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왕의 전설

 

넷째 왕의 전설




< 작자 / 에자르트 샤퍼 >




나오는 이들 




해설자, 넷째왕, 신하1, 2, 3, 와니카(네째왕의 愛馬), 행인 1, 2, 중풍병자, 감독관, 나환자, 행인, 선장, 거지여인(노파), 노예 1, 2, 여인, 소년, 상인 하인 1, 2, 목소리




무대 




이 단막극의 7막은 모두 한 세트에서 이루어진다. 간단한 소도구로써 각 막마다 분위기를 만든다. 무대 전면에 몇 개의 휘장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막이 열리면




– 제 1 막 –




            몇 개의 궁전 기둥을 배경으로 담담하고 소박한 젊은 왕이 늙은 신하 1, 2와 함께 앉아 있다. 거리의 소음. 가까워졌다 사라지고 어둠 속에 해설자 등장.


해 설 자     여러분, 저 거리의 소음을 좀 들어보십시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세상은 온통 축제의 분위기로 술렁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세상 사람들은 들떠 있겠지요. 이를테면 연말 보너스다 휴가다 방학이다(억양을 높여가며) 취업, 진학, 졸업, 결혼.. 그렇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게 그렇고 그렇지만 즐거워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야 어디 한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꼭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구원자시고 해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건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아직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예수 아기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실 무렵 동녘 하늘에 커다란 별이 동방의 세 임금께 나타나 아기의 탄생을 알렸고 바로 그 별이 광활한 러시아 땅의 한 임금님께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임금이라고 하니까 여러분은 즉시 위풍이 당당하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로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 임금님은 전혀 그 반대입니다. 외모로봐서 그는 볼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씨 착하고 인정많고 하는 일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지조가 곧고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이제부터 그 왕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봅시다. (해설자 퇴장하고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신하 3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선다.)




신  하 3     전하, 나타났습니다. 전하.


  왕         아니, 뭐가 나타났다는 게냐? 어디 적군이라도나 나타났다는 게냐, 어서 차근차근히 말해보도록 해라.


신  하 3     동녘 하늘에 큰 별이. 푸른 유황불이 철철 넘치듯 찬란한 별이 나타났습니다. 분명히 심상찮은 징조가 나타난 것입니다.


  왕         아니, 그럴 리가 (어좌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선다.)


신  하 1     전하, 저 별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궁중에 전해오던 그 문제의 별인 줄로 짐작됩니다.


  왕         (놀라면서)저 별은.. 저 별은 온 세상을 다스릴 그 위대한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아닌가?


신  하 2     그렇습니다. 전하. 언젠가 하늘에 큰 별이 나타나서 온 세상을 다스릴 최고의 지배자 탄생을 알릴 것이니 러시아를 지배하던 왕은 그 위대한 왕을 찾아가서 경배드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늘 저녁 바로 전하께 이루어진 것입니다.


  왕         수천년을 두고 고대하던 저 별이.. 나의 온 생애를 두고 기다리던


             저 별이..


신  하1,2     전하!


신  하 1     최초로 인간이 범죄한 그 순간부터 하느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약속하셨습니다. 4천년의 길고 긴 세월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메어 기다리던 언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  하 2     이 엄동의 한밤중에 해묵은 등걸에 새싹이 돋아난 것입니다.


신  하 1     무궁한 축복이 오늘 전하께 내린 것입니다.


  왕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어서 떠날 채비를 차려야 하겠소.


신  하1.2     이 캄캄한 밤중에 어디로 행차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전하!


신  하 2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 길은 험하고 먼 줄로 아뢰옵니다


신  하 1     많은 식량과 튼튼한 시종들과 함께 충분한 준비를 갖춘 후 떠나셔야 마땅한 줄로 아뢰옵니다.


  왕         아니오,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하겠소.


신  하1,2     (걱정스러운 투로) 전하!


  왕         어서들 내 분부대로 채비를 차리도록 하시오. 무엇들 하고 있소?


신  하 1     전하, 그 길은 멀고 험한 길이옵니다.


신  하 2     도적과 강도들이 득실거리는 이국의 황량한 벌판과 사막을 지나야 하는 줄로 아옵니다.


  왕         (책망하듯) 무엇을 하고 있소? 어서 내 사랑하는 말 와니카를 끌어오고 간단한 식량과 함께 채비를 차리도록 하시오.




             신하 3 퇴장




신  하 2     그렇다면 혼자 그 길을 가시겠다는 말씁입니까? 전하!


  왕         그렇소


신  하 1     고정하십시오, 전하. 혼자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옵니다. 많은 노비를 필요로 합니다.


  왕         그럴 필요는 없소.


신  하 2     정 그러시다면 저희들을 데리고 가 주십시오.


  왕         안되오. 그 길이 험하고 위험할수록 아무도 데리고 갈 수 없소.




             신하 3 와니카를 끌고 등장




신  하1,2     전하


  왕        (결심하는 투로) 자기 생애 주어진 길은 결국 혼자서 찾아가는 길이오.


신  하 1     전하, 혼자서는 안됩니다. 전하!


