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총론-성사일반론 형성의 역사적 과정(중세 스콜라 신학4)

 



4.2.4.  인호 교리


아우구스티노는 성사를 외적인 표징(signum, sacramentum)과 내적인 효력(res sacramenti)으로 구분하였다. 스콜라 신학은 이 두 개념 사이에 또 다른 하나, 즉 성사의 중간 효력(“res et sacramentum” 혹은 “res et signum”)을 첨가하였다. 성사의 중간 효력이란 한편으로는 이미 성사 실행으로 나타난 효력 (res)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은 성사의 궁극적인 목표인 은총이 아니라 다시금 그 표지이며 원인(signum, sacramentum)이 되는 것이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세례, 견진, 성품성사에서 이 중간 효력을 “소멸되지 않는 인호”(character indelebilis)와 동일시하였다. 인호란 성사의 수취인에게 지속적으로 각인되는 실재로서, 수취자가 죄를 지어 은총을 잃는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인호 교리의 근원은 성사의 사효성에 관한 교리와 마찬가지로 3세기 중엽의 이단자 세례논쟁에 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황 스테파노 1세의 주장과 로마 교회의 관습대로 이단자 교회에게 세례를 받고 가톨릭 교회로 돌아오는 사람에게 다시 세례를 주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단자 교회에서 받은 세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4세기경부터 2고린 1,21-22에 근거해서 세례 받은 이들이 성령으로 봉인(날인)되었다는 생각이 차차 자리잡게 되어서 결국은 성사적 인호(Character sacramentalis)라는 형태로 굳어진다: “하느님은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어) 굳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인증의) 날인을 하셨고 우리 마음 안에 그 보증으로 영을 주셨습니다”. 소멸되지 않는 인호에 대한 가르침은 세례, 견진, 성품성사가 성사를 받는 이에게 지속적인 효력을 남기고, 그 효력은 성사 수여자의 신앙과 성덕에 매이지 않고 계속 존립한다는 확신을 반영한다.


이런 신학적 사상 발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밀시아데스 교황(Miltiades,311-314) 시대에 있었던 도나뚜스파와의 논쟁이다. 논쟁의 초점은 배교자들에 의해 주어진 세례와 성품의 유효성 문제에 관한 것이 었다. 312년 카르타고의 주교 사망 이후 그 도시의 대부제로 있던 체칠리아노가 주교로 선출되어서 관례대로 3명의 주교들에 의해 주교 서품을 받았다. 그런데 이 3명 중에는 303년 로마 황제 디오끌레시아노가 시작한 박해 때에 교회 서적을 반납한 일이 있는 펠릭스 주교도 끼어 있었다. 그러자 체칠리아노를 반대하던 카르타고의 엄격주의자들은 배교자에 의한 주교 서품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도나투스를 주교로 선출하여서 교회가 분리되었다. 도나투스파들은 5세기 초까지 가톨릭 교회와 대립하였고, 교회는 끝까지 체칠리아노 주교 서품을 유효하다고 인정하였다.


393년부터 도나뚜스파와 투쟁을 시작한 아우구스티노는 인호 교리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단자들에 의해 주어진 세례가 유효하다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정통교회 밖에서 세례를 받은 자들이 성령을 받지 못한다는 대립되는 두 명제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인호와 은총의 구분으로 해결하였다. 즉 이단자 교회에서 전레적 의식을 통해 행해진 세례는 유효한(validus) 세례이지만, 정통 교회 밖에서 행해질 때에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non efficax). 그들이 정통 교회로 돌아오면 세례가 항존하는 성사(Sacramentum manens)이기 때문에 성령이 주어진다. 교회 밖에서 집전된 세례는 성령이 주어지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권하에 놓이게 되는데, 그 표시로 “주님의 인호”(Character Dominicus)를 받게 된다. 아우구스티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사악와 이스마엘을 예로 들어서 둘 사이의 차이를 설명한다: 둘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는 하지만 아브라함의 적법한 후손이 되는 것은 이사악이다. 그러므로 이단자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는 여종의 자식이요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는 사라의 자식으로 적자가 된다.


아우구스티노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부여되는 인호를 여러가지 비유로 설명하였다: 양들을 그 소유주의 표지를 찍어 표시하거나, 군인들이 황제의 “봉인”, 혹은 “인호”로 문신을 뜨는 것 등이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오도하는 자들에게 외적으로 주님의 표시를 받은 양들이 그리스도교와의 일치로 돌아와서 구원되면 방황에서 올바른 길로 인도되고, 유혹에서 해방되고, 그의 상처는 치유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받은 주님의 표시는 무시되어서는 안되고 인정되어야 한다”.1)


7세기부터 12세기까지 아우구스티노 이후 인호설은 망각되었으나 교황 이노첸시오 3세가 발두스파를 단죄하면서 이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2) 그 이후 인호에 대해서 수많은 이론이 생겨나서 혼란 상태로까지 갔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질서가 세워졌다3): 그는 인호를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한다. 즉 세례, 견진, 성품성사를 통해서 인호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닮게 되어 비신자들과 구분이 되고 교회의 경신례(성찬례)에 참여할 자격, 혹은 (성품성사를 통해서) 그것을 집전할 자격을 얻는다. 이렇게 토마스는 인호의 본질을 성찬례와 밀접히 연관지어서 고찰한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토마스 이래로 인호에 네 가지 작용이 있다고 가르친다: 첫째로 구별적 표지(signum distinctivum)이다. 세례성사의 인호로써 그리스도교 신자와 비그리스도교인들과의 구별이 생기고 교회 내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와의 구별이 성품성사의 인호로써 이루어진다. 둘째로는 설비적 표지(signum dispositivum)로서 이 인호로 말미암아 성사의 고유한 작용인 은총이 주어질 수 있는 바탕이 바련된다. 셋째는 의무적 표지(signum obligativum)로서 하느님께 대한 봉사를 마땅히 해야할 의무가 생긴다. 넷째로 동형적(同形的) 표지(signum configurativum)로서 그리스도의 과업에 같이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같아져야 할 당위성이 주어진다.


이렇게 해서 아우구스티노가 기초를 놓은 인호에 관한 가르침이 스콜라 시대에 체계적으로 다루어지고, 세례뿐만 아니라 견진과 성품성사에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그래서 이 세 성사는 세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sacramentum tantum(오직 표지), res et sacramentum(표지와 효과), res tantum(오직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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