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나타난 가난- 구약, 신약

 

Ⅱ. 성서에서의 가난




   1. 구약성서 안에서의 가난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가난이란 개념은 예수에 의해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가난이란 개념은 예수에 의해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예수의 언행과 행적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토양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을 그 뿌리로 하고 있으니 결국 가난이란 개념에 대한 탐구는 구약까지 소급될 수밖에 없다.


구약성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난’에 관련된 여러 단어들은 구체적으로 ‘가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가난한 사람’의 생활과 연관시켜서 여러 낱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가난한 이”에 대해서 사용된 구약성서의 각 어휘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ebon”1)은 “구하는 사람, 거지, 없는 사람, 남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의미하는 바 “물질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자… 집단적으로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dal”2)은 “약자(弱者) 또는 허약한 사람”을 가리키며, ‘시골의 가난뱅이들’이라는 표현은 빈번히 나온다. 즉 “이스라엘의 천한 계급에 있는 사람으로서 물질적인 부나 사회적인 힘의 결핍”을 의미한다. “ani”3)는 “굽신거리는 사람, 품팔이하는 사람, 기력이 없는 사람, 천대받는 사람”을 뜻하며, 어원상으로는 “ani”와 같으나 종교적 색채를 띤 “anaw”는, 대개 복수형인 “anawim”으로 사용되면서 “하느님 대전에 겸허한 사람”을 의미한다. 원래 “anawim”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마음의 상태는 “anaw”이며,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정의를 갈구하는 것”(지혜 2, 3)이며, 또 하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잠언 22, 4)이다. 이 밖에도 “신앙과 하느님에 충실하는 것”(집회 45, 4;민수 12, 3)을 나타내는 의미도 있다.4)


하지만 성서에서 이러한 단어들의 의미가 그대로 고수된 것은 아니었다. 즉 “ani”와 “ebyon”은 시편이나 다른 여러 성서 구절에서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제 단어들의 얽매이기보다는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가난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겠다.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가난에 대한 내용을 볼 때 가난에 대한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그 사상으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첫째는, 가난을 불의로 본다는 것이다. 선택된 민족 사이에는 가난이 존재하는 자체가 불의이다. 그 예로는 욥기(24, 2-10)가 묘사하는 혹독한 곤경에 빠진 가련한 농부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따라서 가난은 숙명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고발하는 그 인간들의 못된 행동 때문에 가난이 생긴다. 부정한 상술과 착취(호세 12, 8;아모 8, 5;미카 6, 10-11;이사 3, 14;예레 5, 27;6, 12), 탐관오리(아모 5, 7;예레 5, 28)들 때문에 불의의 가난이 생기는 것으로 본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난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과의 유대와 인간과 하느님의 친교에 균열이 있다는 표시이다. 가난은 죄(곧 사랑의 거부)의 표징이다. 그러므로 가난은 하느님의 나라(사랑과 정의의 나라)와 공존할 수 없기에 불의인 것이다.5)


둘째로, 가난은 하느님을 맞아들일 자격이요, 하느님께 대한 자기 개방이요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겠다는 용의(用意)이며, 하느님 대전의 겸손이다. 특히 anaw(복수로는 anawim)라는 용어는 종교적인 용어로서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칭호로 쓰이고 있다. 스파니아 예언자 이후에 이스라엘은 역사적인 체험을 겪으면서 이 정신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켰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를 드리면서 자기 자신을 ‘가난한 자’(ebyon)라고 했다(예레 20, 13). 이와 같은 종교적 자세는 시편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은 의로운 이며 완전한 이요(시편34, 20.22;37, 17-18), 성실한 이들이다(시편 37, 28;149, 1). 가난한 자들과 반대되는 오만한 사람들은 야훼와 원수 되고 희망이 없는 자들이다(시편 10, 2;18, 28;37, 10;86, 14). 물질이 궁핍했던 광야에서의 체험은 많은 유다인들을 영신적으로 성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질적 가난은 이스라엘 백성 안에 anawim 즉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을 불러일으켰으며,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 활동에 자기 자신을 개방하고, 하느님의 요구하는 제약들을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적극적으로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6)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느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더욱 쉽게 하느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괴로움과 절망으로 인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지만, 대체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도 가난해져서 하느님께 의지하며 마음을 여는 편이 더 쉬울 것이다. 한편 부자나 권력가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스스로의 마음을 닫게 되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부와 권력에 대한 그들의 의존이 그들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가난해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한다.


결국 구약성서에서의 가난은 물질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anawim’(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이라 할 수 있다.7)




   2. 신약성서 안에서의 가난




신약성서에서도 단순히 ‘가난’에 대한 언급보다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가난’에 대한 의미를 표출시키고 있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물질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이며 정신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으나 훨씬 더 구체적이며 실제적이다.8)


그런데 ‘영적 가난’이란 개념은 이 세상의 모든 재물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가리킨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이란 물질적인 재화가 없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그것을 실지로 소유하고 있다 해도- 사람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영적으로는 가난하면서도 부유한 사람의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마음으로는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사람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9)


예수께서는 인간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2 고린 8, 9; 필립 2, 5-6). 그분이 부자 청년에게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충고를 하신 마태오복음서의(마태 19, 21-22) 사건은, 그분이 당신의 모든 제자들에게 자의적 가난을 요구한 것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부자 청년에게 재물에 대한 우상을 뽑아 버리려 한 것이다.10) 그런데 공관 복음은 예수의 이러한 가난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루가복음만이 그가 어떻게 생활 문제를 해결했는지 설명하고 있다(루가 8, 1-3).11)


‘신약성서 안에서의 가난’ 개념이 비교적 잘 나타나는 마태오와 루가의 행복 선언을 살펴보면, 마태오는 가난의 정신적 측면을, 루가는 물질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복음서에서 말하는 가난의 2가지 개념들 둥 어느 한 측면을 선택하여 단정해 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신적 가난과 물질적 가난은 서로 배타적 개념이 아니라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물질적 가난은 정신적 가난을 얻기 위한 확실한 길이 된다. 따라서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의 개념은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가난인 것이다.12)


또한 예수께서는 ‘복음적 가난’을 권고하셨고 또 당신을 철저히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다. 그래서 이 가난은 다른 말로 ‘의지적 가난’이라 할 수 있다. 예수의 정신에 있어서 가난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권고되고 있다. 신약성서 안에서의 가난은 ‘사랑의 계명’을 중심으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13)


이와같이 ‘신약성서에서의 가난의 의미’는 ‘구약성서에서의 의미’보다 더 진전했다. 구약성서 전체가 주로 물질적 가난을 통해 정신적 부를 가르치고 있다면, 신약성서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가난을 통해 하늘나라의 소유를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난을 ‘불의(不義)’로 간주했던 구약의 관점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재산을 공유하는 형태로 발전되었고, 따라서 가난을 없애려고 모금 운동에 직접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anawim’의 정신은 마태오 복음서의 진복선언에서 절정을 있다. 이는 물질적 의미의 가난뿐만 아니라, 영적, 정신적 가난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4)


이러한 가난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겠다는 신앙의 자세를 드러내며, ‘가난의 삶’은 그분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권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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