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권 제 10장 안티오쿠스 그리푸스와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가 왕권을 놓고 싸우는 중에 힐카누스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곳을 완전히 파괴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힐카누스가 자신은 사두개파에 가입하고 바리새파를 탈퇴한 것에 대하여

 


제 10 장



안티오쿠스 그리푸스와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가 왕권을 놓고 싸우는 중에 힐카누스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곳을 완전히 파괴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힐카누스가 자신은 사두개파에 가입하고 바리새파를 탈퇴한 것에 대하여



1. 안티오쿠스 그리푸스가 왕이 되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에게 공격을 당하다



 그러나 안티오쿠스가 수리아에서 그 왕권을 이어받았을 때 그는 유대를 치러 올라가는 것을 주의깊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그는 그의 이복 동생 – 그 역시도 안티오쿠스라고 불리웠다[㈜ 안티오쿠스 Ⅸ세 키지케누스(Antiochus Ⅸ Cyzicenus)는 안티오쿠스 시데테스(antiochus Sidetes)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고대. 13권. 10 : 1(271)에서 설명한 대로 안티오쿠스 그리푸스(antiochus Grypus)의 형제요 사촌이었다. ]-이 키지쿠스(Cyzicus)에서[㈜ 라이나흐(Reinach)는 삽입되어진 \’키지쿠스(Cyzicus)로부터\’라는 단어를 의심하지만 그의 이러한 의심에는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못한다. 아마 여세푸스의 자료에서 이 단어들은 원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성(姓)\’키지케누스(Cyzicenus)\’라는 단어 다음에 나온다. ] 자기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자기 땅에 머무르면서 동생의 침입을 대비하기로 결심하였다.그듸 동생은 키지게누스(Cyzicenus)라고 불리웠는데 왜냐하면그는 키티쿠스시에서 자라났기 대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파르티아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소테르(Soter)라[㈜ \’Soter\’는 안티오쿠스 Ⅶ세(Antiochus Ⅶ)의 이름으로 다른 곳에서는 주어져 있지 않다. 참). 고대. 13권. 7 : 1(222). ] 불리운 안티오쿠스의 아들이었다. 이 안티오쿠스(소테르)는 그리푸스의 아버지인 데메트리우스의 형제였다. 이같은 일이 발생한 이유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살펴보았듯이 클레오파트라가 그 두 형제와 결혼하였었기 때문이었다. [㈜ 참). 고대. 13권. 7 : 1(222). 그러나 라이나흐(Reinach)의 지적대로 요세푸스는 그의 자료로부터 전후(前後)참조를 취하고 있다. ]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는 수리아로 쳐들어와 오랫동안 그의 형제인 안티오쿠스 그리푸스와 계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 주전 122년에서 113년까지 그리푸스(Grypus)만이 통치했다. 주전 113년에서 111년까지 그는 키지케누스(Cyzicenus)에 의해 수리아(Syria) 밖으로 쫓겨났다. 주전 111년에 그는 돌아와서 키지케누스는 코엘레수리아<베니게(Phoenicia)와 팔레스틴(Palestine)>를 지배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들 사이의 적대감은 주전 96년에 그리푸스(Grypus)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



[힐카누스가 셀류키드에서 독립하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이 시기 내내 란 힐카누스(Hycanus)가 죽었을 때인 주전 129년에서 104까지를 의미한다. ] 힐카누스는 내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안티오쿠스(시데테스)가 죽은 이후, 힐카누스는 마게도냐인들에게 들고 일어섰다. 그리하여 그는 신하로서도 친구로서도 그들에게 어떠한 원조를 제공하지[㈜ 문자적으로\’어떤 것이라도 공급했다\’, 이 말에 대해 니이제(Niese)는 \’그들을 지원했다\’라고 추측한다. ] 않았다. 그 대신에 그의 나라는 알렉산더 제비나스가 통치하는 동안[㈜ 참). 고대. 13권. 9 : 3(268). ] 특히 그형제들 아래서 대단히 번영하고 발전하였다. 왜냐하면 그 형제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덕분에 힐카누스는 유대를 마음놓고개발할 수 있는 여가를 얻었기 대문이었다. 그 결과 힐카누스는엄청난 양의 돈을 축적해 놓을 수 있었다. 더우기 키지케누스가그의 땅을 황폐케 하였을 때,[㈜ 참). 고대. 13권. 10 : 2(218). ] 그는 자신의 뜻을[㈜ 즉, 그의 적대감. ]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그의 애굽의 동맹자들에[㈜ 주전 106년에 톨레미 Ⅷ세, 소테르 Ⅱ세, 라디루스(Ptolemy Ⅷ Soter Ⅱ, Lathyrus)는 키지케누스(Cyzicenus)의 동맹으로 수리아(Syria)에 왔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Ⅲ세(CleopatraⅢ)는 그리푸스(Grypus)를 지원하고 있었다. 참). 베반(Bevan), \’Ptol\’. pp. 328-330과 고대. 13권. 10 : 2(278). ] 의해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과 안티오쿠스 형제들이 서로 싸우면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이본(異本)에는 \’힐카누스(Hyrcanus). \’] 그 둘 모두를 경멸하였다.



