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4주일; 참된 행복, 진복팔단

예수님의 산상설교

-진복 선언, 참 행복-

1. 말씀읽기: 마태오 5,1-12

1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참행복 (루카 6,20-23)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있는 이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참된 행복. 나에게 있어서 참된 행복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해야 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내가 기쁘게 해 드려야 할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것. 이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참된 행복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멸망해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2.2. 산에 오르시어 가르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리를 잡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로 다가왔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시며, 모두를 바라보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치심을 펼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태5,2)

 

네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안내를 듣고 가다가도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면 지나치기도 합니다. 내가 듣지 않으면 아무리 정확한 방향을 가르쳐 준다 하더라도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늘 성경을 가까이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내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행복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어떤 행복을 찾고 있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얼마나 행복한지 돌아봅시다.

 

2.3. 행복한 사람들

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시면서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왜냐하면 이들은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성전에 봉헌한 것은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에 하느님께 무엇인가 하나를 해 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루의 양식을 봉헌한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놓는 이유도 하느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앞에 있던 이들은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하느님께만 매달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무능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만이 자신들을 위로해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도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내 것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음도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 만을 생각하는 사람 안에는 하느님께서 자리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② 슬퍼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5,4) 슬퍼한다는 것은 ‘슬피운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육체나 영혼에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참아 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너무도 커서 마치 어머니가 죽어서 우는 것과 같이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슬픔, 가혹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슬픔, 그리고 잔인한 운명에 대한 슬픔…, 하지만 가장 큰 슬픔은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죄의 유혹에 빠져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신앙인들. 용서를 청하는 신앙인들. 그 마음을 주님께서는 어루만져 주십니다. 위로를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미사에 참례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가슴을 칠 때(제탓이요~), 주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음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슬픔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주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치는 신앙인들을 주님께서는 기쁘게 받아 주시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힘든 마음을 위로해 주십니다.

 

③ 온유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마태5,5) 온유한 사람들은 검소하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압박하거나 착취하지 않으며, 복수를 하거나 폭력으로 목적을 성취하지도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불의를 증오하시고, 오만한 박해자를 단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상속받으리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땅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④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5,6) 루카복음에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루카6,21) 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 상황이 다르기에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 주기 위해 지금을 빼고 “의로움”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즉 옳은 일을 하기 위하여 기회를 엿본다는 것입니다. 이 옳은 일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과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한 표현은 성경적 표현입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미 구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아모 8,11)과 은혜(이사55,1-2)및 하느님의 현재함(시편42,3)을 동경하는 것에 대해 자주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대상은 개종한 유다인들 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구약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 했고, 구원에 목말라 했던 것을 예수님이 채워주셨구나.” 하고 보기에 자연스럽게 목마르다는 표현이 들어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주어진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참아 받으며,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는 의로운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할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것을 찾아서 실천하는 사람들. 그가 바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인데,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보상을 해 주셔서가 아니라(당연히 해 주시겠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다는 그 자체로 흡족해 하는 것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했기에 스스로 흡족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주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이고, 그 은총을 통해 더 흡족해 질 것입니다.

 

⑤ 자비로운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5,7) 자비는 예수님 말씀과 삶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라고 하셨고, 율법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하느님께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자비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마태18,30)

 

자비로운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볼 줄 아는 사람이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내 모습을 알면 “나 또한 자비를 청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고,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나 또한 자비를 입지 못함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됩니다. “보면 화가 나고, 등을 돌리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수 있는 것. 비록 그가 “외면”한다 할지라도 웃으면서 인사를 건넬 때, 주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나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해 주실 것입니다.

 

⑥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5,8) 유다인들은 정결례를 강조했는데 깨끗하다는 것은 유다인에게는 중요한 삶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을 때도 정결례를 거행하며 손을 씻고 먹었습니다. 깨끗해지는 방법은 더럽혀진 몸을 예식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있고, 마음이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한 삶과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을 이용하려 하지 않고, 상대방을 하느님의 자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볼 때, 하느님의 놀라우신 업적을 바라볼 수 있고,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며, 형제자매를 통해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알아 뵐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향한 순진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일을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는 어림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뵙기를 늘 희망합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고, 그렇게 깨끗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찰과 통회를 통해 내 마음 안에 담긴 것들을 바라보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더욱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⑦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구약성경에서 평화는 최고의 은총이요 은혜입니다. 즉 하느님의 모든 은총이 평화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수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까지 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평화를 간직하고,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는 무척 중요합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자신의 재물까지도 사용하는 신앙인. 그가 바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는 더욱 중요합니다. 하느님께 등을 돌린 형제자매의 마음을 돌려서 하느님께로 향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직무이며,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는 직무입니다.(참조: 2코린토5,18-21)

 

그리고 나 자신의 평화도 중요합니다. 내가 평화를 간직하고 있어야 그 평화를 형제자매들에게 전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평화를 간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 하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하는지 주님의 평화를 간직하고 있는 신앙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은혜인데, 최후 심판 때 영원한 생명으로 받게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고 종말론적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인 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어떤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할까요?

 

⑧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박해는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보편적인 유다인들의 행복관이었고, 박해받는 자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개념이 유다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시편들을 알고 있었고(시편22;34,20등),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 예레미야 예언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릅니다. 알고 있다고 해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으로 옮겨야만 의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의로움을 보여주셨고,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의롭지 못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겸손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드러나고, 그 의로움은 겸손과 성실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렇게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의롭게 살아간 신앙인들이 의롭지 못한 이들 때문에 많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박해로 지상에서의 생명을 잃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서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5,11-12)고 말씀하십니다.

 

모욕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나귀의 모습, 나귀 머리라고 하는 뜻으로 심한 욕입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욕하기 위한 낙서가 로마의 파라딘 언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나귀 머리를 한 사람을 매달아 놓았으며, 그 발밑에서 한 신자가 예배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나귀 머리를 믿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박해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예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 대한 박해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인들이 악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기에 오는 것들입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갖는 비난을 다 받게 된다는 것” 그것은 중상모략입니다. 의로운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신앙인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중상모략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참아 받으셨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는 신앙인들. 그가 고통 받고 있는 이유는 “주님께 대한 사랑”때문이고, 그 사랑 때문에 모든 고통을 기쁘게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얼마나 기쁘실까요?

 

의롭게 살아가는 이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의로운 신앙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들의 불의함이 드러나기에 그 빛을 꺼 버리려고 의로운 이들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소외시키거나 말을 만들어서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신앙인들은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주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굳게 믿고 참된 행복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고 계십니다. 언제나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께서 큰 상을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려 주십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내가 생각하는 참된 행복은 무엇입니까?

 

③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 중에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 행복을 얻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4. 공지사항

① 의로운 신앙인들을 칭찬하기.

② 참된 행복에 대해 깊이 묵상하기

③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이 글은 카테고리: 가해(말씀과놀이,2), 말씀과 놀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가해 연중 제 4주일; 참된 행복, 진복팔단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1. 말씀읽기: 마태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마르 9,49-50 ; 루카 14,34-35)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빛과 소금은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소금이 없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귀하게 생각하시며, 귀한 사람으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을 묵상하면서 빛으로서의 삶, 소금으로서의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해 봅시다.

