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권 32년 동안의 사건을 다룸
아켈라오의 추방에서 유대인이 바벨론을 떠날 때까지
제 1 장
가이사가 구레뇨를 수리아와 유대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파견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코포니우스를 유대 총독으로 파견한 것과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있던 종파들에 대하여
1. 구레뇨의 유대인들에 대한 재산세 징수
로마의 원로원(senator)인 구레뇨(Quirinius)는[㈜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구레뇨(Publius Sulpicius Quirinius)는 주전 12년에 로마의 집정관이 된 후, 원정대를 이끌고, 갈라디아 근처에 사는 아시아의 소수 민족인 호마나덴스(Homanadenses)인들을 성공적으로 토벌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타키투스의 보고서중, 연대기 iii : 48, 퀴리니우스의 장례식 중 디베료(Tiberius)의 찬사를 보라). 누가는 그의 복음서 2장 2절에서 말하기를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하기 위하여 베들레헴에 간 그때에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외의 몇몇 저자들, 특별히 람세이(W. Ramsay)는 요세푸스가 이 곳에서 인용한 이 시기(주후 6년) 뿐만이 아니라 주전 4년전에도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었음을 주장함으로 누가의 신빙성을 변호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책, \’그리스도는 과연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는가\’\’ : 누가의 신빙성에 대한 연구(Was Christ Born at Bethlehem : A Study in the Credibility of Luke), 1898, pp.229-28>. 그러나 테일러(L. R. Taylor)는 \’Am Jour. of Philol.\’ liv. 1953, pp.120-133에 나오는 \”구레뇨와 유대의 인구조사\”(Quirinius and the Census of judaea)에서 주장하기를 호마나덴스 전쟁(Hmanadensian War) 때에 구레뇨는 갈라디아지방의 총독도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 셔크(R. K. Sherk)도 테일러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갈라디아의 총독\’ : The Legates of Galatia(\’Johns Hlpkins Stud. in Hist. and Pol, Sc.,\’ Ser. 69, 1951, pp. 21-24, 여기에는 아주 많은 참고서적들을 인용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예수 탄생 이전의 수리아 총독들 명단에는 구레뇨라는 이름이 없다. 터툴리안도 누가가 언급한 그 사건이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치하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증언한다<\’Adv. Marcion,\’ iv. 19에 나오는 구레뇨와 인구조사 : 그 증거에 대한 재연구(Quirinus and the Census, Re-study of the Evidence)라는 코비슬리(T. Corbishley)의 논문과 \’Klio xxix[=Neus Folge, xi], 1936. pp91-92)를 보라>. 누가복음 2장2절은 하이켈하임(F. M. Heichelheim)의 한 문장을 번역, 인용해 보면 약간은 변증이 된다. \”이 인구조사는 수리아가 구레뇨 관할 아래 있기 이전에 시행된 첫 번째 것이다.\” : 프랭크(T. Frank)의 \’고대 로마의 경제 개관\'(An Economic Survey of Ancient Rome). iv, 1938, pp.160-161에 나오는 \”로마의 수리아\”(Roman Syria).] 집정관(con-sul)이 되기까지 여러 지역을 두루 거친 매우 위엄있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가 가이사[㈜ 아구스도(Augustus).]에 의해서 수리아 지역을 다스리도록 명을 받고[㈜ Legatus Augusti pro praetore, \’Class. philol.\’ xxxviii, 1943, pp. 188-189에 나오는 라센(J. A O. Larsen)의 \”Tituli Asiae minoris, Ⅱ, 508,\’에서 그는 dikaiodovth\”라는 단어가 이 부분에서만 나타나며, 루기아(Lycia)의 비문에서는 \”통치자(governor)의 의미로 쓰였다고 말한다. 그는 이 단어가 soter나 euergetes와 같은 명예로운 명칭이라기 보다는 통치자의 칭호를 말한다고 한다. 곧 통치자가 가장 정직한 재판관으로서(적어도 루기아에 의하면), 통치자의 직임을 아주 정의롭게 수행함에 따른 가장 높은 경의를 표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몇 사람들과 함께 수리아로 왔다.[㈜ \’수행원과 함께 도착하였다\’라는 번역은 맞지 않는다. 