 2. 힐카누스가 사마리아를 공격하다



 힐카누스는 매우 튼튼하게 요새화된 도시인 사마리아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어떻게 해서 이 도시가 세바스테(Sebaste)라는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으며-지금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헤롯(Herod)에 의해 요새화되었는[㈜ 혹은 \’다시 건조되었다\’이다. 도시건축의 기술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A. Tscherikower, \’Die hellenistischen Stadtegrundungen vom alexanderd. Gr. bis 멸 die Romerzeit\’ (Philologus, Supplbd. xix. H. 1), 1927을 볼 것. ]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로 더 적당한 곳에서[㈜ 이본(異本)에는 \’적기(適期)에\’, 고대. 15권. 8 : 5(296)에 언급되어짐. ]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힐카누스는사마리아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사마리아인들을 마치 악당들처럼 미워하였기 때문이었다. . 그가 그토록 사마리아인들을 미워한 이유는, 그들이 수리아의 왕들에게 복종하여 유대인들의 식민지 백성들이자 동맹자들인 마리사(Marisa)백성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 이두매(Idumaean)도시인 마리사(Marisa)는 최근에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해 포위되었다. 참). 고대. 13권. 9 : 1(257). 그러나 라이나흐(Reinach)의 지적대로 어떻게 해서 사마리아인들이 이두매에 있는 한 도시를 손에 넣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역자는 마리사는 힐카누스(Hyrcanus)가 세겜(Shechem)과 다른 사마리아 성읍을 취한 후 추측컨대 식민지화 했던 도시가 아닌 사마리아의 그 지역 영토를 의미하는 \’사마리아(Samaria)\’라는 지명에 대한 원문상의 실수(textual error)라고 생각한다. 참). 고대. 13권. 9 : 1(255). 이와 유사한 혼동이 마카비 1서 5 : 66의 사본들에서도 일어난다. 참). 12권. 8 : 6(353). ] 따라서 힐카누스는 그 도시 주위를 빙둘러 참호를 파고, 80스다디온(eighty sta-des : stade는 거리를 재는 단위로서 600피트 즉, 185미티에 해당된다)의[㈜ 약 9마일쯤. ] 거리고 2중 벽을 쌓았다. 그리고 아들인 안티고누스(antigonus)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게 맡겨놓았다. 그들이 점점 더 포위를 하게 되자, 사마리아인들은 기근으로인해 식량을 얻으려고 심지어는 음식에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들까지도 강제로 서로 빼앗는 그러한 식량 부족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 투키디데스(Thucydidean)의 구문(Thuc, I. 49. 7)이 고대. 13권. 14 : 2(382)에서도 발견됨. 그러나 전쟁. 1권. 2 :7(64)의 병행구에는 없음. ] 그때 그들은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 전쟁. 1권. 2 : 7(65)에 있는 병행구는 안티오쿠스 Ⅶ세 그리푸스(Antiochus) Ⅷ Grypus)를 의미하는 \’안티오쿠스 아스펜디우스\'(Antiochus Aspendius)라] 그는 기꺼이 원조해 주었으나 그는 아리스토불루스에게 패하였고, 그 형제들에게 스구도볼리(Scythopolis)에 이르기까지 쫓기다가 거기에 이르러서야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그 형제들은 사마리아로 되돌아 가서 다시금 사마리아인들을 성 안에다 가두어 놓았다.  고 되어 있다. 이것이 정확하다면 그 공격은 주전 113년 이전에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참). 고대. 13권. 10 : 1(272) 주. 그러나 쉬러(Schurer)가 그의 책 I. 268 각주 22에서 주장한 것처럼 안티오쿠스(Antiochus)가 톨레미 라디루스(Ptolemy Lathyrus)에게 한 요청은 주전 107년 직후, 즉 더 후대로 주장한다.[㈜ 고대. 13권. 10 : 7(299)까지의 단락들은(고대. 13권. 10 : 3(281)과 10 : 5(288)에 나오는 간단한 한 구절을 제외하고)\’전쟁사\’에 병행구가 없다. ]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은 두 번째 그 안티오쿠스에게 원조를 요청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안티오쿠스는 톨레미 라디루스(Ptolemy Lathyrus)에게[㈜ 주 369를 참조. ] 6,000명의 군사들을 보내달라고 하였고 톨레미 라디루스는 자기 어머니의[㈜ 클레오파트라 Ⅲ세(dleopatra Ⅲ), 참). 고대. 13권. 10 : 1(274). ] 뜻과는 반대로 군사를 보내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안티오쿠스가 군사들을 요엋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톨레미 라디루스를 그 왕국에서 쫓아버렸던 것이었다. 이제 안티오쿠스는 이 애굽인들과 함께 먼저 힐카누스의 영토를 도적같이침략하여 파괴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감히 그와 정면대결하여싸우지는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 그의 군대는 그렇게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의 영토를 파괴시킴으로써 힐카누스로 하여금 사마리아의 포위 공격을 중지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복 작전에 필패하여 많은 군사들을 잃은 후, 칼리만드루스(Callimandrus)와에피크라테스(Epicates)로 하여금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지휘하도록 남겨두고 트리폴리스(Tripolis)로[㈜ 베리투스(Berytus) 북쪽 수리아(Syria) 해변에 있는. ] 떠나갔다.



