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히는 특이한 방법으로 시작된 세계적으로 유일한 교회입니다. 일반적으로 세계각국의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거나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설립되었으나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계속되는 박해와 탄압속에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흘린 순교의 피로 성장한 교회입니다.
1. 한국 천주교 전래사
신라시대 이후 불교가 1천여년 동안 우리 민족의 생활전반을 지배하였습니다. 또한 이조시대에는 유교와 주자학을 조선 왕조의 국가 지도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주자학이 한계를 드러내고 실사구시의 실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시기에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에 의해 동양에 전파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1549년부터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중국에서는 1581년 경부터 마태오 리치 신부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 무렵 근 백년가 조선에도 선교사들이 들어오려고 애썼으나 허사였습니다.
1. 천주교의 수용
17세기부터 서양의 학술서적들이 북경을 오가던 사절단에 의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서 마태오 리치의 한문 교리서인 ‘천주실의’가 진리에 목마른 젊은 소수의 실학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하나의 학문으로 그것을 연구하다가(천주학, 천학, 서학)차츰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교리를 연구하던 몇몇 남인학자들은 마침 동지사가 북경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 승훈을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시켜 교리를 더욱 깊이 배워오도록 합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1784년에 세례를 받고 서울로 돌아와 이벼,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벽은 이승훈이 가져온 서적들을 연구한 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가성직제도
1786년부터 지도급 인사들은 북경의 교회제도를 본따서 주교직과 사제직을 맡아 교회의 발전을 도모하였습니다. 이 가성직 제도는 2년간 계속되다가 차츰 그 타당성에 대한 의심이 생겨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게 됩니다. 북경 주교는 이 가성직 제도를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조선 교회는 성직자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이처럼 조선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나선 조선인 스스로에 의해서 설립되었습니다.
3. 성직자 영입운동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천주교는 하나의 종교로서 받아들여 졌고, 신자들의 모음도 잦아졌습니다. 그러자 조정의 탄압이 시작되었고 계속되는 탄압속에서도 신자들은 북경의 주교에게 성직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활약하다 1801년 체포되어 순교하게 됩니다.
2. 조선 교구 설정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다음 조선 교회는 33년간 성직자없이 지내면서 계속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고 교회부흥운동을 펴나가게 됩니다. 이 노력의 결실로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 소주교를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주교는 조선 입국을 시도하다 도중에서 병사하였습니다.
그 후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불란서인인 모방, 샤스땅 신부, 그리고 소주교의 후임인 범주교가 차례로 입국하여사목활동을 전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