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총론-칠성사의 영성(1)

 

칠성사의 영성




그리스도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보이도록 드러내셨다고 믿어왔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비가시적인 자신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시기에 신자들 역시 비가시적인 자신의 마음을 가시화시켜야 한다. 즉 성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말이 없는 것이 무조건의 미덕은 아니다. 마음 속에 간직한 고마움, 기쁨 그리고 슬픔, 섭섭함등 모든 것을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고 서로 간의 친교에 도움이 된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공동체(communio)인데, 이 공동체는 通交(communicatio)를 바탕으로 한다. 이심전심이 불교적 태도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표현하는 성사적인 태도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이라고 하겠다.


가톨릭의 성사적 이해에 의하면 세상 만사가 하느님을 전하는 표지가 될 수 있다. 인간과 자연, 사건, 만남, 하찮은 사물까지도 하느님 은총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비록 이런 것들이 유한하고 지나갈 것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가치와 소중함을 지닌다. 이런 관점은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세상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요청한다. 그럼으로써 현재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 생태계의 보호를 신학적으로 밑받침할 수 있게 된다.


이제 7성사 각각의 고유한 의미는 무엇인가 살펴보자. 성사는 은총을 전달해주는데, 은총이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이며, 하느님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어떤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면서 회개하고 믿으라고 요청하였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느님 나라란 예수를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과 용서이며 인간은 이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회개와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은 선물(Gabe)인 동시에 과제(Aufgabe)이다. 구원이란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다른 이에게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인간을 죽이는 이기주의와 자기폐쇄에서 해방되어서 질적으로 새로운 삶에로 옳겨가는 것이다.




1) 세례성사: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다. 다시 말하면 세례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어서,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아들, 딸로 태어나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 하느님의 아들, 딸로 태어난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장점, 예쁜점을 보고 우리를 선택하신 것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는 것이다(성사의 사효성).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신 것을 취소하시지 않는다(성사의 인호). 루가복음 15,11이하의 탕자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하느님은 설사 우리가 죄 속에 있어도 우리 가까이에서 머물러 계시면서, 우리가 당신께로 돌아 오기를 기다리신다. 내 가족, 친척, 부모까지도 내게 등을 돌린다 해도 하느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일찌기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으리라.”(이사 49,15).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받지 않으면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사랑을 못받고 자란 아이들일수록 문제아가 되는 경우가 많다. 어른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가 없다. 인간 삶에 사랑이 이렇게 필수적이기에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려고 드러나게 드러나지 않게 총력을 기울인다. 그렇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고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미워하며 자신에 갖혀서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선행에 앞서서 무조건으로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은 결코 변함이 없다. 바로 이것을 보증하는 것이 세례성사이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스스로의 노력과 공로로 획득하기 위한 “死鬪”를 벌리지 않아도 된다. 이 사랑은 어떤 경우든지 주어진 것인데, 단지 이를 바탕으로 살면되는 것이다. 무조건적이고 최소되지 않는 하느님 사랑 덕분에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과 낙담할 이유가 없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을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으셨는데, 하느님의 아들, 딸이라는 최대의 품위 앞에서 인간적인 모든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바오로 사도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들어 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갈라 3,26-28).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모두가 차별없이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으므로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존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밉고 마음에 안들더라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설사 그 사람이 죄중에 있어서 만인의 지탄을 받는다 해도 언젠가는 회개해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품위를 회복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아주 큰 사람이 될 수도 있다(아우구스티노 성인). 그러므로 세례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큰 은혜를 받지만, 동시에 내 이웃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 의무도 지니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고질적 병폐인 남존여비, 지방색은 하느님을 거스리는 잘못이다.




