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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이 엘리야가 된 이유
Ⅳ.세례「요한」이 「엘리야」가 된 이유 우리는 위에서 말한 바(제2절 Ⅰ)에 의하여, 「엘리야」가 지상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계승 완성하기 위하여 세례「요한」이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누가」복음 1장 17절1)에 기록된 대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슬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기 위하여 출생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명적인 입장에서, 「엘리야」의 재림자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상세한 것은 부활론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엘리야」는 땅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재림하여 그가 사명을 다할수 있도록 그를 협조함으로써, 자기가 지상의 육신생활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세례「요한」의 육신을 세워 그를 통하여서 완수하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육신을 대신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는 「엘리야」와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Ⅴ.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우리는 위에서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무지와 불신은 「유대」인들의 불신은 마침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가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하늘의 비밀을 밝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무조건 위대한 선지자라고 단정하는 견지에서만 성서를 보아왔던 까닭이다. 우리는 인습적인 신앙관념과 구태를 벗어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고루한 신앙태도를 단연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세례「요한」의 문제를 중심하고 배웠다. 사명을 다하고 간 세례「요한」의 문제를 중심하고 배웠다. 사명을 다하고 간 세례「요한」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믿는 것도 부당하겠거니와, 사실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세례「요한」을 잘못 알고, 다한 것으로 믿는 것도 잘못된 신앙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신령 면으로나 진리 면으로나, 항상 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세례「요한」의 진상을 밝혀 왔지만, 누구든지 영통하여서 영계에 있는 세례「요한」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성도들은,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의 불신
Ⅲ.세례「요한」의 불신 위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이, 당시의 제사장이나 전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을 우러르던 마음은,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절). 따라서 만일 세례「요한」이, 자기가 바로 예수님이 증언하신 그대로의 「엘리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나섰더라면,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엘리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전 「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례「요한」의 증언을 믿게 되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끝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주장한 세례「요한」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세례「요한」은 일찌기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불과 성신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자기는 그의 신들 매를 매기에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증거 하였다(마태복음 3장 11절1)). 분만 아니라 「요한」복음 1장 33절을 보면 ꡔ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그리스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ꡕ고 한 세례「요한」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세례「요한」에게 직접 교시하셨고, 세례「요한」 자신도 또 그렇게 증거 하였으며, 한편 「요한」복음 1장 23절1)을 보면, 자기는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 고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3장 28절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언명한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응당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의 지혜로써도 알았어야 할 것이었다. 설혹 세례「요한」이 그 사실을 미처 지각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받아 알고 있는 위에(요한 복음 1장 33 – 34절), 예수님이 친히 자기를 「엘리야」라고 증언하셨으니, 자기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바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을 뒤늦게라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앞에 무지하여(마태복음 11장 19절) 이미 예수님의 증언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요한복음 1장 21절) 그 후에도 섭리의 방향과 길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세례「요한」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이나, 또 이렇듯 난처한 입장에 놓인 예수님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서러우셨을 것인가 ? 사실상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증거 함으로써, 그의 증거 자로서의 사명은 다 끝난 것이었다. 그러면 그후에 있어서의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 그의 부친 「사가랴」는 성령에 감동되어 아직 복중에 있었던 세례「요한」을 두고서 ꡔ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ꡕ(누가복음 1장 75절1))고, 그의 사명을 분명히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한 후에는, 그 앞에 하나의 제자의 입장에서 그를 모시고 섬겨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예수님과 분리되어서 따로 세례를 주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복음 3장 15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도리어 세례「요한」을 「메시아」로 혼동하였고, 한편 또 「요한」복음 1장 20절1)을 보면 제사장까지도 그렇게 혼동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세례「요한」의 제자가, 서로 자기의 선생이 세례를 많이 준다고, 세례를 중심하고 다툰 일까지 있었다(요한복음 3장 25절). 그리고 「요한」복음 3장 30절1)에, 세례「요한」이 ꡔ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ꡕ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는 예수님과 흥망성쇠의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처지에 섰었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흥할 때에 그가 쇠할 수 있을 것인가 ? 