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씩 알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줍니다.
탈리다 쿰 |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슬기로운 사람이 됩시다. |
2003년도 학생회 목표 “친구들에게 관심을“ | |
주요 실천 사항 : ① 친구에게 멜 보내기 ② 학생미사 참례하기 ③ 교리공부하기 | |
◈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1. 독서와 복음의 내용
1독서: 사제 즈가리야는 왕과 고관들이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너희가 주님을 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버리리라.”그러자 사람들은 즈가리야를 주님의 성전 마당에서 돌로 쳐 죽입니다.
2독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해야 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 내는 근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박해를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해 주십니다.
2. 오늘 독서와 복음의 핵심 ☞ 고통속에서 희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제 즈가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상에 빠져 있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죽여 버립니다. 사도들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했기에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목숨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분들은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심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선조들의 피로써 신앙을 이어받은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의 상황은 결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들보다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임은 틀림 없습니다.
어떤 경우가 나의 신앙을 흔듭니다.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고, 누가 있어 나의 신앙생활을 박해합니까? 누가 나를 방해하여 주일에 성당을 못 나오며, 누가 나를 방해하여 성호경을 긋지 못합니까? 누가 방해하여 성서를 읽지 못하고, 누가 방해하여 다른이들에게 신앙을 권면하지 못하게 합니까? ………….바로 나 자신이 아닙니까?
모든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 김대건 신부님은 누구시죠? ◈
1. 신학교에 입학하기 까지
김대건(아명 김 재복, 족보명 김 지식. 안드레아, 1821-1846)은 1821년 8월 21일에 충청도 솔뫼 지방에서 태어났으나, 경기도 용인 지방의 ‘골배마실’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서당과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익히고 열심한 부모 특히 어머니 고 우르술라에게서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던 그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재주와 강한 의지력, 경건한 신심을 보여주어 1836년 6월에 사목 방문으로 지방 순회하던 모방 신부의 눈에 띄었다.
모방 신부는 15세의 소년을 며칠 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에 그에게서 사제 성소를 발견하고 그의 부친과 상의하여 예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김대건은 7월 11일에 모방 신부를 따라 한양에 올라와 먼저 선발된 최 양업과 최 방제와 합류하여 라틴어와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모방 신부는 세 소년을 안전한 방법으로 효과 있게 교육시키기 위해서 마닐라나 싱가포르 또는 페낭에 있는 신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836년 12월 2일에 김대건은 두 동료와 함께 모방 신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조선 교회 책임 신부들에 대한 순명을 선서하였고, 장상들의 허락 없이는 다른 지방으로 가거나 수도회에 입회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1주일 후에 귀국하는 유 방제 신부를 따라 국경을 넘어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 지부에 도착하였다. 파리 외방 전교회 마카오 지부는 그곳에 신학교를 세워 깔레리 신부가 교장으로 동료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교육하였다. 그동안에 마카오에서 내란이 일어나 그는 두 차례에 걸쳐(1838년 8월, 1839년 4월) 동료들과 마닐라로 피난가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며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김대건은 어학과 철학 과정을 끝내고 신학 공부에 들어갔다.
2. 조선 입국 시도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일어난 아편 전쟁(1840-1842) 중에 프랑스도 중국 이권 경쟁에 개입하기 위해 세실 제독의 ‘에리곤호’와 빠쥬 제독의 ‘파보리또호’를 극동에 파견하였다. 1841년 12월 8일에 마카오에 상륙한 세실 함장은 중국 이외에 조선 왕국과도 통상 조약을 맺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마카오 지부장인 리보아 신부에게 통역으로 조선인 신학생의 동승을 요청하였다. 리보아 신부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 조선 교회의 사정을 파악하고 선교의 활성화를 위해 쾌락하였다. 1842년 2월 15일에 김대건은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에리곤호에 승선하여 2개월 후에 양자강 어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남경조약의 체결(1842년 8월 29일)로 끝나 프랑스 함대는 극동에서 이권 추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조선 출동을 취소하여 김대건은 매스뜨르 신부와 함께 하선하였다. 2개월 후에 최 양업이 ‘파보리또호’로 만주 교구의 브뤼기애르 신부와 함께 도착하였다. 1842년 10월 20일에 김대건 일행은 육로를 통하여 조선에 잠입하기로 결정하고 요동 지방의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몽고 지방으로 떠나는 최 양업과 헤어진 후에 매스뜨르 신부와 조선 잠입을 탐색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양인의 여행이 위험하기 때문에 혼자서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1842년 12월 23일에 국경 지방으로 떠났다. 그는 도중에 북경으로 들어오는 조선 사절단 일행에 끼인 김 프란치스꼬라는 교우를 만나 기해대박해와 성직자 영입 운동의 소식을 듣고 먼저 자신이 입국하여 매스뜨르 신부의 영입을 준비하기로 결심하였다. 김대건은 조선 변문(의주)에서 조선에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한양으로 향하다가 부자연스런 언행으로 주님들의 의심을 받아 신변의 위험을 느껴 1843년 1월 6일에 온갖 고생 끝에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1843년 4월에 김대건은 몽고 팔가자(八家子)로 옮겨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844년 2월에 페레올(고) 주교(1843년 1월,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됨)의 명령으로 조선 동북부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우와 만나 주교의 입국을 논의하였으나, 안전하지 않아 압록강의 서북부 국경로를 이용하기로 합의하고 4월에 팔가자로 돌아왔다. 1844년 12월 17일에 신학 공부를 끝내고 김대건은 부제품을 받았다. 1845년 1월에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중국 국경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마중나온 교우들이 외국인 주교의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여 그는 혼자 들어가서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기로 결정하였다. 김 부제는 로사리오 기도를 되풀이하면서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맨발로 눈이 쌓인 길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1845년 1월 15일에 한양에 도착하였다.
