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20세기 화가의 한 사람인 그는
야수주의의 강렬한 색채와 입체주의의 새로운 공간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민속적인 주제와 유대인의 성서에서 영감을 받아 낭만적이고 순수한 표현을 발전시켰다. 그의 환상적인 그림들은 초현실주의의 선조 격으로 숭앙받았지만 샤갈은 동시대의 어떤 미술사조에도 몸담지 않은 가장 독창적이고 신비스러운 작품을 세계를 만들어왔다.
그의 그림에서는 동물과 꽃의 모티브, 지방마을의 풍속, 신부, 연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주로 동물과 꽃은 행복한 남녀의 배경을 장식하며 사랑하는 연인들은 지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닌다. 샤갈의 그림에서 여인은 휴식이자 빛과 같은 존재이며, 후기 작품에서는 음악과 결부되기도 한다. 화려한 색채와 친근한 주제와 이미지들이 전세계 대중으로 하여금 그의 그림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만든이유이기도 하다.
고흐, 고갱, 마티스, 피카소에 이어 대중적 인지도에서 5위에 랭크될 만큼 근대작가로서 또 80년대까지 삶을 누린 현대작가로서 대중의 기억 속에 깊이 파고든 작가이다
1887 7월 7일 러시아 비테프스크에서 사차르와 페이가이타 세갈의 아홉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모이셰 세갈이었으나 후에 마르크 샤갈로 바꾸었다. 아버지는 청어 도매상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가게를 운영하면서 작은 통나무집들을 세놓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유대 학교에 다니다가 비테프스크의 공립학교에 들어갔다.
1906 화가 예후다 펜의 화실에 다니면서 친구 빅토르 메클러와 알게되었다. 두 달 후 펜의 화실을 떠나 지방 사진작가의 작업실에서 수정작업 조수로 일했다.
1907 겨울동안 메클러와 함께 정식 체류허가증도 없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힘겹게 생활했다. 변호사이자 예술 후원가였던 골드베르크가 샤갈을 자신의 하인인 것처럼 등록하여 집에 머물게 하면서 체류허가증을 받게 해주었다. 얼마 후 왕실협회에서 미술을 보호하고 장려하기 위해 설립한 미술학교에 등록했다. 샤갈은 곧 교장 니콜라이 뢰리치의 눈에 띄어 매달 조금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샤갈은 그 학교에 만족할 수 없었다.
1909 자유주의적인 즈반체바 학교에 입학하여 현대의 다양한 표현 양식들에 개방적인 예술가 레온 바크스트에게 교육받았다. 샤갈은 종종 비테프스크에 있는 가족을 방문했고, 거기서 부유한 보석상의 딸 벨라 로젠펠트를 만났다. 그들은 6년 뒤 결혼했다.
1910 계속해서 즈반체바 학교에서 공부하던 샤갈은 학생들의 작품발표회에 <죽은 남자>을 포함하여 두 점의 그림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는 차츰 ‘새로운 예술’을 선보이는 장이 되었다.
막심 비나베르의 후원 덕분에 파리로 간 샤갈은 팔레트 아카데미와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다니며 그림공부를 했다. 이때 최초로 누드습작을 할 수 있었다.
1911 화실들이 몰려있는 전설적인 건물 라 뤼슈(벌집이라는 뜻)로 옮겨갔다. 막스 자코브, 앙드레 살몽, 기욤 아폴리네르 같은 시인들과 어울렸고, 특히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던 시인 블레즈 상드라르와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후에 상드라르는 샤갈에게 바치는 시를 쓰기도 했다.
1912 앵데팡당전에 그림 세 점을 전시했고, 살롱도톤에도 <골고다> 등 세 점의 그림을 전시했다.
1913 앵데팡당전에 <탄생>과 <유혹(아담과 이브)>를 전시했다.
1914 앵데팡당전에 <바이올린 연주자>, <모성>, <일곱 개의 손가락을 가진 자화상>을 전시했다. 발덴의 도움으로 4월에 베를린의 슈트름 미술관에서 최초의 개인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 카탈로그에 아폴리네르가 샤갈에게 헌정한 시 ‘로트소주’가 실렸다. 샤갈은 3달 예정으로 러시아에 돌아갔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파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1915 7월 25일 비테프스크에서 벨라 로젠펠트와 결혼했다. 가을에 페트로그라드(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새 이름)로 갔고, 벨라의 오빠 야코프 로젠펠트가 군복무 대신 전시경제국의 사무관으로 일하도록 주선해주었다.