3. 힐카누스가 사마리아를 파괴하다



 그러나 칼리만드루스도 역시 적을 무모하게 공격하다가 패하여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한편 에피크라테스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스구도볼리와 그 가까이에 있는 다른 곳들을 유대인들에게팔아넘겼다. [㈜ 전쟁. 1권. 2 : 7(66)에 있는 병행구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의 멸망한 무력으로 수구도볼리(Scythopolis)를 점령하고 그후 스구도볼리<지금의 베이산(Beisan)>와 갈멜산(Mount Carmel)사이에 있는 국가를 차지했다. ] 그러나 사마리아의 포위 공격을 그치게 할 수는 없었다. 힐카누스느 1년 이상을 포위공격한 끝에사마리아를 함락하였으마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힐카누스는 그 성을 아주 없애버리고 그것을 산골짜기 시내의 급류에[㈜ 이본(異本)\’a mountain-torrent(산더미 같은 격류)\’로 되어 있음. 힐카누스(Hyrcanus)의 파괴에 대한 증거들에 관해서는 라이스너(Reisner)와 리용(Lyon), 피셔(Fisher)의 \’Harvard Excavations at Samaria\'(1909-1910), 2 vols. 1924를 볼 것. ] 휩쓸려 가도록 계획했다. 그는 그 성이 급류의 아래로 떠렁지게될 때까지 그 밑을 팠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한 도시가 서 있었다는 모든 흔적들이 사라져버렸다. [㈜ 사마리아의(셩벽)포위는 헤쉬완(Heshwan, 지금의 11월)월 25일에 있었다. 메길라드 타아니드(Megillath Ta\’anith)에 언급되어 있다. ] 지금은 대제사장 힐카누스의기이한 이야기에[㈜ 이 이야기와 병행되는 랍비적인 병행구에 대해서느 데렌부르크(Derenbourg) p. 74를 볼 것. ]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하느님이 그와 어떻게 교통하셨는가에대한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는 이와 같다. 힐카누스의 아들들이 키지케누스와 싸운 바로 그 날에 힐카누스는 성전 안에 혼자 있었는데,그가 대제사장으로서 향을 피우다가[㈜ 추측컨대 디스리(쌰노갸)월 10일인 대속죄일(the Day of Atoement)이라고 볼 수 있다. 참). 레 16 : 12이하. 그렇다면 이 이야기와 메길라드 타아니드(Megillath ta\’anith)에 있는 기사 사이에 연대기적 차이가 있다<참). 갈주 366>. 요세푸스의 기사와 병행되는 랍비 전승의 병행구들은 힐카누스(Hyrcanus)가 언제 계시를 받았는지 지적하고 있지 않다. ] 그의 아들들이 안티오쿠스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이야기하는 한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힐카누스는 성전 밖으로 나가자마자이 사실을 모든 대중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같은 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힐카누스의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고있었는가에 대한 것들이었다.



4. 클레오파트라 치하의 애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호의적인 상태



 이 당시 예루살렘과 그 나라(유대)에 있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와 애굽과 구브로(Cyprus)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까지도 번영하는 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그녀의아들인 라디루스(Lathyrus)라[㈜ 라디루스(Lathyrus : \’병아리 콩\’, \’애굽 콩\’)는 톨레미 Ⅷ세 소테르 Ⅱ세(Ptolemy Ⅷ Soter Ⅱ)의 널리 퍼진 이름이다. 참). 고대. 13권. 10 : 1(274). ] 불리는 톨레미와 싸우면서 오니아스의 아들들인 켈키아스(Chelkias)와[㈜ 성경의 힐기야(Hilkiah, \’ilq\’y\’h\’)의 헬라어 형. ] 아나니아(Ananias)를[㈜ 성경의 하나냐(Hananiah, \’anany\’h)의 헬라어형. ]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니아스는 우리가 앞에서[㈜ 다른 사본에는 \’다른 곳에서\’로 되어 있음. 참). 고대. 13권. 3 : 1-3(62-73). ]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헬리오폴리스의 구역 안에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비슷한 성전을 건축하였던 그 사람이었다. 켈키아스와 아나니아를군대장관으로 임명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군대를 그들에게 맡겼으며, 그들의 찬성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갑바도기아의 스트라보(Strabo of Cappadocia)는 이것에 대해 증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타국에서 살다가 돌아오는 사람들과 뒤에 클레오파트라가 구브로로 보냈던 사람들 대부분이 톨레미에게로 갔다. 그러나 오직 오니아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만큼은 그녀에게 여전히 충성스럽게 남아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들과 같은 시민들인[㈜ 혹은 \’종교혼합주의자들\’. 참). 고대. 12권. 2 : 5(46). ] 켈키아스와 아나니아가 클레오파트라 여왕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굳슈미트(Gutschmid, Fuchs가 p. 16에서 인용함)는 켈키아스(Chelkias)가 유스티투스 xxxix : 4에 언급되어 있는 클레오파트라(Cleopatra) Ⅲ세의 익명의 장군이라고 제안한다. 그는 톨레미(Ptolemy)로 하여금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도록 해준 자였다. 라이나흐(Reinach)는 \’REJ \’xl(1900)pp. 50 이하에서 주전 102년도에 세워진 비문에 언급되어진 헬리오폴리탄(Heliopolitan)의 (집정관)을 켈키아스(Chelkias)의 아들이라 보았다. 스트라보(Strabo)의 발췌문에 언급되어진 전쟁은 주전 107-102년 사이에 톨레미 라디루스(Ptolemy Lathyrus)와 클레오파트라 Ⅲ세(Cleopatra Ⅲ)사이에 있었던 전쟁이다. 참). 베반(Bevan), \’Ptol\’. pp. 329-331. ] 스트라보가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5. 바리새인들이 힐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다



  [㈜ 힐카누스(Hyrcanus)와 바리새파의 단절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 고대. 13권. (288-289)는 바벨론 탈무드 \’Qiddu\’in\’ 66a에 병행되어 나와있다. 이거서에 대해서 데렌부르크(Derenbourg), pp. 70-81을 참조할 것. ]



