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리다 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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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멋진 학생회를 위하여“ | |
주요 실천 사항 : ① 하루에 3번 성호경 긋기 ② 미사, 셀에 참석하기 | |
“진리를 행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1. 말씀읽기: 요한3,16-18
16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7 사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를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외아들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예수님! 그분이 왜 하늘에서 내려오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복음을 믿어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께서 어떠한 값을 치르고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16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단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즉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18 그를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외아들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 그리고 믿지 않는 이들. 구원을 얻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인데 그것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잃은 것인가는 나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각각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실이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 폭로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빛(예수님)에 대한 나의 태도가 구원을 결정합니다. 빛을 버린다는 것은 진리의 요구에 따라 사는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빛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고, 빛의 비추임 안에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빛 안에서 사는 삶….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빛과 어두움. 참으로 좋은 표현입니다. 어두움에 있을 때는 빛 속으로 나아가길 거부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빛 속에 있을 때는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 빛과 어두움의 경계는 어디입니까? 빛에 드러내기 싫은 부분은 어떤 부분입니까?
2. 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삼위일체 교리
1. 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
구약에서는 위격이나 삼위일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역사적으로 많은 교부들이 구약의 많은 본문을 삼위일체 진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창세기1,26절의 우리라는 말마디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세인물의 방문(창 18,1-16), 이사야의 삼중찬미를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계시라고 보았지만 그 신빙성은 약하다. 구약은 신약 계시의 준비일 뿐이다. 구약을 바탕으로 삼위일체의 신학적 전개는 어렵다. 하지만 구약의 계시가 궁극적인 신약의 계시를 지향하고 있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이해와 측량을 뛰어넘는 파악할 수없는 하느님의 충만한 풍요성이다.
신약성서에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삼위일체 정식은 예수님의 직제자들에게는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당히 일찍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신약성서는 삼위일체 신비가 그리스도와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성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결코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창조, 구원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 얻어낸 진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명백하게 게시되는 정도에 따라 그 분명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체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신비가 이성적으로 남김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본다.
2.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창조주시요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야훼”라 부르며 흠숭해 왔는데,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이 하느님을 아버지(聖父)라고 부르고 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일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마태 26,39.53; 마르 14,36; 요한 14,2.7)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이르시는 말씀에서는 ‘너희의 아버지(루가 6,36; 마태 6,4.6.8; 7,11)라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그분께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요한 1,14) 분이시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 인성(人性)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성령의 활동이 나타난다. 많은 예언자들에게 성령의 힘을 입혀주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탄생이나 말씀이나 행동도 성령이 같이 하셨다. 특히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의 특별한 전능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복음 전파와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일에 성령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은 무한히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여럿일 수 없다. 오직 한 분만이 계실 뿐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부가 계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성자도 계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도 계신다. 이 때문에 마치 하느님이 세 분인 것 같이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다 같이 하느님이시면서도 하느님은 세 분이 아니고 오직 한 하느님이시다. 이 신비를 ‘삼위일체’라 한다.
성경에는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는 말도 있고 아들과 성령은 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성부가 가장 높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고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온 것이니 그 지위가 성부보다 낮다고 하였으면 좀 납득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일종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교리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에게는 서로 높고 낮음이 없다.
또 성부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성자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성령은 거룩하게 하는 직분을 자지고 오셨는데,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창조 때부터 예수님의 강생까지를 성부의 시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을 성자의 시대, 성령이 강림한 그 이후를 성령의 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린 해석은 상식적으로 알아 듣기 쉽고 그럴 듯하게 생각되지만 교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해석이다. 하느님은 신령한 분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 분은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는 것이다. 세 분은 다 같이 전지 전능하시고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하느님이시다. 또 세 분의 역할은 각각 다르지만 활동하실 때에는 언제나 세 분이 다 함께 하신다. 이와같이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느님은 본질도, 권능과 영광도 같다. 다만 그 위격이 다를 뿐이다,
3.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
1.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의 하느님이시며 이 위격들은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다.
2.세 위격들이 구별된다. 성부 위격은 무근원적 위격이고, 성자의 위격은 성부로부터 출생되는 위격이며, 성령의 위격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는 위격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리고 출생과 발출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다만 유래성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3.이 하느님의 세 관계적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질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느님의 유일성이 강조된다.
4.하느님의 위격들은 존재 안에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를 향하는 하나의 역사 원리다.
4.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는 오직 성부와 관계 안에서 사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자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고, 하느님을 향한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 될 때 우리는 하느님과도 하나가 된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사랑 안에서 일치의 삶을 살도록 보여주는 하느님의 신비이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삼위일체의 삶이 되어야 한다.
4. 공지사항
1. 성당에 일찍 옵시다. 2. 셀 모임에 적극 참여 합시다. 3. 개인 성가책 가지고 다닙시다.