     

    2.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먼저 소금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고, 동시에 부패를 막아 줍니다. 또 사람이 소금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결국 소금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고, 귀한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내가 세상의 소금”이니 나는 정말로 소중한 존재이고, 막중한 사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버려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가지고 있는 소금이 음식의 맛도 내지 못하고, 부패도 막아 주지 못하고, 나를 살리지 못한다면 그 소금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분명 버리고 다른 소금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금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음식에 들어가야 하고, 보관하고자 하는 것에 들어 있어야 하며, 사람이 섭취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소금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소금인 이유는 “나를 통해 맛을 내고, 부패를 막고, 살리기를 원하는 주님의 손”에 들려져서, 주님께서 뿌리시는 곳에 가서 내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뿌리시면(보내시면), 그곳에서 나는 내 삶(말과 행실)으로써 신앙인의 맛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뿌려도 말과 행실로 신앙인의 맛을 내지 못한다면 결국 주님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게 됩니다.

     

    내가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그 신앙을 살아갈 때 내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해 줄 수 있고, 보여줄 수 있고, 인도해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금으로서의 삶입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 비록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신앙을 선택하고, 진리를 향해 나아갈 때, 세상은 올바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몸에 소금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신앙이 없는 이들을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여 생명을 얻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소금의 역할입니다.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소금은 아무 소용이 없는 소금인 것입니다.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신앙인은 아무 소용이 없는 신앙인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진리를 보존할 수도 없으며, 사람을 살릴 수도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나라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도구)을 찾으셔야만 합니다.

     

    또한 소금은 물을 조심해야 합니다. 물에 닿아 형체를 잃어버리고, 짠맛을 모두 빼앗기게 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살지 못하게 하는 환경들이나 유혹들을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2.2.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고 말씀을 하십니다. 빛은 어둠을 비추어 주고 주변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신앙인은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둠(죄, 죽음, 악행 등)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께서 주신 빛으로 그 어둠(죄, 죽음, 악행 등)을 몰아내며 생명에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빛이 비추고 있으면 사람들은 자기 앞에 펼쳐진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게 됩니다. 선인지 악인지, 의로움인지 부당함인지, 생명인지 죽음인지를 보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알기에 옳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의 모습은 믿지 않는 이들의 모습과 많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무엇이 다르기에 “산 위에 자리잡은 고을”처럼 감출 수가 없을까요?

    ① 먼저 신앙인들은 주일이면 성당에 갑니다. 모든 일을 뒤로 하고 하느님께로 나아와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비신자들은 신앙인들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모습을 통해서 “아! 저 사람은 신앙인이구나. 그리고 주일에는 저렇게 지내야 하는 것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② 신앙인들은 계명을 지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세상에 평화와 안정과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비신자들은 신앙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동”을 받고, 자신들의 마음도 움직여 함께 동참하려고 합니다. “역시 천주교 신자들은 다르구나!”하는 말을 비신자들이 많이 하는 것입니다.

    ③ 신앙인들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인내합니다. 비록 물질적인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신앙을 선택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다 할지라도 신앙을 선택합니다.

    ④ 신앙인들은 자선과 봉사를 통해 사람들을 도와줍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용서할 줄 알며, 배려할 줄 알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압니다.

     

    그런데 믿는 이들의 모습이 믿지 않은 이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면 믿지 않는 이들은 무엇을 보고 생명에로 나아갈까요?

     

    예전에 한 공소가 있었습니다. 이곳 공소 신자들은 매일 모여서 기도하고 주일에는 공소예절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주일에 성당이 멀다고 공소예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냉담자도 증가했고, 교리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게 됐으며, 아이들 신앙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소 회장님이 커다란 결단을 내렸습니다. 우리 이제 평일 미사에 참례해 봅시다. 제가 봉고를 한 대 사서 운행을 할 테니 함께 차를 타고서 성당에 다녀 봅시다. 성체를 자주 영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그러자 공소에서는 회장님의 말씀에 따라 한 사람, 두 사람 멀리 있는 성당으로 평일미사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주일에 공소예절을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게 되었습니다. 레지오와 기도회만 공소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공소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서 감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의 힘든 일과를 마치고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고, 차츰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공소회장님은 어느 날, 공소 신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을 모두 신자로 만듭시다. 어렵겠지만 우리가 삶으로 보여 준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더욱 충실히 살아갑시다.” 공소 신자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전교할 대상을 정해놓고 기도를 하면서,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 일이라면 우선적으로 도와주고, 자주 만나면서 친교를 이루고, 성당 자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주간에 있었던 일을 그 사람에게 전해주고, 자기가 한 주간 동안 받은 하느님의 축복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한 면을 다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욕을 잘하던 사람은 욕을 멈추고, 남을 험담하던 사람들을 남들을 칭찬하기 시작했고, 술을 많이 마시던 사람은 술을 줄였습니다. 집안에서 싸움을 자주 하던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고 웃음소리가 크게 나도록 가정 분위기를 바꿨습니다.

     

    그리고 하나 둘, 믿지 않는 이들이 하느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나 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 멀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등불을 꺼버리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15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필립비2,15-16).

     

    2.3. 등불은 등경 위에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넣어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방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 등경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것이 바로 등불을 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빛으로 세우신 것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비추고자 하시는 곳을 비추기 위해 나를 빛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 신앙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 곳,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을 밝게 비추어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생명에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며, 힘과 위로를 주기 위해 나를 빛으로 세우셨고, 나를 통해 비추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등불이 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빛을 발산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멋진 등잔이라 할지라도 기름이 아니라 물이 들어가면 타지 않는 것처럼, 훌륭한 신앙생활을 통해 믿음의 기름을 준비하고 늘 빛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2.4. 착한 행실로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고 말씀하십니다. 빛으로서의 삶은 결국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삶이며, 그 드러내는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입니다. “역시 신앙인은 멋있어~”라는 칭찬을 들을 때, 주님 마음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므로 의로운 삶으로 나 자신을 밝게 빛낼 때, 사람들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어둠의 행실들을 벗어 던져 버리며, 하느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주님 손에 들려 빛으로서의,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언제나 기도하고, 굳은 믿음을 간직하며 삶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빛으로서의 삶과 소금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고,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빛으로서의 삶과 소금으로서의 삶은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③ 주변에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을 칭찬해 보고, 내 행실을 통해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4. 공지사항

    ① 하느님께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

    ②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기.

    ③ 내가 드러내야 하는 착한 행실들 5가지 정해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2. guest 님의 말: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

    1. 말씀읽기: 마태5,17-37

    예수님과 율법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화해하여라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극기하여라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마르 10,11-12 ; 루카 16,18-18)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정직하여라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 할 것은 .’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지 않고, 남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 마음을 다해 사랑 안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아가는 삶, 그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어야 함을 명심합시다.