3. 교회 활동
김대건 부제는 현 석문(가롤로)이 마련한 집에 은신하면서 교회 사정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월에 그는 고생스러운 여행에서 오는 긴장이 풀려 병석에 누워 2주일 동안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김 부제는 리보아 신부에게 그의 귀국 사실과 함께 엥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의 순교 상황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에 천연두(마마)로 희생된 수많은 어린이들을 구하기 위해 약을 부탁하면서 치료법을 문의하는 등 동포애를 보이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자기 귀국 사명인 성직자 영입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려는 서양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지리 지식을 제공하여 입국을 쉽게 하기 위해서 조선 지도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페레올 주교와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거주할 집을 충청도 해안 지방에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울 석관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김대건은 배를 한 척 사서 상해로 여행할 교우를 선정하고 사공들도 구하였다.
1845년 4월 30일에 김대건 부제는 사공 네 명을 포함한 11명의 교우들을 데리고 인천 제물포에서 중국 상해로 출범하였다. 이때에 그는 발각의 위험 때문에 고생하는 어머니에게 자기 귀국 소식도 알리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불효의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바다에서 3일 동안의 폭풍우와 해적선의 위험을 극복하고 6월 4일, 무사히 상해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7월 28일에 페레올 주교에게 자기의 상해 도착을 알리면서 상해로 오시도록 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다음달에 주교는 다블뤼(안) 신부를 대동하고 상해에 도착하였다.
1845년 8월 17일에 김대건 부제는 상해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서품을 받고 8월 24일에 만당(萬堂)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하였다. 1주일 후에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보시고 상해를 떠나 제주도 연안에 표류하였다가 10월 12일에 충청도 강경 지방의 황산포에 상륙하여 한양에 들어왔다. 그는 24년 만에 신부가 되어 어머니와 극적인 상봉을 하고 2개월 동안 함께 지내다가 페레올 주교의 명령을 받고 한양에 올라옴으로써 어머니와 헤어졌다.
4. 체포 및 순교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가 해로를 통해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김 신부는 1846년 5월 14일에 신자들과 함께 서해안으로 나가 5월 29일에 관리들의 감시망을 뚫고 백령도에 도착하여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의 선원들과 접촉하여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자기의 편지(조선 입국을 대기하고 있는 베르뇌 신부와 매스뜨르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조선 지도 등을 전달하고 황해도 순위도에까지 무사히 돌아왔으나 이곳에서 6월 5일에 체포됨으로써 병오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는 다섯 명의 신자들과 함께 해주 감영에 끌려가 네 차례에 걸쳐 심문을 받으면서 배교의 강요를 받았고 다시 한양의 포도청에 이송되어 40차례에 걸친 심문과 고문을 받았다. 재판관들과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의 외국어(중국어, 라틴어, 불어 등) 실력과 폭넓은 서양 지식에 놀랐고 어떤 대신들은 그에게 지리서 편술과 세계 지도(영국제)의 번역을 부탁하여 옥중에서 두 장의 지도를 채색하여 한 장은 국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재능은 조정의 인정을 받아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 신부를 위한 구명운동을 벌여 그에 대한 판결이 3개월이나 연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46년 6월에 세실 제독이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충청도 홍주에 나타나 기해대박해 중에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사실을 항의, 문책하는 서신을 주민들을 통해 조정에 전달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천주교와 김 신부에 대해 강경책을 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친구인 최 양업 신부와 페레올 주교에게 자기 어머니를 부탁하는 마지막 효심을 보이고 교우들에게는 신앙 강화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1846년 9월 15일에 국사범으로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 한강 새남터에 끌려 나왔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나의 하느님과 종교를 위해서였읍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그는 형리에게 편하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자세를 묻고 그의 주문대로 자세를 취해 주기도 하였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신부는 이렇게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