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권 제 8장 산발랏과 므낫세와 그들이 그리심 산에 세운 성전에 대하여 또한 알렉산더가 어떻게 예루살렘시에 입성하게 되었고 유대인들에게 어떤 특혜를 주었는지에 대하여

 


제 8 장



산발랏과 므낫세와 그들이 그리심 산에 세운 성전에 대하여 또한 알렉산더가 어떻게 예루살렘시에 입성하게 되었고 유대인들에게 어떤 특혜를 주었는지에 대하여



1.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 제국을 정복하다



  [㈜ 로마, 파르티아, 헬라의 유대 역사와 마찬가지로 헬라역사에 대한 요세푸스의 자료는 이 번역서의 마지막권 부록에 다루어질 것이다.]



  이 때에 마게도냐(Macedon0의 왕 빌립(Philip)이 오레스태(the Orestae) 가문 출신인 케라스테스(Kerastes)의 아들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반역으로 에게(Aegae)에서 살해당했다. [㈜  마게도냐에서 필립은 주전 336년에 살해당했다.]그리하여 그의 아들 알렉산더(alexander)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그후 헬레스폰트 해협(the Hellespont)을 건너 그라니쿠스(Granicus)[㈜  헬레스폰티네 브루기아(Hellesponitne Phrygia)에 잇는 강으로 이 강 은 말모라(marmora0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전투에서 다리오왕의 부대를 격파하였다. 그리고나서 그는 루디아(Lydia)를 침입하여 이오니아(Ionia)를 정복하고, 가리아(Caria)를 진압한 뒤 밤빌리아(Pamphylia)를 쳐부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다른 곳\”은 고대. 2권. 16 : 5([㈜  더 정확하게 아마닉문들(the Amanic Gates)에 의한 아마누스 산 (Mount amanus : Arrian ii. 7. 1). 여기는 북 수리아의 해안이 길리 기아(Cilicia)의 해안으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에 소아시아를 알렉산더가 정복한 것에 대해 간략히 나온 단락을 의미할 것이다. 또는 거의 유사한 것은 다른 역사가들의 작품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2. 므낫세가 사마리아인들에게 호감을 사게 되다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대제사장[㈜  므낫세(Manasses)는 \”대제사장직을 나누었다\”는 방법에 관해서는 복 음서에서 언급된 \’대제사장들\’과 같은 경우처럼 그가 대제사장의 가문 의 일원이었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제외하면 분명치 않다. 그러나 가능 한 것은 요세푸스가 마나세스가 Sagan(아람어로는 Segan)의 위치에 있 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휘가 바사 시대에 (에 9 : 2 참조) 예루살렘의 귀족 중 한 일원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엇으 며 후기 랍비들은 대제사장의 보조자를 의미하는데 사용한다. 참). 미쉬 나, \’Yoma\’, vi과 바벨론 탈무드(Bab. Talmud), \’Yoma\’, 391] 야두아의 동생이 이방 여인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는 것에 대해 분개하여 그에게 대항하였다. 그들은 이 결혼이 율법을 어겨가며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본이 될 것을 염려하였고 이방인들과 혼합되는 시작으로 보고 매우 걱정하였다.그들은 예전에 결혼에 관한 율법을 어기고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가 큰 불행을 초래하여 포로가 되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므낫세에게 아내와 이혼하거나 제단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했다. 대제사장 야두아도 백성들과 함께 므낫세에 대해 분노했으며, 그를 제단에서 쫓아내었다. 이에 대하여 므낫세는 장인인 산발랏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장인의 딸인 니카소를 사랑하지만 그 일로 인해 제사장직을 박탈당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제사장직은 저의 나라에서 최고의 직무이며 저의 가문에서 쫓겨나고 싶지도 않군요.\” 이 말을 들은 산발랏은 자기 딸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제사장직을 계속 누리도록 해주고 대제사장직의[㈜  물론 사마리아인들 중의.참). 8 : 4(324). 가스터(M. Gaster) \’The Samaritans\’, 1925, pp. 30 이하에 의하면 \”그런 사실의 흔적은 사마 리아의 연대기(Samaritan chronicles) 속에서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예 루살렘의 대제사장 가문과 그들의 총독 또는 지도자들간에 언급된 이 방인들과의 결혼도 없다. 그러나 어떤 연대기에는 \’산발랏\’은 코헨 레 위(Cohen Levi), 즉 \’제사장, 레위인\’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다른곳에 서는 \’레위인\’으로만 언급된다. 그러나 그는 어떤 면에서든지 대제사장 으로는 결코 규정되지는 않는다.] 권세를 소유하도록 해줄 것이며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모든 나라의 총독으로 임명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산발랏은 사마리아에서 가장 높은 그리심 산(Mount Garizein)에 다리오왕의 동의를 얻어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성전을 설립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이 약속에 의기양양해진 므낫세는 다리오왕이 대제사장직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믿고 산발랏과 함께 거하였다. 왜냐하면 산발랏은 이제 매우 고령의 노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백성들가운데 많은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결혼하여 큰 혼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예루살렘 백성들은 므낫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산발랏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경작한 땅을 주고 거주할 땅까지도 주었는데 이런 은혜를 베푼 것은 자기 사위인 므낫세를 위한[㈜ 또는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이는 Dr. Thackeray가 고대. 1권. 서문. 2(0)에서 sumfilokalei\’n을 번역한 것이다.] 것이었다.