     

    2.1.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생각하고 지켜오던 형태의 안식일 규정이나 정결례 규정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율법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간과하고, 오로지 형식과 규정만을 남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기존의 율법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율법을 위해서라면 없어져 버려야 할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근본정신을 바로잡아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완전한 것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되자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주셨던 율법의 규정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백성들이 성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느님 백성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에로 힘차게 나아오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들은 율법의 규정 자체만 바라보지 말고 율법이 가르치고 있고 보여주려고 하는 곳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몸소 오시어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5,1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율법은 예수님을 통해서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을 통해서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고 어울려야 하는지를 아주 쉽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2.2.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

    ~ 이런 것 쯤이야~”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작은 죄들이 모여서 큰 죄를 이루고,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작은 선행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규정들을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지켜 나갈 때, 어느 순간 의로움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지키는 것을 떠나서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통해 형식적으로 살아가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삶이 얼마나 위험하고, 멸망을 확실하게 예약하는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계명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이 그렇고, 정결례 규정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제자들은 가장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지키고, 다른 이들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들이 참되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왜 지켜야 하는지, 그것을 지킴을 통해서 얻게 되는 기쁨은 무엇인지도 잘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도 턱걸이라도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보다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소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범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벌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그것을 범하는 것과, 또 그것을 범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모르는 사람이 실수로 범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어머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기도할 수 있도록 챙겨주고, 단식과 금육을 할 수 있도록 챙겨주고, 신앙생활을 격려해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기도하기도 힘들뿐더러 단식과 금육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평일미사나 주일미사에 참례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덕이 부족하다면 서로가 큰 소리를 내게 될 것이고,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작은 행동으로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이 있고,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만 살아간다면, 그래서 결국 말만 하게 된다면 그도 안 지키게 되고, 남도 그 모습을 통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마음 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덕을 실천할 때,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2.3.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끄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신자들보다도 못하게 살 때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호를 그으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기도하는 내용과 살고 있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의롭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실하고 올바르게 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면서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 아니겠습니가? 그렇게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며 하느님보시기에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성실하게 규정들을 지켰으며, 기도했고, 단식하며, 자선행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착각은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가 의롭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지킨 것처럼 그렇게 기도와 단식과 자선행위는 기쁘게 하면서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며,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규정과 계명들을 충실하게 지키며, 그 지킴을 자랑하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본다면 결코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과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행위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면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또한 그렇게 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2.4.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2.4.1. 화해하여라.

    살인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연한 것을 말씀하십니다.“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마태5,21)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연한 것을 넘어서 어떻게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5,2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신앙인들은 당연한 것을 넘어서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게 성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우리가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말로, 부주의한 행동으로 수많은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의 부주의한 말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가 되지만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치유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형제에게 분노하거나 멸시, 매도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5,22)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순절 첫 금요일에 요한은 유다에게 전화를 걸어 성당에 가서 미사도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도 바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말했습니다. “! 네가 뭔데 성당 가자 말자 하냐? 내 마음이 움직여야 성당도 가는 것 아니겠어! 너나 잘해. 그리고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잠이나 자.”신앙을 권면하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유다는 결국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에서부터 멀어지게 되니 상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요한은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성당에서 이루어진 금요 봉사자 교육에 참례해서 교육을 받고 늦게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요한은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어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봉사자 교육도 받았는데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에이~ 바보야! 집에서 따뜻한 아름 목에 누워서 TV를 보면 얼마나 좋니!”하면서 요한을 멸시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의 삶을 멸시한다면 그 신앙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그에게 준비된 것은 상은 결코 아닙니다.

    분노의 단계

    단순한 내적인 분노(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

    지방 재판

    멸시(자기 형제를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

    최고의회에 회부

    매도(자기 형제더러 멍청이라고 하는 사람)

    지옥 불

    요한은 사순절 기간 동안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또 절제의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았더니 100만원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기쁘게 감사헌금으로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요한에게 이 멍청아! 그 돈 있으면 명품 가방도 살 수 있고, 제주도로 34일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리 멍청한 짓을 했니!”라고 요한의 마음을 매도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매도했을 경우 그가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벌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살인뿐만 아니라 분노나 모욕, 매도 또한 근본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의 계명은 완성되었습니다.

     

    먼저 화해하여라.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24)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성전에 가는 도중이나 제사 도중에는 다른 어떤 일이거나 무시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행동이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든 것보다도 하느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물론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웃, 친구 등과 소소한 문제 하나 해결 못하고 드리는 제사를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래서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러 가기 전에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사보다는 화해가 더 급선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죄를 짓고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억울하게 만든 그 사람이 하느님께 탄식하며 탄원기도를 바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생신에 형제들이 싸우고서 함께 모여서 생일잔치를 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이 그리 편하시겠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싸우고 반목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 그것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신앙인이 저래도 되나?”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며,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아갈 때, 주변의 사람들은 역시 신앙인들은 뭔가 다르구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해와 용서의 바탕 위에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려야지, 온갖 추악함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싸우고서 미사에 온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고백성사를 보고, 미사 전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기쁘게 미사를 봉헌하게 집으로 가겠다고.” 그 후 그 남편도 신앙생활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참 어려운 결심을 했고,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옆에 있는 형제자매와 얼굴 돌리면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 그것은 무딘 마음을 가진 행위이지 신앙이 아님을 꼭 명심합시다.

     

    할 수 있을 때 화해하여라.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지나면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마태5,2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화해는 인간과의 화해로도 생각할 수도 있고, 하느님과의 화해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과의 화해를 생각해 봅시다. 상대방은 나로부터 실제로 손해를 입은 사람이며, “도중이란 이 세상을 말합니다. “재판관은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재판은 최후의 심판을 말합니다. “형리는 하느님의 심판을 실행하는 존재를 말하며, “감옥은 징벌을 받는 장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라는 말씀입니다. , 화해는 할 수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면 용서를 청하고, 하느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가기 전에 회개 할 것은 깊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쁘게 살 수 있고,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등을 돌리면 결국 벌을 끌어안으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반드시 화해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을 때 반드시 해야 함을 강조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5,26)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빚을 지었다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면 결국 구원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갚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결국 구원은 꿈도 못 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기억하면서 나 또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께로부터 용서받고 있음을 생각하면서 형제자매들에게 너그럽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화해를 청할 수 있을 때 청해야 하고, 잘못을 뉘우칠 기회가 있을 때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지 않으면 늦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은총의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갑시다. 화해하고 용서를 청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내일이면 늦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합시다.

     

    2.4.2. 극기하여라.

    나쁜 생각을 버려라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쁜 생각까지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마태5,27) 예수님께서는 행위 뿐만 아니라 나쁜 생각, 음란한 생각까지도 죄임을 말씀하시면서 금하십니다.

