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아리스토불루스가 정권을 잡았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자기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가장 야만스런 폭력을 자행한 것과 안티고누스를 죽인 후그 자신도 죽은 것에 대하여
1. 아리스토불루스 Ⅰ 세(Aristobulus Ⅰ)가 왕의 칭호를 얻으면서 통치자가 되다
힐카누스가 죽은 후, 그의 장남인 아리스토불루스는 정부(thegovernment)를 왕국(A Kingdom)으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보았다. [㈜ 스트라보(Strabo)는 xvi. 2. 40에서 이러한 걔혁을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의 계승자,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왕\’이란 칭호는 아리스토불루스의 히브리 동전에 나타나지 않는다. 부록에 인용된 작품들을 참조할 것. 힐카누스(HYrcanus)가 그의 아내를 왕국의 여왕으로 앉혔다는 아래의 진술은 알렉산더 얀네우스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리스토불루스에 대한 이야기들과 혼동된다는 리키오티(Ricciotti)의 제안을 그럴 듯하게 한다. ] 그것을 가장 좋은 형태로 판단한 그는, 백성들이 바벨론 유수(the Babylonian capivity)로부터 벗어나 본토로 귀환후 481년 3개월만에 처음으로 그의 머리에 왕관을 썼던 것이다. [㈜ 전쟁. 1권. 3 : 1(70)은 471년이라고 보고 있다. 바벨론(Babylon)으로부터의 귀환이 주전 537년에 있었기 때문에 두개의 숫자 차이는 매우 크다. 참). \’전쟁사\’에 있는 병행구절에 대한 택커래이(Thackeray)박사의 각주를 참조할 것. ] 아리스토불루스는 자기 형제들 중에서 오직 바로 아래 동생인 안티고누스(antigonus)만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만이 자기와 같은 위치에 어울린다고 여겼다. 반면에 그는 다른 동생들을 가두어 놓았다. 그는 또한 왕권에 대해 자신과 논쟁을 벌였던 어머니도 감금하였다. – 왜냐하면 힐카누스나 그녀를 왕국의 여왕으로 남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 그리고 그는, 자기 어머니를감옥에서 굶어 죽게함으로써 자신의 잔악성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였고, 그 왕국에서 자신의 협력자로 삼았던 동생 안티고누스마저 죽여버렸다. 왜냐하면 그는 중상모략에 의해 안티고누스와 사이가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안티고누스를 사랑하기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원수들로부터 중상을 당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그 말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 안티고누스가 전장에서 영광 중에 돌아왔을 때,[㈜ \’아마 레바논(Lebanon) 지역에서\’라고 되어 있는 것은 고대. 13권. 11 : 3(319)을 참조. \’갈릴리(Galiles)에서\’라고 되어 있는 것은 전쟁. 1권. 3 : 3(76)을 참조. ] 곧 하느님께 대하여 초막들이 세워지는 초막절 절기가 가까이온 그런 축제 때에, 유연히 그가 안티고누스를 의심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즉 아리스토불루스는 병들어 누웠는데,안티고누스는 대단히 화려하게 차려입고 중무장한 군사들을 데리고, 그 축제를 거행하기 위하여 또 형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 일 후에 그 둘사이의 좋은 관계를 깨뜨리려고 하던 무모한 사람들은, 안티고누스의 화려한 옷차림과 그가 얻은 승리를 구설수에 올리면서그것으로 왕에게 나아갈 구실을 찾았고, 축제 때 그가 화려한 차림으로 나타난 것에 악의를 품고 과장해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리스토불루스에게 그가 행한 모든 것들은 사적인사람의 행동에서 벗어난 것이었으며, 그의 행동은 오히려 자기 자신이 마치 왕이라도 되는 것과 같은 암시를 하는 듯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들은 또한 안티고누스의 행동을 그가 마치 왕이 되었을 때, 고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들과 크게 구별되게 보이려한 엉티리없는 짓이라고 추론하면서, 그가 아리스토불루스를 죽이려는 의도로 중무장한 군사들과 함께 왔던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2. 아리스토불루스가 안티고누스를 죽이다
