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조직 신학적 고찰(참회자의 행동)

 

4.  조직 신학적 고찰




4.1.  고해성사


다른 모든 성사들과 마찬가지로 고해성사도 성사참여자와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행위인 동시에 교회적 행위이다. 고대교회에서는 고해성사의 교회적 측면이 오늘날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참회자들은 공개적으로 실시되고, 참회 기간 동안 지속된 공동체에서의 제명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분리를 사회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공개적으로 거행되는 교회 공동체와의 화해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화해를 체험하였다. 후대에 도입된 개별 고해성사에서 교회적 측면이 더 이상 공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고해성사가 교회 공동체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특히 고해소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고해소 설치는 중세에 시작되었는데, 제대 근처의 참사위원석에 위치해서 아직은 공개적이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불미스러운 접촉을 막기 위해서 고해자와 사제 사이를 창살을 두어서 격리시켰다. 근대에는 비밀 유지에 대한 요구 때문에 점점 더 폐쇄된 형태로 발전되어서, 마침내 사제와 고해자는 서로 쳐다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후대의 교회가 고해성사의 교회적 차원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고해성사의 본질 구성에는 참회자의 행동과 교회의 행동 두 가지가 포함된다고 보았다. 즉 통회, 고백, 보속은 참회자가 해야할 몫으로써, 트리엔트 공의회는 스콜라 신학의 용어를 빌려서 이를 성사의 “질료”라고 불렀다. 이 질료는 교회의 행동인 사제의 사죄경을 목표로 하는데, 공의회는 사죄경을 성사의 “형상”이라고 표현하였다(DS 1673).


고해 성사가 개별적이며 교회적 행위라는 점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수용되었다. “고해성사를 받는 신도들은 하느님께 끼친 모욕의 용서를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부터 받으며, 동시에 범죄로 상처를 입혔던 교회, 사랑과 모범과 기도로써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교회와 다시 화해하는 것이다”(교회헌장 11항).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와의 화해,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은총을 받는 것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구하는 것은 신학이 해야할 일이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교회와의 화해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죄의 용서(res sacramenti)의 중간 효과(res et sacramentum), 즉 본래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단계라고 대답하였다. 새로운 신학에서는 화해의 교회적 차원과 신적인 차원을 순차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좀더 체험적으로 고찰한다. 즉 두 관점이 서로 맞물려 있다고 보는데, 훈계와 화해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의 행동이 하느님의 용서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칼 라너에 따르면1) 교회의 행동은 “하느님의 사랑을 역사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존”이다. 라너는 자신의 견해가 교회 전통에 잘 부합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서 수용되었다고 간주한다.




4.1.1. 참회자의 행동




1) 통회


죄의 용서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참회자가 기여할 바는 통회, 고백, 보속이다.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르면 통회는 죄에 대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필수적”(DS 1676)이다. 그러면 죄사함에서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이 아니라 인간의 행업, 열심과 경건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말인가?


트리엔트 공의회는 통회란 “범한 죄에 대한 아픔과 미움에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겸한”(DS 1676) 마음의 자세라고 표현하였다. 바뀌어 말하면, 통회란 죄스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으로써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카스퍼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 최종적이고 본래적인 목표, 즉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본질과 목적에 거스리는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고 그것을 아파하는 데”2)에 통회의 본질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통회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대화적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 인간 측에 요구되는 사항이라고 하겠다.


하느님께는 인간의 통회를 보고서 비로소 그에 대한 대가로 용서의 손길을 내밀으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복음 선포에서 드러나듯이 하느님은 죄지은 인간을 항상 먼저 용서하신다. 하지만 인간 측에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응답의 자세가 요구되는데, 이것이 바로 통회이다. 죄의 용서에서 결정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선행(先行)하는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이고, 인간의 통회는 용서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통로’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통회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하느님 측이 아니라 인간 측에 요구되는 필수적 조건이다.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용서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온전하지 못하고 단편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작 단계의 회심으로도 고해성사를 통해 죄의 용서를 받기에 충분하고, 고해성사를 ‘자동판매기’처럼 여기는 위험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트리엔트 공의회가 (죄의 추함과 영벌에 대한 두려움에게서 기인하는) 불완전한 통회(attritio)를 고해성사를 유효하게 받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말한 것(DS 1678)을 이해할 수 있다.


통회는 어둡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신의 죄와 잘못을 통회하면서 자신을 헐뜯거나 자학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배우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잘못하고 죄짓는 사람을 너무 쉽게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지만, 살다보면 자신도 똑같은 잘못과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자신이 결코 남보다 잘나지 않았음을 깨닫고서 좀더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내 자신이 잘못을 범해서 마음이 아팠다면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은 잘못 때문에 내심 괴로워했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게 되면 잘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비난을 앞세우기 보다는 가능한 관대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과 죄를 통회하면서 좀더 겸손해지고 이웃에 대해서 관대해짐으로써 새사람이 될 수 있다.