신  하 3     안됩니다, 전하


  왕         그래도 나에겐 아주 좋은 친구가 하나 있지 않소 (와니카를 쓰다듬으며) 키는 작지만 뚝심이 있고 날쌔지는 않지만 인내심이 강하고 온순한 내 사랑스런 와니카만 있으면 충분하오.


신  하 1     전하, 평생을 몸바쳐 전하를 따라온 이 비천한 몸이 끝까지 전하를 모실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왕         (외면한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지존하신 왕께 그냥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 자, 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아마포와 제일 튼튼하고 품위있는 모피 몇 장을 가져오도록 하시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사금과 보석도 함께 가져 오도록 하시오.




             신하 3 퇴장




신  하1,2     전하


  왕         아마도 그분이 나의 선물을 보면 내 백성이 얼마나 근면하고 슬기로운 백성인가를 아실 것이오.




             신하 3 선물 주머니와 항아리를 들고 등장




신  하 3     전하, 여기 모든 선물이 분부대로 준비되었습니다. 지존하신 분께 경의를 표하기에 가장 합당한 선물인 줄로 아옵니다.


  왕         그런데 그 항아리는 무엇인가?


신  하 3     전하, 솜털이 많고 둥그스름한 러시아 꿀벌들이 향기로운 보리수 꽃에서 따온 꽃 꿀이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이런 꽃꿀이 필요하실 것이옵니다.


  왕        오, 경은 참으로 현명하구려. 러시아의 싱싱한 보리수 꽃꿀이라. 아마 그 아기가 이 꿀을 받는 날 그는 제일 먼저 저 하늘나라를 상기하며 미소를 지으리라.


신  하 1     끝내 혼자서 그 위험한 길을 떠나시렵니까?


  왕         경들은 내가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로 의좋게 지내며 이 나라 백성들을 잘 돌보도록 하시오.




             왕 와니카의 등에 선물을 싣고 퇴장. 말발굽 소리 서서히 사라진다.




신  하 2     결국 전하께서는 그 험한 길을 홀로 떠나시고 말았군요.


신  하 1     참으로 자비롭고 인정 많은 분이셨소.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 있었으나 언제나 가난하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언제나 겸손했던 그분께 하느님은 축복을 내리실 것이오.




             신하 1.2 퇴장




– 제 2 막 –




             무대 중앙 왼편으로 희미한 등불이 켜진 여인숙 일부, 바람소리, 앙상한 나무 몇 그루, 무대 중앙 허물어진 헛간에 거지여인이 누워있고 왕은 와니카를 끌고 지친 모습으로 등장.




  왕        와니카야, 하느님이 주신 러시아 땅을 떠난 지도 벌써 석달이 되었구나. 우리를 인도하던 저 별도 이제 지평선에 기울고 있군. 아, 이젠 정말로 피곤하구나. 자, 어디 좀 쉬어갈까?




             헛간 앞에서 왕은 말에서 짐을 내리고 행인 1,2등장




행  인 1     아니, 당신은 뉘시오? 보아하니 먼 길을 떠난 것 같은데..


  왕         그렇소. 벌써 집을 떠난 지도 석달이 넘었소. 당신네들은 도대체 누구               시오?


행  인      지존하신 임금님과 함께 영원히 군림하실 가장 지혜로운 왕, 고귀한 제관이 되실 아기가 탄생하리라는 계시를 받고 가는 길이오.


  왕         아니, 그렇다면 당신네들도?


행  인 2     왜 마음에 짚이는 일이라도 있소. 하하하. 하기야 당신 같은 사람하고 할 얘기는 아니지만


행  인 1     여봐, 좀 조용. 조용히 하라고. 임금님께서 주무시는데 행여라도. 언제 보아도 자네는 말썽꾸러기군


  왕         여보시오. 임금님이라니 무슨 말이오?


행  인 1     도대체 당신들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 말이나 좀 들어봅시다.


  왕        러시아에서 오는 길이요. 러시아, 봄이 되면 광활한 대지에 벌과 나비가 하늘을 날고 겨울이면 희디흰 눈 속에 눈부신 꿈의 나라가 펼쳐지는 저 러시아에서 오는 길이오.


행  인 2     어흠, 음산하고 황량하여 몹시도 춥고 배고픈 나라겠군. 하하하


행  인 1     그건 그렇고 왜 이 낯선 곳으로 무엇을 찾아서 이렇게 혼자 길을


             나섰소?




             갑자가 아기 울음소리. 세 사람 모두 헛간으로 달려간다.




거지여인     여보시오, 나리들. 저를 좀 도와주세요. 뭐 먹을 것이 있으면 조금만 주세요. 춥고 배가 고파요.


행  인 2     아니, 하필 이런 곳에서 아기를 낳다니 원참 살다가 별꼴을 다 보겠                군.


행  인 1     아니, 이 맹추같은 사람아. 따뜻한 안방에서 낳으면 좋은 줄 누가 모르나 집이 없는 여인이니까 그렇지.


  왕         (아기를 품에 안고) 아, 이 가엾은 것아, 이 춥고 음산한 곳에서 태어나다니. 쯧쯧. 얼마나 춥고 배고프니?



