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 임명권 논쟁 Investiturstreit

  성직 임명권 논쟁  聖職任命權論爭  Investiturstreit

  세속적인 성직 임명은 세속의 군주나 권럭자가 주교직과 함께 봉토 또는 영지를 수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교의 품위를 상징하는 반지와 지팡이의 전달을 통해 이루어졌다. 세속적인 성직 임명의 뿌리는 프랑크 제국에까지 소급된다. ꡒ많은 주교의 자리는 탐욕에 사로잡힌 평신도 그리고 돈벌이와 난봉에 여념이 없었던 성직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ꡓ라고 보니파시오는 교황 자카리아(Zacharias)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록하고 있다. 세속적인 성직 임명은 10세기와 11세기에는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관행이 되다시피 하였다. 가끔 세속적인 성직 임명과 관련해서 성직 매매도 모종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시 말해 교회의 직책은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클뤼니 수도회가 추구하는 개혁 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힐데브란트는 교황의 조언자로서 이러한 관행이 안고 있는 어두운 그늘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1073년 힐데브란트가 그레고리오 7세로 교황으로 선출된 후 1075년에 성직 매매와 세속적인 성직 임명의 관행을 금지시켰고, 이러한 방법으로 교회의 직책을 획득한 모든 사람들은 그 직책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였다. 교황의 이러한 조치에 대해 격렬한 항의가 제기되었다. 이는 프랑크 제국의 생사가 달려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주교들은 프랑크 제국에 속하는 재산의 대부분을 영지로 소유하고 있었고, 황제의 권력은 주교들에게 기초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황제들은 이처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독일에서는 하인리히(Heinrich) 4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하인리히 4세는 영지의 위탁과 관련해서 성직 매매라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허락을 얻지 않고서 성직을 매매했기 때문에 파문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의 위협을 보름스(Worms)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교황의 폐위를 선언함으로써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는 1076년 파문의 처벌을 받았다. 이로써 하인리히 4세의 신하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과 복종의 의무를 면제받게 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을 통해 독일 내에서의 자신의 지위가 위태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 제후들은 파문을 빌미로 하인리히 4세의 퇴위를 요구하였다 – 교황에게 굴복하여 화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화해는 카노사(Canossa)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화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교황으로부터 재차 파문의 처벌을 받아(1080년), 제후들에 의해 퇴위를 당한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대립 교황 클레멘스 3세를 옹립하였고 로마를 포위하였다.