역자는 su;n ojlivgoi\”에 mevga\”를 합하여 \’소수 중 하나\’ 즉 \’극히\’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이때 기마단의 한사람이었던 코포니우스(Coponius)도[㈜ 유다의 첫 총독이다. 참). 전쟁. 2권. 8 : 1(117)절의 병행구에는 이 총독의 권한이 가장 극한 처벌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되어있다. 미쉬나(Mishnah) \’Middot\’ I. 3에는 성전의 5개 문 가운데 하나가 키포투스(Kiponus)의 문이었다고 언급한다. 시몬(M. Simon)은 이 문이 코포니우스(Coponius)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으리라고 손키노 역본(Soncino translation)에서 추측하고 있다.] 전권을 위임받고 유대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그와 함께 수리아로 왔다. 더구나 구레뇨는 수리아 지역으로 합병된 유대를 방문했는데 이는 유대인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고 아켈라오의 재산[㈜ 고대. 17권. 13 : 5(355)를 참조하라.]을 처분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그들이 과중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인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에게 저항했으나, 대제사장을 지내고 있는 보에두스(Boethus)의 아들이었던 요아자르(Joazar)의 설득으로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묵인하였다.[㈜ 고대. 17권. 13 : 1(339)에 보면 아켈라우스(Archelaus)는 자신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다고 요아자르(Joazar)를 고소하고 있다. 그 결과 그는 대제사장직에서 쫓겨났다.] 요아자르의 말에 완전히 설득당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그들의 재산 상태를 고분고분히 보고해 주었다. 그러나 가말라(Gam-ala)라는[㈜ 갈릴리 바다의 트랜스 요르단 방면에 있는 가울라니티스(Gaulantitis) 남쪽에 있는 도시가(갈릴리 북쪽에 있는 도시 이름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은 낙타(히브리어로는 gamal)와 같이 생긴 언덕 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의 자믈레(Mamle) 근처에 있다. 아벨(F.M.Abel)의 \’팔레스틴의 지형\'(Geographie de la Palestine), ii. 1938, p.325를 보라. 또한 슐라터(A. Schlatter)의 \”요세푸스에 나오는 히브리 지명\”(Die hebraischen Namen bei josephus, \’Beitr. 2. Ford. chris시. Theol.\’ xvii. 3-4, 1913, p.35를 보라.] 도시에는 유다(Judas)라는[㈜ 전쟁. 2권. 8 : 1(118)(Thackeray)(택커래이의 주(註)를 보라)과 고대. 18권. 1 ; 6(23)의 병행구절을 보면, 요세푸스는 유다를 제4철학의 기초자로 보고 있다. 행 5 : 37에 가말리엘(Gamaliel)은 그를 인구조사 시기에 유대인들을 선동하자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고대. 20권. 5 : 2(102)를 보라. ; Jewish Quart. Rev.\’ 36, 1945-46, pp. 281-286에 나오는 캐너드(J. S. Kenaard)의 \”갈릴리의 유다와 그의 일당\”(Judas of Galilee and His Clan)에서는 이 유다와 갈릴리의 지배권을 얻고자 기회를 노렸던 유다와 동일시 한다<전쟁. 2권. 4 : 1(56)>.] 골란인(Gaulanite)이[㈜ 가울라니티스(Gaulanitis)는 요단의 동쪽, 갈릴리 바다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전쟁. 2권. 8 ; 1(118)에 보면 유다는 갈릴리인이라고 불리웠다.] 살고 있었는데 그는 바리새인인 사독(Saddoc)과 함께 백성들로 하여금 반역하도록 선동했다. 그는 말하기를 세금을 내는 것은 노예나[㈜ 택커래이(H.St.Thackeray)는 \’요세푸스 선집\'(Selecions from Josephus),1919, p.73에서 헬라어 사본이 투키디데스 I : 122(실패는 \”철저한 노예 그 이상의 어떤 것도 가져오지 않았다\”)를 모방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어떤 이들은 다음 본문인 고대. 18권. 1 : 1(5-8)에서 (유사한 문맥-내전의 심리분석이 있는) 투키디데스 iii : 82-84를 너무 많이 생각나게 할 정도여서 드뤼나(H. Druner), \’요세푸스 연구\'(Untersuchungen uber josephus), 1986, pp.1-34, 특히 p.12와 택커래이, \’인간과 역사가로서의 요세푸스\'(Josephus, the Man and the historian), 1929, pp110-114에서는 고대. 17-19권이 요세푸스의 작품이 아니라 투키디데스에 열중하였던 한 조수의 작품이라고 주장하였음을 부연하였다. 그러나 다음을 참조해 보라. 페터슨(H. Petersen)은 \’Am. Jour. of philol.