             왕은 아마포를 가지러 간다. 이 때 여인 행인을 붙들고 애걸한다.




여  인       여보시오, 나리. 배가 고파요. 무엇이든 먹을 것을 좀 주세요.


행  인 2     여봐, 시간없어. 곧 출발이야. 빨리 가야돼.


행  인 1     아니 이 사람, 정말로 매정한 사람이군. 이런 꼴을 보고 그냥 가란


             말이야?


행  인 2     값싼 동정은 하지 않는게 좋아.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기 시작하다보면 그것은 한정없는 일이야. 정말 아무 일도 못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행  인 1    죄송하오. 부인. 우리는 세분의 임금을 모시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사람들이오. 한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소.


행  인 2     어서 가세. 어서 원참 재수가 없으려니 별꼴을 다 보겠군.




             행인들 퇴장하고 왕 아마포를 들고 온다.




  왕         쯧쯧쯧. 얼마나 춥겠소. 자, 이걸 좀 덮으시오. 그리고 이 빵을 좀


             드시오.


             (아마포로 아기를 싸안고) 네 애비는 어떤 사람이었니? 이 세상에 태어난 너에게 얇은 아마포밖에 준 것이 없으니 딱도 하구나. 쯧쯧. 가엾은 것아.


여  인       감사합니다. 나리, 감사합니다.


  왕        내 나라에 있었다면 당신에게 좀 더 잘 해줄 수 있을텐데. 자 이걸 받아두시오. 어려움이 많을텐데 아기와 당신을 위해서 요긴하게 쓸 날이 있을 것이오.


여  인      (당황하면서) 아니, 이건 진주가… 나리, 당신 같은 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분입니다. 나리같은 분을 저희 나라의 임금으로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이제부터 나리를 제 마음의 임금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 시간부터 죽을 때까지… 감사합니다. 나리




                와니카 긴 울음을 운다.




  왕         자, 그럼 몸조리를 잘 하시오. 아가야, 너도 건강하게 잘 커야한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자, 와니카야, 어서 가자.




– 제 3 막 –




             몇 그루 나무가 서 있는 광야. 희미한 달빛. 짐승우는 소리. 바람 소리. 멀리 개 짖는 소리. 와니카와 함께 콧노래를 부르며 왕 등장.




  왕         이제 내가 아는 노래는 죄다 불렀군. 와니카야, 불쌍한 아기를 떠나온 지도 벌써 열흘 밤이 지났구나. 그날 저녁때 만났던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그분들과 동행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저 하늘에 별이 빛나는 한 아무 걱정이 없어. 와니카야, 어서 힘을 내자. 이제 얼마남지 않았을테지. 그 곳에 도착하면 너도 융숭한 대접을 받고 푹 쉬게 될 거다.




             고통에 신음하는 남자 목소리, 깡마른 노예 두 사람이 감독관에 끌려 매를 맞으며 등장




감 독 관     이놈들, 너희같은 놈들은 깡그리 없애 버려야돼. 이놈들, 혼찌검이 나도록 어디 맛                 좀 봐라.


노  예1,2    나리,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왕         여보시오, 왜 그렇게 사람을 때리시오?


감 독 관     아니, 당신은 누구요?


  왕         …


감 독 관     (노예를 때리면서) 이놈들, 도망을 가!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


노  예1,2     나리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나리,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감 독 관     이놈들, 내가 얼마나 비싼 값을 치르고 네 놈들을 산 줄 아느냐, 이놈들. 아직도 정신이 들자면 더 맞아야해. 이놈들


  왕         (감독관의 몽둥이를 뺏으며) 여보시오, 주인양반. 그들의 몸값이 도대               체 얼마요?


감 독 관     뭐라고? 당신이 사겠다는 말이오?


  왕         그렇소. 내가 사겠소.


감 독 관     금화 300냥만 내시오. 쓸모없는 것들이지만 길만 잘 들이면 힘도 세고 고분고분할거요.




             왕은 금화를 준비한다.




  왕         자, 여기 있소


감 독 관     이상한 사람도 다 보겠군. 도대체 당신은 이놈들을 사서 어디에 쓰려               고 하시오?


  왕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린다면 그 자신도 또 다른 노예가 되는 법이오


감 독 관     골치아픈 얘기는 딱 질색이오. 어서 돈이나 주시오.




             감독관 의아한 표정과 함께 퇴장




노  예 1,2    나리 감사합니다. 나리


노  예 1     나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벌써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제 저희들은 어디로 가는 겁니까? 목숨을 다해 나리를 섬기겠습니다.


  왕         이제부터 당신들은 당신들의 길을 가시오


노  예 2     나리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인가요?


  왕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길을 가오. 자 여기 돈을 받으시오. 이것으로 땅을 사서 열심히 일을 하여 살도록 하시오.


노  예 1     나리, 이게 어찌된 일이옵니까?


  왕         자, 어서들 가시오. 이제부터 자기의 일을 하고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지고 살도록 하시오




             왕은 퇴장하고 중풍환자 한 사람 비틀거리며 등장




중풍환자     젊은양반,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먹을 게 있으면 조금만 나누어 주십               시오.


노  예 1     이 벌판에 먹을 게 어디있어?