5. 말씀으로 기도하기(적어봅시다)

삼위일체 대축일
탈리다 쿰
“더 멋진 학생회를 위하여“
주요 실천 사항 :
① 하루에 3번 성호경 긋기 ② 미사, 셀에 참석하기
“진리를 행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1. 말씀읽기: 요한3,16-18
16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7 사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를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외아들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말씀연구
예수님! 그분이 왜 하늘에서 내려오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복음을 믿어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께서 어떠한 값을 치르고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16 과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단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즉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18 그를 믿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외아들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 그리고 믿지 않는 이들. 구원을 얻기 위한 단 하나의 수단인데 그것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잃은 것인가는 나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각각의 입장은 이러합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실이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모두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 폭로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빛(예수님)에 대한 나의 태도가 구원을 결정합니다. 빛을 버린다는 것은 진리의 요구에 따라 사는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빛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고, 빛의 비추임 안에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빛 안에서 사는 삶….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빛과 어두움. 참으로 좋은 표현입니다. 어두움에 있을 때는 빛 속으로 나아가길 거부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빛 속에 있을 때는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 빛과 어두움의 경계는 어디입니까? 빛에 드러내기 싫은 부분은 어떤 부분입니까?
2. 나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삼위일체 교리
1. 성서에 나타난 삼위일체
구약에서는 위격이나 삼위일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역사적으로 많은 교부들이 구약의 많은 본문을 삼위일체 진리를 암시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창세기1,26절의 우리라는 말마디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세인물의 방문(창 18,1-16), 이사야의 삼중찬미를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계시라고 보았지만 그 신빙성은 약하다. 구약은 신약 계시의 준비일 뿐이다. 구약을 바탕으로 삼위일체의 신학적 전개는 어렵다. 하지만 구약의 계시가 궁극적인 신약의 계시를 지향하고 있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이해와 측량을 뛰어넘는 파악할 수없는 하느님의 충만한 풍요성이다.
신약성서에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삼위일체 정식은 예수님의 직제자들에게는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당히 일찍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이해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신약성서는 삼위일체 신비가 그리스도와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계시되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성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결코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창조, 구원 역사와의 연관 속에서 얻어낸 진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명백하게 게시되는 정도에 따라 그 분명성을 드러낸다. 이처럼 체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신비가 이성적으로 남김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본다.
2.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은 창조주시요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을 “야훼”라 부르며 흠숭해 왔는데, 신약 시대에 이르러 우리는 이 하느님을 아버지(聖父)라고 부르고 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일러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언제든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마태 26,39.53; 마르 14,36; 요한 14,2.7)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이르시는 말씀에서는 ‘너희의 아버지(루가 6,36; 마태 6,4.6.8; 7,11)라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그분께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요한 1,14) 분이시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 인성(人性)을 취하셔서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성령의 활동이 나타난다. 많은 예언자들에게 성령의 힘을 입혀주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탄생이나 말씀이나 행동도 성령이 같이 하셨다. 특히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의 특별한 전능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복음 전파와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일에 성령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은 무한히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여럿일 수 없다. 오직 한 분만이 계실 뿐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부가 계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성자도 계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도 계신다. 이 때문에 마치 하느님이 세 분인 것 같이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다 같이 하느님이시면서도 하느님은 세 분이 아니고 오직 한 하느님이시다. 이 신비를 ‘삼위일체’라 한다.
성경에는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는 말도 있고 아들과 성령은 다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성부가 가장 높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나고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온 것이니 그 지위가 성부보다 낮다고 하였으면 좀 납득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일종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교리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에게는 서로 높고 낮음이 없다.
또 성부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성자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성령은 거룩하게 하는 직분을 자지고 오셨는데,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창조 때부터 예수님의 강생까지를 성부의 시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을 성자의 시대, 성령이 강림한 그 이후를 성령의 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린 해석은 상식적으로 알아 듣기 쉽고 그럴 듯하게 생각되지만 교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해석이다. 하느님은 신령한 분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 분은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는 것이다. 세 분은 다 같이 전지 전능하시고 시작과 끝이 없으시며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하느님이시다. 또 세 분의 역할은 각각 다르지만 활동하실 때에는 언제나 세 분이 다 함께 하신다. 이와같이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느님은 본질도, 권능과 영광도 같다. 다만 그 위격이 다를 뿐이다,
3.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
1.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데 이들은 하나의 하느님이시며 이 위격들은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다.
2.세 위격들이 구별된다. 성부 위격은 무근원적 위격이고, 성자의 위격은 성부로부터 출생되는 위격이며, 성령의 위격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는 위격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리고 출생과 발출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다만 유래성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3.이 하느님의 세 관계적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질에 있어서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느님의 유일성이 강조된다.
4.하느님의 위격들은 존재 안에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외부를 향하는 하나의 역사 원리다.
4.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는 오직 성부와 관계 안에서 사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자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고, 하느님을 향한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된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 될 때 우리는 하느님과도 하나가 된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사랑 안에서 일치의 삶을 살도록 보여주는 하느님의 신비이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삼위일체의 삶이 되어야 한다.
4. 공지사항
1. 성당에 일찍 옵시다. 2. 셀 모임에 적극 참여 합시다. 3. 개인 성가책 가지고 다닙시다.
5. 말씀으로 기도하기(적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