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나이다”. 




사도신경에 있어서 이 부분은 부활하시고 현양되신 그리스도가 다시 재림하리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되며, 즉 악의 세력에 대해 그리스도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고 세상의 모든 이들은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여기에 함께 섞여 있다.




1. 심판자, 그리스도 재림 사상의 성립1)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나이다” 여기서 부활하신 분이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것이 기본 진술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예수가 이제 하느님의 오른편에서 창조물들을 지배하신다는 고백이 결론적으로 도출된다. 그러므로 이 두 진술이 지니는 요지 사이의 관계와 그 두 진술의 전승사적인 관계는 지금 현재의 사도신경의 순서와 일치하지 않는다. 즉 사도신경에서 이 두가지 사건둘은 단순히 (추측 가능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기록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고백이 맨 먼저 선행하며, 부활과의 직접적인 연관 안에서 그의 재림에 관한 진술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오른편에서 누리는 현재의 주권에 대한 내용은 단지 이것들 뒤에 언급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육화에 대한 것이 언급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고백은 본질적으로 그의 부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세상의 종말에 모든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을 신성한 심판자에 관한 사상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세상의 종말에 관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많은 종교들에서 그런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심판과 세상 종말에 대한 기대의 연계는 유다이즘에서 뿐 아니라 페르시아의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이미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이 예언자를 부르시는 호칭의 형태로 발견된다. 또한 에녹의 묵시록에서 보면, 종말의 신성한 왕국을 가져다 주는 이 ‘사람의 아들’ 혹은 ‘사람’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물로서 생각되며 그의 주된 임무는 종말의 심판이라고 여겨진다. 결국 그 ‘사람의 아들’은 천상의 구름 속에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종말의 심판자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유대인들의 기대 속에 자리잡은 이 인물은 심판을 위해 예수가 재림하리라고 기대하던 원시 그리스도교 교회에 의해서 예수와 동일시 된다. 어떻게 해서 예수와 세상에 대한 미래의 심판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물이 합쳐지게 되었을까?


참고삼아 판넨베르그의 의견을 정리해보면, 세례자 요한 처럼, 아마 예수 자신도 미래에 있을 사람의 아들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 했을 것이다. 예수의 이런 몇몇 말씀들을 살펴보면, 예수는 자신과 사람의 아들을 다른 사람으로서 구별한다. 즉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가 12,8; 9,26과 마르 8,38). 루가와 마르꼬의 복음서에 따르면 두 문장이 1인칭과 3인칭으로 구분되고 있다. 부활 이후 교회 공동체는 ‘예수’와 미래에 도래할 ‘사람의 아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이런 말씀들을 다르게 구성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루가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를 비교해 볼 때 나타난다. 마태오 10,32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라고 전한다. 여기서 루가나 마르꼬와는 달리 예수를 나타내는 ‘나’라는 주어가 양쪽 문장에 다 들어있다. 이것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와 사람의 아들을 동일시 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반면에 역사의 예수는 아마도 그의 메시지와 행위들이 미래에 있을 사람의 아들의 심판을 통해 확인될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자신에 대해 말할 때는 자신과 사람의 아들을 구별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의 경우에는 ‘사람의 아들’ 호칭에 있어서 3가지 층이 있다고 본다. 즉 현재적 호칭과 고난 받는 ‘사람의 아들’로서의 호칭, 미래적 호칭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미래적 호칭에 관해서는 예수 자신이 ‘사람의 아들’과 동일시 되지는 않지만 현재적 호칭과 고난 받는 ‘사람의 아들’로서의 호칭에 있어서는 예수와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과 동일시 했는지의 여부에 대해 성서학계는 양분된 의견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문제에 대해서는 개방성을 견지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부활 사건 이후에는 예수와 ‘사람의 아들’이 동일시 되고 있다는 것이다. 


부활 이후에 지상의 예수와 미래에 하늘에서부터 도래할 미래 세계의 심판자 사이의 구별이 사라졌다. 그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는 천상적인 인물이 되었다. 마치 유다이즘의 ‘사람의 아들’처럼 말이다. 그리스도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이, 그가 선포했던 하느님의 통치를 완성하기 위해서 다시 오시리라는 쪽으로 방향지어졌다.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의 역할도 자동적으로 최후의 심판을 위해서 오리라고 기대되던 ‘사람의 아들’의 역할과 같은 각도로 합쳐졌다. 그래서 교회는 이제 예수를 사람들이 기다리던 ‘사람의 아들’로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그의 제자들 중의 몇몇은 부활 발현에서 이미 예수를 ‘사람의 아들’로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발현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건으로 생각되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부활 이후에 두 인물은 동일인이 되었다.