아리스토불루스는 안티고누스를 비방하는 이러한 말들을 마지못해 믿기 시작했다. [㈜ 이본(異本)에는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가 이러한 비난들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라고 되어 있음. ] 그래서 그는 자신이 동생을 의심하고있다는 것을 동생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면서 비밀 통로 곳곳에 호위병들을 몰래 배치시켜두었다. – 왜냐하면 그는 후에 안토니아(antonia)라고 불리운그 성에서 병으로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스모네안 가(家)와 후기에는 헤롯(Herod)에 의해 재건립된 느헤미야(Nehemiah)의 바리스(baris)<전쟁. 1권. 3 : 3(76)참조> 지역에 있는 성전 북쪽의 요새, 참). 고대. 12권. 5 : 4(251). 그곳에 인용된 문헌에는 Watzinger, \’Denkmaler\’ ii : 31이하를 추가하라. ]– 그리고 호위병들에게 만일 안티고누스가 무장하지 않고 있다면 그에게 나타나서도 안된다는 것과, 그러나 만일 그가 무장한 채로 왕에게 나아온다면 그를 죽이라고 지시하였다. 심지어 그 자신은 안티고누스에게 사람을 보내어 무장하지 말고 자기에게 오라고 그에게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여왕과, 안티고누스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던 사람들은 그 전달자에게 그 반대로 전하도록 하였다. 즉 안티고누스에게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병기를 들고 찾아오도록 전하에 하였던 것이다. [㈜ 전쟁. 1권. 3 : 3(76)에 있는 병행구에는 \’갈릴리(Galilee)에서 그리고 병으로 인해 그는 조사차 방문하지 못하였다\’라는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불루스가 그에게 무장한 채로 오라고 초청한 이유는 그의 군장비를 살펴보기 위함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거짓 전갈을 조금도의심하지 않은 안티고누스느 자신에 대한 형의 우호적인 감정을믿으면서, 그가 들은 대로 형에게 자신의 군장을 보여주기 위하여 완전무장을 한 채로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나아갔다. 그리하여그가 매우 은밀한 통로가 있는 스트라톤 망대(Straton)라 불리는 곳에 다다랐을 때, 그 호위병들이 그를 죽였던 것이다. 이제그의 죽음이 분명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는 사실은 시기와 중상보다도 더 강력한 것은 없으며, 또한 시기와 중상보다도 더 쉽게우정과 타고난 인연을 깨뜨리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에세네파인 유다의 예언]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에세네파에 속해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놀랄 만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다가 한 예언들은 결코 거짓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유다가, 성전 곁을 지나가고 있는 안티고누스를 보았을 때, 장래의 일을 예언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있었던 그의 동료들과 제자들에게 소리쳤다. 즉 안티고누스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예언은 거짓말처럼 여겨졌다. 왜냐하면 비록 유다가 안티고누스는 스트라톤 망대라 불리는 곳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안티고누스는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다 자신도 그때 그가 살아있는[㈜ 다른 사본에는 \’현존하는\’으로 되어 있음. ] 것을 보면서 예언했던 것이다. 그의 예언이 거짓으로 들린 이유는, 안티고누스가 살해당하게 될 것으로 유다가 예언한 장소는 그 당시 그가 있던 곳에서 600스다디온[㈜ 약 65마일. ]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날도 이미 저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예언은 불행하게도 거짓말로 판명될 것 같았었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예언하고 슬퍼하였던 것과 같이 안티고누스가 그 비밀 통로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도 유다가 예언했던 이름과 똑같은 스트라톤 망대라 불리는 곳에서였다. 즉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이사랴(Caesarea)의 스트라토 망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곳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 헤롯(Herod)은 스트라토 망대(Straton\’s Tower)의 이름을 가이사랴(Caesarea)로 바꾸었다. 참). 고대. 15권. 9 : 6(331-341). ]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예언자를 잠시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3. 