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성사-교의사적 전개(성사성을 이해하려는 시도)

 



3.3.   성사성을 이해하려는 시도


고대 교회에서는 혼인의 윤리적인 정당성을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중세 초기에는 혼인의 법적인 안전성 확보가 주요 관심사였다. 비로소 중기 스콜라 신학에 이르러서야 혼인을 신학적, 성사적인 측면에서 고찰하게 되었다. 12세기에 초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성사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정확한 성사의 숫자를 규정하게 된다. 그들은 혼인을 칠성사 목록에 넣었으나, 다른 성사들과는 차이가 난다고 보았다. 즉 혼인이 성사이기는 하지만, 은총의 효력은 없다고 보았다. 모든 성사들에게 적용되는 “성사는 표시하는 바를 이룬다(Efficiunt quod figurant)”는 원칙이 혼인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기 스콜라 신학자들은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적 결혼은 그 자체로 금지된 것을 허락한다는 데에 혼인의 성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혼인을 성사에 포함시키면서도 은총의 작용을 제외시킨 데에는 다음의 이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 성사만이 은총을 야기하는데 비해서, 혼인이 이미 구약성서에서 설립되었다; 혼인 체결시 돈을 건내 주는데, 이럴 경우 은총을 야기한다고 하면 모든 혼인 체결은 독성적인 은총의 매매가 된다; 혼인성사는 결혼 당사자들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빅토르의 후고 (Hugo of St. Viktor, + 1114])의 성사정의에 따르면 성사들은 “축복 예식”을 근거로 은총을 보유하는데, 혼인 체결을 위해서 사제의 축복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혼인을 칠성사 안에 두면서도 예외로 간주하는 데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은 과거부터 계속 지속되어 온 성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이다. 사람들은 기도의 생활과 결혼 생활을 근본적으로 합치될 수 없는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당시에 존경받던 예로니모가 인용하였다는 오리게네스의 말에 근거하여서 사람들은 ‘결혼한 이에게서 적어도 성관계를 갖는 동안에 그들의 영혼에 성령이 임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비로소 13세기에 와서 성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면서 혼인에서 은총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 알베르또(Albertus Magnus, +1280)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영향 안에서 “자연에 부합하는 것은 선이다”(In Sent.IV q.31 a,21) 주장하면서, 성관계를 그 자체로 좋고,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에 상응해서 혼인 성사에서 은총의 효력을 인정한다. 즉 혼인 성사는 (여전히 위험시 되던) 정욕을 경감하고, “결혼의 선”으로 향하도록 효력을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 알베르또는 혼인 성사가 그것이 표시하는 바 모두를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혼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결합과 인간의 영혼과 하느님의 일치를 표현하지만, 이를 실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 알베르또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 1274)는 이 구분을 이어 받아서 자신의 고유한 개념으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성사는 자신이 표현하는 본질(은총)을 포함하는데, 혼인성사의 경우에는 성사를 통해서 표현된 본질이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즉 혼인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도움은 포함되어 있지만(이점에서 그는 자신의 스승보다는 혼인에 대해서 긍정적이다), 에페 5,21-33에 언급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일치는 표현할 뿐 포함하지는 않는다(In Sent. IV d.26q.2 a.1 ad 4f.; a.3). 이렇게 토마스에게서 초기 스콜라 신학의 모순, 즉 혼인은 성사이지만 은총 효력은 없다는 견해가 약화되기는 하였지만, 온전히 극복되지는 않았다. 혼인성사는 은총을 야기하지만, 표시하는 바와 효력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피렌체 공의회 (1439)의 결정문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공의회는 칠성사를 다루면서 각기 성사의 효력이 무엇인지를 밝히지만, 혼인 성사의 경우에는 그에 상응한 효력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일곱 번째 성사는 혼인이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결합의 표시이다. ‘이 신비는 큰 것이니,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2). 혼인의 효과인은 일반적으로 말로 표현하는 상호간의 동의이다. 세가지 선이 혼인에 부여되는데, 첫째는 후손의 출생과 그를 하느님의 봉사자로 교육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남편이 지켜야하는 배우자에 대한 신의, 셋째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인데, 혼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불가분의 결합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간음으로 인해서 별거는 허락되지만, 다른 혼인을 체결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에 반대된다. 왜냐하면 합법적으로 체결된 혼인의 유대는 지속적이기 때문이다”(DS 1327).