     

    단호하게 대처하여라.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외적인 행동만이 간음이 아니라 마음에서 품는 생각들도 간음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30)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세상에 온전하게 팔다리와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죄를 짓고 구원에서 멀어지기 보다는 단호하게 죄에 대처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정화의 삶을 살아가야 함도 분명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은 좀 더 밝아지고, 안전해지며, 서로가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들의 충동을 자제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좋은 친구가 옆에 있는 것이 필요하고, 참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각종 매체를 정화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보고 듣는 것을 정화하지 않으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더 많은 것을 보고자 마음이 움직이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보려 하면서 죄를 짓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단호하게 대처하며 죄의 유혹을 피하고, 기쁨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 갈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2.4.3. 이혼하지 말라

    여성을 존중하지 않았던 남성들

    예수님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있어서 재산의 일부로 생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들을 버리게 만들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이고, 그 어떤 재물로도 사고 팔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남성들은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으면 당연하게 이혼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안에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는데 간음, 풍기문란, 음식을 태우는 것, 계명을 어기는 것,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 따위를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이런 일을 발견하고 버릴 마음이 있으면,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면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됩니다. 이혼장에 소박 사유를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내가 무서워서 지붕위에 올라가서 아래에 있는 아내에게 이혼장을 던졌다고도 합니다.

     

    모세는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마태5,31)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야 그 여성들이 다른 남성과 혼인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나름대로 여성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남성들은 악용했던 것입니다.

     

    이혼하지 말라.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금지하십니다. 이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마태5,32)라고 가르치십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동등한 존재이고,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 둘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가 되었으면 결코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배우자에게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면서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혼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둘을 한 몸으로 엮여 주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너무 쉽게 이혼하는 신앙인들, 배우자에 대한 신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 배우자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배우자를 더 사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들은 내가 어떻게 배우자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귀하게 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배우자는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2.4.4.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먼저 당연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마태5,33) 거짓 맹세를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거짓을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백색 거짓말이라고 미화시킵니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진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그런 상황이라고 해서 거짓을 말해서도 안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맹세에 대해서 더 깊이 있게 가르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태5,34-36)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맹세하지 마라.”입니다. 어릴 적에 친구들에게 자주 했던 말 가운데에서 천주께 맹세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 내가 하는 말이 사실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천주께 맹세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를 하지 말고 땅을 두고도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니오를 명확하게 하여라.

    맹세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믿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까지 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시며 너희는 말할 때에 .’ 할 것은 .’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5,37)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신앙인은 아니오를 정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워 보이지만 너무도 어려운 것입니다. 예전에 고백성사를 볼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성사를 보다가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변명을 하면 그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것은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면 된단다.”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핑계를 대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제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 변명 또한 악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을 말하는데 상대방이 안 믿어주면 그만입니다. 또한 내가 거짓을 말하는데 상대방을 믿게 하려고 하느님까지 끌어들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고, 좀 더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상대방이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형제자매들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나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정 안에서 말로 상처받을 때는 언제이며, 내가 말로 상처를 줄 때는 언제입니까? 특히 자녀들에게 나도 모르게 주는 상처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까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요, 많은 이들에게 화를 내며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분노하거나 멸시하고, 더 나아가 매도하는 나를 보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그렇게 하면 용서할 수 있을까요? 나의 그런 모습은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요? 그리고 나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4. 알림 및 공지

    내가 지키고 있는 계명들의 의미를 살펴보고 더 잘 지키려고 노력하기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내 옆에 있는 이들의 말을 믿어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3. 관리자 님의 말:

    진실한 사랑: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

    1. 말씀읽기: 마태오5,38-48

    폭력을 포기하여라 (루카 6,29-30)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루카 6,27-28 ; 루카 6,32-36)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돌려주는 것. 누가 그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랑!” 말로는 참으로 하기 쉬운 것이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굳은 결심과 큰 인내가 필요합니다. 물론 그 사랑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보여주셨고, 나 또한 하고자만 한다면 신앙의 힘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고자 하더라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웃음으로 돌려줄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묵상해 봅시다.

     

    2.1. 사랑하여라. – 동태복수법의 포기

    구약에서는 동태복수법이 있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마태5,38)라고 하는 것처럼,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을 상하게 했다면 가해자의 눈을 피해자가 입은 상해만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똑같이 복수를 한다 하더라도 감정이 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 아들의 눈을 다치게 한 상대방에게 분노와 복수심에 불타는 아버지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양쪽 눈을 다 멀게 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수심에 불타는 복수는 보복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악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동태복수법은 금전적 보상제도로 대체되었고,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폐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행과 학대를 당할 때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2.2.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5,39)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음의 것들을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5,39-42)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말씀해 주실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 이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예수님께서도 나에게 그대로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오른 뺨을 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먼저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5,39)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른 뺨을 때린다는 것은 오른손잡이가 손등으로 얼굴을 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가장 모욕적인 행위였습니다. 랍비의 법에는 손등으로 남을 치는 행위는 특별히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 행위에는 두 배의 벌이 가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모욕을 받아들이고 다른 뺨까지 돌려 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일까? 바보처럼 당하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고방식,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사고방식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한대 맞았다고 해서 똑같이 때려준다면 그 모욕이 사라질까요? 그 수치스러움이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분노의 씨앗을 심을 뿐입니다.

    악인에게 똑같이 맞선다면 나 또한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의 행동을 용서할 때, 그 모욕은 내 마음에 자리 잡지 않고,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때린 사람은 두 발 뻗고 자지 못해도, 맞은 사람은 두발 뻗고 잔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맞은 사람은 바로 용서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오른 뺨을 때리는 이에게 왼뺨마저 돌려 대 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예수님께서는 몸소 인간이 되시어 용서를 베푸셨고, 모범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하면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빌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행동을 보여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해야 할 차례인 것입니다.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5,40)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서로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재판을 걸어서 서로 자기 것이라고 우깁니다. 여기서는 이겨도 죄를 짓게 되고, 져도 죄를 짓게 됩니다. 둘의 관계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관계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속옷을 빼앗으려는 사람에게 그래 겉옷도 필요할 테니 이것마저 가지고 가거라.”라고 한다면 얼씨구나하면서 가지고 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데 그렇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가져갔다 할지라도 내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고, 그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다시 한 대를 치더라도, 더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에 맞서서 또 다른 불의를 낳느니보다는 그것을 참아 받는 것이 훨씬 이익 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넘치고, 후하게 갚아 주실 것이니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분명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는 사람 또한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나를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 또한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누가 내 뺨을 쳤을 때 다른 한쪽마저 돌려대 주는 사람, 겉옷을 빼앗겼을 때 속옷마저 내어 주는 사람. 대단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해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를 미워하고 나를 박해하고,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 잘 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원수 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남을 비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는 이 말씀. 참으로 어려운 말씀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분명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말씀하셨으니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하겠습니다. 지키는 시늉이라도 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동네에 아주 고약한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아주 고약한 구두쇠에 자린고비였고, 또 한 사람은 욕심쟁이에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욕심쟁이인 사람이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던 땅을 구두쇠가 땅 주인에게 아주 헐값에 사들였습니다. 욕심쟁이는 그 땅을 내어주기 싫어서 전 주인에게 몇 년 동안 사용하겠다는 각서를 받았고, 대금도 미리 지불해 주었으니 못나가겠다고 하였고, 구두쇠는 자신이 땅을 살 때는 그런 조항이 없었다며 서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증인을 만들고, 계약서를 위조하며 몇 년을 소송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법적인 문제가 서로 걸려서 막대한 소송비용은 물론이요 형사처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당신들 때문에 우리 동네가 이렇게 시끄럽게 되었으니 둘다 이 동네를 떠나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땅을 가지고 그렇게 싸운 그들은 동네에서 인심도 잃고, 돈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손해를 본 다음에야 비로소 욕심쟁이는 그때 그냥 포기할 걸.”하고 후회하였고, 구두쇠는 몇 년 더 사용하도록 내버려 둘걸.”하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문제가 되었던 땅에 작은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구를 본당신부님께 만들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본당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주면 행복해지거늘…,”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마태5,41)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이 말씀을 하실 때는 키레네 사람 시몬을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실 때, 로마군인들은 키레네 사람 시몬을 붙잡아서 그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로마군인들은 식민지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시킬 권리가 있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을 얼마나 크게 기뻐했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가 강제로 나에게 짐을 지워서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할 때, “네가 가자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서 이천 걸음까지도 가 줄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가준다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그를 도와주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해 주실 것이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보상해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얼마나 큰 은총을 주셨겠습니까?

