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연중 제 4주일 셀모임 자료

 

연중 제 4주일










탈리다 쿰


    


         “행복한 가족 구성원 되기“


주요 실천 사항 :

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기  ② 미사, 셀모임 참석하기 





행복한 사람들


1.시작기도: 말씀읽기: 마태 5,1-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 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다가 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0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행복한 사람들


오늘 예수님께서는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행복한 사람인지, 내가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사람들은 배고프고 짓밟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종이 주인한테 대들면 맞아 죽던지 팔리던지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마태오 복음사가가 복음을 기록할 때 보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태오는 가난한 자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재산은 많아도 하느님을 공경하며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며 사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슬퍼한다는 것은 슬피운다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육체나 영혼에 있는 여러 가지 고통을 참아 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슬픔이 너무도 커서 마치 어머니가 죽어서 우는 것과 같이 그렇게 슬피 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슬픔, 가혹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슬픔, 그리고 잔인한 운명에 대한 슬픔, 그리고 이 눈물에는 유혹이나 죄를 용서받은 것 때문에 흐느끼는 슬픔의 눈물(예수님의 부활을 본 뒤 자기 죄를 뉘우치며 불행한 상태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형태가 바로 통곡)도 엉켜 있을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을 예로니모와 레오는 “남의 죄를 슬퍼하는 사람, 자기 죄를 슬퍼하는 사람(암브로시오)”을 말한다고 한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메시아가 가져다주는 행복 때문만이 아니라, 그 슬픔의 교훈으로 현세를 떠나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하며 그리스도교의 희망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근심스러운 눈초리와 우울한 낯빛과 절망스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고통 속에서도 마음을 하느님께 열어 놓고 예수님께 위로를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과 역경이라는 인생의 학교에서, 생명의 가치를 배운 사람은 정녕 행복하리라(참조: 집회서 34,9, 마태11,29)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온유한 사람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아람어에서는 이 두 단어가 거의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은 모두 검소하고 가난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자비에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압박하거나 착취하지 않으며, 복수를 하거나 폭력으로 목적을 성취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사회적 불의를 증오하시고 오만한 박해자를 단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사 61장에 보면 유배중이고 땅도 다 빼앗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고 이제 하느님밖엔 없는 사람들이기에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상속받으리라는 것은 온유한 자가 언젠가 얻게 될 땅은 하늘나라와 다른 것이 아니며 이 하늘나라는 새로운 땅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고 한 표현은 성서적 표현입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미 구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아모 8,11)과 은혜(이사55,1-2)및 하느님의 현재함(시편42,3)을 동경하는 것에 대해 자주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의 대상은 개종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구약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했고 구원에 목말라했던 것을 예수님이 채워주셨구나” 하고 보기에 자연스럽게 목마르다는 표현이 들어갑니다.


하느님을 믿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가난을 감수하고, 고통을 참으며 역경 가운데에서도 인내하는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며 그분의 섭리와 정의의 질서에 협력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는 예수님 말씀과 삶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라고 하셨고, 율법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도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하느님께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자비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마태18,30)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유다인들은 정결을 강조했는데 깨끗하다는 것은 유다인에게는 중요한 삶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을 때도 손을 씻고 먹었습니다. 깨끗해지는 방법은 더럽혀진 몸을 예식을 통해서 깨끗해지는 것이 있고, 마음이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마음은 항상 그 존재의 기초를 말하는데 인간 존재의 밑바탕을 이루는 것이 마음이라고 했는데 이 마음에서부터 하느님을 믿고 안 믿고, 선과 악이 나옵니다. 따라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향한 순진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평화는 최고의 축복이요 은혜였습니다. 즉 하느님의 모든 축복이 평화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도 부활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화 있기를” 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도 활동의 특별한 임무인 것이며, 그것은 바오로가 말한 화해시키는 임무이며 화해의 이치를 전하는 임무(2고린5,18-21)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들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존재이고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은혜인데 최후 심판 때 영원한 생명으로 주는 것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종말론적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기도를 하기 전에 삼가 아뢰오니 라는 말이 아니라 “감히 아버지라 아뢰오니”가 합당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사가 시대에까지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구약성서의 전통 안에 여전히 서 있었는데 이 전통에서는 분에 넘치며 은혜로운 계약에 관한 지식이 아버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억제시켰고 요한은 처음부터 용어를 다르게 썼습니다. 즉 예수님은  아들 υιοS로 그리고 우리는 자녀들  ΤεΚνα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바울로는 우리가 다만 그 아들을 믿든 자로서 그의 영에 동참함으로써만 아들들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해줍니다(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보내신 영에 의해 우리가 영으로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얻어 맞아가면서도 싸움 말리고 화해시키는 사람이 아닐까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박해는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보편적인 유다인들의 행복관이었고 박해받는 자는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사실이 예수님 당시 널리 유포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시편들을 알고 있었기에 (시편22;34,20등)신약에도 내려와 후기 베드로전서에도 義를 위한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욕이라는 그리스말(오네이디소신-오노스-당나귀, 에이도스-꼴, 모습)은 글자 그대로 나귀의 모습, 나귀 머리라고 하는 듯으로 심한 모욕이었습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모욕하기 위한 낙서가 로마의 파라딘 언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나귀 머리를 한 사람을 매달아 놓았으며, 그 발밑에서 한 신자가 예배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로마의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나귀 머리를 믿는 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박해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예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 대한 박해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인들이 악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기에 오는 것들입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갖는 비난을 다 받게 된다는 것” 그것은 중상 모략입니다. 영혼을 지닌 사람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중상 모략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느님이시고 사람이시며 그 명예가 더럽혀지는 일을 참아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러 모욕, 이런 고통도 참아야 합니다.




예전에 한 여인이 있었는데 남편한테 얻어맞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편이 성당에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이랑 사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는데 성당에 나가지 말라니 당신이랑 그만 살아야겠군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놀래서 마침내 그도 성당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까?




2. 내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공지사항


1. 셀모임에 적극 참여 합시다. 2. 올 해는 학생미사에 빠지지 맙시다.


3. 희망찬 새로운 이 해에 학생회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해 봅시다.




4. 말씀으로 기도하기(적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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