노  예 2    (노예1을 힐책하며) 나쁜 놈, 은혜를 배반해도 분수가 있지. 하긴 너같은 놈이나 나라를 통치하는 놈이나 결국 똑같은 놈이야. 늙고 병들면 쓰레기처럼 버리고 몽둥이와 채찍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어떤 놈은 배가 터져 죽고 어떤 놈은 굶어 죽으니. 이 나라가 안되는 이유는 바로 너같은 놈들이 있어서 그런거야.


노  예 1    하하, 언제부터 네가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신세가 되었냐? 여보게 자네 신분을 좀 생각해 보게. 노예 주제에 뭐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거야? 하하하 정신 좀 차려, 정신.


중풍환자     여보시오, 저를 좀 도와주시오.


노  예 2     자,여기 금화 한 닢이 있소.


             (노예1, 이를 저지하려 한다.) 이것은 내가 당신께 주는 것이 아니고 나 아닌 어떤 사람이 당신께 주는 것이오. 자, 이걸 받으시오.


노  예 1    안돼, 이 사람. 정신이 있나 없나. 그 돈은 우리를 위해 준 것인데


            안돼!


노  예 2    십분의 일만큼을 떼어준다고 해서 금방 우리가 굶어 죽나? 이봐, 자네는 조금 전까지의 우리 신세를 좀 생각해 보게.


중풍환자     감사합니다. 나리


             퇴장




노  예 1     자네 생각이 옳은 것 같아. 나는 언제나 욕심이 많은 편이야.


노  예 2     아니야, 그래도 자네는 착한 사람이야. 자네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힘이 부쳐 쩔쩔 맬 때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나.


노  예 1     하기야 10년, 20년 아무런 보장도 없이 큰나팔을 불어대며 백성들을 속이고 자기들의 사리사욕만 채우려는 놈들. 그 놈들이 불어대는 큰 나팔구멍 바로 그 앞에 이빨 사나운 독사가 있다는 것을 그 놈들은 몰라.


노  예 2     나도 어리석고 배운게 없어서 이런 신세가 되었지만 사실 그놈들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들이지.


노  예 1     천벌이 내릴거야, 천벌이


노  예 2     자, 가세. 그런데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노  예 1     너무나 얼떨결에 당한 일이라서 정신을 못차렸지.


노  예 2     분명히 그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 제 4 막 –




             새벽녘, 몇 개의 바위 사이에 나환자 한 사람  누워있고 잠에서 막 깨어난 왕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왕         아, 벌써 날이 새는군. 아름다운 새벽 하늘, 그 누가 저토록 영롱한 진주를 하늘에 뿌렸나. 수많은 사람들의 맑고 빛나는 눈물이 영근 저 하늘의 별들, 은빛 출렁이는 은하수. 아,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로군. 와니카야, 자 어서 저 빛나는 별의 꼬리를 따라잡자.




             와니카, 몹시운다. 나환자의 신음소리




  왕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여보시오, 당신은 뉘시오?


나 환 자     가까이 오지 마시오. 버려진 몸이오니 가까이 오지 마시오.


  왕         (나환자 부축하며) 쯧쯧쯧 가엾어라. 얼마나 춥겠소.


             (아마포를 꺼내어 싸매주고 외투를 벗어 덮어준다.) 언제부터 여기 이러고 있었소?


나 환 자     감사합니다. 당신은 뉘신데 저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해주시               오?


  왕         길가는 행인이오


나 환 자     가족과 친지로부터 외면당한 지도 벌써 오래 전의 일이오. 이러다가 죽으면 그뿐이오. 나는 천벌을 받은 모양이오. 내 죄라면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고 뼈가 빠지게 일한 것 뿐인데 어이 이런 천벌을 내리셨는지 하느님 정말 무심하구려.


  왕         천벌이라니, 무슨말이오?


나 환 자     ….


  왕        사람에게 불행이란 것이 곧 천벌은 아니오. 우리가 그 불행을 잘 받아들인다면 그보다 더 큰 은총은 없을 것이오. 이를테면 불행은 우리의 눈을 확 뜨게 하는 시력이 될 수 있을 것이오.




             나환자,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나 환 자     하지만 나리, 어서 내 곁을 떠나 주시오.




             나환자 일어서서 퇴장. 이때 왕은 주머니 속의 보석을 그 품에 넣어               준다.




  왕         자, 이걸 받으시오. 변변치 못한 것이나 받아 두시오.


             (왕은 선물 자루를 들고 말에 실으려다 텅빈 자루임을 알고 놀라는 표정. 주머니를 뒤져본다.) 이런, 하나도 남은게 없잖아. 이럴 수가 있나. 모든 게 정말 바닥이 났네. 그래도 얼마전엔 아마포도 한필 있었고 모피도 한 장, 보석과 진주도 몇 개씩은 있었는데. 이럴 수가 있나.


             (땅에 털썩 주저앉는다.) 혹시 잠든 사이에 누가 훔쳐갔나. 하지만 그 임금님이 화를 내시진 않을 거야. 그래, 아직도 보리수 꽃꿀이 남아 있지 않은가. 사실 그분께 이 꽃꿀은 (꿀단지를 어루만지며) 가장 적합한 선물이 아닌가.