사실상 예수님의 복음은 누구보다도 먼저 세례「요한」 자신이 전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지로 인하여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 중심이 하늘편에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하늘의 역사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요한」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무지는 더욱 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례「요한」은, 특히 옥중에 들어가게 된 후부터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언행은, 인간 세례「요한」의 눈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도 역시 「엘리야」가 오기 전에 나타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ꡔ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ꡕ(마태복음 11장 3절)하고 질문하여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3절 내지 19절1)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분개심에 격한 경고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누가복음 1장 75절1)),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 어린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 노정을 출발하실 때에, 하늘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증거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례「요한」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자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다. 그는 ꡔ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ꡕ(마태복음 11장 4 – 5절)고 완곡한 대답을 하셨다. 물론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와 같이 구구하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상기케 하심으로써, 자기가 누구시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마태복음 11장 5절) 하신 말씀에는, 세례「요한」과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비감한 심정이 어리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선민으로 부름을 받았던 「유대」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세례「요한」은 하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부유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예수님은 부득이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시고 「사마리아」땅을 두루 도시면서 가난한 자 가운데서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무식한 어부들과 세리와 창녀들은 모두 이처럼 가난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예수님이 찾고자 하셨던 제자들은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다. 지상천국을 건설하러 오신 예수 님이었으니 그에게는 따라다니는 천명보다도 먼저 천명을 영도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이 예비한 능력 있는 무리들을 찾으시려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 제사장과 교법사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비한 잔치에 청함을 받은 손님들은 하나도 응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거리에 나가 방황하는 거지 떼를 불러 모아야만 하셨다. 이처럼 불청객들을 맞으러 나선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은, 드디어 ꡔ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ꡕ(마태복음 11장 6절)라고 하는 심판의 말씀을 토하시고 말았다. 세례「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혹은 「메시아」, 혹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 – 21절)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자기(예수)로 인하여 실족하면 무슨 복이 있겠느냐고 하는 간접적인 표현을 통하여서, 세례「요한」의 운명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어떠한 실족을 하였던가 ?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바와 같이 그는 종신토록 예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질문하러 왔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뒤에 예수님은, 사명적인 면에서 보아, 세례「요한」이 본시 가장 위해한 선지자로 왔으나, 이제 맡겨진 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어, ꡔ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ꡕ(마태복음 11장 11절)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일찌기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지상생활을 거쳐 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일라면, 천국에서도 가장 큰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역사상 가장 큰 자로 지상에 태어난 세례「요한」이 어찌하여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만도 못할 것인가 ? 과거에 왔다 간 수 많은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시간적인 먼 거리를 두고 간접적으로 이를 증거 하였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할 사명을 띠고 왔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 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일진대, 증거 적인 처지에서 보아,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 하는 세례「요한」은 간접적으로 증거한 그 어떠한 선지자보다도 위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를 모신다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는 가장 작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모시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가까이 모셔야 할 자리에 부름을 받은 세례「요한은 (누가복음 1장 75절), 도리어 예수님과 엇갈린 길을 걷고 있었으니, 이로써 그는 천국의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 다음 절에는 ꡔ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ꡕ고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를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 광야에서 그렇게 어려운 수도생활을 하여 온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잘 모시기만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수제자의 자리는 침노한 「베드로」에게 빼앗긴 바 되었다. 여기에 ꡔ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ꡕ라고 시간적인 한계를 지은 것을 보면, 그 아래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일반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세례「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ꡔ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ꡕ고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이 지혜가 있어서 지혜롭게 행동하였다면, 예수님의 무릎 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행적은 영원히 의로서 남아질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어니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마저 모두 막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길을 가게 된 큰 요인이 세례「요한」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또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8절에서, ꡔ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ꡕ고 하여, 세례「요한」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지혜가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고 한탄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유대민족의 갈 길