아리스토불루스의 후회와 그의 치명적인 병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는 곧 자기 동생을 살해한 것에 대한양심의 가책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책이 병으로 발전되었다. 즉 그의 마음은 자신의 죄악된 행동으로 말미암아 너무 혼란스럽게 되어,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피를 토하기까지 이른 것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를 시중들던 종자들 중 하나가 그가 토한 피를 밖으로 옮기다가 미끄러지면서 그것을 살해된 안티고누스의 피로 물든 얼룩이 여전히 눈에띄고 있는 바로 그곳에다 쏟았던 것이다(나는 이것을 신의 섭리에 의한 것으로 믿는다). 그후에 그 종이 일부러 그 피를 거기에다 쏟았던 것이라는 소문이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퍼져나갔다. 그 소문은 아리스토불루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자 그는 그 소문의 진상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사람들은 그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더욱 궁금해진 그는 꼭 알아내고자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같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도 말하지않는 이유를 가장 나쁜 쪽으로 의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불루스로부터 협박과 압력을 받아 사람들이 그에게 진실을 털어놓자, 그는 죄책감으로 인해 병이 들었다. 비통과 깊은 탄식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내가 알기로는, 내가 저지른그같이 불경스럽고 사악한 범죄를 하느님께서 모르실리가 없어.나의 혈육을 살해한 것에 따른 보응이 갑자기 내게 덮쳐 오는구나, 오! 가장 파렴치한 인간이여, 너는 얼마나 오랫동안 동생과어머니 영혼을 빼앗은 그 생명을 간직하고 있으려느냐\’ 왜 나는, 이 생명을 그들에게 단번에 주지 못하고 나의 피를 그같이 억울하게 살해된 사람들에게 헌주(獻酒, libation ;술을 마시거나 땅 위에 부어서 신에게 제사하는 것)와도 같이 한방울씩 바쳐 야만 된단 말인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가 구사한 단어들은 그 사조에 있어서 유대적이라기 보다는 더 헬라적이며 헤롯(Herod)의 가족관계에 대한 극적인 문구들중의 하나를 생각나게 해 준다. 그것들은 자료로서 다베섹의 니콜라스(Ncolas of Damascus)의 것임을 보여준다. ] 그는 이러한 말을 간신히 하고는 죽었다. 그는 필헬렌(Philhellene)이라는[㈜ 주전 104년부터 103년까지. ] 칭호를 받으며 1년 동안[㈜ 헬라어로 되어 있는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I세의 동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하게 그가 필헬렌(Philhellene)이라는 칭호를 공적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없다.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의 칭호에 대한 상술(詳述)과 고대. 13권. 12 : 1(320)까지의 단락은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 통치하였는데, 그의 통치기간 동안 그 나라는 많은 이득을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투라이아 사람들(the Itu-raeans)과[㈜ 그들은 서쪽 베니게(Phoenician 오지(奧地)의 레바논(Lebanon)지역과 동쪽 다메섹(Damascus)의 남쪽 지역에 살았다. 참). 스트라보(Strabo) 753-756.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의 정복은 북부 갈릴리까지, 참). 전쟁. 1권. 3 : 3(76)과 Schurer i, 276. ] 전쟁을 벌여 그들의 영토에서 좋은 땅을 획득하였으며, 또한 그 주민들에게 만일 그 땅에 그대로 머무르고 싶거든할례를 행하고 유대인들의 율법대로 살 것을 강요하였다. 그는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으며 조심성이 많았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스트라보는 티마게네스(Timagenes)의[㈜ 주전 1세기 역사가. 참). 아피. 2권. 7(84)] 말을 근거로 증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 사람은 상냥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유대인들에게 매우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들에게 영토를 넓혀 주었으며, 또 그들에게 이투라이아 영토의 일부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들과 이투라이아인들을 할례로써 결합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