 힐카누스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그 자신의 성공과 그의 아들들의 성공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시샘을 받게 되었다. [㈜ 이본(異本)에는 \’그리고 그의 아들의 성공\’이 빠져 있다. ] 특히바리새인들은 그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우리가 앞에서[㈜ 고대. 13권. 5 :9(171-173). ]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 종파들 중의 하나이다.그런데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심지어 그들이 왕이나 대제사장에 대하여[㈜ 라이나흐(Reinach)의 지적대로 여기에서 왕과 대제사장간의 차별은 추측컨대 헤롯(Herod)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의 자료를 요세푸스가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역자는 여기에 유대 종파주의에 대한 대다수의 문장 문제가 니콜라스(Nicolas)의 필치라고 제시한 관찰을 이것에 첨가하였다. ] 이야기 할 때도, 그들은 즉시 신용을 얻는다. 힐카누스도 바리새파의 일원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척이나 사랑받고 있었다. 한번은 그가 그들을연회에 초대해서는 그들을 환대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들이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고 자신은 의롭게 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또한 모든 일에서 자신은 하느님과 그들을 즐겁게 하려고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신앙을 공언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그들에게만일 자기가 어떤 나쁜 일을 하거나, 또는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들이 발견한 적이 있거든 자신을 올바른 길로 돌이켜이끌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한 목소리로 그의 덕을 입증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의 칭송에 대단히 기뻐하였다.그런데 그 손님들 가운데 엘르아살(Eleazar)이라는[㈜ 하스모네안 지배자에 대한 비판가는 탈무드의 병행구에서는 유다(Judah)라고 불린다. ] 사람이있었다. 그는 악한 본성의 소유자이었으며,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당신이 진실을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했으니 하는 말인데 만일 당신이 의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대제사장직을 포기하고 백성들을 통치하는 것에 만족하십시오\’[㈜ 이것은 대젯사장의 유전학적인 특성과 관련된 레 21 : 14에 근거하여 볼 때 율법의 위반일 것이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힐카누스가 자신이 어떠한 이유로 해서 대제사장직을 포기해야 하는지 말해달라고 그에게 요청하였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로들로부터 당신의 어머니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통치시 포로였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거짓이었다. 그래서 힐카누스는 그 사람에게 격노한 반면, 모든 바리새인들은 대단히 분개하였다.



6. 힐카누스가 사두개파(the Sadducees)를 택하고 바리새파를 버리다



 그런데 힐카누스의 친밀한 친구들 중에 사두개파에 속해있던 요나단(Jonathan)이라는[㈜ \’요한<John, 헬라어로는 요하네스(Joannes)\’로도 쓰임. 사두개파의 대변자는 탈무드에서 엘르아살(Eleazar)이라고 불린다. ] 사람이 있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는 반대되는 주장을 가지고 있는 종파이었다. 그 요나단이힐카누스에게, 모든 바리새인들은 일반적으로 엘르아살이 그를중상모략한 말에 찬성하였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만일 힐카누스가 바리새인들에게 엘르아살을 어떻게 처벌해야 그가 했던 말을 취소하겠느냐고 물어본다면, 더욱 명백히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힐카누스는 바리새인들에게 엘르아살이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하도록 하려면 어떠한처벌이 좋은가 물어보았다. – 왜냐하면, 만일 바리새인들이 그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결정한다면,[㈜ 이본(異本)\’~의 여부를 시험하다\’라고 되어 있음. ] 그들은 그 중상모략하는말에 찬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힐카누스 자신이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바리새인들은 힐카누스의 질문에 엘르아살을 벗겨서매질하라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상(calumny)했다는 죄로 한 남자에게 사형판결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바리새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를 처벌하는데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힐카누스는 대단히 화가 났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중상하는 말에찬동했었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이때 요나단은 특히 그의 분노에 더욱 불을 붙였다. 그리하여 요나단은 힐카누스가 바리새파를 버리고 사두개파로 들어오도록,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규정을 폐지하고,[㈜ 이러한 율법의 갱신은 미쉬나(Mishinah), Ma\’aser Sheni\’, v. 15, So\’모 ix. 10에 언급되어 있다. ] 그 규정을 지킨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힐카누스를 충동하였다. 물론 이것으로 인해그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증오심을 커지게 되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대. 13권. 11 : 1(301)이하와 12 : 1(320)이하. ] 언급하도록 하겠다. 지금은 단지,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선조들이만들어 놓은 규정(유전)들을 백성들에게 지키게 하였다는 것과,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그들은 사두개파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사두개인들은 오직(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규정들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선조들에 의해 만들어진 유전들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두 종파는 심각한 차이를 보이며 논쟁을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부(富)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이 있었으나 대중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 두 종파와 그리고 에세네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의 책 「유다이카(Judaica」의 제2권에[㈜ 전쟁. 2권. 8 : 2(119). ] 기술되어 있다. [㈜ 이본(異本)에는 \’우리가 하였다\’라고 되어 있음. ]



7. 힐카누스가 하느님의 뜻에 의해 받은 은사들



[㈜ 여기서 \’전쟁사\’와 병행구절이 다시 시작된다. 참). 1권. 2 : 8(67). ]



 힐카누스는 그 소요를 진정시켰다. [㈜ 힐카누스(Hyrcanus)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바리새파의 적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전쟁사\’의 병행구에서 더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다. ]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행복하게 살았다. 그가 31년[㈜ 전쟁. 1권. 2 : 8(68)의 병행되는 사본에는 3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헤게시푸스(Hegesippus)는 31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 구절은 고대. 20권. 10 : 3(240)과 일치한다. 이 연대는 힐카누스(Hyrcanus)가 주전 135년부티 104년까지 재위했기 때문에 정확하다. ]동안 매우 훌륭하게 통치한 후 죽었을 때 그에게는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그가 하느님께 가장 좋은 특별한 은사들 중에서 세가지 즉 국가의통치, 대제사장의 직무,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 그러므로 그는 스토아적 신앙과 필로에 의하면 이상적인 구주의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 헬라 문학에서 유사한 문자들에 대하여는 P. Wendland, \’Die hellenistischeromische Kutur\’와 필로(Philo)에 관한 최근 작품들, 이를테면 베리에(Brehier)와 구드노프(Goodenough)의 작품들을 참조하라. 요세푸스(혹은 그의 자료)는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예언\’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참). 고대. 12권. 11 : 3(318), 무어(Moore), \’Judasim\’, I : 421. ]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고, 또 그에게 장래 일을 미리 보고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자기의 장남과 차남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들은 그 나라의 지배자로 남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이 그를 아버지가 행복하게 보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른 지를[㈜ 이본(異本)의 \’그들이 얼마나 멀리 능가했는가\’라는 구절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참). 1권. 2 : 8(69)에 있는 병행구(ajpevklinan)를 참조할 것. ] 보여주기 위하여 언급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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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권 제 10장 안티오쿠스 그리푸스와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가 왕권을 놓고 싸우는 중에 힐카누스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곳을 완전히 파괴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힐카누스가 자신은 사두개파에 가입하고 바리새파를 탈퇴한 것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10 장


