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수위권 Primat

  교황 수위권  敎皇首位權 Primat

  초대 교회의 경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ꡐ교황직ꡑ이라는 개념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단지 교회의 주교들 가운데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ꡐ로마의 주교ꡑ라는 개념만이 알려져 있었다. 이 특별한 지위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 교회가 창립되었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였다. 사도단내에서 베드로는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그가 반석으로서 교회의 기초가 되리라는 것을 약속하셨다(마태 16,18).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형제들을 굳세게 해야 할(루가 22,32) 과제를 위임하셨다. 예수께서는 또한 베드로에게 사목직을 위임하셨다(요한 21,15~17).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승천 후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사도 1,15 이하). 오순절 설교 때(사도 2,1 이하) 사도들의 대변자 역할을수행하기도 하였다. 어느 일정한 지역에 상주하지 않았던 순회 사도들 – 예를 들어 사도 바오로의 경우처럼 – 에 의한 교회의 창립도 인정되었다. 순회 사도들은 권위 있게 교회의 감독자들을 임명하였다. 감독자의 임명은 성직 수행을 통해 이루어졌고, 감독자는 사도적 신앙을 전달하도록 공적인 권위를 위임받았다. 이러한 교도권은 교회 내의 통치권과 연계되었다. 교도권과 통치권은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도를 통해 위임된 것이다. 로마의 교회는 베드로를 로마 교회의 창립자로 여겼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사도적 권한으로 교회를 견고하게 만들어 ꡒ사도들의 기초ꡓ(에페 2,20) 위에 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거주하였고, 로마에서 서거하였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베드로의 로마 거주 사실에 대해서는 로마의 주교 클레멘스의 편지,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의 편지 등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베드로 대성전의 지하 발굴을 통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서거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즉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신자들이 베드로의 무덤으로 공경하였다는 오랜 전통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래서 로마의 교회는 그 시초부터 사도 베드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베드로를 로마 교회의 창립자로 생각하였다.


  사도들은 그들의 후계자들에 비해 우위에 서 있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활동을 직접 보고 들은 목격 증인이었고, 그래서 교회 전체를 위해 복음을 선포해야 할 과제를 위임받았다.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위임된 복음선포의 과제를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전달해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도들은 교회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사도적 기능을 자신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에게 양도하였다. 사도들은 교회가 시대를 초월하여 자신의 기초 위에 그리스도를 소중하게 간직하도록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지역 주교들 역시 오류가 없는 가르침의 전달과 사목직의 수행을 통해 교회를 주님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베드로의 특별한 지위는 다른 사도들이 수행하는 과제와 대립하지 않는다. 베드로의 특별한 지위는 다른 사도들이 수행하는 과제와 대립하지 않는다. 베드로의 특별한 지위 안에 전체는 통합되어 일치를 이룬다.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 왔을 때에도 이 특별한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다른 지역의 교회는 베드로의 지위는 물론 그로부터 파생되는 로마 교회의 특별한 지위마저도 인정하였다. 96년경에 기록된 클레멘스 편지는 이러한 인정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의 편지 역시 로마 교회의 확고한 믿음과 각별한 자선 행위를 기리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통해 자신들의 신앙의 정통성을 확인하였다. 심지어 이단자들마저도 자신의 주장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로마를 찾았다. 로마의 교회에는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저명한 인물들이 그 구성원으로 소속되어 있었지만, 로마 교회가 누리고 있는 지위는 이러한 인물들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 교회와 사도 베드로 사이에 내재하는 각별한 일치에 기인하고 있다. 로마 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와 사도적 계승자 사이의 일치는 이단을 둘러싼 갈등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도적 계승의 증명은 사도들로부터의 시간적 간격이 멀어질수록 더욱더 절실하였다. 왜냐하면 사도적 계승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의 순수성과 전례의 명확성이 보존되기 때문이었다.


  리옹의 이레네오는 180년경 복음이 지니고 있는 진리의 토대를 찾았고, 그는 이 토대가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에 의해 로마에 창립된 교회 안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레네오는 다른 모든 교회는 ꡒ로마 교회와 그의 각별한 우위권 때문에 일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 안에는 항상 사도적 전통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ꡓ(Adv. Haer. Ⅲ 3,3)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테르툴리아노는 마태오 복음 16장 18절의 구절로부터 교회의 믿음과 삶을 위해 베드로가 우선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을 베드로의 직무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로써 테르툴리아노는 사도 베드로가 창립자였던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인정하였고, 테르툴리아노가 속하였던 아프리카 교회 역시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인정하였다.