3. 사마리아인들이 다리오왕이 패배하기를 기대하다



   [㈜  참). 고대. 11권. 8 : 1(304) 주 340.]



  다리오왕이 알렉산더가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그라니큼 전투에서 자기 군대를 패배시키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이에 다리오왕은 마게도냐인들이 전 아시아를 침입하여 정복하기 전에 기병과 보병을 불러 모아 그들과 대적해 보기로 결심하였다. 따라서 다리오왕은 유브라데 강을 건너 길리기아(Gilicia)의 산인 다소(Taurus) 산맥을[㈜ 더 정확하게 아마닉문들(the Amanic Gates)에 의한 아마누스 산(Mount amanus : Arrian ii. 7. 1). 여기는 북 수리아의 해안이 길리기아(Cilicia)의 해안으로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넘어 길리기아의 이수스(Issus)에서 전투할 태세를 갖추고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산발랏은 다리오가 내려온 것에 대해 기뻐하면서 므낫세에게 이같이 말했다. \”나는 다리오 왕이 적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대로 내가 한 약속들을 들어 주기로 하겠네. 나 뿐만 아니라 온 아시아인들이 마게도냐인들은 바사군의 엄청난 숫자에[㈜  같은 진술이 디오도루스(Diodorus), svii, 32. 4(참고 Arrian ii. 6. 4 이하)에 나온다 Arrian, ii, 8, 8은 다리오의 군대를 600,000명으로 계 산한다. 디오도루스, xvii, 31, 2는 500,000으로, 유스티투스 (Justinus), xi, 9와 쿨티우스(Curtius), iii, 2, 4는 400,000으로 환산한 다.]질려서 싸우려 들지도 못할 것임을 알게 될것일세.\” 그러나 결과는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바사군은 마게도냐 군과 싸워서 대패하여 많은 수의 군사들이 전멸당했다. 다리오왕의 모친과 처자식들은 포로가 되어 잡혀갔고그 왕은 바사로 도망쳤다.[㈜  전투는 주후 333년 10월에 일어난 것이다.] 알렉산더는 수리아를 침입하여 다메섹(Damascus)을 장악하였고 시돈(Sidon)을 점령하고나서[㈜  다메섹(Damascus)과 시돈(sidon0의 정복은 이수스(Issus)의 전쟁이후 곧바로 있었다. 참). 니이제(B. Niese), (B. Niese), \’Geschichte der griechischen und makedonischen Staaten\’, I, 81, 2n 2.]두로(Tyre)를 포위하였다.[㈜  주전 332년 1월에서 7월까지, 참). 주360.] 알렉산더는 유대인 대제사장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알렉산더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과 관련되었다는 요세푸스의 자료와 역사성에 관해서 부록을 보라. 현존하는 비유대적인 자료 중 어떤 것도 알렉산더와 관계했던 유대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아니한다는 주로써 충분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랍비 전승은 유사한 이야기를 보존한다 (바벨론 탈무드, \’Yoma\’, 69a와 주석 도는, \’Megillath Taanith\’, ix, \” 가리심산(mount Garizim)의 날\”). 부록을 보라.] 원군과 물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또한 다리오왕에게 전에 공물을 보냈던 것처럼 자기에게도 보내주고 마게도냐인들과 우호 관계를 맺으면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다리오에게 반역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으므로 그가 살아있는 한 이 맹세를 어길 수 없다는 답신을 보내 왔다. 이 답신에 대해 알렉산더는 화가 났다. 그는 두로를 거의 차지하게 될 지경에 있었기에 그곳을 떠날 수는 없었고, 두로를 완전히 차지하게 되면 유대 대제사장을 공격하여 그로 하여금[㈜  본문은 \”그로 하여금\”이 빠져 있다.]만인이 보는 앞에서 어떤 것이 맹세를 지키는 것인가를 보여 주겠다고 위협하였다. 알렉산더는 일을 마무리한 후에 가사(Gaza)시를 공격하여 가사 시 수비대의 사령관인바베메세스(Babemeis ; Babemeses)와[㈜  다른 사본에는 바베마시스(Bab?masis)등. 이름은 Arrian, ii, 25, 4에, 바티스(Batis)로 Curtius, iv, 6, 7. 에는 베티스(Betis : 다른 사본에는 Batis)로 나타난다. 유스티(F. Justi), \’Iranisches Namenbuch\’, p.65이 하에는 바티스(Batis)와 이란인(바사인 : 역주) 바타(Iranian Vata)를 연결시킨 다(Columbia의 Louis H. Gray 교수도 동일하게 개인적 발표에서 그 렇게했다). 반면 그는 바베베시스(Babemfsis)를 셈어 형태로 생각한 다. 요세푸스가 다론 본문의 것과 서로 유사한 것은 진짜 이란어의 형 태가 잔존한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내게는(Ralph Narcos) 보여진다. 이름의 두번째 음절인 m?sis는 이란 이름 와우미사(Waumisa 다리오 Ⅱ세의 장군, 참고: F. Weissbach, \’Die Keilinschriften der  Achsmeniden\’, 1911, p.34 이하)에 나타나는 것과 동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또한 미드라(Mithra)라는 이름의 변중법적 발전이다. 참). Justi,\’s. v\’. 첫음절 바베(Bab?- )는 이란어 바가(Baga),즉 \’하나 님\'(이 단어는 보통 Mega로 헬라화한 것이다. 참고 : Megaphernes와 비슷한 이름들)의 와전된 형태일 것이다. 요약하면, 가사(Gaza)의 사령 관의 원래 이름은 바가미사(Bag-amisa), 즉 미드라(Mithra)는 하느님 이다 \’라고 나는 제안하는 바이다. ] 함께 가사 시를 포위하였다.[㈜ 주전 332년 여름에. 참). 주 361.]



