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에 순교성지 호남에는 3개의 성당이 솥발처럼 세워져 교회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겼는데, 되재[升峙, 현 전북 完州郡 華山面], 나바위[羅岩, 현 전북 益山郡 望城面 華山里]와 함께 수류(水流, 현 金堤郡 金山面 禾栗里)본당이 바로 그것이다.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주봉인 무악산, 상두산, 국사봉에서 둘러싸인 곳에 있는 수류본당은 1895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라크루(Lacrouts, 具) 신부가 당시 금구군(金溝郡) 배재[梨峴]에서 1년간 전교에 힘쓰다가 1896년 현재의 사제관터인 이(李)진사의 재실을 구입하여 본당을 창설하였다. 역대 주임신부별로 성당의 발전상황을 일람하면, 초대(1895~1900년) 라크루 신부의 성당대지 확보에 이어, 2대(1900~1918년) 페네(Peynet, 裵嘉祿) 신부가 성당건축에 착수하여 1907년에 48년간의 목조 건물인 구성당을 준공하였는데, 이는 웅대한 한국의 고전적 건축양식을 갖춘 것이었다. 1908년에는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세워 전북 최초의 학교로서 한문과 신학문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때의 수류본당 관할은 김제, 부안, 정읍, 순창, 고창, 담양, 장성까지였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페이네 신부가 소집령에 의해 귀국, 3대(1918~1919년) 임시 본당신부로 투르뇌(Victor Tourneux, 呂) 신부가 부임했다가 다시 페이네 신부가 돌아와서 4대(1919~1920년)를 이었다. 5대(1920~1930년) 뤼카(Ludvicus Lucas, 柳嘉鴻)신부, 6대(1930~1935년) 이상화(李尙華, 바르톨로메오) 신부, 7대(1935~1937년) 최민순(崔玟順, 요한) 신부, 8대(1937~1938년) 석종관(石鍾寬, 바오로) 신부, 9대(1938~1942년) 최재선(崔再善, 요한) 신부 때는 원평(院坪) 공소를 건립하였다.
10대(1942~1947년) 이약슬(李若瑟, 요셉) 신부 때 8.15광복을 맞았으며, 11대(1947~1950년) 김영태(金永泰, 도미니코) 신부, 12대(1950~1951년) 김후성(金厚星, 프란치스코) 신부 때 6.25전쟁을 겪는 동안 유서깊은 1907년에 세워진 수류본당이 소실되었다. 구 성전을 잃고, 군종신부로서 김 프란치스코 신부는 온갖 고초 속에 빠졌으나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의 피난지로 화한 수류지역에서 50여명의 신자가 순교하였다. 이리하여 1960년까지 10년 동안 수류지역의 신자는 김제본당(金堤本堂)에 소속되었다. 9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류본당의 특징을 든다면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많이 배출한 점이다.
1959년 교우들의 노력으로 현대식 성당을 재건하여 전주교구 관하의 수류본당을 부흥, 재출발하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계승하여 오고 있는데, 이때부터의 역대 주임신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13대(1960~1961년)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신부 때 원평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였고, 14대(1961~1962년) 김동현(金, 베드로) 신부, 15대(1962~1966년) 권영균(權, 안토니오) 신부, 16대(1966~1969년)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신부, 17대(1969~1974년) 김영신(金英信, 바오로) 신부, 18대(1974~1976년) 김정원(金正原, 토마스) 신부, 19대(1976~1979년) 김병엽(金炳燁, 베드로) 신부, 20대(1979~1982년) 이순성(李順性, 베드로) 신부 때 현 성당의 의자축조와 사제관의 건립을 보았고, 21대(1982~ 현재) 유종환(兪鍾桓, 마태오) 신부 때에 와서 사제관을 재건하였다. 신자수는 1983년 12월말 현재 1,100명이다. 또한 1984년 현재 성직자 10명, 수도자 11명을 배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