  노르만족(게르만 민족의 한 종족)이 교황을 하인리히 4세의 포위와 공격으로부터 구출했으나 로마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파괴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1085년 살레르노(Salerno)에서 서거하였다. 1105년에는 하인리히 4세의 아들이 아버지를 거슬러 봉기를 일으켰다. 교황 파스칼(Paschalis) 2세는 황제와 교황 사이의 화평을 위한 전제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하인리히 5세는 합법적인 왕으로서 통치하고, 교회의 자주성은 보장되어야 하며, 황제에 의한 성직 임명은 중지되어야 한다. 하인리히 5세는 1105년 12월 31일 자신의 부왕 하인리히 4세를 퇴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황 파스칼 2세는 독일의 왕과 화평을 도모하기 위해 독일 여행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 5세는 성직 임명의 행사권을 고집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 조치로 교황은 독일 여행 계획을 취소하였고, 그 대신 프랑스로 갔다. 교황은 샬롱(Chalons sur Marne)에서 독일에서 파견한 특사들과 교섭의 시간을 가졌다. 특사들은 왕의 권리로서 앞으로 임명될 주교들에 대한 동의와 그들의 성직 임명에 따르는 수익권을 제안하였다. 특사들은 수익권에는 도시, 성, 시장, 세관은 물론 황제의 권한에 속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어야 하고, 또한 제국으로부터 유래하는 교회의 재산 역시 성직 임명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제시하였다. 교황 파스칼 2세는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러면서 교회의 자주성에 대한 필요성을 지적하였다. 트루아(Troyes)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세속적인 성직 임명권을 재차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또 다른 시노드 – 1110년 라테라노에서 개최되었다 – 는 세속적 성직 임명의 금지를 더욱더 강화시켰고, 교회 재산의 임의 처리를 독성죄로 간주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5세 국왕은 여전히 성직 임명권을 고수하고 있었고, 교황은 여기에 반대하는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1110년 여름, 교황과 새로운 로마 침공을 계획하고 있던 황제 사이에 담판이 시작되었다. 이 담판에서 교황 파스칼 2세는 거듭 세속적인 성직 임명권을 단죄하였다. 하지만 황제의 수익권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 대신 하인리히 5세는 성직 임명권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교황은 자신의 제안이 교회와 국가의 철저한 분리를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제안을 관철시켰을 경우, 독일 내의 교회는 물론 독일 제국에서도 실천적인 어려움이 발생하리라는 것도 간과하였다. 하인리히 5세는 황제의 대관식 – 아직 공식적인 대관식을 치르지 못하였다 -을 원했기 때문에 교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1111년 2월 9일 수트리(Sutri)에서 비밀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비밀 조약은 황제의 대관식 이전에 공표되어야만 하였다. 비밀 조약 체결 후 곧 치러진 황제 대관식 – 이 대관식은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있었다 – 에서 교황은 수트리에서 체결되었던 비밀 조약의 내용을 공표하였다. 비밀 조약의 내용에 대해 독일의 주교들이 즉각 항의하였다. 독일의 주교들은 제국의 제후로서의 지위를 포기할 용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폭동이 발생하였고, 교황은 황제 대관식의 주재를 거부하였다. 하인리히 5세는 황제 대관식은 물론 성직 임명권마저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파스칼 2세가 하인리히 5세의 두 가지 요구를 모두 거절하자 황제는 교황과 추기경들을 체포하였다. 그 다음날 로마에서는 격렬한 시가전이 발생하였고, 하인리히 5세는 로마 근교에로 물러가서 교황을 2개월 이상 감금시켰다. 그사이 선출된 대립 교황 실베스테르(Silvester) 4세가 하인리히 5세의 진영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 감금되어 있던 교황 파스칼 2세는 하인리히 5세의 요구를 승낙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111년 4월 11일 체결된 조약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서품을 받기 전이라면 교황으로부터 반지와 지팡이로 성직 임명을 승인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왕으로부터 성직 임명을 받지 않은 자는 서품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황 파스칼 2세는 이 승인을 서면으로 확인하고 16명의 추기경의 선서로 보증해야만 하였다.


  그 결과 1111년 4월 13일 드디어 하인리히 5세는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압력에 못 이겨 마지못해 동의한 교황의 승인은 교회 내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나타났다. 교황의 입지도 난처하였다. 교황 파스칼 2세는 승인의 과정에 대해 정확한 기록을 남겨 발표하였으나 교황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1112년 라테라노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에서 교황 파스칼 2세는 황제에게 성직 임명권을 승인한 것은 과오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1112년 라테라노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황제의 성직 임명권을 무효로 선언하였다. 1112년 비엔나에서 개최되었던 시노드는 모든 세속적인 성직 임명을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황제에게 파문의 처벌을 내릴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논쟁과 불화는 계속되었다. 교황 파스칼 2세의 죽음마저도 이러한 논쟁과 불화를 종식시키지 못하였다. 교황 파스칼 2세의 후임자 젤라시오(Gelasius) 2세는 매우 짧은 기간 교황으로 재임하였다. 그의 후임 교황 갈리스토(Calixtus) 2세는 성직 임명을 둘러싼 불화와 다툼을 종식시킬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사이에 많은 신학적 저서들이 성직 임명을 이론적으로 해명하였다. 이 해명에 따르면, 독일의 주교들은 이중의 지위를 소유하고 있었다. 즉 독일의 주교들은 주교직과 동시에 세속의 제후직을 소유하고 있었다. 1119년 교황 갈리스토 2세와 황제 하인리히 5세 사이에 최초의 대화가 모색되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119년 랭스(Reims)에서 공의회가 개최되는 동안 참석자들은 성직 임명권을 종교적인 영역에 확대해서 적용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121년 가을, 교황 갈리스토 2세는 황제와 항구적인 평화를 모색하였고, 이 평화는 1122년 ꡐ보름스 정교 조약ꡑ의 체결을 통해 보장되었다. 이로써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논쟁과 불화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dogma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