     

    복수를 하지 않고 사랑으로 포용해주며, 자신의 것을 내어주면서까지 주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이라야 할 수 있고, 사랑이 가득 담긴 이라야 할 수 있으며,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이라야 할 수 있고, 주님의 은총이 있어야 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것들,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을 예수님께서는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 혼자 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온전한 사랑을 담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할 때, 나머지 것들은 주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나는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도저히 못하겠다는 마음과 내 힘으로 하겠다는 마음을 버릴 때, 주님께서는 내 안에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자리 잡게 해 주시며, 열정이라는 은총을 끊임없이 쏟아 부어 주실 것입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마태5,42)고 하십니다.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의롭지 못한 이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주면 다시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넘치도록 후하게 채워 주실 것이기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낯선 자매가 사제관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남편은 아파서 일을 못하고, 아이가 병원에 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돈을 좀 빌려 달라고…, 그 자매가 거짓을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그 자매의 손에 돈을 쥐어 주는 것. 그리고 한 마디 해 주는 것.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 보세요.”라고 말 하는 것. 그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알면서도 당해줄 수 있는 사람들. 신앙인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간다면, 형제자매들도 어느 순간 변화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변화가 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게 믿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필요한 이들에게 내 것을 내어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움켜잡기만 하는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이 움켜잡은 것은 놓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조금 내 놓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산다.”고 입으로 떠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한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동네에서 평이 안 좋은 아이랑 둘이 놀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꾹 참고서 집에서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들어오자 어머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왜 그렇게 좋지 않은 그 녀석과 놀고 있는 거냐? 그 애가 얼마나 버릇이 없는 애 인줄 알고 있어? 다시는 그 녀석과 놀지마…”

    그러자 아이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그건 나도 알고 있는데 내가 안 놀아 주면 그 애는 놀 친구가 하나도 없어…,”

     

    2.3.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그에게 잘 대해줍니다. 그런데 참된 사랑은 그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그 사랑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나를 박해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3-44)

     

    이웃 사랑

    구약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이 있었으나 이웃이란 유다인에게 있어서 오직 유다인들 만을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주시면서 강도당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냐고 질문하셨을 때 율법학자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될 수 있는 한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과의 교제를 통해 우상숭배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명령이 이방인을 미워하는 하나의 구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웃으로 바라보지 않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그들을 속여도, 그들로부터 물건을 훔쳐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유다인들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보복을 하고, 자기 민족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더 나아가 박해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삶의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죄를 슬퍼하며,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내 사랑의 범위도 커져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다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5,45) 그리고 내가 사는 이유도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마태5,45)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의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내가 악인이어도, 내가 불의를 저질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렇게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는 자녀들입니다. 하늘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의로운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역시! 신앙인인은 달라.”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수행할수록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게 됩니다.

    둘째,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통치하시는 아버지의 나라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당신의 통치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사랑과 자비와 용서 안에서 살아가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낼 때,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할 것입니다.

    셋째, 아버지의 말씀에 언제나 하고 순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해야 할 일에 하고 순명하며, 하지 말아야 할 일에서 발길을 돌립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명할 때, 하느님의 뜻은 나를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순명으로 이 땅에서 당신의 뜻이 펼쳐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형제자매들의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알고 있기에 주님의 자녀들은 언제나 한 끼의 식사 앞에서도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식만을 청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의 양식도 청하며,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 줍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형제자매들의 잘못을 먼저 용서해 주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용서받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용서해 줍니다. 또한 용서해 주지 않으면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먼저 용서해줍니다.

    여섯째, 유혹을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유혹과 싸우면 이길 확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피하는 것이 결국 유혹을 이기는 방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에게서 도망치듯 그렇게 유혹에서 도망칠 때, 유혹을 물리치고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악을 멀리하려는 사람들입니다. 내 힘으로는 악에서 나를 구할 수 없기에, 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며, 악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만 매달립니다.

    여덟째,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를 바라며, 자기 자신 또한 그것을 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늘 기도하는데, 그것을 빈말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고백한 믿음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그 믿음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고백하는 이 모든 내용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로 고백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용서하며, 내어주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해 주시니, 나 또한 주님께 그렇게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당연히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주님의 은총을 청하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2.4. 하느님의 상을 받는 방법

    모든 이를 사랑하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함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5,46) 하느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 또한 내 옆에 있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보며 사랑해야 합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내가 받을 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받지 못할 사람은 없고,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그런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본당에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형제를 피하는데 유독 베드로 형제만이 성격이 고약한 요셉 형제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께서 베드로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 형제님은 요셉 형제와 친하게 지내시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별 것 없습니다. 집에서 같이 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니 성당에서는 친하게 지낼 만 하더군요. 그 형제 아내나 자녀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 보다 훨씬 쉽지 않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신앙인들도 자기들끼리는 그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냅니다. 계원들끼리는 신앙인들보다 더 자주 만나고, 더 친하게 지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지 말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져 줍시다. 다른 사람이 관심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져 줍시다.