             (다시 일어서면서) 빨리 가야돼. 와니카야. 이제 더 지체해서는 안되겠어. 빨리 가야 될 것 같애.


             (다시 비틀거리며 앉는다.) 하지만 나는 참 큰일이로군. 좋은 일도 때로는 큰 유혹이고 약점이 되는군. (꿀단지 뚜껑을 열면서) 아, 이 향기로운 냄새, 러시아의 보리수, 하늘을 치솟는 싱싱한 러시아 백성의 향기, 이 싱그러운 보리수 꽃향기를 지존하신 아기가 맡는 날엔 모든 것을 다 이해해 주시겠지. 아니야, 지존하신 분께 드려야 할 모든 선물을 다 써버렸으니 무슨 면목으로 그분을 만난단 말인가. 갈 길은 아직도 아득하고 남은 것이라곤 이 못생긴 꿀단지 하나뿐이니.


             (다시 꿀냄새를 맡으려는데 와니카가 소스라쳐 운다.) 아니 이건 어디서 날아온 벌인가?


             (왕은 꿀단지에 앉은 벌을 쫓는다. 그러나 벌떼는 점점 떼를 지어 몰려온다.) 이놈의 벌떼들. 저리가, 저리가!


             (비틀거리다 꿀단지를 깬다. 울먹이며) 저리 가란 말이야.


             이놈의 벌떼들…


             (왕은 땅에 쓰러지고 와니카도 벌떼에 쫓겨 난동하다 쓰러진다. 왕왕대는 벌떼 소리.  계속 왕은 윗도리로 얼굴을 감싸고 깨진 꿀단지 속에 손을 넣는다. 낙심하는 투로) 하나도 없군. 하나도 없어


             (단지 조각을 허공에 던져버리고 미친 듯 무대위를 왔다갔다 한다.) 이놈의 벌떼들, 어서 내 몸뚱아리마저 다 빨아먹어라. 이놈의 벌떼들


             (비틀거리다 땅에 허둥대는 와니카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찬다.) 에이 이놈!


             (와니카 신음소리. 벌떼 서서히 몰려가고 왕은 비통한 모습으로 와니카 곁에 앉는다. 왕은 울먹이고 와니카 숨을 거둔다.)


             와니카, 내가 잘못했어(흐느껴 울며) 불쌍한 와니카, 정말 내가 잘못했어. 용서해줘. 내가 나 자신을 걷어찰 수야 없지 않니. 네가 아니면 이제 누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며 또 그리운 내 고향으로 누가 나를 데려다 주겠는가? 와니카야 불쌍한 와니카야.. 아아.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군. 나는 참으로 멍텅구리야. 그러나 이제 너무 때가 늦었어. 이런 거지꼴이 되어 그분을 만나려면 만나주지도 않을테니 말이야~




             음악과 함께 암전




– 제 5 막 –




             (방파제 돌 몇 개, 무대 왼편에 놓여 있다. 웅성대는 군중, 갈매기 울음소리와 간간이 울리는 뱃고동, 여인과 소년, 선주 및 하인 등장, 그 후 초췌한 모습으로 왕 등장)




여  인       (애걸하는 목소리로) 선주님, 한번만 봐 주십시오. 나리께 진 빚은 살아 생전에 다 갚을 터이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 어린 것은 안됩니다.


선  주       하하하, 살아 생전에 다 갚겠다고? 이 녀석 애비가 그 빚을 다 못 갚고 노예선 선창에서 노를 젓다가 죽었으니 이놈이 그 자리를 채워야 돼.


여  인       안됩니다. 이 아이만큼은 안됩니다.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선  주      하하하. 당신이? 안돼. 뭣들하고 있어. 빨리 이 아이를 끌고 가도록 해.




             하인들 아이를 끌고 여인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이 때 왕은 비장한 모습으로 다가서면서




  왕         여보시오?


선  주       (경멸하는 눈초리로) 당신은 뭐요?


  왕         (낮은 목소리 도전적인 눈초리로)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선  주       뭐라고? 당신이 대신 가겠다고? 하하하


  왕         그렇소


선  주       (주위를 돌며 한참 생각한 뒤 왕의 팔목을 잡아 흔들며) 그래 우리 노를 저을 힘이 있나? 하하하 자신이 있나 말이야?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니야




             하인들 저희들끼리 비웃음




여  인       여보시오 당신은 도대체 뉘시오?


선  주       저리비켜 (여인을 밀치며 왕의 턱을 치켜들고) 자신이 있나 어서 말을 해보란 말이야.


  왕         내가 가겠다고 말했잖소.




             하인들, 저희들끼리 뭔가 숙덕인다.




선  주       (무엇인가 결정한 듯이) 음, 그렇다면 좋아. 야, 이놈들아 무엇들하고 있어? 어서 이놈을 끌고 가도록 해. (하인들 왕의 손과 발목에 족쇄를 채워 끌고 가고 여인 왕의 뒤를 따르면서 절규)


여  인      안됩니다. 선주님,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인 울면서 왕의 손을 잡고)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왕         저 어린 것을 잘 기르시오.




