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성사-성서적 기초(그리스도교의 세례-실천)

 

2.7. 그리스도교의 세례




2.7.1. 실천


2.7.1.1. 초기의 세례


예수의 첫 제자들은 분명히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다. 사도행전의 증언에 의하면(사도 2,38-41) 사도들은 처음부터, 즉 성신강림 이래로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선포와 그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를 연결짓는다. 이 증언은 초기 바울로 서간에 의해서 밑받침된다: 이미 갈라디아서(3,27)와 고린토 전서에서 바울로는 당연하게 세례의 실천에서 출발한다. 그는 자신까지 포함해서 “우리는 모두 한 영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라고 1고린 12,13에 기술하고 있는데(1,13-17 비교), 이로써 사도 9,18의 기사를 확인하다. 교회공동체의 형성과 세례는 함께 속한다; 그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제자들은 어떻게 세례실천을 하게 되었는가? 역사적인 연결은 부활 이전 예수의 분명한 위탁이 아니라, 요한의 세례로 시작된 예수의 복음선포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 현대의 성서주석학에서 주류를 이루는 의견이다.


세례의 의미는 아마도 예수가 구원에 대한 세례자 요한 의미를 아주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마태 11,7-19 병행구절; 마르 9,13; 11,30-32 병행구절; 루가 7,28 병행구절)을 통해서, 그리고 “부활 이후에 세례자의 추종자 상당수가 팔레스티나의 유대 그리스도교인들에 합세하였다는 것”을 통해서 강조되었을 것이다.1) 그러나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요인은 제자들이 예수가 보여준 모범과 일치하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부활하신 예수의 위탁으로 행한다는 굳은 확신으로 세례를 베푼다. 이 확신은 부활 이후의 세례명령 안에 표현된다: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마태 28,19 이하; 마르 16,16 비교).


그러나 소수이기는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린 세례 명령을 역사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의견도 있다: 예수의 생애 동안에는 시행되지 않았던 세례 예식이 부활 이후 짧은 시간 내에 아주 당연하듯이 교회 안에 굳건하게 자리잡았다는 것은 부활하신 분의 명시적인 위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2.7.1.2. 세례 정식


세례의 정식은 바뀐다. 사도행전에서는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사도 2,38; 10,48) 혹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사도 8,16) 받는다고 하고, 바울로는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되는”(로마 6,3) 혹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갈라 3,27) – 직역하면 εισ Χριστον(그리스도 안으로) – 세례라고 하였다. 정식이 서로 다른 것은 세례 이해에 있어 역점의 차이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루가의 정식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양도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고, 바울로의 경우는 내적인 연결, 그리스도의 운명과 “함께 성장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한 마디로 구성된 정식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삼위일체적 정식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이 정식은 신약성서에 단 한번밖에 나오지 않는다(마태 28,19).


세례대상자는 (이스라엘에서의 수세가 그러하듯) 스스로에게 세례를 주자 않고 (세례자 요한의 경우처럼) 세례를 받는다. 그러므로 세례는 세례를 받는 이의 행동일 뿐아니라 그에게 주어지는 사건이다. 이 성사의 상징능력의 관점에서 전례역사의 연구는 세례자가 몸을 물 속에 완전히 다 담갔는지 혹은 물에 선 채로 물을 끼얹게 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세례가 어떤 모습으로 실천됐는지에 관해서 명백하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2.7.1.3. 개개인의 세례와 “온 집안 사람”의 세례


회개와 세례는 순전히 개인적인 결단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척과 관련 안에서 이루어진다. 온 “집안 사람”이 회개를 하여서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2) 유대나 그 당시의 그리스 사회구조는 가족과 한 집안에 사는 사람 모두의 연대를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 구조에서 집안 전체가 함께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바울로는 남편이나 부인이 함께 하지 않고 혼자만 신앙을 갖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1고린 7,12-16), 사도행전에서는 개개인의 회개의 과정과 세례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한다.3) 이렇게 신앙과 세례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신약성서 내에서는 이 차이를 문제하지 않는다.




2.7.1.4.  어린이도 세례를 받았는가?


어린이의 세례의 정당성에 관한 근래의 토론에서 신약성서가 어린이에 대한 세례를 알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광범위한 토론 끝에 이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확실하게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찬성)와 쿠르트 알란드(Kurt Aland/반대) 사이에 진행되었던 논쟁에서는 특별히 세 텍스트 그룹이 연구의 대상의 되었다. ⑴ “Oikos-정식”(1고린1,16; 사도 16,15; 16,31.33)은 “온 집안 사람”의 세례를 말해준다. “집안 사람”에는 아이들도 속하지 않는가? ⑵ 예수께서 어린이들 축복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말 “그들을 방해하지 말라”(마르 10,14)는 고대교회의 세례 예식 중에서 있을 법한 질문을 회상하게 한다: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데 무엇이 방해가 됩니까?”(사도 8,36; 10,47; 11,17 비교). 마르 10,14은 – 직접적은 아니지만 – 이미 어린이 세례를 거부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가? ⑶ 1고린 7,14 에서 바울로는 혼종혼에서 비신자인 남편이 신자인 부인을 통해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더럽다고 해야 할 터인데 사실 그들은 거룩합니다”. 이 생각에서는 유대인 개종자에 대한 법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 법에 의하면 여자가 유대교로 개종한 이후에 낳은 아이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을 지닌 어머니를 통해서 이미 “거룩하기” 때문이다), 부모들과 함께 유대교로 개종한 아이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세례실천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에서 인용된 텍스트 중 어느 것도 충분하게 증명의 성격을 지니지는 못한다. ⑴ Oikos 정식은 신약성서에서 필연적으로 아이들을 포함한다고 분명히 규정되지는 않는다(예를 들어서 1고린 16,15에서는 스테파나의 “집안”에 대해 그들이 교회에 많은 봉사를 한다고 전하는데, 거기에서 어린이까지도 포함해서 생각한다고는 볼 수 없다). ⑵ 마르 10,14과 사도 8,36; 10,47; 11,17 사이에는 (비록 같은 단어 “kolyein” [방해하다]를 사용하고 있다 해도) 내용적인 관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마르 10,14은 세례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의 텍스트에서는 어린이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⑶ 바울로가 1고린 7,14에서 유대인 개종자에 대한 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추측은 근거가 상당히 희박하게 보인다. 더구나 그 당시에 개종자 세례 자체가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하지가 않다.


어린이 세례에 대해서 성서적으로 찬반의 논거를 대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성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조직신학적인 관점에 의해서 – 이를테면 신앙과 세례의 관계에 대한 성서적인 규정-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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