Ⅱ.「유대」민족의 갈 길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 하셨고(마태복음 11장 14절), 이와 반대로 장본인인 세례「요한」자신은 이미 이 사실을 부인하여 버렸으니, 「유대」민족은 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인가 ?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두 분 가운데서 누가 더 믿을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던가 하는 데 따라서 좌우될 문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먼저 당시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으로 보여졌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예수님은 빈천한 목수의 가정에서 생장한, 하나의 배우지 못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청년이 이름 없이 일어나,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이라 칭하면서, 「유대」인들이 생명과 같이 여기는 안식일을 범하였다(마태복음 12장 1 – 8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원의 푯대인, 율법을 폐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마태복음 5장 17절).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몰린 바 되어, 하는 수 없이 어부를 불러 제자를 삼았으며,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셨다(마태복음 11장 19절).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도, 세리들과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마태복음 21장 31절) 주장하셨던 것이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후에,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값진 기름을 부은 일이 있었다(누가복음 7장 37 – 38절). 이러한 행동은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서도 용납되기 어려운 일이어 든, 하물며 음행 하는 여인을 돌로 쳐죽여도 말못하던 「유대」인의 엄격한 윤리사회에 있어서 어떻게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인가 ?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여인의 태도를 비난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도리어 그 여인을 칭찬하셨던 것이다(누가복음 7장 44 – 50절, 마태복음 26장 7 – 13절). 한편 또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세우시고(요한복음 14장 9절), 자기로 말미암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주장하시면서(요한복음 14장 6절), 자기를 그들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무엇보다도 더 사랑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마태복음 10장 37절, 누가복음 14장 26절). 예수님의 모습이 이러하였으므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를 ‘마귀’의 왕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조소하였던 것이다(마태복음 12장 24절).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결코 믿겨운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당시의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세례「요한」의 모습은 어떠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세례「요한」은 당시의 명문가인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다(누가복음 1장 13절1)). 그의 부친이 지성소에서 분향할 때에, 그 아내가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곧이듣지 아니함으로써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출생하자마자 그 입이 열린 기사이적 등으로 인하여, 온 「유대」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던 것이다(누가복음 1장 9 – 66절). 분만 아니라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연명하면서 수도하던 그의 빛나는 신앙생활을 보고, 일반 「유대」인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도 그에게 혹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물어볼 정도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훌륭하게 보였던 것이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절). 위에서 밝힌 바 그 당시의 사정을 놓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세례「요한」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과연 그들이 누구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 그것이 세례「요한」의 말이었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보다도,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한 세례「요한」의 말을 더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의 말을 믿게 되자, 예수님의 이 증언은 「메시아」로 자처하기 위한 일종의 위증이 되고 말았기 대문에, 예수님은 자연히 망언자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망언자로 몰리게 될 때,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거리끼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불신의 정도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세례「요한」의 말을 믿고 보니,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엘리야」가 오셨으리라 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말라기」의 예언을 믿는 처지에 서면,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로 자처하는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입장에 서면, 「엘리야」가 온 다음에야 「메시아」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성경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은 부득이 예수님을 불신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엘리야의 재림과 세례요한
