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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선풍
6. 五家禪風 당나라 말기에 회창(會昌)의 폐불사건58>이 일어나 그 당시 불교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선종만은 이것을 계기로 크게 번영하였는데, 이로부터 중국 선종의 최성기라고 할 수 있는 5家가 성립하게 된다. 1) 僞仰宗 위앙종은 선종 5가의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위산 영우(靈佑)와 앙산 혜적(仰山 慧寂)이 있다. 위앙종은 여래선(如來禪)59>과 조사선(祖師禪)을 구분하였으며, 돈오(頓悟)의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점수(漸修)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위앙종은 선의 방법이 과격하지 않으면서도 가풍이 매우 심오하였으며, 위앙종의 대표적 법문을 나타내는 종지(宗旨)로서는 ‘여여불(如如佛)’60>이 있으며61>, 앙산은 자기의 자신의 방편 법문을 모든이에게 맞추어 지도하는 趙州의 ‘잡화점’과 같다고 설명한다.62> 2) 臨濟宗 임제종은 당 말기에 주로 하북 지방에서 교화를 펼치었다. 臨濟宗에서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臨濟 義玄을 들 수 있다. 그의 사상은 무엇보다도 ‘無依道人,無位眞人’이라는 말처럼 현실에 있어서 인간의 절대 무조건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살아있는 인간을 곧바로 절대 긍정하며 일체 그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진실되고 꾸밈없는 자기의 주체를 전개하는 無位眞人을 주장하며, 이러한 無依道人이 바로 현재에 눈앞에 있는 우리들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이 바로 祖師이며, 부처’라고 말하는 것이다.63> 또한 그는 ‘平常無事’‘無事是貴人’등을 설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馬祖로부터의 平常心을 계승한 인간의 절대 긍정과 근원적인 인간의 주체를 지극당연한 일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인간의 생활종교로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겠다.64> 3) 曹洞宗 洞山 良价와 曹山 本寂에 의해 공동으로 창립된 조동종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이치를 철학적인 시와 노래로 표현하였다. 매우 일상적인 언어인 동시에, 완전히 일체의 인식과 설명을 뛰어넘는 철학적 구극의 진리이기도 한 ‘우리’,‘그’,‘너’,‘그것’,‘이것’등과 같은 대명사의 사용과 그의 의문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그곳에서 그곳으로’라는 진리에 연관된 것에 관한 물음의 대답인 ‘다름아닌 이것이 그것(只這是)’이라는 추상적 철학적 이치가 그 禪風을 잘 드러낸다.65> 흔히들 조동종의 오위(五位)를 중시할 수 있으나, 이 ‘五位’66>는 깨닫기 힘든 제자들을 위한 교육상의 개요를 교육적인 편법으로 할 수 있겠다.67> 4) 雲門宗 운문종은 雪峯 義存의 法을 이어 발전시킨 계통으로서, 대표적 인물로서 雲門 文偃이 있다. 雲文은 함축된 短言의 寸句의 짧은 한마디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일자관(一字關)’이라고 한다. 雲門은 선문답에 있어 2자,3자 또는 1자로 된 대답 즉 一字關을 던져, 그 1자로 말안에서의 시와 철학을 드러낸다. 雲門이 이렇게 일자로서 질문과 대답사이의 생생함을 이루는 것은 추상적인 한자로서만이 나타낼 수 있는 묘미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겠다.68> 5) 法眼宗 법안종은 운문종과 같은 계열로서, 法眼 文益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法眼 文益의 선사상은 한 마디로 ‘三界唯心’이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겠다고 하겠다. 三界唯識頌을 보자면, ‘三界는 오직 마음일 뿐이며, 존재하는 것은 모두 識이다. 識일 뿐이며 모든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三界唯心은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내용이 마음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시말하자면 외부 경계에 다섯가지의 경계가 있어 그것이 현식(現識)에 비추어 외부의 경계인 것처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三界唯心’의 사상은 馬祖 道一의 平常心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평상심의 일상성을 크게 관조하는 입장은 法眼의 독자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69>
