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하비에르)]
*영문 : Francis Xavier
*신분 : 사제
*지역 : 스페인
*년도 : 1552년
*축일 : 12월3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을지라도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이
말은 학문으로써 장래가 극히 촉망되며 성공과 명예, 특권의 생활이 그의 앞
에 놓여 있던 한 젊은 철학 교사에게서 여러 번 반복된 것이다.
그 당시 24세이던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파리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이 충고
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는 이냐시오 로욜라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
다. 이냐시오의 끈질긴 설득은 결국 프란치스코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했
다.
프란치스코는 이냐시오의 지도 아래 영적 훈련을 했고 1534년에는 그의 작은
공동체인 갓 창설된 예수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함께 몽마르트르에서 교황의
지시에 따르는 청빈과 정결 그리고 사도직 수행에 관한 서원을 했다.
프란치스코는 1537년,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 베니스를 떠나 리스본으로 갔으
며 그곳에서 동인도로 항해하여 인도의 서쪽 해안인 고아에 상륙했다. 그후
10년 동안 그는 인도인들, 말레이인들, 일본인들 등 사방에 흩어진 국민들의
신앙을 깨우치기 위해 많은노력을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
식과 잠자리를 함께 나누었다. 그는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특히 나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많은 시간을보냈다. 때로는 잠잘시간도 없을 정도
로 바빴으며 심지어는 성무일도를 바칠 시간조차 갖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그의
편지에서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말레이지아 섬을 거쳐서 일본으로 갔다. 그는 일어를 열심히 배
워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교훈을 주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교 본부를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일본에
서 중국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이 계획은 중국 본토에 도착하기 전에 그가 세
상을 떠남으로써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흔히 그는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선교사로 불린다. 그가 직접 개종시킨 신
자들만 계산하더라도 10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는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로 선언되어 1622년에 시성되었으며, 비오 10
세에 의하여 \’외국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어 오늘에 이른다.
[설명] 우리 모두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선교
는 반드시 머나먼 외국에 가서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 자녀들,
남편이나 아내,혹은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는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직 희생으
로써, 개인적인 모든 이익을 포기함으로써 프란치스코는 자유롭게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희생은 좀 더 큰 선익을 위하여 때로는 자신을 양보하는 것이다. 기도의 선행,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선행, 단순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주는 선행 등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시간이다. 프란치
스코는 이 가장 큰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야기] 프란치스코는 홍콩에서 남서쪽으로 7백 마일 떨어진 산치아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란치스코가 배 안에서 병으로 죽어갈 때 그 배에 있던 포르
투갈 선원들은 그를 배에서 옮겨야만 했다. 그에 대한 친절로 선장의 노여움
을 살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는 바닷가 모래
밭에 프란치스코를 내려둔 채 떠나 버렸다.
그러나 어떤 포르투갈 상인이 쓰러질 듯한 오막살이 안으로 프란치스코를 데
리고 갔다. 그는 열이 심한 발작과 피를 빼는 불안한 치료 속에서도 계속해서
기도했다. 그는 갈수록 허약해져만 갔다.
\”나(그의 친구인 안토니오)는 그의 임종을 지켜 보았으며 그가 죽어갈 때 그
의 손에 촛불을 들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예수의 이름을 입술에 올리며 평화
와 안식을 지닌 채 자신을 하느님께 바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