\’ 79, 1958, p.261, 주5에 나오는 그의 \”요세푸스의 진실한 작품과 그의 작품이라고 단정된 것들에 대하여\”(Real and Alleged Literary projects of Josephus)라는 논문에서 이 가정들을 반박하고 있다. 그는 투키디데스를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고대사의 초기 부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투키디데스에 대하여 많이 언급되는 이유는 요세푸스가 17권-19권 부분을 저술하는 동안에 투키디데스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였기 때문이며 이렇게 하여 요세푸스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리챠드(G.C.Richards)의 \”요세푸스의 고대사 구성\”(The Composition of Josephus\’ Antiquities), \’Class. Quart. xxxiii, 1939, p.39를 참조하라>.] 마찬가지이며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과감히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민들을 선동하고 다녔다. 그 두 사람은 마치 자기들이 주민들의 행복과 재산을 안겨다 줄 수 있고 명예와 영광도 누릴 수 있게 만들 것처럼 선동하였다. 유다와 사독은 게속해서 말하기를 지금까지 그들의 권익을 위하여 자기들이 말한 그 내용에 동참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반대로 주저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행동으로 옮긴다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실것이라고 자신에 찬[㈜ 역자는 여러 사본들의 내용을 따랐다. 왜냐하면 고대. 18권. 1 : 1(18)에서 다시 볼수 있기 때문이다. 제4의 철학(The Fourth Philosophy)은 목적을 위하여서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었다. 허드슨의 교정에 의하면(Hudson\’s emendation) povnou를 \”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하고 있다.] 목소리로 유대인들에게 말하였다. 유대인들은 이 말에 크게 고무되어 로마 정부에 대해 매우 과감하고 심도있는 반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두사람의 선동으로 인해 야기된 유대인의 반란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겪게되었고, 온 나라는 불합리한 그의 교리로 큰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심한 전쟁에 휘말리게 되어 유대인들은 고통을 함께 나누던 많은 동족들을 잃었다. 또한 강도들이 극심하게 날뛰었으며 많은 고위급 사람들은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공공의 복지를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소요를 일으킨 그들은 적과 동족을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이들은 사람들에 대해 광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살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도시마다 약탈과 파괴가 계속해서 자행되었을뿐 아니라 기근마저 겹쳐 절망은 극에 달할 정도였다. 나날이 확산되던 소요는 마침내 적들에 의해서 하느님의 성전마저도 불타 황폐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여기서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전통을 하루 아침에 개혁하고 혁신하는 것은 백성들의 회합을 깨뜨리는 시막한 결과를[㈜ 또는 \”그것에 접촉하는 자들의 멸망\”이라고 할 수 있다.] 초래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 경우 유다와 사독이 철학의 제4학파(fourth school ofphilosophy)를 주도적으로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르는 열렬한 지지자들이 많이 늘어나자, 갑자기 그런 일이 들이닥칠 때 필연적으로 따르는 여러 가지 갈등의 씨를 심으면서 온 나라를 순식간에 폭동으로 들끓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은내가 지금부터 기술하고자 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그 철학의 신비함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젊은이들 속에 파고들어서 그들을 오염시키고 그들의 정신을 파괴시켜[㈜ 본문의 해석이 매우 어렵다. 페터슨 교수(Prof . Petersen)는 개인적인 교류를 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주었다. \”특별히 그들과 일치하는 일반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멸망이 후대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온갖 파괴를 일삼게 했던 그 철학 체계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 보려고 한다.