             (모두 퇴장하고 암전. 비장한 음악 높았다 사라지고 북소리에 맞추어 노예들의 노젓는 그림자와 함께 파도소리. 뱃고동소리, 신음소리, 채찍질, 고함지르는 소리 높았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한 무리의 노예들이 노젓는 그림자만 무대 위에 남고 해설자 무대에 등장)




해 설 자     자 여러분, 넷째 왕이 보낸 세월은 이야기하기는 간단하지만 참으로 길고 지루한 세월이었습니다. 끈질기게 목숨을 부지하며 지낸 세월이 어느덧 30년이 지났습니다. 죄인들과 노예들이 노를 젓는 노예선에서 보낸 30년, 그 과부의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죽은 자의 사슬에 얽매여 이 노예선을 탔을 때 그는 순간 순진하기만 했습니다. 죽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기에게 지워준 빚의 액수가 얼마인지, 또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얼마동안이나 노를 저어야 하는지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족쇄가 발목에 죄어들때마다 그는 자기 노역이 끝날 때가 언제인가 물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아직도 멀었다’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억울한 것은 그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노를 젓는다고 알아주는 사람이 이 배에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배의 시설물의 하나처럼 되어버렸고 그가 찾아 헤매던 모든 것도 이제는 모두 허사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다시 고향에 돌아간다 해도 그는 왕관을 쓸 자격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확실히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영영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하게 자신을 괴롭힌 것은 이제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일이 모두 위선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지금의 자기 처지를 생각하면 할수록 이 사실은 가슴에 못을 박는 고통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노를 저을 수 없을만큼 늙고 허약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노예선에서도 더 이상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해설자 퇴장하고 선원, 늙고 병든 왕을 데리고 등장)




선  원      (무대 뒤에서) 어이 영감, 정신 좀 차려. 자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야. 자 시원한 공기를 힘껏 마셔보라고. (늙고 초췌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무대 뒤에서 걸어나오다 쓰러진다. 그리고 객석을 향해 꺼질 듯 사라지는 음성으로)


  왕         그 별이 있는 데가 어디요? 어디쯤이요? 그 별이 (왕은 무대 위에 쓰러지고 음악 높았다 스러지며 하인 1,2 등장)


하  인 1     오늘은 날씨가 찌뿌드드한 게 뼈마디가 욱신욱신하는군.


하  인 2     원참. 나이값 좀 해라. 나이값을. 몇 살이나 먹었다고 원참 더러워서 (쓰러져서 있는 왕을 발견하고) 아니, 여보게 저기 저걸 좀 보게. (하인 1,2 급히 달려가서 흔들어 본다. 그러나 대답니 없다. 그러자 하인 1 일어나서)


하  인 1     벌써 갔어. 혹시 노예선에서 나온 죄수 아닌가? 아이 끔직해라.


하  인 2     여보게. 이리 좀 와보게. (다시 숨소리를 들어본다.)


하  인 1     보나마나 죽었겠지. 뭘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나. 하기는 주인 양반께 보고를 하고 끌어다 보여줘야 할텐데. 좌우지간 오늘은 더럽게 재수없는 날이군. 어쩐지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만




             이때 상인, 무대 위에 등장, 하인 1.2 놀라는 표정으로 주인을 보고




하  인 1     나리, 여기 늙은이 시체가 하나 있습니다.


하  인 2     아니 살아있는 것 같아. 숨소리가 들려요.




             모두 늙은 왕 주위에 모인다. 상인, 왕을 흔들며




상  인       여보 영감, 어디서 왔소?


  왕         …


하  인 2     어디서 왔는냐고 묻지 않소?


             (하인 왕의 얼굴에 귀를 갖다대고 있다.) 나리, 이 양반이 뭐라고


             중얼거립니다.


             상인 다시 흔들며


상  인       어디서 왔소, 영감?


하  인 2     뭐, 저쪽에서…


상  인       저쪽에서라니 어디 말이오, 노예선에서 왔소?


             (왕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다. 상인 일어서서 뭔가 한참 생각한다.) 얘들아 이 영감을 어서 집으로 모셔가도록 해라.


하  인 2     나리, 희망이 없을 것 같은데요


상  인       (귀찮다는 듯이) 시키는대로 해. 너는 항상 왜 그렇게 말이 많은가?




             늙은 왕을 데리고 모두 퇴장




– 제 6 막 –




             무대 중앙 왼편, 간단한 거실, 찻잔이 놓인 작은 탁자를 중심으로 상인과 늙은 왕 마주 앉았고 벽에는 창틀 사이 낡은 액자가 걸려있다. 간간이 들리는 먼 뱃고동 소리.




상  인       그렇다면 당신이 그 배를 탄지가 삼십년이 되었단 말이요?


  왕         그렇소.


상  인       (의아한 듯이) 음. 삼십년이라 참으로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겠습니다.


  왕         …


상  인       보아하니 당신은 포악한 죄수나 노예신분같지도 않은데 왜 그런 배를 타게 되었소?


  왕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상  인       당신이 자진해서 그 배를 탔소?


