대한 인물이었다.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의 초월성을 체험한 이사야는 성전의 사람(6장)이었다. 그의 하느님은 거룩하고 힘이 센 분이며 왕같은 분이시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느님께서 정화시켜 주어야 한다. 하느님은 정의를 요구하시며 일상생활과 일치하는 예배를 인간에게 요구하신다. 성실성은 하느님의 철저한 요구이다. 또 이사야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물질과 군사력보다는 철저히 하느님께 신뢰할 것을 그가 민족에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민족의 시련을 내다본 이사야는 비극의 생존자로서 하느님께 끝까지 성실하게 처신할 ‘소수의 남은 자’가 있으리라고 예언했고, 이 남은 자들의 왕이 곧 메시아라고 말하였다. 그가 예언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평화와 정의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세상에 퍼뜨리는 분이다(2:1-5, 7:10-17, 9:1-6, 11:1-9, 28:16-17).
이사야의 천재적 종교심은 당대와 후대의 사람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대의 편집자들은 이사야의 말씀들을 수집하였고 그의 신탁들에 또 많은 본문들을 첨가시켰다. 하여 그 편집과정을 상세히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쨌든 이사야서들의 편집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가 있다. △ 1-21 :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신탁(거의 모두가 이사야의 것임). △ 13-23 : 예레미아서와 에제키엘서처럼 따로 수집한 신탁들. 민족들에 관한 신탁으로서 이사야의 것임. △ 24-27 : 소위 ‘이사야의 대묵시록’으로서 유배 이후 시대의 본문임. △ 28-33 : 불행을 예고한 문집으로서 이샤야의 것임. △ 34-35 : 소위 ‘이사야의 소묵시록’으로서 유배 이후 시대의 본문임. △ 36-39 : 역사적 부록(2열왕 18-19의 본문참고). 후대의 사기(史記)임. △ 40-55 : 이사야의 제자로서 소위 ‘제2 이사야’라고 부르는 예언자의 작품. 이 예언자는 유배의 말기에 활동하였음. △ 56-66 : 이사야의 또 다른 한 명의 제자, 소위 ‘제3 이사야’라고 부르는 예언자로서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에 활동한 예언자의 작품.
제2 이사야는 누구인가? 그는 바빌론에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승리가 예견되고 바빌론 제국의 멸망을 내다보던 시대, 그러니까 기원전 550년경과 유태인들의 본국 귀환을 결정한 고레스의 칙령(538) 사이의 시대에 예언자로 활동하였다. 제2 이사야의 문집은 이사 1-39의 것보다 훨씬 더 통일성이 있다. 이 문집은 예언자의 소명체험에 해당하는 40:1-11의 본문으로 시작하고 결론에 해당하는 55:6-13의 본문으로 끝마친다. 문집의 첫마디가 “위로하여라, 너희는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40:1)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문집을 ‘이스라엘을 위로하는 책’이라고 불렀다. 위로는 제2 이사야서의 가장 중대한 주제이다. 반대로 첫 이사야 말씀(1-39)은 매우 위협적이고 아하즈왕과 히즈키야왕의 치세 때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40-55의 신탁들은 예의 역사와는 무관하며 또 매우 위로가 되는 말씀들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느님의 심판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귀환과 민족부흥의 때가 곧 다가왔음을 예언자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그런 이유로 창조의 하느님과 구원의 하느님에 대해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에게 구원은 창조의 연장일 뿐이다. 새로 창조된 이스라엘은 새로운 출애굽, 곧 해방을 얻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 창조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는 주제는 예언자에게 첫 출애굽을 능가하는 해방으로 통한다. 제2 이사야가 ‘과거의 사건’과 ‘미래에 올 사건’을 시간적으로 구분한 입장은 종말론(終末論)의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제2 이사야의 신학은 첫 이사야의 것보다 더 조직적이다. 그의 유일신 사상을 좀 더 신학적, 교의적으로 전개하였고 우상들의 무능함을 철저히 파헤치고 있다. 또 예언자는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지혜와 섭리를 부각시키고 종교적 보편사상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구원은 이 예언자의 마지막 복음이었다.