이제 세상에 대한 미래의 심판은 예수와 동일시 되고있기 때문에 그의 심판은 더 이상 미래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게 그것은 이미 현재에도 발휘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과 함께, 죽은 이들의 부활과 함께, 창조물들에 대한 새창조와 함께 완전히 나타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최종적인 도래와 연관된 ‘세상에 대한 심판’은 이미 비밀스럽게 결정되어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 그리스도교인들도 또한 이 심판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불완전하게 보이는 많은 이들이 하느님 나라와 새로운 삶을 분유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교인이라 부르는 이들은 심판 때에 예수로부터 분리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마태 25,31-46). 그러나 미래의 심판자가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미 의지하고 있는, 예수 이외의 다른 분이 아니라는 그리스도교적 확신이 있기에 미구에 있을 ‘최후의 심판’은 희망의 대상이 된다. 그를 받아들이는 어떤 사람도 이미, 현재에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는 심판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서부터 생명으로 이미 옮겨간 것입니다’.(요한 5,24)


 




2. 심판의 의미2).




만일 우리가 사도신경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적절한 요약이라고 가정한다면,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 구문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교의일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존재 이유 그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은 ‘하느님을 믿지 않은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인이든지 비그리스도교인이든지 간에 혹은 가톨릭, 마르크스주의자, 이슬람교이든지 간에, 성인이든지 범죄자이든지 간에,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간에, ‘모든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라고 말한다. 만약 내가 모든 사람과 똑같이 심판대에 서야만 한다면 그리고 나에 대한 그 심판이 어떤 것일지 모른다고 한다면 신앙이 좋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 부분은 바로 종교의 핵심을 위협하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결국, 우리는 종교가 死後까지도 포함하는 보장된 미래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나라는 사람은 심판에 직면하게 되고 불확실성에로 내던져진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님이심을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들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미래에 있을 심판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희망의 대상으로서 고대하고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은 모순처럼 보이지 않는가?’. ‘죄의 사함과 희망의 확실성은 심판이라는 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명백한 모순은 용서하시는 분이며 동시에 심판자이신 그분의 단일성 안에서 해결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맨 처음에 어떤 심판을 규정했는지에 대해 깨닫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심판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죄의 사함’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죄의 사함의 최종적 양상이다. 심판은 미래에 자유로이 그리고 왜곡 없이 그리고 내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심판에 대한 기대는 세상 안에서의 자유(내 자신의 죄로부터의 자유,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자유, 아무런 대가 없이도 혹은 내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라도 동료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자유)에로 변형되는 것이다. 심판에 대한 기대는 나를 죽음으부터 자유롭게 한다.




공관 복음서나 요한 복음서에서 보면 예수가 종말에 닥칠 심판에 대해 자주 말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느냐에 따라 심판이 행해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심판이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어떤 판결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속마음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3). 따라서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있어서 ‘심판’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과 기대의 대상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멸망시키러 온 분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이며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이미 그 구원을 선취했기 때문이다.






3. 토 론 정 리




그리스도교인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심판에 직면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굳이 신앙을 지켜야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불공평하게 보이는 이러한 상황 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구원이 하느님 차원의 일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미래에 대해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며 구원은 인간 편에 놓여 있는 실재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완성되고 가능해지는 영역의 실재이다. (그렇다고해서 인간 측의 하느님 구원의지에 대한 응답과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두고 또한 신앙이 단순히 계명 준수의 차원 혹은 처벌을 면하기 위한 어떤 것이 아니라 구원을 선취하여 기쁨과 희망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이해한다면, 신앙 생활을 해야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은 세상 전체 그리고 모든 세대에 걸친 전체적인 심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시리라고 기대되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심판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믿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이 하나의 희망이며 은총의 사건으로 다가서게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멸망시키러 온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던 분임을 생각할 때, 심판의 위협의 대상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


그리고 심판을 어떤 처벌을 위한 판결로 보지 않고 감추어진 자신의 속마음을 하느님 앞에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각각의 인간이 지니는 예수 그리스도 혹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대한 태도가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손짓하시는 하느님께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로 나아가지 않고 끝까지 폐쇄성을 견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감추어진 자신의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는 마지막 심판에 임해서 스스로 멸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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