 4. 사마리아인들이 승리한 알렉산더에게 간청하다



  산발랏은 자기 뜻을 펼 좋은 때가 왔다고 믿고 다리오 왕을 배반하고 자기 수하에 있는 8,000명 이나[㈜ 다른 사본은 16,000.] 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두로를 장악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알렉산더에게로 가서그를 다리오 왕 대신에 주인으로 모실테니 자신과 자기 부하 8,000명을 받아 달라고 하였다. 이에 알렉산더가 그의 의견을기쁘게 받아들이자388) 산발랏은 자신감을 얻어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저에게는 유대인 대제사장 야두아의 동생인 므낫세라는 사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살고 있는 영토에 성전 설립을 원하는 동족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힘을 둘로 나누어 놓으면 왕에게는 이로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족이 한 마음으로 연합되어 있으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 있던 앗수르 왕들도 이때문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참). 이 고소는 바사 기간동안만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을 대적하려고 만든 것이다. 4 : 6(97) 이하.] 이 말에 알렉산더가 동의를 표하자 산발랏은 온갖 정성을 다하여 성전을 세우고 므낫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산발랏은 자기의 손자들이 이러한 큰 영예를 얻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였다. 그러나 산발랏은 7개월 후에 두로의 공략이 끝나고[㈜  참). 주 352. 공격의 7달 동안 지속된 기간은 디오도루스, xvii. 46. 5 와 Curtius iv. 4. 19. 와 Plutarch의 \’알렉산더의 생애\'(Vita Alex.) xxiv에 언급되어 있다. ] 가사의 공략이 시작된 지 2개월이 지나서[㈜  참). 공격받은 두달 간의 지속 기간이 디오도루스 xvii 48. 7에 언급되 어있다]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더는 가사를 차지한 후 서둘러서 예루살렘시로 진입 하였다.[㈜  현존하는 비유대적 자료는 알렉산더가 가사(Gaza)를 취한 후에 즉각 애굽을 향해 떠났다고 진술한다. 참). 부록]