2) 견진성사


역사적으로 보면 원래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는 함께 속하여 있었다. 세례성사의 마지막 부분에 주교가 세례받은 이들에게 안수해주던 것이 나중에 따로 떨어져서 독립된 것이 바로 견진성사이다. 그래서 현대의 신학은 견진성사를 세례성사와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고찰한다. 즉 견진성사는 세례의 완성이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며 그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과제를 지닌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세례받을 때의 결심이 흐려지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재결단이 거듭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다시 새롭게 추스려서 세례성사의 은혜를 기억하고 은혜에 맞갖게 살아가도록 결단하는 견진성사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자주 결단이 필요하듯이 신앙인답게 살기 위해서도 자주 결단이 필요하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좀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은혜를 받게된다. 여기에 특별히 성령의 작용을 기원하게 된다. 물론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게되지만 견진을 통해서 이미 받은 성령을 새롭게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면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것이 아직도 많지만 여러분이 지금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요한 16,12-13). 이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깊이 깨닫게 됨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을 통해서 부활 이전만이 아니라 부활 이후에도 두려움이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나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선포한다(참조: 요한 20,19-23: 사도 2).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진정한 공동체, 즉 인간의 온갖 차이를 넘어선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렇게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깨닫고, 깨달은 바를 두려움없이 선포하고,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은혜에 속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리와 자유, 공동체적 사랑에 이르는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되어 자주적임을 자랑하는 현대인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오류에 빠져서 부자유 속에 살면서 서로 분열되어 사는 것이 아닌가? 진리를 깨닫고 깨달은 바를 남의 이목이나 방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고 서로 다른 점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께 의존한다는 것은 속박이 아닌 진리와 자유, 사랑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에 의하면 인간의 진정할 자율은 성령께 자신을 묶는 “타율”을 근거로 한다.




3) 성체성사


* 성체성사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최후만찬에서 예수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표징으로 삼아서 자신을 죽음을 설명해 주신다. 식사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고 둥근빵을 찢어서 먹었고, 포도주를 음료로 마시었다. 예수께서는 빵을 찢어지듯이 자신의 몸도 십자가에서 못에 박혀서 찢길 것이고, 붉은 포도주처럼 피를 흘릴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바로 인간을 위한 죽음이다. 미사때에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시고 그런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상징하는 빵을 나누어 먹는다. 세례때 보증된 하느님의 변치않는 크나큰 사랑이 성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로써 우리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을 매주 성체를 통해서 먹고 산다. 이런 의미에서 주일 미사는 의무가 아니라 크나큰 은혜이다. 이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주일 미사를 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 성체성사의 큰 은혜는 동시에 하나의 과제를 포함한다. 최후만찬은 빠스카 만찬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빠스카 만찬이란 이스라엘이 모세의 영도하에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한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식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종살이에서 자신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업적에 감사하는 빠스카 예식을 거행하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체성사의 정신은 우선 감사에 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eucharistia, 감사의 예식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매주일 함께 모여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천지 창조 때부터 인간을 사랑하시고, 죄지은 인간을 용서하시면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하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생활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출 수 있어야 한다. 매주일 미사에 참석하면서 매사에 불평만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지 못하면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이다.


*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헌신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나와 함께 남도 생각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성체성사는 진정한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성사, 공동체의 진정한 일치를 이루는 성사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나와 내 가족, 내 친척, 내 지방, 내나라만 잘살겠다는 이기주의는 결국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고 이는 궁극적으로 모든 장벽을 없애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성체성사의 정신을 살리지 못하는 고린토 교회의 신자들을 준엄하게 꾸짖는다(참조:1 고린 11, 17-34).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에 매주일 참여하는 이라면 어디에서든 헌신을 바탕으로 공동체(가정, 직장)의 일치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쪼개어 주는 헌신, 즉 성체성사의 정신에 기반을 두며 일치를 이루는 공동체와 다른 형태로 일치를 이루는 집단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서, 그리고 역사의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미움과 적의를 핵심으로 뭉치는 집단(집단 이데올로기), 타인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기반으로 뭉치는 집단(기득권 옹호)을 수 없이 발견한다. 이런 집단들은 어느 한편을 철저히 제외시짐으로써 서로 뭉치는데, 아무리 외적으로 일치되어 보인다 해도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공동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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