  왕         아니오. 그동안 모든 은혜는 정말 감사하오. 젊은양반.


상  인       (일어나면서 한숨을 쉬며 회상에 잠긴 듯한 표정) 나에게 감사할 것               은 없소. (의아한 표정으로 왕 일어선다.) 당신이 감사드려야 할 분은               이미 돌아가셨소.


  왕         그렇다면..


상  인       왜 그게 누구신 줄 안단 말이오?


  왕         허허 아니오


상  인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유언이었지요. 도둑들과 강도, 살인자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오.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지요.


  왕         당신의 어머니가..


상  인       예, 그렇소. 자식 노릇하기도 쉽지는 않소.




             상인과 왕은 30년전 그 날을 회상하며 관객을 응시하고 음악과 함께 무대 중앙 오른편 푸른 조명 아래 여인과 소년 그리고 선장 하인들 삼십년 전 그날 오후의 일들이 무언으로 재현되다가 일순간 모든 동작이 고정된다. 그리고 퇴장




  왕         당신의 어머니는 참으로 착한 분이었군요.


상  인      글쎄요. 참으로 착한 그 사람은 그 날 그 사람. 나는 평생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소.


  왕         그 사람이라니요? 그 분은 어떤 사람인데요?


상  인       (놀란 듯이 왕을 쳐다보면서) 당신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데가 있소.


  왕         …


상  인       혹시 당신이 무엇 때문에 그 배를 타게 되었는지 좀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왕         허허. 별다른 이유가 없다니까요.


상  인      (고개를 끄덕이면서) 좋습니다. 지난 날의 남의 어두운 비밀을 자꾸 들춰내려는 것은 좋지않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노예선에서 나온 놈들은 모두 쓰레기같은 녀석들 뿐이었소. 그놈들을 돌본다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거지요.


  왕        그래도 불쌍한 사람임엔 틀림없지요.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겠지               요.


상  인       도움? 하하하 이 손발이 부서지도록 일을 해서 벌은 돈이오. 애써 모은 재산을 시궁창에 그냥 내버리는 것과 다를 게 뭐 있단 말이오?


  왕         …


상  인       그래도 난 어머니 때문에


  왕         당신 어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앞으로도 언제나 그래야지요.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십시오.




             왕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상  인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왕         꼭 찾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찾아가야 할 곳이?


상  인       거기가 어딘가요?


  왕         (천천히) 꼭 찾아가야 할 곳이 있어요.




             왕 퇴장




– 제 7 막 –




             무대 중앙을 중심으로 작은 바위 두엇 있고 무대 양편의 몇 그루 나무들 사이. 멀리 작은 집들이 보이는 언덕, 화창한 날씨, 길을 가는 군중들 소리, 남루한 차림의 왕 등장




  왕        어디 보자, 그 옛날 그 별이 마지막으로 빛나던 곳이 어딘가? 옳지 저 산기슭이군. 그렇지 분명히 저쪽이야.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사람들인가? 웬 사람들이 이렇게 번잡할까? 그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한 무리 남녀들이 깔깔거리며 등장) 여보시오. 모두들 어디로 갑니까?


아 가 씨     아니 할아버지 어디에 사시는데 그것도 모르세요? 축제가 있는 줄을               모르세요?


  왕         뭐라고요?


청  년       축제가 있다고요, 축제!




             젊은 남녀 퇴장하고 무대 오른편 거지 노파가 등장한다. 노파는 무대 중앙 작은 돌 위에 앉아 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왕도 앉아서 노파의 얼굴을 본다.




노  파       아휴 힘들어라.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땀을 닦고 동냥자루에서 먹을 것을 꺼내어 먹으면서 일어나 무대 왼편으로 퇴장. 왕은 노파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


  왕         저 양반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 그때 헛간에서 만난 그 여인도 지금은 저렇게 되었을테지. 아마 난 또 쓸데없는 공상을 하나보군. 인생에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 일이란 대부분 운명의 장난에 불과하지. 사랑이란 것도 그렇지. 하지만 사랑은 확실히 아름다운 것이야. 가장 무서운 교훈을 주는 것도 사랑이지만.


             (다시 일어나서 무대 왼편으로 걸어나간다) 벌써 날이 저무는군. 어디 쉴 곳을 찾아야할텐데.


             (암전된 상태에서 큰 바위 하나를 무대 중앙에 위치시킨다. 그 바위 옆에 왕은 짐을 풀고 바위에 기대 앉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노파 동냥자루에서 무엇인가 찾다가 한 줄기 나팔소리에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다가 왕을 발견하고 말을 건넨다.)


노  파       여보시오, 늙은 양반. 이 곳에 잔칫집이 있다는데 그게 어디쯤이오?


  왕         …


노  파      늙은 양반, 얻어 먹는 사람은 우선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살 행동을 해야되는데 늙은 양반,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시오?


  왕         …


노  파      아니 이 양반 남의 말에 한마디 대꾸도 없이 잠들어 버렸군. 여보시오. 늙은양반, 원참 이 초저녁에 벌써 잠이 들다니. 어디서 왔소 늙은 양반?


  왕         아주 멀리서 왔지요


노  파       저런 이 양반 보게나. 잠든게 아니로군.