3.4. 종교 개혁 시대의 대립


종교 개혁자들은 혼인의 성사성을 부정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을 낮게 평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루터는 결혼을 전(全) 그리스도계의 “가장 고귀한 지위”1)라고 일컬었다. 종교개혁자들이 혼인의 성사성의 거부하는 이유로 성서에서 설립의 말씀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에페 5,21-33에 근거를 두는 가톨릭 신학자들에 대항해서, 이들은 32절의 신비(mysterion)란 말마디에 잘못 이끌려서 이 단어를 스콜라 신학의 “성사”란 의미로 해석하였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결합이 아닌 혼인에 잘못 적용하였다고 반박한다. 또한 이들은 가톨릭 교회가 혼인을 성사로 보면서도 사제들에게는 이를 금지시킨 것은 모순이라고 보았다.


종교 개혁자들이 혼인의 성사성을 거부한 또다른 이유는 성사성과 함께 교회의 법적 권한의 주장, 이를테면 교회는 혼인 장애의 종류를 제시하고 모든 결의론적인 법적 판결을 내리는 권한을 지닌다는 주장이 결부되어 있다고 본 데에도 있었다. 루터는 혼인 성사에 대한 교회의 법적 권한은 “무신앙적인 인간의 법으로써, 이는 하느님이 이룩하신 삶의 방식을 그물로 엮어서 위 아래로 뒤 흔들어 놓는다”2)고까지 혹평을 하였다. 또한 칼빈은 사법적 조사와 독재적인 법률과 같은 “혐오스런 짓의 잠복처”3)라고 비난하였다. .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 반대해서 혼인의 성사성에 대한 가르침을 수호하는 한편(DS 1801) “동정과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낫고 복되다”고 선포한다 (DS 1810). 공의회는 혼인성사의 은총의 효력이 에페 5,25과 32에 “암시되었다”고 보면서, 은총이 내용적으로는 무엇인지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DS 1799.1801). 또 공의회는 혼인 장애를 찾아내는 교회의 권한을 변호하였다(DS 1804).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한 가르침을 수호하는 데에서 공의회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사용한다: “만일 누가 […] 혼인의 유대가 배우자 한편의 간통 때문에도 풀릴 수 없고, 그리고 둘 중의 하나, 간통의 동기를 제공하지 않은 무죄한 쪽도 다른 배우자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왔고 가르친다면, 교회가 잘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는 파문될지어다”(DS 1807).


DS 1807의 첫 머리는 간단히 “결혼의 연대가 […]풀릴 수 있다고 말하는 자는”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대신 다소 복잡하고 방어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 이는 특별한 문제 의식을 반영한다. 즉 공의회 교부들은 한편으로는 두번째 혼인을 관용하는 동방교회의 실천과 가톨릭 자체의 전통에서의 예외를 명시적으로 단죄하기를 원치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교회에서 지배적인 성서 해석이 자의적이라는 비난을 배척하려고 하였다. 이상의 표현에서는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가능하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혼인성사에 대한 가르침(DS 1797-1800)




지속적이고 해소될 수 없는 혼인의 유대를 인류의 시조는 성령의 비추임 속에서 다음의 말로 선포하였다: “이는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그러므로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을 이룬다”(창세 2,23 이하).


이러한 유대를 통해서 오직 두 사람만의 결합이 체결된다는 것을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더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그분은 다음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전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마태 19,6). 그리고 나서 바로 그분은 아담에게서 시작되어 아주 일찌기 선포된 이 유대의 견고성을 다음의 말씀으로 강조하셨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됩니다”(마태 19,6).


이 자연적인 사랑을 완성하고, 풀릴 수 없는 일치를 견고하게 하고, 부부를 거룩하게 할 은총를 성사들의 설립자요 완성자인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얻으셨다. 거룩한 사도 바울로는 이를 다음의 말로 암시하였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사랑하시어 그를 위해 자신을 넘겨 주셨던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시오”(에페 5,25). 그리고 나서 그는 첨가하기를: “이는 큰 신비이니,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2).


복음의 계명 안에서의 혼인은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을 근거로 예전의 혼인적 결합보다는 우월하기에, 교황들과 공의회와 교회의 모든 전통은 항상 정당하게 이 혼인이 신약의 성사들에 속한다고 가르쳤다. 이에 반대해서 오늘날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 공경할 성사에 대해 잘못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대로 복음에 근거하여서 육신의 잘못된 자유를 받아들이고, 사도 시대 이래로 지속된 가톨릭 교회의 이해와 참된 전통과는 다른 많은 것을 글가 말로 선포하였는데, 이는 신자들에게 큰 손해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




혼인 성사에 관한 교의 (DS 1801-1812)