1916 5월 18일 딸 이다가 태어났다. 11월 아방가르드 화가 그룹 ‘다이아몬드 잭’의 모스크바 전시회에 45점의 다른 작품을 전시했다.
1917 10월 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후 문화부가 만들어졌다. 문화부 안에 시, 연극, 미술 등을 담당하는 부서들이 있었는데, 그 담당관으로 각각 마야코프스키, 마이어홀트, 샤갈이 지명되었다. 그러나 아내 벨라의 간곡한 만류로 이를 거절했다. 샤갈 부부는 비테프스크로 돌아와 벨라의 부모 집에서 생활했다.
1918 평론가 아브람 에프로스와 야코프 투겐홀트가 모스크바에서 샤갈에 대한 최초의 전문적인 연구서를 출간했다. 샤갈은 10월 혁명 1주기 기념식을 위해 화가들과 장인들을 모두 동원하여 비테프스크 거리를 장식했다.
1919 상트페트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서 개최된 제1회 혁명예술전시회에서 샤갈은 전시실 두 개를 배당 받는 등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소련 정부에서 그의 그림 12점을 사들였다.
1920 국립유대극장의 단장 알렉세이 그라노프스키로부터 극장을 장식할 벽화 의뢰를 받아 <유대예술극장의 소개>, <문학>, <연극>, <무용>, <음악>, <결혼 피로연>, <무대 위의 사랑>을 제작하였다.
1921 모스크바 근교의 시골마을 말라호프카에 있는 고아원에서 전쟁고아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자서전 <나의 삶>을 쓰기 시작했다.
1922 마침내 샤갈은 러시아를 영구적으로 떠났다. 샤갈 가족은 1922년 여름에서 1923년 가을까지 독일에 머물렀다. 베를린의 화상이자 출판업자인 카시러가 <나의 삶>을 판화로 제작하여 출간하고자 하여 20점의 에칭을 완성했다. 처음으로 석판화 작업을 하기도 했다.
1923 9월 1일 파리로 돌아온 샤갈은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라 뤼슈에 두고 갔던 그림들 역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상이자 출판업자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고골리의 <죽은 혼>의 삽화를 주문했다.
1924 파리의 바르바장주-오데베르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려 작품 122점을 전시했고, 이 전시회를 계기로 이후 샤갈의 경력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앙드레 말로와 알게 되었다.
1926 볼라르의 주문을 받고 라퐁텐의 <우화집>에 들어갈 삽화로 30여 점의 과슈를 그렸다. 미국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이 뉴욕 라인하르트 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1927 파리에 있는 베르넴 존스 화랑과 계약을 체결하여 정기적인 수입을 보장받게 되었다.
1928 라퐁텐의 <우화집>에 들어갈 삽화를 위해 에칭 작업을 시작했다.
1930 베를린의 미술관에서 라퐁텐의 <우화집> 삽화를 위해 제작한 과슈 전시회가 열렸다.
볼라르의 주문으로 성경의 삽화를 과슈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1931 텔아비브의 시장 메이르 디젠고프의 초청을 받아 2-4월까지 거의 세 달 동안 가족들과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다.
1932 네덜란드에서 첫 번째 개인전이 개최되어 벨라와 암스테르담을 방문하였다.
1933 만하임 미술관에서 ‘문화 볼셰비즘’ 전시회가 개최되었을 때 샤갈의 작품들이 나치에 의해 공개적으로 소각되었다.
바젤의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1934 벨라, 쥘 쉬페르비엘, 앙리 미쇼 등의 친구들과 함께 코스타브라바의 타소 델 마르에서 여름을 보낸 후 바르셀로나, 톨레도, 마드리드를 여행했다.
1935 당시 폴란드에 속했던 빌뉴스의 유대협회 낙성식에 참석했다가 바르샤바를 방문하면서 위협적인 반유대주의를 감지하게 되었다.
1939 전쟁이 선포되기 직전에 샤갈은 가족들과 함께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생디에쉬르루아르로 옮겨갔다.
미국 피츠버그의 카네기재단이 개최하는 국제회화전에서 삼등상을 받았다.
1940 이본 제르보의 초청으로 파리의 메 미술관 개관기념전시회에 몇몇 작품을 전시했다.