  왕         할멈은 어디에 사는 분이오?


노  파       거지에게 집이 어디 따로 있소? 하늘 아래가 다 내집이지.


  왕         당신을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하구려.


노  파       나도 일생동안 좋은 일을 아주 많이 했다고요. 비록 직업은 거지였지               만.


  왕         허허허 뭐라고요? 거지로서 남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소?


노  파       남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법               이오.


  왕         하하하 거지가 자기한테 동냥을 준 은인에게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단 말이오?


노  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면 되는 법이오.


  왕         모든 걸 가지고 있다면 왜 빌어먹는단 말이오? 구걸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는 증거가 아니오?


노  파       아, 영감은 그걸 알아듣지 못하는구려. 분명히 나보다 더 늙은 것 같은데도. 이를테면 돈보다 물건보다 더 중요한 것을 거지도 가지고 있다는 거요.


  왕         그게 뭔데요?


노  파       따스하고 다정한 미소, 다정한 말 한마디는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환한 날개를 달아주고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오.


  왕         허허허


노  파    나는 언젠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버린 일이 있어요. 아, 그땐 나도                     젊었지요.


  왕         하하 그랬었군요.


노  파       여보시오, 그렇다고 내가 동냥을 얻기 위해 몸이라도 판 것으로 생각지는


              마시오.


  왕         아니 도대체 무엇을 선사했는데요?


노  파       삼십년 전 어느날 저녁 죽어가는 나를 도와 준 어느 남자에게 내 마음을 선사했지요. 그분은 정말 친절하고 자비로운 분이었지요.


             (왕은 놀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시오? 나는 그후로 정말로 행복했답니다. 내 마음은 그분의 영토, 그분은 그 영토의 임금님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지금까지 나는 아무 것도 잃은 게 없답니다. 살아 생전에 그분을 만나는 것이 내 소원이라오.


  왕         (자리에 앉으면서) 그렇지요. 당신은 정말 아무 것도 잃은 게 없군요.




             왁자지껄한 군중 소리가 가까워진다. 무기들이 맞부딪치는 소리, 나무숲 사이를 지나는 바람소리, 군중의 웅성대는 소리




군  중       자칭 유대의 왕,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십자가에 못박               으시오.




             왕은 놀란 듯이 일어나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왕         왕, 왕이라니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왕이란 어떤 왕을 말하는가?


노  파       이 가엾은 것들, 저들의 가장 위대한 왕을 저토록 핍박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지요


  왕         그게 무슨 말이오?


노  파       아니, 당신은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예루살렘 큰 길을 지나오면서도 그 얘길 못들었단 말이오. 참 딱도 하구려. 성경에도 있고 예언자들도 말했던 그 임금 말이오. 그분은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죽은 사람도 다시 살려내신 분이오. 나도 그분을 한 번 만나 뵌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백성들은 이방인들에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치고 인는 판국이오.


  왕         할멈은 그 얘길 어디서 들었소?


노  파       참 딱하기도 하구려.


  왕         (다가서면서) 그 왕의 연세는 얼마요?


노  파       (침착한 태도로) 그분의 나이요? 서른살 가량 되지요.


  왕         (놀라면서) 뭐라고? 서른살이라고? 서른살?


노  파       그래요. 서른살 정도된다오. 아니, 왜 그러시오?


  왕        서른살 서른살이라고… 그렇군요. 헛간에서인가 외양간에서 아기를 낳고 내가 갖고 있던 아마포로 강보와 기저귀를 만들라고 준 그때였소.


노  파       (절박한 감정으로) 아니,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이 바로 그분이었소?




             왕은 노파를 뿌리치고 일어나서 객석을 향하여 절규, 노파는 왕을 붙들려다 땅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왕         (절규) 그 임금은 어디 계시오. 어디갔소? 어디로 가셨소, 어디로..




             십자가에 못박는 소리 요란하게 울리고 무대 위에 그림자로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세 개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왕은 미친 듯이 비틀거리며 그 앞에 다가선다. 이 때 천둥과 번개 요란하다. 군중들 고함소리와 괴성.




군 중 들     지진이다. 지진이야. 사람살려 사람 살려요!




             이때 왕은 굴러오는 돌에 맞아 쓰러지고 십자가를 향한다. 비장한 음악 높았다 사라진다.




  왕         주님, 저는 아무 것도 가진게 없습니다. 주님께 갖다 드리려고 했던 선물을 죄다 없애버렸습니다. 황금과 보석, 아마포와 모피, 그리고 꽃꿀을 낭비하고 말았습니다.


목 소 리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너는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너는 내가 매맞았을 때 그 매를 대신 맞아 주었다.


  왕         주님, 제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쓰러진 채 십자가로 더 가까이 간다.




목 소 리     보잘 것 없는 네 이웃 형제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를 위해 한 것이               다.


  왕         주님, 당신께 드릴 것은 아무 것도 없사오나 저 가련한 여인의 영혼을 그리고 제 영혼을 당신의 영원한 나라의 선물로 받아주십시오.




             왕은 숨을 거두고 흑인 영가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너는 어디 있었나”로 서서히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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