     

    모든 이에게 인사하기

    한 자매가 냉담을 하였습니다. 냉담 이유는 성당에 가면 아는 체 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반겨주는 사람이 없고, “왔냐고 인사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의 냉담 얘기에 다른 형제는 왜 인사를 받으려고 하느냐? 먼저 인사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 사람 잘못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틀린 이야기 입니다. 처음 성당 나왔을 때 먼저 인사하기가 얼마나 쑥스럽습니까? 신앙의 이름으로 낯선 사람들이 모인 곳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당연히 신앙공동체 안에서따스함, 마음의 평화, 위해주고 반겨줌, 기도해 줌등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차갑게 다가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기들끼리만 인사하고, 자기들끼리만 움직이고, 자기들끼리만 음식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성당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하고 발길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사람에게만 인사를 할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손을 내 밀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그를 처음 보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인사, 아는 사람에게만 하는 인사,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밖에 나오면 아는 체도 안하는 모습. 서로에게 관심 없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교회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사람들은 너무도 한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상처받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무도 없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5,47) 그러므로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비신자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는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먼저 와서 인사하고, 가시는 형제자매들에게 따뜻하게 인사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가정방문을 하면서 기도해 주고, 어려움이 있으면 도와주는 신앙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함께 성당에 오려고 노력하고, 참된 신앙의 벗이 되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완전함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어떻게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완전함이란 사랑하는데 결점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데 결점이 없고, 내어주는데 결점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는 사람을 말하며, 주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기꺼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람은 된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가기 위해서 내가 용서해 줄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용서를 받고 있음만을 기억합니다.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것만을 기억합니다. 만원을 주면 일억을 주겠다고 하는데 안 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보잘 것 없는 것을 내어 주고, 감당할 수 없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이가 바로 나 자신임을 알 때, 내가 용서하고, 이해하고, 내어주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좀 더 너그러운 사람, 좀 더 자비로운 사람, 좀 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고자 굳은 결심을 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봅시다.

    그런데 예수님! 이건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라는 불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주님께서는 얘야! 그래서 내가 인간이 되었지 않느냐? 인간의 모든 고통을 나 또한 겪었단다. 네가 힘을 내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내가 먼저 해 보인 것이란다. 힘낼 수 있지? 내가 네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때 예수님! 잘 안 들려요.^*^”하고 싶을 지라도, “! 해보겠습니다.”하고 씩씩하게 응답하는 내가 되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인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이고,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가 누구와 함께 하길원하실까요?

     

    4. 알림 및 공지

    나를 미워하고 괴롭힌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기

    형제자매들에게 먼저 인사하기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4. guest 님의 말: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

    1. 말씀읽기:마태 6,24-34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루카 16,13-13)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세상 걱정과 하느님의 나라 (루카 12,22-32)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것,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살아가며,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는 것. 이것은 참으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양다리를 걸치지 말아야 하지만 하느님 외에도 수많은 것들에 매달리고 있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지 재물을 섬기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보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깊이 묵상해 봅시다.

     

    2.1.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마태6,24)고 말씀을 하십니다. 두 주인은 바로 하느님과 재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재물을 섬기다보면 하느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재물은 움켜잡게 만들고, 육신을 편안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 같은 유혹을 줍니다.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적으로 행복하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재물에 대한 집착은 사기나 도둑질을 넘어서 모함이나 살인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재물은 인간을 죄짓게 하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잊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재물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주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곳에 늘 자신의 몸이 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모임보다는 재물이 오가는 모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6,24)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주인은 하느님과 재물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섬길 것인가? 재물을 섬길 것인가?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사용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실베스텔 신부

    프란치스코 성인이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할 때 돌을 산 적이 있었는데, 그 돌을 판 사람은 실베스텔 신부였습니다. 그는 그때 돌을 헐값에 팔았습니다. 아마도 그 돌이 좋은 목적으로 쓰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싸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프란치스코의 형제들이 많은 돈을 마구 내주는 것을 보고 그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전에 나한테서 돌을 살 때 당신은 아주 싸게 샀잖아요.” 프란치스코 성인은 실베스텔 신부가 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사제의 욕심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즉시 허리를 굽혀 베르나르도의 옷 주머니에서 돈을 세지도 않고 한줌 쥐어서 그 사제의 손에 쏟아 부으면서 물었습니다. “이만하면 됐습니까? 신부님?”그러자 실베스텔 신부는 냉정하게 고맙습니다고 하고는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후에 실베스텔 신부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심판을 하는 것처럼 영혼 속에서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와서 형제들 안에 받아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실베스텔 신부는 온전하게 하느님만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 이야기

    한 형제가 사제관에 와서 이렇게 신세를 한탄했습니다. “신부님! 알고 계신 것처럼 큰아들은 성당에서 청년회장을 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학생회장이라고 주말이면 성당에서 살고, 막내는 복사라고 성당에서 살며, 아내는 성모회 활동 한다고 시대 때도 없이 성당에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당도 좋지만 가정도 중요하고, 대학도 중요하고, 취업도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그 형제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가정이 평안하게 되었잖습니까? 아내는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고 계시고, 자녀들은 바르게 성장하고 있잖습니까? 얼마나 행복한 가정이십니까? 그리고 형제님 가족은 저희 성당의 큰 보물입니다. 그리고 제가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형제님만 성당에 오시면 이 성당은 형제님 것이 됩니다. 가족이 모두 성당에 와 있잖습니까?”

    그러자 그 형제는 신부님! 그렇게 되는 것인가요? 그럼 오늘부터 제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후 신부님께서는 청년회장과 학생회장, 그리고 복사를 하는 작은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에도 충실하단다. 아직은 학생이니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지. 다음 학기부터는 꼭 장학금을 받아 오거라.” 그러자 정말로 다음 학기부터는 장학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모든 일에 충실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교리교사들에게 장학금 타지 못하면 교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 장학금을 타 왔습니다. 같이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당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좋은 대학 다니고, 좋은 곳에 취직하고, 더 많은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당에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시간을 빼앗긴다거나 해를 입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당에서 그렇게 힘을 얻었기에 더 열심히 공부하고, 가정생활에 충실하며, 더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시간에 성당에 안 간다고 해서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를 알아주는 곳에만 가고 있고, 형식적으로만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충분한 재물을 모으고,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성당에 다닐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재물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나에게 와서 상담을 청한다면 나는 어떻게 말해줄까요?

     

    어느 아이의 봉헌금

    한 아이가 한 주 동안 준비한 봉헌금을 잊고 성당에 왔습니다. 미사 때 봉헌하려고 했는데 봉헌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아빠! 봉헌금을 놓고 왔어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만 원 짜리 한 장을 건네주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봉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만원은 저한테는 너무 많은 봉헌금이 아닐까요?” 그러자 옆에 계시던 엄마가 네가 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만원은 많을 수도 있지. 하지만 네가 받고 있는 은총에 비하면 그 만원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겠니?”

    그러자 옆에 계시던 할머니가 소리를 쳤습니다.

    애 교육 잘 시킨다. 봉헌금은 천원이면 되지. 다들 천 원 하더라.”

    “……,”

    점심식사를 마친 후 친구들한테 놀러가는 어머니에게 아들은 이천 원이 든 봉투를 드리며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이것 친구들과 맛있는 것 사 드세요.”

    할머니는 봉투를 받아들고 나가다가 다시 들어와서 2천원을 던지며 말했습니다.

    너 나 늙었다고 놀리는 거냐! 이천 원이 뭐야~ 차라리 주지 말던지.”

    어머니! 봉헌금은 천원이면 된다면서요. 하느님께도 천원 드리지만 어머니께는 그보다 더 많은 이천 원을 드렸는데요. 충분하지 않으세요?”

    “……,”

     

    하느님입니까? 재물입니까?