2) 죄의 고백


죄를 사제에게 고백하는 데에는 충분한 의미와 필요성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간학적, 신학적 근거를 들 수 있다. 인간학적으로 볼 때, 말 못하고 마음 속에 감추어두었던 부담스러운 것들을 발설하는 것은 해방의 효과를 지닌다. 이런 관점에서 (비록 심리적으로 많은 압박감을 주었던 부정적인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트리엔트 공의회가 중죄를 고할 때에는 그 형태, 횟수,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라고 규정한 것(DS 1679-1680)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개개의 중죄를 맥락에서 떼어내어 고백하는 것은 참회자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죄의 고백은 가능한 정직하고 진실하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 오늘날에는 상당 방식의 고해성사에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규정처럼 정확한 양식에 따르지는 않더라도 고해자는 자신 삶의 역정과 다양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면서 죄를 고백한다.


죄고백의 필요서에 대한 신학적 근거는 죄와 용서가 교회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죄는 신앙인으로서의 신분에 해를 끼친다는 의미에서 교회에 손상을 입힌다. 즉 죄는 한 신앙인의 신앙을 약화시키고, 신뢰성을 감소시키며, 신앙적 투신을 마비시킴으로써 살아있는 그가 속해 있고 일부분을 이루는 교회 공동체에 손해를 끼친다. 이렇게 개인의 죄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교회에 영향을 미치기에 참회자는 교회를 대표하는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또한 죄의 고백은 참회자가 자신의 통회가 진지하다는 것을 사제에게 알리고, 새로운 삶을 위한 도움을 사제에게 청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고해성사에서 반드시 고백해야 할 죄는 중죄(대죄)에 국한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심한 성찰로 기억나는 모든 대죄를 낱낱히 사제에게 고백하라고 규정하였다(DS 1707).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자신이 지은 대죄를 다 기억하지 못하여 고백하지 않았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 죄는 간접적으로 용서를 받지만, 나중에 생각이 나면 고백해야 한다.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르면 소죄는 “고백하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고 다른 많은 구원 방식을 통해서 사해질 수 있다”(DS 1680). 하지만 교회 교도권은 소죄의 고백도 권고하고 있다. “소죄를 위해서도 고해성사를 성의껏 자주 받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그것은 단순한 형식적 반복이거나 심리적 수련이 아니라, 세례의 은총을 완성하려는 항구한 노력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고린 후 4,10)”(『고백 성사 예식서』, 일러두기 7항).


사제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버거우니까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 전화를 이용해서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느냐’고 묻는 신자들도 있다. 이것은 통신망이 고백의 비밀을 해친다는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 때문에 불가능하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은 아주 중대한 일이고 중대한 일은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 컴퓨터나 전화를 이용한다면 성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 하고서 비록 더듬거리는 말로라도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 가장 성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스도께 죄를 고백하고 그분에게서 용서를 받는 고해성사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고해성사는 그리스도와 참회자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그러나 본당에서 판공 때나 주일에 많은 신자들이 제한된 시간 내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하기에 성사가 너무 형식적, 기계적으로 이루어져서 인격적인 만남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사제와 개별적으로 시간 약속을 해서 좀더 여유를 갖고 상담식으로 고해성사를 받는 것도 권장할만 하다.




3) 보속


떼르뚤리아노에 따르면3) 참회에는 회개했다는 ‘사실적 증거’(operosa probatio), 즉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인 행동으로 실현되는 증명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는 사실적 증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본다: 베옷을 입고 재에 누워있는 것, 몸을 돌보지 않는 것, 지속적인 탄식, 기도 그리고 울음, 무릎을 꿇고 원로, 순교자, 증거자들과 모든 형제들에게 지원을 간청하는 것 등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390)와 다른 교부들이 참회성사를 “힘드는 세례”라고 표현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보속을 이해할 때 참회자는 죄의 용서를 받기 전에 보속을 완전히 수행해야 하고, 그래서 화해(사죄)는 죄사함의 효과적 원인이 아니라 단지 보속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선언하고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준다.4)


고대교회의 엄격한 참회 실천에 비교해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보속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온건하다. 공의회의 결정문은 전래(傳來)되어 온 행업적 보속이행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공격을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기워갚는 보속은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혼자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분의 협력으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참조 필립 4,13).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자랑은 그리스도 안에(참조: 1고린 1,31; 2고린 10,17; 갈라 6,14)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살고(사도 17,28) 그 분 안에서 공로를 쌓으며, 그 분 안에서 보속을 수행하고 그 분 안에서 ‘합당한 참회의 열매’를 맺는데(루가 3,8; 마태 3,8), 그 열매는 그 분에게서 힘을 얻고, 그 분에 의해서 아버지께 바쳐지며 그 분을 통해서 아버지께서 받으신다”(DS 1691). 여기서 참회 행위는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결 안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참회 행위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는 죄인의 업적 이상의 것이다. 즉 보속은 구원자 그리스도와의 깊은 일치 안에서 실행됨으로써, 우리의 빈약한 행동을 풍요하게 만들어 주시는 그 분의 업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하는 보속은 죄에 대한 완전한 반대급부(反對給付)라고 이해할 수는 없다.  죄의 용서는 인간이 행한 보속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용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보속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단지 죄가 남긴 어두운 자취를 조금이라고 지워보려는 노력일 뿐이다. 죄의 결과, 즉 하느님과의 단절, 사랑을 거부함으로 생긴 이웃과의 관계 손상 및 단절, 자기 소외를 극복하려는 작은 노력이 바로 보속인 것이다.


