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성사-조직신학적 고찰

 

4. 조직신학적 고찰




4.1.   병자성사의 의미


4.1.1.  상황: 삶이 위협 당하는 체험


우리는 성서적 의미의 삶의 개념을 바탕에 두고 생각하기로 한다. 성서에 의하면 삶은 단지 (이승에서) 신체조직이 잘 작동하는 것에 그치거나 오로지 저승에서의 삶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은 무엇보다도 관계이다. 즉 다른 인간들과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에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고, 사랑받는 체험과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체험, 세상을 받아들이고 창조적으로 그에 응답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위협을 받는데, 죽음은 단지 물리적으로 생명이 다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가 끊어져서 고립되는 것,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는 것, 철저히 무기력한 것이라고 하겠다. 사람들은 중한 병을 앓으면서 이렇게 생명이 위협 당한다고 여겨왔는데, 중병을 앓으면서 환자는 흔히 자기 자신의 무상함을 마주하게 되고, 창조적인 능력, 기쁨, 다른 이들과의 생동적으로 만날 수 있는 힘을 잃게되어서 자신이 전 존재가 흔들리는 체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생명의 위협이 몰려닥치는”1) 상황이라고 표현 할 수 있다. 이렇게 삶이 위협 당하는 병의 상황에서 병자성사를 받게 된다.




4.1.2. 의미: 삶을 구하고 살아갈 힘을 주도록 돕는다.


중병 속에서 삶을 위협 받는 환자를 구하는 길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과의 결속을 실현하고, 주위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이 담긴 지지를 통해서 약해진 삶에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병자성사의 표징 속에서 표현된다. 첫 번째의 표징은 다른 사람들이 병자와 함께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병자를 돕기 위해서 병자를 방문한다. 다음의 표징은 침묵 중에 안수하는 것(가까움과 돌아봄의 표징), 축성된 기름의 도유(환자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 힘을 얻도록 돌보는 노력의 표징), 환자를 하느님 앞에로 인도하는 기도이다. 그 기도는 성령의 도움, 자비, 보좌, 능력 그리고 해방, 구원, 회복을 내용으로 한다.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의 “도와주심”를 청하는 데에 모아진다. 즉 주님은 병자를 약함과 병고에 홀로 내버려두지 말라고 간청한다. 하느님께서 병자에게 가까이하심으로써 그를 내적으로부터 강하게 되고, 필요하다면 (다른 이와의 친교를 해쳐서 삶을 약화시키는) 죄의 무게에서 해방되며, 절망의 체험에서 구원되어 일어나야 한다. “구원되다”와 “일어나다”는 단어는 의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치유뿐만 아니라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과 영원한 삶에로의 구원까지도 생각하게 하는데, 그렇다고 이 단어가 부정확하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런 언어 사용은 삶이란 개념이 포괄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즉 삶은 육체적이 생명력을 통해서 드러나지만 더 나아가서 육체적 죽음을 넘어선 생동적 관계도 의미한다.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서 병자성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서술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 삶의 근본적인 위협을 몸으로 체험하는 상황에서 교회 공동체의 기도와 도유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오심으로써 실제로 생명을 구하고 힘을 북돋운다는 표징이 된다. 이렇게 교회는 특별히 병자들을 돌보던 예수의 뒤를 이어서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실행한다.




4.2. 교회론적 의미


병자성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교회론적 의미를 지닌다. 우선 성사의 집행자는 교회 공동체를 대표한다. 이것이 교회 공식적인 위탁이 의미하는 바이다. 물론 공식적인 위탁과 함께 병자들에게 하느님의 가까이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관심과 세심한 배려로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능력도 길러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든 그저 형식적인 성사집행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두 번째 측면으로는 전례는 전례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봉사의 차원도 포함한다. 즉 병자들 위해서 실제적으로 돌보고 돕는 것,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이들이 다시 소생할 기회를 얻도록 투쟁하는 것, 그리고 죽음을 금기시하거나 숨기려하는 것을 대해 반대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에 속한다고 하겠다. 즉 교회는 병자들이 인간적 대접을 받도록 실제적으로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동시에  죽음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환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에 자신의 죽음을 연결지어서 수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병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자유로이 결합”시킬 것(교회 11항)을 권유하고 있다. 현대인은 자신의 삶의 모든 가능성을 오랫동안 향유하려고 한다. 무론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될 것이 없겠다. 그러나 죽음은 물론 이와 관련되는 모든 것을 회피하고 억압한다면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신의 집 근처에 병원 영안실이 건설되거나 장애자 센터가 들어서는 것을 주민들이 극력 반대하는 것은 죽음을 회피하고 억압하려는 경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병자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도움은 건강을 무조건적으로 숭배하는 세태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병자를 치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생명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여서 귀중하게 여기고, 그래서 병으로 생명이 위협받는 환자를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회피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교회는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현재의 생명을 중요시하면서도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것도 증거해야만 할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dogma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