  대제사장인 야두아는 이 소식을 듣고는 전에 그 왕의 명을 거역하여 왕이 화를 낸적이 있었기 때문에 마게도냐인들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몰라 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백성들에게 자기와 함께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간구할 것을 명령하였다. 즉, 하느님께 이 민족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참). 마카비 2서 3 : 14 이하에 나오는 유사한 경우에 대한 대제사장 의 고통에 대한 묘사.] 그러나 그가 제사를 드린 후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그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엄숙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 예루살렘 도시를 치장하고 성문을 열어서그들을 맞이하도록 하라. 율법에 따라 백성들은 흰 옷을 입게 하고 제사장들은 자색옷을 입도록 하라. 내가 지켜줄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어떠한 해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 그는 잠이 깨자마자 너무 기쁜 나머지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가 말한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으며 그는 알렉산더 왕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5. 알렉산더가 대제사장에게 문안하다



  그는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시에 거의 다달았다는 소식을 듣고 제사장들과 주민들을 대동하고 나아갔다. 이 행렬은 신성하여서 다른 족가의 행렬과는 달랐다. 왕을 맞이할 장소를 특별한 곳으로 정해 놓고 사페인(Saphein)이라고[㈜  다른 본문에는 Saphin, Sapha(n) E. Schurer의 Geschichte des judischen Volkes im Zeitalter Jesu Christi 1권(4판), 604 주 14는 요세푸스가 번역한 것처럼 히브리어의 아람어 형태인 SOphim즉 전망 으로 사페인(Saphein)을 설명한다. 쉬러(SchUrer)는 이 미쉬나에 언급된 SOphim을 전쟁. 2권. 19 : 4(528)에 언급된 Skovpo\”라 불리운 언덕과 동일시한다(또한 일찌기 G. Boettger의  \’Topographisch-historisches Lexicon zu‥‥Jos-ephus\’, p. 219에 서도 동일). 이곳은 현재 스코푸스 산(Mount Scopus)으로 예루살렘외 복쪽 약 1마일 거리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현재 히브리 대학이 세워져 있다. 랍비들의 번역에 의하면 (부록 참고) 알렉산더와 대제사장 사이 의 만남은 안티파트리스(Antipatris)에서 있었다. 이곳은 욥바(Joppa: Jaffa)의 북동쪽 20마일 지점에 있다. 이 도시는 헤롯 시대 이전에는 케팔사바(Kephar Saba)라 불리웠다(고대. 16권. 5 : 2(142)에서는 Kafarsaba\’라고 불리움). 그리고 Reland 와 Hudson\’-Havercamp는 사바(Saba)와 사파(Sapha)사이의 혼동은 랍비 번역판에서 사페인(Saphein, 또는 Sapha)을 안티파트리스(Antipatris)로 대체시킨 것에 원인이 있다고 제안한다. ] 불렀다. 이 말은 헬라어로 번역하면 \’전망\'(Lookout)이라는 뜻이다. 이 곳에서 예루살렘시와 성전을 바라보면 매우 관망이 밝았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의 뒤를 따르는 베니게인들(Phoenicians)과 갈대아인들(Chaldaeans)은[㈜  제안된 다론 본문에는 구다인(Cuthaeans). 이것은 랍비들의 번역판에서 지지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의하면 구다인들(사 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갈대아인 \'(Cha-Idaeans) 이 맞다는 것이 더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8 : 5(332) 에는 \”수리아의 왕\”). 게다가 요세푸스(또는 그의 자료)는 나중의 사건 을 생각한 것이다. 이는 마카비 1서 3\’41에 언급된 것으로 수리아 상 인들이 노예로 유대인들을 잡아 팔려는 소망으로 셀류키드(Seleucid) 장군 루시아스(Lys-ias)를 따라 유대로 같이 왔을 때의 사건을 기억 한 것이다. ] 왕이 화가 났으므로 도시를 약탈하고 대제사장들에게 치욕스런 죽임을 당하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와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알렉산더는 흰 옷을 입은 백성들과 자주색과 주홍색의 옷에다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진 금패가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 제사장들과 대제사장에게로 가까이 나아와 하느님께 경배드리고 나서 먼저 대제사장에게 문안인사를 하였다.