    안티오쿠스 그리푸스와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가 왕권을 놓고 싸우는 중에 힐카누스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곳을 완전히 파괴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힐카누스가 자신은 사두개파에 가입하고 바리새파를 탈퇴한 것에 대하여


    1. 안티오쿠스 그리푸스가 왕이 되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에게 공격을 당하다


     그러나 안티오쿠스가 수리아에서 그 왕권을 이어받았을 때 그는 유대를 치러 올라가는 것을 주의깊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그는 그의 이복 동생 – 그 역시도 안티오쿠스라고 불리웠다[㈜ 안티오쿠스 Ⅸ세 키지케누스(Antiochus Ⅸ Cyzicenus)는 안티오쿠스 시데테스(antiochus Sidetes)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요세푸스가 고대. 13권. 10 : 1(271)에서 설명한 대로 안티오쿠스 그리푸스(antiochus Grypus)의 형제요 사촌이었다. ]-이 키지쿠스(Cyzicus)에서[㈜ 라이나흐(Reinach)는 삽입되어진 ‘키지쿠스(Cyzicus)로부터’라는 단어를 의심하지만 그의 이러한 의심에는 어떠한 이유도 제시하지 못한다. 아마 여세푸스의 자료에서 이 단어들은 원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성(姓)’키지케누스(Cyzicenus)’라는 단어 다음에 나온다. ] 자기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자기 땅에 머무르면서 동생의 침입을 대비하기로 결심하였다.그듸 동생은 키지게누스(Cyzicenus)라고 불리웠는데 왜냐하면그는 키티쿠스시에서 자라났기 대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파르티아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소테르(Soter)라[㈜ ‘Soter’는 안티오쿠스 Ⅶ세(Antiochus Ⅶ)의 이름으로 다른 곳에서는 주어져 있지 않다. 참). 고대. 13권. 7 : 1(222). ] 불리운 안티오쿠스의 아들이었다. 이 안티오쿠스(소테르)는 그리푸스의 아버지인 데메트리우스의 형제였다. 이같은 일이 발생한 이유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살펴보았듯이 클레오파트라가 그 두 형제와 결혼하였었기 때문이었다. [㈜ 참). 고대. 13권. 7 : 1(222). 그러나 라이나흐(Reinach)의 지적대로 요세푸스는 그의 자료로부터 전후(前後)참조를 취하고 있다. ]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는 수리아로 쳐들어와 오랫동안 그의 형제인 안티오쿠스 그리푸스와 계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 주전 122년에서 113년까지 그리푸스(Grypus)만이 통치했다. 주전 113년에서 111년까지 그는 키지케누스(Cyzicenus)에 의해 수리아(Syria) 밖으로 쫓겨났다. 주전 111년에 그는 돌아와서 키지케누스는 코엘레수리아<베니게(Phoenicia)와 팔레스틴(Palestine)>를 지배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들 사이의 적대감은 주전 96년에 그리푸스(Grypus)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


    [힐카누스가 셀류키드에서 독립하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이 시기 내내 란 힐카누스(Hycanus)가 죽었을 때인 주전 129년에서 104까지를 의미한다. ] 힐카누스는 내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안티오쿠스(시데테스)가 죽은 이후, 힐카누스는 마게도냐인들에게 들고 일어섰다. 그리하여 그는 신하로서도 친구로서도 그들에게 어떠한 원조를 제공하지[㈜ 문자적으로’어떤 것이라도 공급했다’, 이 말에 대해 니이제(Niese)는 ‘그들을 지원했다’라고 추측한다. ] 않았다. 그 대신에 그의 나라는 알렉산더 제비나스가 통치하는 동안[㈜ 참). 고대. 13권. 9 : 3(268). ] 특히 그형제들 아래서 대단히 번영하고 발전하였다. 왜냐하면 그 형제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덕분에 힐카누스는 유대를 마음놓고개발할 수 있는 여가를 얻었기 대문이었다. 그 결과 힐카누스는엄청난 양의 돈을 축적해 놓을 수 있었다. 더우기 키지케누스가그의 땅을 황폐케 하였을 때,[㈜ 참). 고대. 13권. 10 : 2(218). ] 그는 자신의 뜻을[㈜ 즉, 그의 적대감. ]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그의 애굽의 동맹자들에[㈜ 주전 106년에 톨레미 Ⅷ세, 소테르 Ⅱ세, 라디루스(Ptolemy Ⅷ Soter Ⅱ, Lathyrus)는 키지케누스(Cyzicenus)의 동맹으로 수리아(Syria)에 왔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Ⅲ세(CleopatraⅢ)는 그리푸스(Grypus)를 지원하고 있었다. 참). 베반(Bevan), ‘Ptol’. pp. 328-330과 고대. 13권. 10 : 2(278). ] 의해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과 안티오쿠스 형제들이 서로 싸우면서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이본(異本)에는 ‘힐카누스(Hyrcanus). ‘] 그 둘 모두를 경멸하였다.