선종의 성립과 조사선
5.禪宗의 成立과 祖師禪 이상 달마로부터 여러 시대를 거쳐 외래불교가 중국인의 생활 종교로 형성되었다. 이를 일반적으로 조사선의 불교라 하는데 사실 중국의 선종은 조사선의 전개와 더불어 새로운 중국불교의 주류로서, 또한 종파로서의 선종의 차원을 넘어 종래의 전 불교를 통합한 입장이 되었다. 즉 그것은 인도에서 전래한 단순한 명상의 실천으로서의 선이 명상이나 삼매의 신비적 습선(習禪)의 영역을 탈피하여 현실적인 중국인의 일상생활속에 융합된 생활 종교로서 정착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48> 종래의 禪이 지니고 있던 신비성은 오히려 일상 생활 그 자체의 새삼스러운 감격이 되고, 신통력은 물을 이용하여 땔감을 운반하는 행동속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속세 한 가운데서 세속적이지 않는 자유를 찾아내는 것이며, 관념적이며 일시적인 자유가 아니라 구체적 생활 그 자체의 혁신인 것이다. 49> 동시에 선원이 종래의 전통적인 율원(律院)에서 독립하여 새롭게 제정된 선원청규(禪苑靑規)에 의한 수행생활과 출가승들이 직접 생산노동50>에 참여하여 자급자족의 생산적 교단을 형성하는데 이는 일찌기 전 불교의 역사상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사실로 불교의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으며, 중국인들의 생활 종교로서의 선불교의 완성과 선종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불교의 지도적 인물이 마조도일(馬祖道一)과 석두(石頭)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강호의 새로운 선불교는 선종의 본격적 역사서인 ‘보림전’을 편집하여 그 옛날 석가모니불이 가섭에게 부촉한 정법안장51>이 마조도일까지 전례되었다는 조사선의 계보를 완성시켰다. 또한 이 시대에 선승들의 일상생활의 대화나 행적을 기록한 어록이 출현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이 종교였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불법의 정신을 살아있는 인간의 특수한 대화로 연구하여 ‘선문답’이라는 새로운 수행방법이 창안되었음을 말하는데, 이는 곧 생활종교로서의 조사선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한 인간이 자기 전신을 특수한 역사적 현실에서 악전고투하여 싸워이긴 땀과 피가 젖은 사상의 표현인 조사선의 선종록은 인간 신뢰의 시대에 인간성 자각과 회복52> 을 의미하며 전통과 권위주의를 벗어난 인간의 생활종교의 모습을 여실히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선의 특성은 붓다의 정신을 인간의 평범한 생활에 밀착된 종교로서의 선불교를 전개한 것이라 하겠다. 곧 平常心是道인 것이다. 마조는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오염시키지 말라. 오염은 생사의 차별심이나 조작하려는 작위성이며 우리의 평상심이 바로 도이다”라고 하면서 평상심은 조작함도, 시비도, 취사도 범부나 성인의 구별하는 마음도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평범한 일상생활의 마음이라 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마음이 본래 청정심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법은 모두 심법이며 만법은 모두 마음을 쫓아서 생기며, 마음이 만법의 근본이 된다 (心地法門). 이러한 마음이 道에도 業에도 얽매이지 말고, 忘念도 없고 조작도 없으며(無念無作), 닦음도 증득함도 없이(無修無證) 53> 모든 지위를 지치지 않고 스스로를 숭경하는 것이 道라는 것이다. 이처럼 평상심이 도라 하면서 다만 지금의 行住坐臥에 있어서 사물에 접하는 것이 모두 평상심이며, 현실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어 평상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동작과 행위를 불성의 전체작용으로 본다. 진여불성이 마음이기에 평상심이 바로 도요, 부처임을 주장한다.(卽心是佛) 이러한 ‘卽心是佛’은 ‘平常心是道’와 더불어 조사선의 주요사상인데 이는 범심을 버리고 탐진취를 없애고 불성인 진여를 드러내려고 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범과 성이라는 분별이 없어진 범과 성 그 전체가 그대로 부처인 것을 의미한다. 54> 이러한 조사선의 깨달음의 장소는 바로 行住坐臥, 곧 인간의 모든 행동이며 견성은 더 이상 내면적인 근본 지혜나 本覺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적,구체적 행동이 되며55>, 진리는 이제 새삼스레 배우거나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들의 생활속에 자명하게 있으며, 현실이 바로 진리 즉 깨달음의 장소가 되는 것이며, 진리는 밖에서 구해지는 것도, 안에서 이상화 되는 것도 아니며 다만 일상 생활안에서 기운차게 작용하여 그치는 것이 없는 것이다.56> 이상에서 본 바 평상심으로 일상 생활을 전개하는 조사선의 본질이 일상성의 종교임을 알 수 있었다. 곧 평범한 일상 생활속에 언제 어디서나 자기의 주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각적 삶을 가꾸는 살아있는 지혜인 것이다.57>