1. 만일 누가 혼인은 주 그리스도에 의해 설정된 복음적 계명의 칠성사 중의 하나로서 진정하고 본래적인 성사가 아니라 교회에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은총을 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2. 만일 누가 그리스도인에게 동시에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이 허락된다고 말한다면; 이것이 하느님의 계명에 의해 금지되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3. 만일 누가 단지 레위기에 언급된 (18,6 이하) 혈연과 인족(姻族)의 등급만이 혼인 체결을 막거나 혼인의 유대를 갈라 놓는다고 말하거나; 교회가 이중에서 몇개에 관면을 줄 수 없다거나, 다른 등급이 혼인을 막고 갈라 놓는다는 것을 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4. 만일 누가 교회가 갈라 놓는 혼인 조당들을 설정하는 전권이 없다고 말한다면, 혹은 교회가 조당을 설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5. 만일 누가 잘못된 신앙 때문에, 같이 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혹은 악의적으로 배우자에게서 떠나 있는 것 때문에 혼인의 유대가 풀릴 수 있다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6. 만일 누가 성립되었으나 완결되지 않은 혼인이 한쪽 배우자의 장엄한 수도서원으로 인해서 풀릴 수 없다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7. 만일 누가 교회가 복음과 사도의 가르침(마태 5,32; 19,9; 마르 10,11 이하; 루가 16,18; 1 고린 7,11)에 따라 혼인의 유대는 배우자 한편의 간통 때문에도 풀릴 수 없고, 그리고 둘 중의 하나, 간통의 동기를 제공하지 않은 무죄한 쪽도 다른 배우자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교회가 가르쳐 왔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8. 만일 누가 교회가 여러가지 이유에서 부부가 일정한 기간 혹은 정해지지 않은 기간 동안 침대와 식탁을 분리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선언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9. 만일 누가 거룩한 신품성사를 받은 성직자들이나 혹은 장엄하게 정결 서원을 한 수도자들이 혼인을 할 수 있고, 교회법과 서원이 상치됨에도 불구하고 그 혼인의 유대가 유효하다고 하고, 이와 반대되는 의견은 혼인을 단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정결 서원을 하였더라도 정결의 은혜를 받았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혼인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느님께 올바로 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를 거부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련을 당하도록 묵인하지 않으신다 (1고린 10,13).


10. 만일 누가 혼인이 동정의 신분이나 독신보다 우선한다거나, 동정과 독신으로 머무는 것이 혼인하는 것보다 더 낫고 복되지 않다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11. 만일 누가 장중한 혼인 체결을 일년 중 일정한 때에 금지하는 것이 월권이고, 이교도의 미신에서 유래한 미신이라고 말한다면; 혹은 누가 교회가 혼인 체결에 사용하는 축복이나 다른 외적인 경신례의 규정들을 단죄한다면 파문될지어다.


12. 만일 누가 혼인의 용건들이 교회의 판사들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파문될지어다.




3.5. 인격적으로 정향된 혼인관


19세기에 결혼을 우선적으로 후손의 전파와 경제적인 안정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전통적 관점에서 벗어나 두 사람 간의 사랑의 연대로 보는 인격적인 혼인관이 등장한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일부 가톨릭 신학자들은 혼인 신학에서 좀더 인격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결혼의 최우선적 목적을 후손의 출산에 두었던 전통적인 가르침4)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공동체적 생활 안에서 배우자 서로의 인격적인 완성을 결혼의 내재적 의미라고 주장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혼인을 인격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입장을 수용한다. 그래서 더 이상 혼인의 일차적인 목적은 자녀출산, 이차적 목적은 부부애라고 구분하지 않고 둘을 동등한 위치에 놓는다. “혼인성사의 힘으로 부부 생활과 자녀 출산과 그 양육을 통해서 서로 성덕에 나아가도록 도와 주는 것이니,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서 그들의 신분과 역할에 고유한 은혜를 받고 있다(1고린 7,7). 이 혼인에서 가정이 형성되고, 가정에서 인간 사회의 새 시민들이 탄생하여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을 세세에 영속(永續)시키기 위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의 은통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교회 11). 사목헌장에서도 혼인이 후손의 출산과 교육에로 정향되어 있다고 언급하지만 ‘혼인의 선(善)’에 어떤 차등을 두는 것을 피한다. “혼인 제도와 부부애는 본연(本然)의 성격상, 자녀의 출산(出産)과 교육(敎育)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로써 부부애는 절정에 달하고 흡사 월계관을 받아 쓰는 셈이다”(사목48).” 


또한 공의회는 스콜라 신학과는 달리 혼인성사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의 일치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부부가 거기에 참여를 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정한다. “그리스도교 신자 부부는 혼인성사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일치와 결실 풍부한 사랑의 신비를 표시하고 거기에 참여하며(에페 5,32)…”(교회 11). “진정한 부부애는 하느님의 사랑에 흡수(吸收)되어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求援能力)과 교회의 구원 활동으로 지배되고 풍요해진다”(사목 48). 


이렇게 가톨릭의 혼인신학에서 법적이고 제도적인 시각 대신에 점점 더 구원 역사적인 관점이 들어서고, 성서에 나타난 계약의 주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에 새로운 이해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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