     2. 힐카누스가 사마리아를 공격하다


     힐카누스는 매우 튼튼하게 요새화된 도시인 사마리아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어떻게 해서 이 도시가 세바스테(Sebaste)라는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으며-지금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헤롯(Herod)에 의해 요새화되었는[㈜ 혹은 ‘다시 건조되었다’이다. 도시건축의 기술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A. Tscherikower, ‘Die hellenistischen Stadtegrundungen vom alexanderd. Gr. bis 멸 die Romerzeit’ (Philologus, Supplbd. xix. H. 1), 1927을 볼 것. ]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로 더 적당한 곳에서[㈜ 이본(異本)에는 ‘적기(適期)에’, 고대. 15권. 8 : 5(296)에 언급되어짐. ]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힐카누스는사마리아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사마리아인들을 마치 악당들처럼 미워하였기 때문이었다. . 그가 그토록 사마리아인들을 미워한 이유는, 그들이 수리아의 왕들에게 복종하여 유대인들의 식민지 백성들이자 동맹자들인 마리사(Marisa)백성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하였기 때문이었다. [㈜ 이두매(Idumaean)도시인 마리사(Marisa)는 최근에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해 포위되었다. 참). 고대. 13권. 9 : 1(257). 그러나 라이나흐(Reinach)의 지적대로 어떻게 해서 사마리아인들이 이두매에 있는 한 도시를 손에 넣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역자는 마리사는 힐카누스(Hyrcanus)가 세겜(Shechem)과 다른 사마리아 성읍을 취한 후 추측컨대 식민지화 했던 도시가 아닌 사마리아의 그 지역 영토를 의미하는 ‘사마리아(Samaria)’라는 지명에 대한 원문상의 실수(textual error)라고 생각한다. 참). 고대. 13권. 9 : 1(255). 이와 유사한 혼동이 마카비 1서 5 : 66의 사본들에서도 일어난다. 참). 12권. 8 : 6(353). ] 따라서 힐카누스는 그 도시 주위를 빙둘러 참호를 파고, 80스다디온(eighty sta-des : stade는 거리를 재는 단위로서 600피트 즉, 185미티에 해당된다)의[㈜ 약 9마일쯤. ] 거리고 2중 벽을 쌓았다. 그리고 아들인 안티고누스(antigonus)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게 맡겨놓았다. 그들이 점점 더 포위를 하게 되자, 사마리아인들은 기근으로인해 식량을 얻으려고 심지어는 음식에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들까지도 강제로 서로 빼앗는 그러한 식량 부족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 투키디데스(Thucydidean)의 구문(Thuc, I. 49. 7)이 고대. 13권. 14 : 2(382)에서도 발견됨. 그러나 전쟁. 1권. 2 :7(64)의 병행구에는 없음. ] 그때 그들은 안티오쿠스 키지케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 전쟁. 1권. 2 : 7(65)에 있는 병행구는 안티오쿠스 Ⅶ세 그리푸스(Antiochus) Ⅷ Grypus)를 의미하는 ‘안티오쿠스 아스펜디우스'(Antiochus Aspendius)라] 그는 기꺼이 원조해 주었으나 그는 아리스토불루스에게 패하였고, 그 형제들에게 스구도볼리(Scythopolis)에 이르기까지 쫓기다가 거기에 이르러서야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그 형제들은 사마리아로 되돌아 가서 다시금 사마리아인들을 성 안에다 가두어 놓았다.  고 되어 있다. 이것이 정확하다면 그 공격은 주전 113년 이전에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참). 고대. 13권. 10 : 1(272) 주. 그러나 쉬러(Schurer)가 그의 책 I. 268 각주 22에서 주장한 것처럼 안티오쿠스(Antiochus)가 톨레미 라디루스(Ptolemy Lathyrus)에게 한 요청은 주전 107년 직후, 즉 더 후대로 주장한다.[㈜ 고대. 13권. 10 : 7(299)까지의 단락들은(고대. 13권. 10 : 3(281)과 10 : 5(288)에 나오는 간단한 한 구절을 제외하고)’전쟁사’에 병행구가 없다. ]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은 두 번째 그 안티오쿠스에게 원조를 요청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안티오쿠스는 톨레미 라디루스(Ptolemy Lathyrus)에게[㈜ 주 369를 참조. ] 6,000명의 군사들을 보내달라고 하였고 톨레미 라디루스는 자기 어머니의[㈜ 클레오파트라 Ⅲ세(dleopatra Ⅲ), 참). 고대. 13권. 10 : 1(274). ] 뜻과는 반대로 군사를 보내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안티오쿠스가 군사들을 요엋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 톨레미 라디루스를 그 왕국에서 쫓아버렸던 것이었다. 이제 안티오쿠스는 이 애굽인들과 함께 먼저 힐카누스의 영토를 도적같이침략하여 파괴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감히 그와 정면대결하여싸우지는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 그의 군대는 그렇게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의 영토를 파괴시킴으로써 힐카누스로 하여금 사마리아의 포위 공격을 중지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매복 작전에 필패하여 많은 군사들을 잃은 후, 칼리만드루스(Callimandrus)와에피크라테스(Epicates)로 하여금 유대인들과의 전쟁을 지휘하도록 남겨두고 트리폴리스(Tripolis)로[㈜ 베리투스(Berytus) 북쪽 수리아(Syria) 해변에 있는. ] 떠나갔다.


