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씨병 환자들의 피어린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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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압과 폭력으로 얼룩진 매운 시대의 뒤끝은 언제나 파리하다. 광포한

폭압에 누웠던 ‘풀’들은 다시 일어서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고, 무성한 함성으로 노래한다. 상처의 노래, 흉터의 노래, 억눌렸던 신음의 코러스다. 상실한 역사와 뭉개진 진실을 복원하려는 ‘민초’들의 진한 살내음이다.

최근 남도의 한 아름다운 섬에서 모진 시대의 업보를 되묻는 작지만

진지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센씨병(나병) 환자들을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강제로 격리 수용한 데 대해, 정부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청구하는 소송이 제기된 것이다. 소송의 주인공은 의사와 사회운동가 등

120여 명으로 구성된 ‘소록도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소록도모임)’. 지난 3월 한센씨병 환자의 인권 회복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선 광주·전남

지역의 저명인사들이 그 주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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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모임은 지난 19일 “정부가 해방 이후부터 1962년 전염병예방법

상 나환자 강제 격리 규정을 임의규정으로 완화하기 전까지 소록도에

한센씨병 환자들을 강제로 수용, 외부와 격리시킨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 행위”라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8월 말까지 소록도

환자들의 증언을 첨부하여 피해 보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또한 이들은 일제시대 소록도에 정착촌을 만들어 격리 수용을 시작한 책임과 관련하여,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중이다.

한센씨병은 신경에 영향을 미치는 박테리아에 의해 발병하는데, 손발이 변형되고 피부가 탈색되면서 몸이 만성적으로 썩다가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주로 영양부족에 의해 발병하기 쉬우며, 거부감을

주는 외형상의 증세에 비해 감염성이 높지 않은 병으로, 우리나라에는

2만여 명의 환자가 있다. 이 가운데 2,000여 명이 소록도를 위시한 7곳의 자활 정착촌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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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일본 도쿄시 남서쪽 구마모토시에서 날아든 한 승소 판결은

소록도모임의 외로운 투쟁을 한껏 고무시켜준 낭보였다. 구마모토 지방법원은 5월11일 과거 나병을 앓았던 원고 127명의 주장을 인정하고

정부로 하여금 원고들에게 18억 엔의 피해 보상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나병의 감염성이 높지 않은데다 1940년대에 미국에서 프로민이라는 치료약이 개발됐는데도 1953년 정부가 나환자격리법을 제정해

강제로 환자들을 격리시킨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라는 판결이었다.

나환자격리법은 나환자들을 치료용 특별 병동에 강제 격리하여 환자들을 사회로부터 추방하는 결과를 낳았고, 마침내 1996년 폐기되었다. 소송이 제기된 것은 지난 98년. 이 법으로 부모형제, 친구들과 생이별한 채 평생을 외롭고 비참하게 보내야 했던 격리자 13명이 집단소송을 제기하였고, 이후 같은 고통을 겪은 779명의 환자 전원이 전국

각지에서 이 소송에 합류하거나 후원 활동을 벌여왔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상소를 포기하고 이들의 고통과 피해에 대해

반성하는 의미에서 보상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환자격리법이 제정되기 전에도 일본은 나환자 인권의 사각지대나 다름없었다. 1931년께는 전국의 모든 나환자를 격리 수용했고 48년에는

환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강제 단종 조처를 실시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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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사례에 견주어, 소록도의 경우는 피해자의 규모와 인권 침해의 정도에서 그 차원을 달리한다. 강제 수용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환자 수가 6,254명에 이르렀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죽어나간 환자도 부지기수였다. ‘천형의 땅’이 지금의 ‘낙원의 섬’으로 바뀌기까지

그 이면에는 힘없는 환자들의 피맺힌 한이 울음을 삼키며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작은 어촌마을 소록도가 문제의 섬으로 바뀐 것은 1916년, 기후가 온화하고 수량이 풍부하며 육지와 가깝다는 점을 들어 조선총독부가 소록도를 나환자 격리 최적지로 선정하면서부터다. 총독부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섬의 약 5분의 1 가량을 매입한 뒤 가건물을 건립, 일본인을

초대 원장으로 삼아 소록도 자혜원을 설립했다. 이듬해 자혜원은 정월부터 본관 외 47동을 차례로 준공, 4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환자들을

강제 송치했다. 자혜원의 실상은 병원보다 수용소에 가까웠고, 환자의

도주를 막기 위해 매일 두 차례씩 인원 점호를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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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반대를 무시하고 확장을 거듭한 자혜원은 1929년 약 5만 평의

부지에 735명의 환자를 수용할 규모로 커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총독부는 1933년 소록도 섬 전체를 매수하여 150만 평 규모로 대대적인 확장 사업에 착수했다. 1939년까지 6년여 동안 병원 시설 신축 공사에 환자들이 동원되었다.

하루에 몇 만 장씩 벽돌을 찍어내야 했고, 한 겨울 혹한에 맨 삽으로

언 땅을 파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 밤에 동생리 선창 건축에 내몰렸는가 하면, 개펄을 메워 중앙리 운동장을 다져야 했고, 중앙공원을 조성하느라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징벌용 감금방에서는 폭력이 난무했다. 맞아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섬을 탈출하려다 바다에 빠져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나마 주어진 노임은 각종 명목으로 착취당했다. 납골당·종루·어가비·등대 등을 세운다는 미명 아래 모금이 강요되었고, 심지어 환자를 노예 취급한 일본인 원장의 동상 건립 비용도 강제 모금으로 충당될 정도였다. 결국 원장은 분노한

환자의 손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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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고서도 격리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인 직원이 병원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환자 84명이 피살되는 소요 사건이 발생했고, 병원

형편도 어려워져 도주 환자가 줄을 이었다. 이에 정부는 미군정과 함께 대대적으로 부랑환자 단속을 실시해 격리 정책의 기조를 재확립했다. 1962년 전염성이 없는 음성 치유자의 사회 복귀가 논의되면서 강제 격리 규정이 임의규정으로 바뀌고, 환자 정착 사업에 착수하는 등

나병에 대한 정부의 인식이 진일보하기는 했지만, 정착 사업의 일환으로 7월에 착공한 오마도 간척공사에 또다시 환자를 동원하는 등 나환자의 인권 현실은 여전히 숙제를 안고 있었다. 이 시기의 문제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소록도모임은 오는 8월 초 일본 구마모토현을 방문할 계획이다. 소송 관계자들로부터 자료를 수집하고, 일본 현지의 한센씨병 환자 모임과의 연대 방안도 적극 모색하고 있다. 다시 일어선

‘풀’들의 노래가 합창으로 퍼져나갈지, 환자의 인권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인식이 어떤 차이를 보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211.191.147.194 파란마음: 자비하신 주님,
이들에게도 잃어버린 건강을 찾아 주소서!
잃어버린 인생을 찾아 주소서! 아멘^^ [07/20-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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