  로마 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앞서는 특별한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이 특별한 지위는 베드로에 의해 로마 교회가 창립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로마 교황들은 자신들의 각별한 지위를 자각하였다. 부활 축일을 둘러싼 논쟁과 관련해서 교황 빅토리오 1세는 자신의 각별한 지위를 의식하여 매우 권위 있게 처신하였고, 마찬가지로 교황 고르넬리오는 노바시아노주의의 이단에 대적하였고, 교황 스테파노 1세는 이단자 재세례 논쟁과 관련해서 매우 권위 있게 처신하였다. 이와 유사한 대결과 갈등의 상황에 직면하여 로마의 주교들은 자신의 결정권을 매우 권위 있게 행사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 난 이후 수위권 문제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고백을 둘러싼 갈등과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즉 로마의 주교는 니케아의 신앙 고백을 부단하게 고수하는 문제와, 서방 교회에는 오직 하나의 총대주교가 존재하지만 동방 교회의 경우 2명의 총대주교 – 나중에는 3명의 총대주교 – 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씨름해야만 하였다. ꡐ총대주교ꡑ라는 칭호는 6세기에 등장하였다. ꡐ교황ꡑ이라는 칭호도 나름대로의 기나긴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 처음에는 주교들을 ꡐ파파ꡑ(Papa)라고 불렀다. 이 ꡐ파파ꡑ라는 칭호는 로마 주교의 수위권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6세기 이후 이 칭호는 로마의 주교에게만 유보되었다. 이 시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ꡐ보편적 총대주교ꡑ로 호칭되었다. 이렇게 해서 ꡐ파파ꡑ와 ꡐ총대주교ꡑ라는 두 칭호는 보편적인 수위권에 대한 요구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는 이러한 요구와 관련해서 라이벌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여타 다른 교구의 주교들은 로마의 주교가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권리를 행사하는 것처럼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관례적인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결정한 바 있다. 동로마 황제는 비잔틴의 주교 역시 이러한 권리 행사를 보장받아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의회(381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는 로마 다음가는 총대주교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대해 로마의 주교는 항의하였다. 칼케돈 공의회(451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에게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와 동등한 권리 행사를 보장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레오 1세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초세기에 있어서 교황의 수위권 문제는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초기에는 단지 총대주교의 수위권만 존재하였다. 즉 총대주교는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만 권리를 행사하였다. 전체 교회를 위한 보편적인 수위권은 오로지 로마의 주교에게만 있었고 다른 총대주교에게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 주교의 수위권 행사와 관련해서는 정확한 구별이 필요하였다. 즉 로마의 주교로서, 로마 교회의 수도 대주교로서, 서방 교회의 총대주교로서, 또는 베드로 직무의 수행자 –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 – 로서의 수위권 행사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가운데 총대주교로서 행사하는 수위권과 보편 수위권의 구별이 매우 어려웠다.


  4세기말 교황 시리치오(Siricius) 재임시 로마에서는 새로운 자아 의식이 싹텄다. 이 자아 의식은 교황의 서한 양식이나 대화의 방식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즉 교황의 서한은 형제적이고 충고적인 색채를 벗어나 순종을 요구하는 색채를 띠기 시작하였다. 교황 시치리오는 베드로의 이름으로 내린 결정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스페인의 주교들이 신학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질의했을 때). 그리고 교황이 반포하는 교령은 공의회의 결정이 지니는 것과 동일한 구속력을 지닌다고 하였다. 이로써 교황 시치리오는 로마에서 적용되는 규율과 가르침을 총대주교가 관할하는 전체 지역에도 적용되는 규범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5세기 초엽에 들어와 로마의 교도권과 사법권은 자명한 사실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교황 첼레스티노(Coelestin) 1세는 431년에 개최된 에페소 공의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베드로 사도는 교히의 반석으로서 주님으로부터 하늘 나라의 열쇠와 죄를 매고 푸는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ꡒ베드로는 자신의 후계자를 통해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히 살아 있다ꡓ고 강조하였다.


  수위권을 둘러싼 논쟁의 진행 과정에 종지부를 찍었던 인물은 교황 대 레오 1세였다. 교황의 전기에 따르면, 교황 대 레오 1세는 ꡐ자신의 독특한 권위ꡑ에 입각해서 규정들을 반포했다고 한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이러한 규정을 반포할 수 있는 근거를 마태오 복음 16장 18절로부터 찾았고, 정치적인 이유에 입각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요구와 종교적 이유에 근거한 수위권을 대비시켰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교회를 지도할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자신과 베드로를 동일시하였다고 교황 대 레오 1세는 주장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렸던 것처럼 모든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였다. 베드로에게 적용되는 이러한 권한은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로마의 베드로좌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후계자를 통해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베드로가 ꡐ그리스도의 대리자ꡑ인 것처럼 스스로를 ꡐ베드로의 대리자ꡑ로 자처하였다.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교황 역시 교회에 대한 ꡐ완전한 지도권ꡑ을 행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교황 대 레오 1세는, 이 지도권은 전체 교회를 위한 책임을 의미하고, 이로써 개별 주교들이 각자의 교구를 지도하는 것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교황 대 레오 1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안으로 형제들을 굳세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위임하신 책임(루가 22,32)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대 레오 교황은 네스토리우스파, 마니교, 프리실리아누스주의 그리고 펠라지우스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자신의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에 대항해서는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마태 16,18)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가 자기 자신에게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부여하자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는 스스로 ꡐ하느님의 종들의 종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이후부터 이 칭호는 교황이 자신을 호칭하는 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로써 수위권의 진행은 종결되었다. 중세 전성기에 들어와서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1296년 2월 15일에 반포한 칙서 Clericis Laicos와 1302년 11월 8일 반포한 칙서 Unam Sanctam을 통해 교황의 지배권을 세속의 군주들에게 확대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비극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비극적인 실패의 여파는 이어지는 교황들에게 로마 교황청의 권력의 약화, 아비뇽의 유배 – 이 유배로 교회에 대한 프랑스 국왕의 영향은 70년간 계속되었다 – 등의 현상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로마의 주교로서의 교황의 특별한 지위는 바티칸에서 개최되었던 스무 번째 보편 공의회(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무류성에 관한 선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스물한 번째 보편 공의회(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ꡒ영원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부께로부터 파견되신 것처럼 당신도 사도들을 파견하시고(요한 21,21), 거룩한 교회를 세우셨으며,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이 세상 종말까지 목자로서 교회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셨다고 가르치며 선언하는 바이다. 이 주교직 자체가 하나요 갈림이 없는 것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성 베드로를 다른 사도들 위에 두시고, 그 안에 신앙의 일치와 상호 교류의 볼 수 있는 원리와 기초를 마련하셨다ꡓ(교회 헌장, 18항)고 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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