    3. 힐카누스가 사마리아를 파괴하다


     그러나 칼리만드루스도 역시 적을 무모하게 공격하다가 패하여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한편 에피크라테스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스구도볼리와 그 가까이에 있는 다른 곳들을 유대인들에게팔아넘겼다. [㈜ 전쟁. 1권. 2 : 7(66)에 있는 병행구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의 멸망한 무력으로 수구도볼리(Scythopolis)를 점령하고 그후 스구도볼리<지금의 베이산(Beisan)>와 갈멜산(Mount Carmel)사이에 있는 국가를 차지했다. ] 그러나 사마리아의 포위 공격을 그치게 할 수는 없었다. 힐카누스느 1년 이상을 포위공격한 끝에사마리아를 함락하였으마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힐카누스는 그 성을 아주 없애버리고 그것을 산골짜기 시내의 급류에[㈜ 이본(異本)’a mountain-torrent(산더미 같은 격류)’로 되어 있음. 힐카누스(Hyrcanus)의 파괴에 대한 증거들에 관해서는 라이스너(Reisner)와 리용(Lyon), 피셔(Fisher)의 ‘Harvard Excavations at Samaria'(1909-1910), 2 vols. 1924를 볼 것. ] 휩쓸려 가도록 계획했다. 그는 그 성이 급류의 아래로 떠렁지게될 때까지 그 밑을 팠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한 도시가 서 있었다는 모든 흔적들이 사라져버렸다. [㈜ 사마리아의(셩벽)포위는 헤쉬완(Heshwan, 지금의 11월)월 25일에 있었다. 메길라드 타아니드(Megillath Ta’anith)에 언급되어 있다. ] 지금은 대제사장 힐카누스의기이한 이야기에[㈜ 이 이야기와 병행되는 랍비적인 병행구에 대해서느 데렌부르크(Derenbourg) p. 74를 볼 것. ]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하느님이 그와 어떻게 교통하셨는가에대한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는 이와 같다. 힐카누스의 아들들이 키지케누스와 싸운 바로 그 날에 힐카누스는 성전 안에 혼자 있었는데,그가 대제사장으로서 향을 피우다가[㈜ 추측컨대 디스리(쌰노갸)월 10일인 대속죄일(the Day of Atoement)이라고 볼 수 있다. 참). 레 16 : 12이하. 그렇다면 이 이야기와 메길라드 타아니드(Megillath ta’anith)에 있는 기사 사이에 연대기적 차이가 있다<참). 갈주 366>. 요세푸스의 기사와 병행되는 랍비 전승의 병행구들은 힐카누스(Hyrcanus)가 언제 계시를 받았는지 지적하고 있지 않다. ] 그의 아들들이 안티오쿠스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이야기하는 한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힐카누스는 성전 밖으로 나가자마자이 사실을 모든 대중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같은 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힐카누스의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고있었는가에 대한 것들이었다.


    4. 클레오파트라 치하의 애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호의적인 상태


     이 당시 예루살렘과 그 나라(유대)에 있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와 애굽과 구브로(Cyprus)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까지도 번영하는 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그녀의아들인 라디루스(Lathyrus)라[㈜ 라디루스(Lathyrus : ‘병아리 콩’, ‘애굽 콩’)는 톨레미 Ⅷ세 소테르 Ⅱ세(Ptolemy Ⅷ Soter Ⅱ)의 널리 퍼진 이름이다. 참). 고대. 13권. 10 : 1(274). ] 불리는 톨레미와 싸우면서 오니아스의 아들들인 켈키아스(Chelkias)와[㈜ 성경의 힐기야(Hilkiah, ‘ilq’y’h’)의 헬라어 형. ] 아나니아(Ananias)를[㈜ 성경의 하나냐(Hananiah, ‘anany’h)의 헬라어형. ] 자신의 군대장관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니아스는 우리가 앞에서[㈜ 다른 사본에는 ‘다른 곳에서’로 되어 있음. 참). 고대. 13권. 3 : 1-3(62-73). ]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헬리오폴리스의 구역 안에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비슷한 성전을 건축하였던 그 사람이었다. 켈키아스와 아나니아를군대장관으로 임명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군대를 그들에게 맡겼으며, 그들의 찬성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갑바도기아의 스트라보(Strabo of Cappadocia)는 이것에 대해 증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타국에서 살다가 돌아오는 사람들과 뒤에 클레오파트라가 구브로로 보냈던 사람들 대부분이 톨레미에게로 갔다. 그러나 오직 오니아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만큼은 그녀에게 여전히 충성스럽게 남아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들과 같은 시민들인[㈜ 혹은 ‘종교혼합주의자들’. 참). 고대. 12권. 2 : 5(46). ] 켈키아스와 아나니아가 클레오파트라 여왕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굳슈미트(Gutschmid, Fuchs가 p. 16에서 인용함)는 켈키아스(Chelkias)가 유스티투스 xxxix : 4에 언급되어 있는 클레오파트라(Cleopatra) Ⅲ세의 익명의 장군이라고 제안한다. 그는 톨레미(Ptolemy)로 하여금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도록 해준 자였다. 라이나흐(Reinach)는 ‘REJ ‘xl(1900)pp. 50 이하에서 주전 102년도에 세워진 비문에 언급되어진 헬리오폴리탄(Heliopolitan)의 (집정관)을 켈키아스(Chelkias)의 아들이라 보았다. 스트라보(Strabo)의 발췌문에 언급되어진 전쟁은 주전 107-102년 사이에 톨레미 라디루스(Ptolemy Lathyrus)와 클레오파트라 Ⅲ세(Cleopatra Ⅲ)사이에 있었던 전쟁이다. 참). 베반(Bevan), ‘Ptol’. pp. 329-331. ] 스트라보가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5. 바리새인들이 힐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다


      [㈜ 힐카누스(Hyrcanus)와 바리새파의 단절에 대한 다음의 이야기 고대. 13권. (288-289)는 바벨론 탈무드 ‘Qiddu’in’ 66a에 병행되어 나와있다. 이거서에 대해서 데렌부르크(Derenbourg), pp. 70-81을 참조할 것. ]