    누군가가 나에게 하느님과 재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까요? 매 순간 이런 유혹은 밀려옵니다. 그런데 저는 둘 다 선택하겠다고 할 것 같습니다. 두 주인 뿐이겠습니까? , 넷은 물론 열 주인도 섬기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2.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라.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마태6,25)

    당연히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합니다. 몸이 옷보다 소중합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일미사와 혼인식이 겹쳤을 때 어느 것이 더 우선일까요? 어떤 경우는 혼인식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주일미사를 빠지게 됩니다. 술 약속과 아내와의 약속,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요? 술 약속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 잃고 난 다음에 후회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주일 빠지고 등산가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대송을 바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보다는 자신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자기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정리하고, 미사에 참례하여 성체를 모시고, 기쁨이 충만하게 주일을 보내는 것도 큰 이익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고, 지금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울면서 후회하게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2.3. 나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내가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 이유는 내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6,26) 하느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모상대로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죄 많고 부족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까지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청하기만 하는 나의 기도에도 귀를 기울여 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나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헛된 것을 생각하는 나

    건강 염려증에 걸린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이 더 건강은 약하다는 것을 볼 때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그 걱정 때문에 수명이 단축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인간의 근심 걱정 중에서 97%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을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을 고민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것에 온 신경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시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마태6,27)

     

    우리 모두는 때가 되면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승에서의 끈을 아무리 움켜잡는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잡은 것을 놓는 사람이고, 주님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나머지는 주님께서 모두 채워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고, 믿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멋진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나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나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고 걱정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태6,28-30)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는지에 대한 실험을 농구장에서 했습니다. 한 사람이 농구장에 이상한 복장을 하고 움직였습니다. 농구경기가 끝난 다음에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라고 물었을 때,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의 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못 봤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입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입고 있는 옷들은 그리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지 말고,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하는가?”를 걱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데 나를 외면하실 리가 없습니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살아간다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옷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행동으로 말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는 고민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에 관심 없는 이들은 다른 것에 관심을 씁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누가 알아줄까?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남들 하는 것처럼 대충 형식적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고민하지 않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과 무엇을 먹으러 갈까? 어느 찻집에 가서 무엇을 마실까?”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어디 갔는데 무엇이 맛있더라. 어디 찻집에 새로 생겼는데 분위기가 좋더라. 누구랑 어디 갔었는데 참 좋더라…,”라는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러나 신앙이 있는 이들은 다른 생각을 합니다. “혼자 사시는 자매에게 무엇을 해다 드릴까? 이번 주일에는 신자들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안 입는 옷들을 어떻게 활용할까? 이런 것들을 모아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6,31-3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서 참된 기쁨과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맡기고 살아간다면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등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생명의 빵(성체)을 받아 모시고, 구원의 음료(성혈)를 받아 마시며, 의로움의 옷을 입을 생각들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좋은 음식이나 좋은 옷을 입지 말아야 할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봉사하는 이들이 함께 먹는 음식이 좋은 음식이고, 봉사하면서 입고 있는 옷이 좋은 옷입니다. 아무리 비싼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누가 입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무리 낡은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누가 입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옷이나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달리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헐벗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걱정하지 말라고 해야 할까요?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재물을 통해 그들의 헐벗음과 굶주림을 달래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의 삶의 자세는 비 신앙인들의 삶의 자세와는 좀 달라야 합니다. 물질을 중요시 하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의 방식은 신앙인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필요한 곳을 보고도 얼굴을 돌리는 사람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필요함을 아시고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네가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을 좀 주지 않으련?”

     

    2.4. 하느님 안에서 풍요로운 사람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기에.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의로운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서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며, 세속적인 걱정이나 자랑을 하지 않고, 영혼구원을 위해 힘씁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더 마음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성실하게 일합니다. 그리고 움켜잡으려 하지 않고, 베풀며 살아갑니다. 신앙인들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라는 말씀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풍요로움을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바라보며 살아가기에.

    그런데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엇을 입을지를 고민하지도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삶은 어리석은 삶이 아닐까요? 세상살이를 포기한 사람의 삶의 모습은 아닐까요? 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보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이런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인생은 단기간에 승부를 내는 게임이 아니라 영생 안에서 인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전체 안에서 부분을 바라보아야지, 부분만 바라본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 분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정년퇴임을 하신 한 형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은 청탁도 잘 받아 주고, 챙기기도 했는데 저는 그것을 못했습니다. 직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업에도 뛰어 들고, 그래서 그들은 참으로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지만 저는 무능한 사람으로,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청탁받은 사람들의 비리가 드러나니 그들이 직장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도 없고, 다른 사업에 손댄 사람들도 오랜 시간이 흘러보니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해 해 나가면서, 젊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드니 바로 이것이었구나! 처음에는 손해 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큰 이익을 보게 되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었음을, 아직도 달려야하는 마라톤이었음을 나이가 들어서 깨닫게 되었고, 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지금 이 순간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바라보며, 영원이라는 시간 안에서 지금 이 순간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유혹에도 빠지고 시련도 당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기도하며 이겨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걱정하다보니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내일 것도, 모레 것도, 일 년 후의 것도 지금 다 해결하려고 하니 바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좀 더 여유가 생기면 신앙생활 하겠다.”고 말하고,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나누면서 살아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바로 내일 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오늘 수업에 충실하고, 오늘 배운 것을 복습하는 것이 내일의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고, 앞으로의 진로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면 급하게 되고, 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세상 것에 마음을 온전히 빼앗기게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자꾸 자꾸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6,34)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도 내일의 양식을 청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지 않고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신앙인들의 소박한 기도로서 내일 아침에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잠 못 드는 일은 없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바구니에 아직도 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일 양식 때문에 근심 걱정하면서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을 많이 모은다 하더라도, 그것이 내 삶을 연장해주는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걱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습니까? 그리고 내 마음을 차지하고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까? 아니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며, 하느님을 참되게 섬기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더욱 굳은 결심과 실천을 다짐해 봅시다.

     

    3. 나눔 및 묵상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남에게 보여지는 것들입니까?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의 나의 모습입니까? 그리고 나는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4. 알림 및 공지

    내가 준비하고 있는 봉헌금과 교무금을 살펴보기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가기

    내가 하고 있는 봉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5. guest 님의 말:

    과연 제 눈으로 당신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주님 봉헌 축일

    1. 말씀읽기:루카2,22-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의 유년시절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주님 봉헌 축일은 성가정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산모는 출산한 지 40일 만에 성전에 나아가 몸을 정결하게 하는 정결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 축일은 성탄 후 40일째 되는 날에 성모 마리아께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 교회는 전통적으로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복하였기에 미사 전례 전에 초 축복과 봉헌 행렬이 이루어집니다. 초가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혀 주듯, 나 또한 나 자신으로 세상을 비추는 존재가 되기 노력해야 합니다.

     

    2.1.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바치는 성가정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성가정은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가서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바쳤습니다. 성가정은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루카2,23)입니다. 첫 아들은 주님에 의해 축성되고, 속세를 떠나서 사제로서 오로지 하느님을 섬겨야 했는데(탈출13,2;민수18,15-16),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께서는 사제직을 레위인들에게만 한정시켰습니다. 하느님께서 첫아들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권리를 기억하도록 하려고 첫 아들은 성전에 봉헌하게 하셨고, 5세겔의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속량하도록 명하셨습니다.

