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회 Orthodoxe Kirche

 정교회  正敎會  Orthodoxe Kirche

  정교회는 11세기 이래 독자적인 전례와 함께 존속하고 있는 동방의 그리스도 교회를 포함하고 있다. 정교회는 ꡐ동방이 정통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ꡑ라고 자처한다. 정교회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통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정교회는 각각 독자적인 교회의 연합체로서 공동의 신앙과 서로간의 사라을 통해 자신들의 일치를 확인한다. 최고의 기구는 범 정교회적인 주교 시노드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보편 교회의 총주교로서 명예 수위권을 차지한다. 정교회의 성립 – 로마 교회와의 분리 – 은 매우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언어와 전례의 차이로 동방의 교회는 ꡐ그리스 교회ꡑ라 불리기도 한다. 신비적이고 관상적인 경향을 띠었던 동방 교회와 로마법의 영향을 받아 활동적이고 사변적인 경향을 띠었던 서방 교회 사이에 긴장과 오해가 발생하였다.


  395년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로마 제국을 자신의 아들들에게 분할해 주면서, 그 결과로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노선은 더욱더 첨예화되어 갔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 거주하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붙였고, 동방의 다른 총대주교 –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 에 대해 수석 주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점점 교회의 내정 문제에 관여하였고, 그 결과 정교회는 자유를 상실하면서 황제에게 예속되게 되었다. 로마에 대한 동로마 황제의 경쟁심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권력욕으로 인하여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져 갔다. 더구나 교황들이 프랑크 제국 쪽으로 방향을 돌림으로써 양 교회의 분리는 가속화되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의 신학적인 분리도 진행되었다. 단성론과 성화 공경을 둘러싼 논쟁은 이러한 신학적인 분리의 징후였다. 단성론을 둘러싼 논쟁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아카키오스(Akakios)는 황제의 위임을 받아, 482년 동로마 제국 전체를 위한 종교 칙령으로 반포될 신앙 정식을 완성시켰으나,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카키오스의 신앙 정식은 칼케돈 공의회가 반포한 신앙 고백의 본질적인 부분을 포기하였기 때문이었다.


  교황 펠릭스(Felix)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를 교황의 법정에 소환하기 위해 특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였으나, 특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전쟁 포로로 취급받아 감금당하였고 임무 수행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협을 받았다. 484년 7월에 특사가 로마로 귀환한 후 교황은 로마에서 시노드를 개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와 그의 지지자 –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황제를 지칭한다 – 를 파문하였다. 교황은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특사에 대한 취급과 관련해서 항의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신앙의 문제와 관련된 황제의 결정권을 박탈하였다. 교황은 종교적인 권력과 정치적인 권력의 구별에 대해 동로마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아카키오스는 자신에 대한 교황의 파문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교황을 파문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동서 교회의 분열은 519년까지 지속되었다. 519년 동로마 황제는 교황 호르미스다스(Hormisdas)에 의해 작성된 신앙의 규칙 – 이 규칙은 칼케돈 공의회의 신앙 고백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었다 – 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야심에 가득 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포시우스(Photios)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 심지어는 위조를 통해서 – 동방 교회를 서방 교회로부터 분리시켜 스스로 동방 교회의 수장이 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포시우스느 성공하지 못하였고, 명예욕에 사로잡힌 총대주교 미카엘(Michael Kerullarios)은 성공하였다.


  1054년 교황의 특사 훔베르트(Humbert)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소피아(Hagia-Sophia) 성당의 제대에서 파문 칙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미카엘 총대주교는 교황의 특사 훔베르트를 파문시키는 조치로 대응하였다. 이로써 동서 교회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1431년부터 1445년 사이에 개최되었던 열일곱 번째의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결합을 이루었으나, 그나마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 재일치를 위한 사무국의 대주교 빌레브란트(Willebrands)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공동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 공동 선언문은 1054년의 쌍방간의 파문을 철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이 공동 선언문은 1054년의 파문은 원래 두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두 교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고 해명하기도 하였다. 파문의 철회라는 법률적인 행위는 교황과 정교회 대표단의 지도자가 서로 포옹함으로써 확인되었다. 동시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그레고리오 성당에서도 공동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교황의 대리자로서 볼티모어의 셰한(Shehan) 추기경이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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