     힐카누스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그 자신의 성공과 그의 아들들의 성공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시샘을 받게 되었다. [㈜ 이본(異本)에는 ‘그리고 그의 아들의 성공’이 빠져 있다. ] 특히바리새인들은 그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우리가 앞에서[㈜ 고대. 13권. 5 :9(171-173). ]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 종파들 중의 하나이다.그런데 일반 대중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심지어 그들이 왕이나 대제사장에 대하여[㈜ 라이나흐(Reinach)의 지적대로 여기에서 왕과 대제사장간의 차별은 추측컨대 헤롯(Herod)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다메섹의 니콜라스(Nicolas)의 자료를 요세푸스가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역자는 여기에 유대 종파주의에 대한 대다수의 문장 문제가 니콜라스(Nicolas)의 필치라고 제시한 관찰을 이것에 첨가하였다. ] 이야기 할 때도, 그들은 즉시 신용을 얻는다. 힐카누스도 바리새파의 일원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척이나 사랑받고 있었다. 한번은 그가 그들을연회에 초대해서는 그들을 환대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들이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고 자신은 의롭게 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또한 모든 일에서 자신은 하느님과 그들을 즐겁게 하려고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신앙을 공언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그들에게만일 자기가 어떤 나쁜 일을 하거나, 또는 의로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들이 발견한 적이 있거든 자신을 올바른 길로 돌이켜이끌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한 목소리로 그의 덕을 입증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의 칭송에 대단히 기뻐하였다.그런데 그 손님들 가운데 엘르아살(Eleazar)이라는[㈜ 하스모네안 지배자에 대한 비판가는 탈무드의 병행구에서는 유다(Judah)라고 불린다. ] 사람이있었다. 그는 악한 본성의 소유자이었으며,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가 ‘당신이 진실을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했으니 하는 말인데 만일 당신이 의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대제사장직을 포기하고 백성들을 통치하는 것에 만족하십시오’[㈜ 이것은 대젯사장의 유전학적인 특성과 관련된 레 21 : 14에 근거하여 볼 때 율법의 위반일 것이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힐카누스가 자신이 어떠한 이유로 해서 대제사장직을 포기해야 하는지 말해달라고 그에게 요청하였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로들로부터 당신의 어머니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통치시 포로였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거짓이었다. 그래서 힐카누스는 그 사람에게 격노한 반면, 모든 바리새인들은 대단히 분개하였다.


    6. 힐카누스가 사두개파(the Sadducees)를 택하고 바리새파를 버리다


     그런데 힐카누스의 친밀한 친구들 중에 사두개파에 속해있던 요나단(Jonathan)이라는[㈜ ‘요한 사람이 있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는 반대되는 주장을 가지고 있는 종파이었다. 그 요나단이힐카누스에게, 모든 바리새인들은 일반적으로 엘르아살이 그를중상모략한 말에 찬성하였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만일 힐카누스가 바리새인들에게 엘르아살을 어떻게 처벌해야 그가 했던 말을 취소하겠느냐고 물어본다면, 더욱 명백히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힐카누스는 바리새인들에게 엘르아살이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하도록 하려면 어떠한처벌이 좋은가 물어보았다. – 왜냐하면, 만일 바리새인들이 그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결정한다면,[㈜ 이본(異本)’~의 여부를 시험하다’라고 되어 있음. ] 그들은 그 중상모략하는말에 찬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힐카누스 자신이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바리새인들은 힐카누스의 질문에 엘르아살을 벗겨서매질하라고 대답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상(calumny)했다는 죄로 한 남자에게 사형판결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바리새인들은 일반적으로 그를 처벌하는데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힐카누스는 대단히 화가 났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중상하는 말에찬동했었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이때 요나단은 특히 그의 분노에 더욱 불을 붙였다. 그리하여 요나단은 힐카누스가 바리새파를 버리고 사두개파로 들어오도록,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규정을 폐지하고,[㈜ 이러한 율법의 갱신은 미쉬나(Mishinah), Ma’aser Sheni’, v. 15, So’모 ix. 10에 언급되어 있다. ] 그 규정을 지킨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힐카누스를 충동하였다. 물론 이것으로 인해그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증오심을 커지게 되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고대. 13권. 11 : 1(301)이하와 12 : 1(320)이하. ] 언급하도록 하겠다. 지금은 단지,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선조들이만들어 놓은 규정(유전)들을 백성들에게 지키게 하였다는 것과,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그들은 사두개파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사두개인들은 오직(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규정들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선조들에 의해 만들어진 유전들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두 종파는 심각한 차이를 보이며 논쟁을 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부(富)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이 있었으나 대중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이 두 종파와 그리고 에세네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의 책 「유다이카(Judaica」의 제2권에[㈜ 전쟁. 2권. 8 : 2(119). ] 기술되어 있다. [㈜ 이본(異本)에는 ‘우리가 하였다’라고 되어 있음. ]


    7. 힐카누스가 하느님의 뜻에 의해 받은 은사들


    [㈜ 여기서 ‘전쟁사’와 병행구절이 다시 시작된다. 참). 1권. 2 : 8(67). ]


     힐카누스는 그 소요를 진정시켰다. [㈜ 힐카누스(Hyrcanus)와 그의 아들들에 대한 바리새파의 적대를 의미하는 것으로’전쟁사’의 병행구에서 더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다. ]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행복하게 살았다. 그가 31년[㈜ 전쟁. 1권. 2 : 8(68)의 병행되는 사본에는 33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헤게시푸스(Hegesippus)는 31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이 구절은 고대. 20권. 10 : 3(240)과 일치한다. 이 연대는 힐카누스(Hyrcanus)가 주전 135년부티 104년까지 재위했기 때문에 정확하다. ]동안 매우 훌륭하게 통치한 후 죽었을 때 그에게는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은, 그가 하느님께 가장 좋은 특별한 은사들 중에서 세가지 즉 국가의통치, 대제사장의 직무, 그리고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 그러므로 그는 스토아적 신앙과 필로에 의하면 이상적인 구주의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 헬라 문학에서 유사한 문자들에 대하여는 P. Wendland, ‘Die hellenistischeromische Kutur’와 필로(Philo)에 관한 최근 작품들, 이를테면 베리에(Brehier)와 구드노프(Goodenough)의 작품들을 참조하라. 요세푸스(혹은 그의 자료)는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예언’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참). 고대. 12권. 11 : 3(318), 무어(Moore), ‘Judasim’, I : 421. ]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고, 또 그에게 장래 일을 미리 보고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자기의 장남과 차남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들은 그 나라의 지배자로 남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이 그를 아버지가 행복하게 보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른 지를[㈜ 이본(異本)의 ‘그들이 얼마나 멀리 능가했는가’라는 구절은 명백하게 잘못되었다. 참). 1권. 2 : 8(69)에 있는 병행구(ajpevklinan)를 참조할 것. ] 보여주기 위하여 언급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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