또 이 문집에 유명한 네 편의 ‘종의 노래’가 들어 있다(42:1-4[5-9], 49:1-6, 50:4-9[10-11], 52:13-53:12). 이 노래들이 묘사하는 종은 완벽한 야훼의 종이요, 자기 백성을 모으는 자요, 민족들의 빛이다. 이 종은 아름다운 믿음의 길을 설교하고 있고 자기의 목숨을 바쳐 백성의 죄를 없앴다는 것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고양(高揚)된 영광의 종이다. 구약성서에 이 네 가지 노래만큼이나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된 본문은 없다. 누가 이 노래들을 썼을까? 처음 세 편은 제2 이사야가 썼고 넷째 노래는 그의 제자가 썼을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노래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종의 정체(正體)에 관해 아직도 토론을 벌이고 있다. 그들 중 어떤 학자들은 종의 정체를 이스라엘 공동체의 형상(形象)으로 본다. 과연 제2 이사야서의 어떤 본문들은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종의 형상이 개인적 인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 있다. 그들은 종의 정체를 ‘과거 혹은 현재’의 역사적 인물로 파악하고 있으며 흔히 제2 이사야 자신을 종의 형상에서 확인하고 있다. 또 넷째의 노래는 제2 이사야가 죽고 난 뒤에 스승의 시집에 제자들이 부연한 것으로 통한다. 종을 개인으로 보는가, 아니면 집단으로 보는가가 문제이다. 어쨌든 과거와 현재(제2 이사야시대)에 국한시켜 종의 정체를 논하는 것은 본문의 객관적인 여건을 충분히 고려한다고 볼 수가 없다. 제 2 이사야의 본문들은 종을 장차 올 구원의 중개자로 보고 있으며, 또 유다전승의 일부는 종의 노래들을 메시아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고통의 인물인가? 종은 본의 아니게 고통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가 희생을 원한 것이 아니지만 끝까지 ‘종살이’(봉사)에 충실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희생된 것이다. 하느님은 종의 이 헌신과 사랑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multitudo)의 치유를 가능케 하신다. 예수는 이 고통당하는 종의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와 사명을 발견했다(루가 22:19-20:37, 마르 10:45). 또 초대교회의 첫 설교자들도 제2 이사야의 종의 노래에서 가장 완벽한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겼다(마태 12:17-21, 요한 1:29).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 56-66의 본문은 소위 ‘제3 이사야’로 통하는 무명 예언자에 의해 쓰여졌다고 여긴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서학은 제3 이사야서의 편집과정을 매우 복합적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여 시(詩)로 되어 있는 63:7-64:11의 본문은 유배가 끝나기 전(538)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66:1-4의 신탁은 성전재건(520년경)의 동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반대로 60-62장의 본문은 제3 이사야의 사상과 문체에 속한다. 반대로 66:1-4을 제외한 65-66의 본문은 묵시문학에 속하며 그 연대를 어떤 이는 그리스시대로 보고, 어떤 학자들은 유배에서 귀환한 직후의 시대로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제3 이사야서는 제2 이사야의 제자들이 쓴 작품이다. 이 세 번째 문집은 예언자들의 왕, 곧 8세기 이사야의 학파가 낳은 이사야적 전승이 맺은 열매이다.
20세기 중반에 고고학자들은 사해(死海) 연변에 있는 쿰란(Qumran)에서 기원전 2세기의 시대에 속하던 이사야서의 완벽한 필사본을 발견하였다. 이 필사본은 ‘마소라성서’와는 다른 구독법을 구사하고 또 이본(異本)들을 포함하고 있다. 쿰란의 이사야 필사본(약자 IQISa)은 오늘날 이사야서 번역가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대본으로 손꼽힌다. (徐仁錫)
[참고문헌] Commentaries, B. Duhm, 4v., Gottingen 1892; 4th ed., 1922 / K. Marti, Tubingen, 1900 / A. Condamin, Paris 1905 / J. Skinner, 2v., Cambridge, Eng. 1918; 2d ed., 1925 / J. Knabenbauer and F. Zorell, 2v., Paris 1922~1923 / F. Feldmann, 2v., Munster 1925-1926 / E. Konig, Gutersloh 1926 / A. van Hoomacker, Bruges 1932 / J. Fisches, 2v. Bonn 1937-1939.
이사악 [원] Isaac
아브라함과 사라의 외아들. 그의 이름은 ‘웃다’ 또는 ‘미소짓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사라가 늙은 나이에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웃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가 많은 후손을 갖게 될 것이며 그 후손들은 팔레스티나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창세 12:7, 13:14-17, 15:18-21). 그러나 사라가 너무 늙었기 때문에 아기를 낳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사라의 하녀 아가와의 사이에서 아기를 낳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하느님이 약속한 아들이 아니었다. 이사악이야말로 믿음의 자식이며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언약이 실현되었다(창세 17:15-19, 로마 9:7).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창세 22:1-18). 이사악이 그의 아버지에 의해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고 하느님에 의해 목숨을 건짐을 신학자들은 예수의 희생과 부활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사악이 가나안의 여인과 결혼할 경우 아브라함의 혈통이 더럽혀지게 되므로 아브라함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의 처녀 레베카가 이사악의 아내로 선택되었으며(창세 24:1-67), 이 둘 사이에서 에사오와 야곱이 태어난다.
이붕익 [한] 李鵬翼 [관련] 이의송
이붕익(1842~1866). 순교자. 세례명은 바오로.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부모와 함께 경기도 시흥(始興)으로 피신하였으나 체포되어 10월 22일(음 9월 14일) 양화진(楊花津)에서 아버지 이의송(李義松), 어머니 김이쁜(金–)과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 당하여 순교하였다. (⇒) 이의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