[㈜  즉, 알렉산더는 대제사장에게 먼저 가서 그가 인사하기 전에 인사를 하였다. ] 모든 유대인들은 한 목소리로 알렉산더를 환영하면서 그의 주위로 둘러 섰으나 수리아의 왕들과 나머지 병사들은 알렉산더의 행동에 대해 너무나 놀라 그가 정신이돈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파르메니온(Parmenlon)이[㈜  알렉산더의 부사령관인 마게도냐인 장군은 알렉산더가 애굽으로 갔을 때 수리아와 팔레스틴을 책임지고 떠나갔다(파르메니온(Parmenion)이 알렉산더가 떠난 후에 수리아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분명치 않 지만, 참고 : 1. Spak, \’Der Bericht des Josephus Uber Alexander den Grossen, 1911, p.29이하). 플루타르크(Plutarch)의 잘 알려진 이 야기 \’알렉산더의 생애\’ xxix에서 파르메니온은 알렉산더의 비평가 같 은 역할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에 의하면 만약 그가 알렉산더였다면 그는 다리오의 말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알렉산더는 \”만약 내가 파르메니온이라면 나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혼자 그에게로 가서 모든 백성들은 왕께 경배 드리는데 왕은 무슨 이유로 유대인 대제사장에게 경배를 드리는 것이냐고[㈜  니이제(Niese), i :83 주 3에서 지적한 것처럼 부복(proskyn?sis)은 시대착오이다. 왜냐면 알렉산더가 다리오 죽음 이후에 자신에게만 부복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관습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참). J. Hort,\’Proskynein\’, 1932(Neutestamentliche Forschungen 3. 2) .331] 묻자,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대제사장에게 경배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에게 영예를 주신 하느님께 경배드린 것이네. 내가 마게도냐(Macedania)의 디움(Dium)에 있었을 때 꿈속에서 이 사람이 지금 입고 있는 복장을 한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일세 그때 내가 어떻게 하면 아시아제국을 정복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꿈속에서 이 사람이 나타나더니 자기가 부대를 이끌고 바사 제국을 정복하도록 도와줄테니 조금도 주저하지[㈜  다른 본문에는 \”남지\”.] 말고 담대하게 바다를 건너도록 하라고 일러 주었네. 그런데 그 이후로 나는 그런 복장을 한사람을 본적이 없었네. 그런데 지금 그를 보자마자 그가 꿈속에서 나타나 권면해 주었던 것을 생각해보니 하느님의 인도하심에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다리오와 바사인들의 세력을 전멸시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하느님의 도우심이었음을 믿을 수 있게 되었네.\”그는 파르메니온에게 이같은 말을 하고 난후에 대제사장에게 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의[㈜  다를 본문에는 \’제사장들] 행렬과 더불어 예루살렘 시로 들어갔다. 그는 성전에 올라가 대제사장의 지시하에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에게[㈜  다른 본문은 \”제사장들과\”를 빠뜨리고 있다(헬라어에서 이 단어들은 \”대제사장 자신에게\”가 \”제사장들에게\”에 선행한다).] 경배를 드렸다. 알렉산더는 다니엘서에서 헬라인들중의 한 사람이 바사제국을 멸망시키게 될 것이라는[㈜  참). 단 8 : 21에 대해 고대. 10권. 11 : 7(273). 다니엘서의 후반 부 분(7-12장)은 일반적으로 주전 165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하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생각이다.] 글을 읽고 나서 예언된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고 믿었다. 이에그는 마음이 기뿐 나머지 백성들을 해산시키고, 다음 날 그들을다시 불러서 모이게 하고 그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제사장은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기를 원하며 7년째에는 조공을 면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모든것을 다 허용해 주었다. 또한 바벨론과 메대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도 율법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자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알렉산더가 백성들에게 자기 부대에 들어온다면, 그들 고유의 풍습을 따르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하자 많은 백성들이 그 부대에 들어 가겠다고 자원했다.[㈜  참). 고대. 11권. 4 : 7(107).]