1941 많은 망설임 끝에 미국 행을 결심한 샤갈은 마르세유로 떠났다.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했던 6월 23일, 샤갈 가족은 뉴욕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11월에는 피에르 마티스 화랑에서 전시회가 열려, 1910년부터 1941년 사이에 제작한 21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1944 크랜베리 호숫가에서 여름을 지내고 뉴욕으로 돌아가기 직전, 벨라가 갑자기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바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36시간만인 9월 2일에 사망하였다. 슬픔에 잠긴 샤갈은 9개월 동안 전혀 작업을 하지 않았다.
1945 버지니아 해거드를 만났다. 버지니아는 원래는 그의 생활을 돌봐주기 위해 고용되었으나 곧 그의 연인이자 동반자가 되었다.
봄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아메리칸 발레단이 공연하는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불새>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담당했다.
1946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샤갈이 40여 년 동안 작업한 작품들을 전시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5월부터 3달 정도 파리에서 생활했다. 6월 22일 버지니아 해거드와 샤갈의 아들 데이비드가 태어났다.
<천일야화>의 삽화를 위해 처음으로 과슈 채색석판화를 완성했다.
1947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의 재개관을 기념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위해 파리를 방문했다.
1948 완전히 프랑스로 돌아와 오르주발에 정착했다. 후에 샤갈의 화상으로 활동하면서 그를 다시 프랑스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게 될 에메 마그를 만났다. 제2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판화부문 인터내셔널 상을 받았다.
출판업자 테리아드가 샤갈의 에칭 삽화가 들어간 고골리의 <죽은 혼>을 출간했다.
1949 런던 워터게이트 극장 로비에 벽화를 그렸다. 방스에 작업실을 차렸고, 마담 보노의 도예 아틀리에에서 처음으로 도자기를 만들었다.
1950 봄에 별장 ‘라 콜린느’를 사들이면서 방스에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피카소와 마티스를 자주 만났다.
1951 샤갈은 예루살렘, 하이파, 텔아비브에서 열리는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하였다.
1952 발렌티나(바바) 브로드스키를 만나, 7월 12일 랑부이예 근처의 클레어퐁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이 그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테리아드가 그리스 작가 롱고스(서기 2C)의 전원시 <다프네와 클로에>의 삽화로 채색석판화를 주문했다.
테리아드가 샤갈의 에칭 삽화가 든 라퐁텐의 <우화집>을 출간하였다.
1955<성서메시지> 연작을 시작했다.
1956 테리야드가 샤갈의 에칭삽화 105점이 들어간 성경을 출간했다.
1957 최초의 모자이크 벽화 <푸른 수탉>을 완성했다.
1958 샤갈은 메츠의 생테티엔 성당에 설치할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을 시작했다.
파리 오페라 극장(팔레 가르니에)에서 상연되는 모리스 라벨의 발레 <다프네와 클로에>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디자인했다.
1960 샤갈은 예루살렘의 하다사 대학 의료센터에 있는 유대교 회당에 설치할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표현하고 있다.
1961 예루살렘의 유대교 회당을 위한 12점의 스테인드 글라스 전시회가 파리의 장식미술관과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1964 뉴욕 주 포캔티코 힐스의 태리타운에 있는 연합교회 예배당에 설치할 스테인드 글라스 <선한 사마리아인>을 완성하였다. 9월에 스테인드 글라스 <평화>의 설치를 위해 뉴욕을 방문했다. 이 작품은 다그 함마르시욀드를 추모하여 국제연합(UN) 본부에 설치되었다
1965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되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의 무대장치와 의상 디자인을 위해 예비 스케치 작업을 시작했다.
1966 방스를 떠나 생폴드방스의 별장 ‘라 콜린느’에서 지냈다. 뉴욕 태리타운의 연합교회에 설치할 스테인드 글라스를 8점 더 완성하였다.
1967 6월에서 10월까지 루브르 박물관에서 연작 <성서메시지>의 전시가 있었다. 샤갈 부부는 전시된 그림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1968 니스대학 법과대학 학장이던 친구 루이 트로타바의 부탁으로 대형 모자이크 <오디세이의 메시지>를 완성했다.
1969 니스에 마르크 샤갈 성서미술관의 초석을 놓았다.
샤갈은 6월 18일 이스라엘의 새 의회건물 낙성식을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이 새 건물을 위해 샤갈은 12점의 모자이크 바닥과 모자이크 벽화 <통곡의 벽>, 그리고 대형 태피스트리 <이사야의 예언>, <출애굽기>, <예루살렘 입성>을 제작했다.
1970 1월에서 3월까지 샤갈의 판화 회고전이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