     

    2.2. 정결례 예물을 바치는 성가정

    성가정은 율법의 규정에 정결례 예물로 가난한 가정은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루카2,24)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사실 성모님은 정결하신 분이니 정결례를 치룰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니 새삼 하느님께 봉헌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가정은 율법의 모든 규정대로 모든 것을 실천했습니다.

    계명이나 규정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합리화”입니다. “이 정도는 안 해도 되고, 이 정도는 어겨도 되고, 이것은 다음에 다시 잘하면 되고…,”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2.3. 시메온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습니다.(루카2, 25)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날이 시작되면 세상살이의 짐에 짓눌렸던 허리를 펴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숙인 머리를 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들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친히 위로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시메온 뿐만 아니라 많은 유다인들이 이스라엘의 위로(구원)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기다린다면 시메온처럼 그렇게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가야 함을 명심해야 하고, 내 삶을 그렇게 바꿔 나가야 합니다.

     

    ① 하느님의 약속

    성령께서는 시메온 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기에 성령께서 언제나 시메온과 함께 머물러 계셨습니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성실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기에 성령께 온전히 자신을 맡길 수 있었고, 성령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며 살아가는 시메온을 이끌어 주셨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루카2,26)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시메온은 이 약속을 굳게 믿으며 한 생을 살아왔습니다.

     

    ② 약속을 지켜 주시는 하느님

    성령께서는 죽기 전에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시메온은 그 약속을 믿고 한 생을 기도하며 기다림의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시메온을 이끌고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때 시메온은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게 됩니다. 한 생을 기다려온 보람을 얻으며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신앙인 눈에는 하느님만 보이고, 하느님 눈에는 당신 자녀만 보입니다. 한생을 메시아만을 기다려왔고, 메시아만을 찾아 왔기에 아기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아 본 것입니다.

    시메온은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상으로 메시아를 뵈올 수 있는 은총과 메시아를 만지고 품에 안을 수 있는 은총을 시메온은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금을 캐는 사람이 금맥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쁠까요? 산삼을 찾아 헤매던 사람이 귀한 산삼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자신이 그렇게 원하던 것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조급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시메온이 성전에 들어간 것은 우연히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서 들어간 것(루카2,27)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릴 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시메온처럼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에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면 되는 것입니다. 시메온처럼 그렇게 주님을 항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가 되어 봅시다.

     

    2.4. 시메온의 노래

    이제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시메온의 노래는 성무일도 끝기도에 바치는 노래입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면서 시메온의 노래를 바치는데, 이 시메온의 노래가 나의 매일 밤 기도가 되면 멋진 임종경이 될 것입니다.

     

    ① 약속의 이행에 대한 감사

    시메온은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셨고,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게 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시메온은 그 약속을 굳게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시메온이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메온은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루카2,29)라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기쁠 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 시메온은 그렇게 기쁨에 넘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이 기쁨 속에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켜 주시는 분이심을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고 있기에 큰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사명은 다 이룬 것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내 삶을 통해서 찬미 받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내 삶으로 하느님께 영광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이끄심에 온전히 맡기며 의롭고 독실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②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2,30)

    한 생을 주님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살아온 시메온은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감격하여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2,30)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셨고, 구원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두 눈으로 본 것입니다.

     

    나도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따뜻하게 봉사하는 형제자매의 손길 안에서, 엄숙함과 경건함이 우러나오는 형제자매들의 성실한 삶 안에서,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은 노인들의 손에 쥐어진 묵주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볼 눈이 있어야 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 시메온이 한 생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나 또한 그렇게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③ 하느님의 구원 계획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셨고,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시어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시메온은 알고 있기에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2,31-32)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시메온 만을 위함이 아닙니다. 유다인들만을 위함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구원은 유다인들로부터”라는 원칙을 지켜주시기 위해 유다인으로 오신 것입니다. 메시아께서 유다인으로 나셨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영광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당연히 영광이 됩니다.

     

    또한 시메온의 찬양을 통해서 나만 생각하는 신앙, 내 가족만을 생각하는 신앙, 내가 아는 사람을 생각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을 위해주는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나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내가 되어봅시다.

     

    ④ 시메온의 말에 놀라는 요셉과 마리아

    시메온의 찬양을 들은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두고 하는 시메온의 말을 듣고 놀라워하였습니다. 요셉성인과 성모님은 궁금했을 것입니다.“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사실 마리아와 요셉은 천사로부터 예수님에 관하여 들어서 알고 있었고,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기를 낳았기에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자신들만 알고 있는 비밀을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마리아와 요셉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가까웠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계시는 하느님 편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자신의 힘으로 온전히 안다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이들은 말씀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내가 아무리 신앙의 신비 안에서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으니 겸손하게 은총을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겨우 하나를 알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⑤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하는 시메온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2,34) 쓰러지게 한다는 것은 그를 멸망시킨다는 것이고, 일어나게 한다는 것은 그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심판관이십니다.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에 맞는 심판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은 주님을 자비로우신 심판관으로 맞아들여, 주님께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주님의 심판에서 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하였고, 예수님의 치유와 표징을 통하여 믿음을 더해갔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예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예수님을 궁지에 빠트리려 했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모함했으며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⑥ 성모님의 고통

    시메온은 성모님께서 받으실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25)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악인들은 언제나 음모를 꾸몄고, 어머니 마리아는 언제나 가슴 조이며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그들의 모함과 계략이 구체화되면 될수록 어머니 마리아는 칼에 꿰찔리는 듯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머니 마리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 구원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시는 것을 지켜 보아야만 하는 것이 어머니 마리아의 기쁨이면서 동시에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2.5. 한나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 이들은 모두 해방을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들어 주셨습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루카2,36-37)

     

    한나는 성전에서 일어난 엄청난 은총의 순간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습니다.(루카2,38)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2.6. 나자렛으로 돌아가는 성가정

    정결례와 아기 예수님의 봉헌 예절을 마친 성가정은 이제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갑니다. 나자렛은 마리아와 요셉의 마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시기 전까지 나자렛에서 준비하시며 지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루카2,4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고,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셨습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기뻐하였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 생을 기도하며 성령안에서 살아왔기에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아 볼 수 있었고,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 또한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살아갈 때 주님과 함께 살 수 있으며, 주님의 영광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할 수 있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시메온의 마음으로, 한나의 마음으로 살아가며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3.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내가 만일 시메온이나 한나였다면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그리고 시메온과 한나처럼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어떤 은총과 노력들이 필요할까요?

     

    ③ 의롭고 독실한 삶은 어떤 삶입니까?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리고 내 삶은 누가 이끌고 있습니까?

     

    4. 알림 및 공지

    ① 기쁜 마음으로 정해진 규정들을 지키기

    ② 시메온의 노래를 매일 저녁 기도로 바쳐보기

    ③ 주님을 위해 봉헌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며, 축성된 초를 선물해 보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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