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자 [한] 修鍊者 [라] novitius(novitia) [영] novice

수도단체에 입회하여 수련기에 있는 자. 이를 허가하는 것은 고위장상의 권한에 속하며 연령, 건강, 성격, 자유의사, 성숙도 등이 고려 대상이 된다. 수련자는 수련기를 시작하기 전에 세례성사, 견진성사를 받은 자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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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장 [한] 修鍊長 [라] novitiorum magister [영] master of novices

수도회에서 수련기에 있는 자들을 지도하는 사람. 수련자에 대한 지도는 수련장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다. 수련장은 그 수도단체의 회원으로서 종신서원을 발하고, 정당하게 선정된 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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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본당 [한] 水流本堂

1890년대에 순교성지 호남에는 3개의 성당이 솥발처럼 세워져 교회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겼는데, 되재[升峙, 현 전북 完州郡 華山面], 나바위[羅岩, 현 전북 益山郡 望城面 華山里]와 함께 수류(水流, 현 金堤郡 金山面 禾栗里)본당이 바로 그것이다.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주봉인 무악산, 상두산, 국사봉에서 둘러싸인 곳에 있는 수류본당은 1895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라크루(Lacrouts, 具) 신부가 당시 금구군(金溝郡) 배재[梨峴]에서 1년간 전교에 힘쓰다가 1896년 현재의 사제관터인 이(李)진사의 재실을 구입하여 본당을 창설하였다. 역대 주임신부별로 성당의 발전상황을 일람하면, 초대(1895~1900년) 라크루 신부의 성당대지 확보에 이어, 2대(1900~1918년)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가 성당건축에 착수하여 1907년에 48년간의 목조 건물인 구성당을 준공하였는데, 이는 웅대한 한국의 고전적 건축양식을 갖춘 것이었다. 1908년에는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세워 전북 최초의 학교로서 한문과 신학문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때의 수류본당 관할은 김제, 부안, 정읍, 순창, 고창, 담양, 장성까지였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페이네 신부가 소집령에 의해 귀국, 3대(1918~1919년) 임시 본당신부로 투르뇌(Victor Tourneux, 呂) 신부가 부임했다가 다시 페이네 신부가 돌아와서 4대(1919~1920년)를 이었다. 5대(1920~1930년) 뤼카(Ludvicus Lucas, 柳嘉鴻)신부, 6대(1930~1935년)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 7대(1935~1937년) 최민순(崔玟順, 요한) 신부, 8대(1937~1938년) 석종관(石鍾寬, 바오로) 신부, 9대(1938~1942년) 최재선(崔再善, 요한) 신부 때는 원평(院坪) 공소를 건립하였다.

10대(1942~1947년) 이약슬(李若瑟, 요셉) 신부 때 8.15광복을 맞았으며, 11대(1947~1950년) 김영태(金永泰, 도미니코) 신부, 12대(1950~1951년) 김후성(金厚星, 프란치스코) 신부 때 6.25전쟁을 겪는 동안 유서깊은 1907년에 세워진 수류본당이 소실되었다. 구 성전을 잃고, 군종신부로서 김 프란치스코 신부는 온갖 고초 속에 빠졌으나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의 피난지로 화한 수류지역에서 50여명의 신자가 순교하였다. 이리하여 1960년까지 10년 동안 수류지역의 신자는 김제본당(金堤本堂)에 소속되었다.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류본당의 특징을 든다면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점이다.

1959년 교우들의 노력으로 현대식 성당을 재건하여 전주교구 관하의 수류본당을 부흥, 재출발하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여 오고 있는데, 이때부터의 역대 주임신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13대(1960~1961년)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신부 때 원평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였고, 14대(1961~1962년) 김동현(金, 베드로) 신부, 15대(1962~1966년) 권영균(權, 안토니오) 신부, 16대(1966~1969년)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신부, 17대(1969~1974년) 김영신(金英信, 바오로) 신부, 18대(1974~1976년) 김정원(金正原, 토마스) 신부, 19대(1976~1979년) 김병엽(金炳燁, 베드로) 신부, 20대(1979~1982년) 이순성(李順性, 베드로) 신부 때 현 성당의 의자축조와 사제관의 건립을 보았고, 21대(1982~ 현재) 유종환(兪鍾桓, 마태오) 신부 때에 와서 사제관을 재건하였다. 신자수는 1983년 12월말 현재 1,100명이다. 또한 1984년 현재 성직자 10명, 수도자 11명을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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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한] 修理山

성지. 안양시(安養市) 중심가에서 남서로 4km지점에 있는 수리산의 한 골짜기에는 수산리라는 마을이 있다. 담배골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주민의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인 50여호의 조그마한 마을이다. 이곳은 격심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든 교우들에 의해 19세기 초에 이룩된 마을이다. 이곳에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성인 최경환(崔京煥, 방지거) 일가의 순교애화가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최경환은 최양업 신부(우리나라 2번째 신부)의 아버지로 1804년 충청도 홍주(현 洪城)에서 태어났으나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서울의 벙거지골[笠洞],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정착한 곳이 이곳 수리산 골짜기로,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며 신앙생활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기해박해의 거센 물결이 이 마을에도 밀려왔다. 1839년 7월 31일 최경환을 비롯한 40명의 교우들은 관헌에 의해 체포되어, 최경환은 40여일의 고문 끝에 포도청에서 숨을 거뒀고(9월 12일), 그의 처 이 마리아(李聖禮)는 다른 여교우 한 명과 함께 이튿날 수구문[光熙門]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이보다 훨씬 전에 최경환의 막내아들인 젖먹이도 옥에서 죽었다. 최경환의 맏형인 최 야고보가 동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생전에 그가 살던 수리산의 마을 옆에 묻어주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의 무덤은 세인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갔다. 1929년 용산신학교의 피숑(Pichon, 宋) 신부의 노력으로 그의 무덤은 다시 확인되었고, 그의 유해는 이듬해 5월 26일 명동성당으로 옮겨졌다(현재는 절두산성당).

수리산 담배골에는 안양천주교회 수산리공소가 있고, 최경환의 무덤자리에는 수원 레지오마리에 코미시움이 세운 십자비석이 세워져 있다. 현 주소는 경기도 안양시 3동 담배골.

[참고문헌] 이충우, 한국의 성지, 1981 / 교회와 역사, vol. I.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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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치골 [관련] 공주본당

초기 교회 유적지. 공주(公州)지방에는 박해를 맞아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은신교우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수리치골도 그 중의 하나로, 이 마을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Ferreol, 高) 주교에 의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성심회라는 신심단체가 구성되어 공주지방의 신앙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다. 충남 공주군 유구면 조평리에 위치. (⇒) 공주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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