신수의 닦음과 혜능의 깨침
3) 신수의 닦음과 혜능의 깨침 북종 신수는 “마음을 모아 선정에 들고 마음이 머무르게 하여 깨끗함을 보며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고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증득한다”라 하여 점(漸)의 입장이었고44> 참 마음을 지키는 것을 가르친 반면, 남종선에서는 이러한 가르침 모두 마음의 얽메임이라 하여 물리치고 있다.45> 무념의 근거에 있는 각자의 본성을 곧바로 자각하는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주장한다. 남종선에서는 이르기를 “우리들 6대조사(六大祖師)는 모두 단도직입하여 곧바로 견성하여 깨닫도록 했지 단계적으로 깨닫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하여 학도자는 반드시 곧바로(頓) 불성을 자각한 뒤 점차로 인연을 닦아야 하여(漸修) 지금의 삶에서 해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돈오점수적 입장에서의 새로운 돈오선을 주장하는 것이다. 46> 혜능은 깨침에 있어서 頓悟의 길을 제공한다. 이에 비해 신수가 제공하는 구경각의 길은 <屈.曲.直>의 어렵고 오랜 수행의 길이었다. 그 의미를 풀어보면,먼저 사람이 <一行>을 인식하게돨 때까지는 몸이 구부러져 펴지지 않는 것과 같아(屈) 세계의 온갖 차별적 현상들에 미혹과 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숨을 가라앉히고 定에드는 것은 몸을 구부리고 엎드려 나아가는 것과 같으며(曲), 마지막으로 만물이 한모습(一相)인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은 뱀이 대통 안에들어간 뒤 곧아지게 되는 것과 같다(直)는 말이다.47> 이러한 혜능과 신수의 ‘깨침과 닦음’의 길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실존적이며 실천적인 차원의 논쟁으로 제기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올바른 깨침의 기준이다. 불교의 사상, 특히 대승불교의 사상은 현실적인 것이다. 깨침과 수행은 보살행없이 사변적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으며,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6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논의되고 있는 돈점론은 바로 이 세상에서 자기완성과 불국정토를 이루려는 보살행과 정토사상에 입각하여 바라보아야할 것이다.
신수와 혜능의 입장
1) 北宗禪(신수)의 입장 宗密은 북종선의 특성을 요약하여 “번뇌의 티끌을 털어내고, 청정한 마음을 직관하며, 명상의 방편에 의거해서 대승경전의 진리에 통달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번뇌의 티끌’이란 본래적인 청정성에 대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으로서 마음의 청정성을 오히려 번뇌의 티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神秀는 그러한 거울의 본래의 청정성을, 번뇌를 털어낸다고 하는 구체적인 현실의 실천에 의해서 실증하고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단계적 수행을 통한 「절대적 눈뜸」으로 가는 漸修의 입장인 것이다. 대체로 자기에게 눈뜬다는 것은 마음의 주체가 모든 분별의 의식을 떠나있는(心體離念)것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차별의 의식을 떠난 마음의 상태는 마치 허공의 넓음과 같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으며, 모든 존재는 모두 평등하다. 그것이 여래에 의해서 깨우쳐진 平等法身이며, 이 법신에 근거해서 모든 사람들의 본래적 눈뜸(本覺)이 주장되는 것이다.40> 또한 신수는 “수행자가 마음을 안정시켜 도를 구하려고 할 때는 마땅히 시절과 방편을 관찰해야 한다”하여 시절과 방편을 강조하는데, 이 때 방편이란 곧 좌선 방편을 의미한다. 