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 Dunkles Jahrhundert

  암흑기   暗黑期   Dunkles Jahrhundert

  882년 교황 요한 8세의 살해와 더불어 이른바 ꡐ암흑기ꡑ라고 부르는 교황사의 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는 교황들이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 종속되었던 굴욕의 시기였다. 893년 교황 포르모소(Formosus)는 독일의 국와 아르눌프(Arnulf von Karnten)에게 도움을 요청한 바 있다. 이 사실 때문에 교황 포르모소는 이른바 ꡐ시체 시노드ꡑ(Leichensynode)에서 스테파노 6세에 의해 단죄되었다. 이 단죄로 포르모소 교황은 이미 9개월 전에 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덤은 파손되었고 교황직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시체는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이러한 처사로 말미암아 스테파노 6세는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897년 감옥에서 교살당하였다. 스테파노 6세의 후임자는 이른바 ꡐ시체 시노드ꡑ의 결정을 취소시켰고 교황 포르모소를 복권시켰다. 930년 교황 레오 5세는 짧은 재위 기간 후 로마의 성직자들과 나중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던 크리스토포로(Christophorus)에 의해 퇴위당하여 체포되었고, 1년 후 교황 레오 5세는 유폐되어 아마도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교황권은 로마의 귀족 당파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고, 이 당파를 이끌어 간 인물은 로마의 집정관 테오필락투스(Theophylakt)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Theodora)였다. 그리고 그의 두 딸 마로치아(Marozia)와 테오도라 2세였다. 이들은 교황 요한 10세의 선거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관철시켰다. 교황 레오 6세와 스테파노 7세는 마로치아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다. 스테파노 7세 후임으로는 마로치아의 아들 요한 11세가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마로치아의 또 다른 아들 알베리크(Alberich)가 자신의 어머니 마로치아에게 반항하여 봉기를 일으켜 어머니를 체포하였다. 교황 요한 11세 역시 구금당하였다. 교황 레오 7세(936~939년)에 이르기까지,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 정신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교회를 개혁하려는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알베리크는 자신의 아들 옥타비아노(Octavian)를 교황으로 만들려고 모색했으나, 이 모색은 교황 아가피토(Agapet) 2세의 서거 후 비로소 실현되었다. 옥타비아노는 요한 12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에 즉위하였다(이전까지 교황으로 선출된 후 이름을 바꾸는 것은 예외에 속했다).


  요한 12세의 재위 기간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교황 요한 12세는 그 당시 로마 귀족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교황사에 있어서 전환점이 도래하였다.


  요한 12세 교황은 로마 교회를 개혁시키기 위한 명목으로 독일의 오토 1세 대제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962년 2월 2일 오토 대제는 자신의 제후 아델라이데(Adelhaid)와 함께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황제로 등극하였다. 이로써 이른바 ꡐ암흑기ꡑ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하지만 교황권은 여전히 로마의 귀족 가문에 예속되어 있었다. 973년 이후 크레셴티 가문이 권력을 행사했고, 1012년 이후로는 투스칼리니(Tusculaner) 가문이 권력을 행사하였다. 오토 대제와 그의 후계자를 통해 교황들은 로마 귀족의 권력 행사로부터 조금씩 독립할 수 있었다. 채워지지 못한 반쪽의 여백은 ꡐ암흑기ꡑ에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교회의 개혁 정신 – 클뤼니의 개혁 정신 – 에 의해 채워질 수 있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dogma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암흑기 Dunkles Jahrhundert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암흑기   暗黑期   Dunkles Jahrhundert

      882년 교황 요한 8세의 살해와 더불어 이른바 ꡐ암흑기ꡑ라고 부르는 교황사의 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는 교황들이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 종속되었던 굴욕의 시기였다. 893년 교황 포르모소(Formosus)는 독일의 국와 아르눌프(Arnulf von Karnten)에게 도움을 요청한 바 있다. 이 사실 때문에 교황 포르모소는 이른바 ꡐ시체 시노드ꡑ(Leichensynode)에서 스테파노 6세에 의해 단죄되었다. 이 단죄로 포르모소 교황은 이미 9개월 전에 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덤은 파손되었고 교황직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시체는 테베레 강에 던져졌다. 이러한 처사로 말미암아 스테파노 6세는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897년 감옥에서 교살당하였다. 스테파노 6세의 후임자는 이른바 ꡐ시체 시노드ꡑ의 결정을 취소시켰고 교황 포르모소를 복권시켰다. 930년 교황 레오 5세는 짧은 재위 기간 후 로마의 성직자들과 나중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던 크리스토포로(Christophorus)에 의해 퇴위당하여 체포되었고, 1년 후 교황 레오 5세는 유폐되어 아마도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시기에 교황권은 로마의 귀족 당파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고, 이 당파를 이끌어 간 인물은 로마의 집정관 테오필락투스(Theophylakt)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Theodora)였다. 그리고 그의 두 딸 마로치아(Marozia)와 테오도라 2세였다. 이들은 교황 요한 10세의 선거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관철시켰다. 교황 레오 6세와 스테파노 7세는 마로치아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다. 스테파노 7세 후임으로는 마로치아의 아들 요한 11세가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마로치아의 또 다른 아들 알베리크(Alberich)가 자신의 어머니 마로치아에게 반항하여 봉기를 일으켜 어머니를 체포하였다. 교황 요한 11세 역시 구금당하였다. 교황 레오 7세(936~939년)에 이르기까지, 클뤼니 수도회의 개혁 정신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교회를 개혁하려는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알베리크는 자신의 아들 옥타비아노(Octavian)를 교황으로 만들려고 모색했으나, 이 모색은 교황 아가피토(Agapet) 2세의 서거 후 비로소 실현되었다. 옥타비아노는 요한 12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에 즉위하였다(이전까지 교황으로 선출된 후 이름을 바꾸는 것은 예외에 속했다).

      요한 12세의 재위 기간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교황 요한 12세는 그 당시 로마 귀족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교황사에 있어서 전환점이 도래하였다.

      요한 12세 교황은 로마 교회를 개혁시키기 위한 명목으로 독일의 오토 1세 대제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962년 2월 2일 오토 대제는 자신의 제후 아델라이데(Adelhaid)와 함께 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황제로 등극하였다. 이로써 이른바 ꡐ암흑기ꡑ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하지만 교황권은 여전히 로마의 귀족 가문에 예속되어 있었다. 973년 이후 크레셴티 가문이 권력을 행사했고, 1012년 이후로는 투스칼리니(Tusculaner) 가문이 권력을 행사하였다. 오토 대제와 그의 후계자를 통해 교황들은 로마 귀족의 권력 행사로부터 조금씩 독립할 수 있었다. 채워지지 못한 반쪽의 여백은 ꡐ암흑기ꡑ에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교회의 개혁 정신 – 클뤼니의 개혁 정신 – 에 의해 채워질 수 있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