 6. 사마리아인들이 알렉산더에게 재차 간청하다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에서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규정짓고 난 후에 인근 도시들로 나아갔다. 모든 백성들은 그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한편 그리심산 위에 위치해 있고 유대의 변절자들이 살고 있는 세겜(Shechem)이라는[㈜  헬라어로는 시키마(Sikima). 참). 고대. 5권 1 19(69) 각주 43.] 수도에서 살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은 알렉산더가 유대인들에게 환대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도 유대인 행세를 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사마리아인들의 성품은 이러하였다.[㈜  참). 고대.9권. 14 : 3(291) 각주 415.] 그들은 유대인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만 자기들이 유대인들과 친분 관계가 있음을 부인했으나 유대인들에게 눈부신 행운이 찾아 온 것을 보게 되면 그들은 갑자기[㈜  다른 본문에는 \”갑자기\”가 빠져 있다. ] 돌변하여 자기들도 요셉과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후손들로 유대인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왕에게 온갖 찬사가 담긴 말을 하고 왕이 예루살렘안으로 거의 입성하였을 때 왕을 영접하러 갔다. 알렉산더가 그들에게 격찬을 하자[㈜  또는 \”명령하자\”.] 세겜인들은 그에게 와서 산발랏이 보내 주었던 군사들을 데리고 영접을 나온 후에 성전에도 영예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대해 알렉산더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으며[㈜  다를 본문에는(\”약속했다\” 이후에)\”오늘\”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 돌아오는 길에 꼭 들리겠다고 했다. 또한 그들은 알렉산더에게 매7년째에는 씨를 뿌리지 않으므로 조공을 면제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알렉산더는 이러한 요구를 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히브리인들인데 세겜의 시돈인들(Sidonians)이라고 불리운다고 말했다.[㈜ 참). 고대. 12권. 5 : 5(257) 이하.\’Cambridge Ancient History\’, vii : 191에 M. Rostovtzeff는 베니게(Phoenicia) 성읍들의 식민지화 활동 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기록하길\’\”팔레스틴에 있던 마리사(Marissa)는 확실히[톨래미(Ptolemy)와 셀류키드(Seleucid)시대 때) 시돈 사람 (Sidonians)들의 식민지로 있었다. 왜냐면 거의 모든 헬라인들이‥‥ 우리가 이것을 안티오쿠스(Antiochus)와 세겜에 있는 시돈사람들 사이 에 잘 알려진 편지 교환과 관계하여 이를 해결해야만 한다‥‥베니게 성읍들 출신의 그와 같은 반 헬라인(semi-Greeks)들은 아마도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에 그룹으로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요 세푸스는 유대인들이 산발랏(Sanballat)과 반 헬라인으로서의 그의 친 구들까지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고 이해하지 못했음이 틀림이 없다. ] 알렉산더는 그들이 유대인인가하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대답하기를 자기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알렉산더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유대인들에게만 이런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돌아을 때에 여러분들에 대해서 더욱 정확히 알아본 후에 최선의 방범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그는 이런 말을 하고 나서 세겜을 떠났다. 그는 산발랏에게 애굽에 가면 땅을 분배해 줄 것이니 군사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머지 않아서 데바이드(Thebaid)를 점령한 후에 그들에게 그 영토를 하사하고 잘 지키도록 명령하였다. [㈜ 톨레미 시대의 애굽에는 파윱(Fayum)에 있는 (델타지역의 끝의 남쪽 얏 65마일 지역) 마을이 있었다. 데바이트(Thebaid)에 거주하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다른 고대 기록이 없는 것 같다. 데바이드는 퍄윱 지역에 포함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참). 스트라보(Strabo), xviii : 3(약 787년). 니이제(Niese)는 \’GGMS\’,  ii : 112주 2에서 이 진술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ganz unzuverlassig)으로 생각한다.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사마리아인에 대해서는 고대. 13권. 3:4(74) 이하와 일반적으로 애굽에 있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는 고대. 12권. 1:1(7)을 보라.]



 7. 유대의 변질자들이 사마리아인과 합세하다



  알렉산더가 죽자,[㈜ 주전 323년 6월에] 그의 왕국은 디아도키(Diadochi)등의 여러 후계자들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주민들에 의해 부정한 음식을 먹게 되거나 안식일을 범했다거나 그외 다른 죄를 지어 비난을 받게 된 자들은 세겜인들에게 도망가서는 부당하게 쫓겨나 버리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본문에는 \”비난했다\”] 대제사장 야두아가 죽고 그의 아들 오니아스(Onias)가[㈜ 하스모네안 이전 기간에 그런 이름을 가진 몇 몇의 대제사장들중 첫번째.] 대제사장직에 오르게 된 것은 이 무렵쯤이었다. 그 당시 예루살렘 백성들의 상황은 이러하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josephus, TN-catholicdictionary-C1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