또한 방편을 배우는 목적을 성불에 두고 성불은 각자의 정심(심의의 자성청정심)의 체로 이룰 수 있으며 이 정심의 체는 명경과 같으며 무시이래로 만상을 비추고 있지만 일찌기 염착(染着, 더러워짐)하지 않았고 이 정심의 체를 알기위하여 방편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심의 체를 간(看)하는 좌선의 실천으로 앞, 뒤, 상, 하의 시방(十方)을 행주좌와(行住坐臥)와 함께 간하도록 하는 看心法을 주장함으로 여러가지 좌선법이 연구되어 학인들을 지도하던 초기 선종에서와는 달리 좌선 방편을 근본으로 하는 실천종교로 정착되게 한다.41> 2) 南宗禪(혜능)의 입장 이에 반해 남종선은 無念을 설하고 있는데, 無念은 본래 털어낼 티끌조차 없는 無․空을 의미한다. 이는 북종선에 대한 신뢰의 비판에서도 명확히 나타나고 있는 바, 慧能의 無心이란 선악의 분별, 마음의 집착을 벗어난 無住로서 표현된다. 북종신수가 「觀心論」에서 “자기의 마음의 청정과 오염이라는 두가지 작용을 內觀하라”하며 참마음을 지키는 것을 가르친 것에 반하여 남종선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모두 마음의 얽매임이라 하여 물리치고 있다. 혜능은 “일체의 걸림이 없고 밖으로 일체의 경계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坐)이고, 본성을 보고 산란되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 하여 좌선의 정의를 새롭게 내린다. 이 때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은 無念이고, 본성을 본다는 것은 바로 돈오견성을 의미하는 바, 자성청정심의 자각과 無念, 無住, 無相의 盤若의 실천을 일체라 하여 중국 선불교의 새로운 모습을 완성시키고 있다.42> 慧는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에 눈뜨는 것이다. 자기 마음의 본체 즉, 의식적인 마음의 근저에 慧가 있는 것이다.43> 慧는 밖으로부터 觀하기도 하는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라 텅빈 마음의 본질 그 자체이며 이로써 머무름이 없는 마음과 그것을 아는 마음은 완전히 하나임을 알게된다. 이는 또한 본체와 세계가 無와 有의 이분법적 구분을 뛰어넘어 空으로 합일되는 本來無一物의 세계이다. 이렇게 하여 직관적인 定(마음의 평안함)과 慧는 일체를 이루고 있다.
혜능과 신수
4. 慧能과 神秀 5조 弘忍에 이어 6조에 이르러 중국 선종을 확립시킨 南北兩宗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南頓北漸, 南能北秀’라고 하듯이, 남종의 혜능과 북종의 신수는 ‘깨침과 닦음’에 있어서 頓과 漸이라는 대별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돈점(頓漸)의 문제는 진리를 직시케 해 주는 것은 아니되, 구도자의 구체적인 실천수행과 연관되는 실존적인 문제34>이며, 역사적으로는 종파를 가름짓고 한 종단의 정통과 이단을 판가름하는 기준35>이었다. 또한 頓漸의 입장이 본격화 되었던 6세기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깨우치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는 깨침과 수행에 있어서 頓과 漸이라는 다양한 방식을 제시하면서 논쟁화되고 있다. 이러한 頓漸 논의들은 단순히 이론적 인식과 실천적 수행의 문제가 아니라 안심과 보살행이라 표현될 수 있는 바,36> 頓漸論의 본격적 출발이라 할 수 있는 혜능과 신수의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그 철학적 바탕과 의미를 찾아보면서 그것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혜능과 신수의 사상은 일단 그들의 偈頌에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5조 弘忍이 의발의 계승자를 뽑는 데, 신수는 다음과 같이 偈頌을 지었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朝朝勤拂拭, 莫使惹塵埃 밤낮으로 갈고 닦아 세속에 물들지 말게 할지니라.37> 여기에서 신수는 선정의 수행을 꾸준히 계속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자신의 게송을 통하여 인도 불교 고유의 <戒 – 定 – 慧>의 삼단계 수행방식을 온전히 농축시켜 표현하였다.38> 이에 대해 혜능은 戒와 定을 뛰어넘은 도약으로 慧를 말하고 있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보리(菩提)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 또한 대가 아 니다.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본래 아무 것도 없는 데 어디서 티끌이 생겨날까?39> 이렇게 신수는 거울의 본래의 청정성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확인하려 한 반면, 혜능은 본래의 청정성을 ‘단박 깨달음’으로 아는 것이며 그것은 선악과 變, 不變을 초월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