제2절 엘리야의 재림과 세례요한 「엘리야」가 재림하리라는 것은 이미 「말라기」선지가 예언했던 바였고(말라기 4장 5절), 세례「요한」이 바로 재림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증언이었다(마태복음 17장 13절, 마태복음 11장 14절). 그러나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자였다는 사실은, 일반 「유대」인은 물론 세례「요한」 자신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요한복음 1장 21절), 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의혹(마태복음 11장 3절)과, 그에 따르는 「유대」인들의 불신은 날로 더하여지게 되어, 마침내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Ⅰ.「엘리야」의 재림을 중심한 「유대」인들의 심적 동향 통일왕국시대에 있어서, 「솔로몬」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성전 이상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성전 이상을 다시 찾아 세워, 실체 성전된 「메시아」를 맞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4대선지자와 12소선지를 보내시어 「사탄」분립의 역사를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특별선지 「엘리야」를 보내시어, 「가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대결케 하여 「바알」신을 멸하신 것도, 이러한 이상 실현의 뜻을 가로막는 「사탄」을 멸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이루지 못하고 승천하였기 때문에(열왕기하 2장 11절),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사탄」을 분립해 가는 노정에 다시 「사탄」이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실체 성전 이상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이에 앞서 「엘리야」가 지상에 다 이루지 못하고 간 「사탄」분립의 사명을 계승 완수하게 하는 섭리가 있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섭리 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선지자 「말라기」는 「엘리야」가 재림해야 할 것을 예언했던 것이다(말라기 4장 5절1)).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있던 「유대」인들의 간곡한 소망은 물론 「메시아」의 강림이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유대」인들이 갈망해 왔던 것은, 「엘리야」의 재림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말라기」선지를 통하여, 「메시아」의 강림에 앞서 그의 앞길을 예비하게 하시기 위하여,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마고 분명히 약속하셨었기 때문이다(말라기 4장 5절). 그런데 「엘리야」는 이미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900여년 전에 승천한 선지자로서(열왕기하 2장 11절), 그는 분명히 영계에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인 사실이 있다(누가복음 9장 31절). 이와 같이되어 「유대」민족은 하늘에 머물고 있는 「엘리야」가 다시 올 때에는, 전에 승천하던 모양으로 반드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이,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듯이,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엘리야」가 다시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대로, 「엘리야」가 다시 왔다는 소식은 없고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메시야」를 자처하고 나섰을 때, 「예루살렘」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7장 10절1)을 보면,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그보다 먼저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말라기 4장 5절) 「엘리야」는 어디 와 있는가 하는 공박을 받게 되었다. 제자들은 그 답변에 궁하여 예수님께 직접 문의한 결과(마태복음 17장 10절), 예수님은 바로 세례「요한」이 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고 대답해 주셨다(마태복음 11장 14절1), 마태복음 17장 13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겠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다른 「유대」인들이야 어떻게 예수님의 이러한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인가 ?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들이 자기의 증언을 즐겨 받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ꡔ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ꡕ(마태복음 11장 1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더욱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요한」복음 1장 21절1)의 기록이 보이는 바, 이미 세례「요한」 자신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명백히 부인한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된 성구
Ⅵ.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성구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데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하실 때, 이것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보시고, ꡔ「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ꡕ(마태복음 16장 23절)고하신 책망으로 미루어,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이 어찌하여 「베드로」에 대해 그토록 책망하셨을 것인가 ? 그러나 사실에서는 예수님은 그때 이미,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어차피 영 육 아우른 구원섭리를 완성하실 수 없게 되자, 영적인 구원만이라도 이루시려고 그 탕감조건으로서, 부득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로 결정하고 계셨던 때였다(누가복음 9장 31절). 그런 때에 「베드로」가 이 길을 만류한 것은, 결국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구원섭리의 길마저 방해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처럼 책망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ꡔ다 이루었다ꡕ(요한복음 19장 30절)고 최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로써 구원섭리의 전 목적이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아시게 된 후부터, 예수님은 육적인 구원은 재림 후의 섭리로 미루시고, 영적인 구원섭리의 기대만이라도 조성하시려고 십자가의 노정을 걸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ꡔ다 이루었다ꡕ고하신 그 말씀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제2차적인 구원섭리의 목적으로 세우셨던, 십자가에 의한 영적인 구원섭리의 기대를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하여는, 첫째로 기도에 의한 신령으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해야 되고, 다음으로는 성서를 바르게 읽음으로써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요한복음 4장 24절)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던 근본 목적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구원이 예수님이 띠고 오셨던 사명의 전부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서 뜻을 이루시려고 오셨다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원치 않는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억울하고도 비통한 심정을 풀어드리고 그의 뜻을 맞추어 드리는 신부가 지상에 생겨나기 전에, 예수님이 누구와 더불어 그 뜻을 이루시겠다고 재림하실 것인가 ! ꡔ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ꡕ(누가복음 18장 8절1))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무지를 예상하시고 개탄하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서를 중심하고,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죽음의 길을 가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영적으로 예수님에게 직접 물어보면, 더욱 명백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영통을 하지 못하면 영통하는 딴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서라도 바른 신앙을 가져야만, 끝날에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