서방교회의 전통 신학에서는 법적인 관점(죄는 보상되어야 하고, 그래야 죄인이 다시 자유롭게 된다)에서 보속이란 죄를 ‘기워갚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동방교회에서는 치유적인 관점이 두드러진다. 참회자가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죄는 죄인 자신과 그가 영향을 미치는 주위를 중독시키고, 그럼으로써 죄인을 내적으로, 외적으로 괴롭힌다. 이런 죄의 결과를 조금이라도 극복하려는 노력인 보속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인간 자신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결과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속은 인간 삶 안에서 생겨난 굴곡과 속박에서 치유되는 것을 돕는 시도로서, 구원을 전하는 교회의 노력과 근본적으로 부합한다고 하겠다.




4.1.2. 사죄경: 교회의 행동


사죄경을 통해서 고대교회에서 죄인을 파문하고 다시 죄인과 화해한 것이 반영된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사죄경을 일종의 “재판(심판)의 행동”이라고 보았다(DS 1685, 1709). 하지만 공의회는 이 표현을 세속적인 재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사제의 사죄 행동은 일종의 사법적인 행동이라고 하지만, 정의를 지향하기 보다는 은총으로 인한 치유와 구원을 목표로 한다. 정의에 입각한 처벌이나 무죄 입증을 근거로 한 무죄 선언이 아니라, 죄가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는 것이고,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죄 행동을 “은총의 심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죄가 가볍게 다루어지지 않고, 실제로 죄라고 지칭된다. 그리기 때문에 “심판”이다. 그러나 그 죄는 참회자를 참회의 과정에로 이끄는 하느님 은총을 통해서 극복된다. 그러기 때문에 “은총의 심판”인 것이다.


고해성사를 통한 사죄권은 주교로부터 권한을 받은 사제이다. 전통신학에서는 이에 대한 성서적 근거로서 교회에 위임된 열쇠권한(마태 16,19; 18,18; 요한 20,19-23)을 들고 있다. 사제는 성품성사를 통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권한을 위임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설하고 성화하며 이끌게 된다. 바로 이런 권한에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인을 다시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도록 하는 것도 해당된다.




4.1.3.  공동사죄


현재 가톨릭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에 의하면 개별적으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것이 중죄의 사함을 받기 위한 정상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중대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개별 고백 없이 한꺼번에 여러 참회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죄가 베풀어질 수 있다. 이에 대한 세부 규정은『고해 성사 예식서』 일러두기 31―35항, 교회법 961―963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공동사죄가 가능한 경우로서 두 가지를 제시된다. 첫째로 죽을 위험이 임박한데 한 사제나 여러 사제들이 참회자들의 개별적인 고백을 들을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이다. 둘째로 참회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적절한 시간 안에 각자의 개별 고백을 올바로 듣기에는 고해 사제의 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참회자들이 자기들의 탓 없이 고해성사의 은총이나 영성체를 오랫동안 못하게 될 때에도 가능하다.


공동사죄가 베풀어질 수 있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에 해당되는 상황인지의 여부는 주교가 판단한다. 주교는 주교회의의 다른 구성원들과 의논해서 결정해야 한다. 주교가 결정한 경우 외에 여러 참회자들을 한꺼번에 공동으로 사죄해 주어야 할 다른 큰 필요성이 생기면 타당하게 사죄해 주기 위해서는 가능한 먼저 교구장에게 문의해야 한다. 교구장에게 문의하지 못하고 사죄해 주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중대한 이유를 교구장에게 속히 보고해야 한다.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부활, 성탄 판공이 공동사죄의 이유에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공동사죄가 허락되지 않는다. “큰 축제나 순례 때 있을 수 있는 참회자들의 회중이 많다는 이유만으로는 고해 사제들이 부족하더라도 충분한 필요로 간주되지 아니한다”(교회법 961조 2항).


공동사죄를 유효하게 받기 위해서는 참회자가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한다. 즉 “각자가 자기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작정하고, 혹 남에게 끼친 손해나 악표가 있으면 보상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물론 “현재로는 개별적으로 고백할 수 없는 모든 대죄를 마땅한 때에(debito tempore) 개별적으로 고백할 결심”해야 한다(일러두기 33항; 교회법 962조 1항).


공동사죄로 중죄를 사면받은 교우들은 또다시 공동사죄를 받기 전에 되도록 빨리 기회가 있는 대로 개별 고백을 받아야 하고, 불가능 상태가 아닌 한 1년 안으로 개별적으로 고해 성사를 받아야 한다. 이런 규정은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법에 따라서 고해 성사에서 모든 사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DS 1707)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공동사죄의 실천에 있어서 대죄의 경우에 나중에 죄를 고백하겠다는 결심이 죄사함의 전제 조건이라고 하지만, 그 유효성은 이 결심의 이행에 종속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공동사죄로 사함을 받은 대죄를 나중에 개별 고백하라는 규정은 교육적 차원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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