2. 고대 유대 철학의 세 유형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그들 나름대로 독특한 세 부류의 철학적 종파를 가지고 있었는데, 에세네파(the sect of the Esse-ns), 사두개파(the sect of the Sadducess), 그리고 바리새파(the sect of the pharisees)라고 불리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종파에 관해서는 \’유대전쟁사\'(The Jewish War)제2권에서 이미 말한 바 있으나[㈜ 전쟁. 2권. 8 : 2-14(119-166). 요세푸스는 이 곳에서 고대. 13권. 5 :9(171-173) 부분에 나오는 세 철학간의 토론에 대하여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마르쿠스(Marcus)가 그의 고대. 13권. 5 :9(171)부분의 주(註)에서 언급하고 있는대로 요세푸스는 그의 헬라 독자들에게 이 세 분파를 더욱 지적인 방법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바리새인들과 스토아 학자들과(자서.2(12)), 피타고라스 학파의 중심 논리를 비교하고 있다<고대. 15권. 10 : 4(371)>.] 여기서 다시 잠깐 언급하려고 한다.
3. 바리새파 사람들
바리새파 사람들은 생활의 수준을 단순화하고, 사치와 낭비하는 생활을 싫어한다.[㈜ 요세푸스는 바리새인들과 스토아 학자들의 유사성과(각주15를 참조하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의 상이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은\’금 그릇들을 자신들의 전 삶처럼 여겼다. 이는 그들이 허세를 부려서가 아니고(문자 그대로 \”그들의 거만한 성품\”), 사두개인들 자신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이승에서 자기자신을 괴롭힌다. 그들은 저승에서도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그들의 사상 때문이다(\’Abot de-Rabbi Natan 5\’, 골딘(J.Goldin)옮김).] 그들은 생활에 유익한 것으로 선택된 율법을 철저히 따르며, 그들에게 주어진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한 일로 여긴다.[㈜ 휘스톤(Whiston)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이성이라는 안내자를 추종하였다.\” 이것을 많은 학자들이 채택하고 있지만, 사실 잘못된 번역이다. 택커래이가 지적하고 있는 대로(\’선집\’, p.158, 주4) logo\”는 여기서 사두개인들과 에세네파 교리를 제시하고 있는 초두의 문장들(1 : 4,5(16-18))에 언급된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어(G.F.Moore)는 \’Harv. Theol. Rev.\’ 22, 1929, p.374에 나오는 그의 논문 \”요세푸스에 따른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유대인들의 철학\”(Fate and Free Will in the jewish philosophies according to Josephus.)에서 요세푸스가 바리새인들의 이성적인 삶을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이 스토아 학파와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썼다고 말한다(자서. 2(12)).] 그들은 윗사람을 잘 공경하고 보호하며, 성급하게 추정하여 자신들의 제안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병행구절인 5 : 9)172)부분의 주에서, 마르쿠스는 운명(fate, eiJmarmevnh)이란 단어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섭리(Providence)와 같은 의미를 가진 헬라 단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무어는 같은 부분의 379의 eiJmarmevnh에 관한 주에서 히브리어에는 헬라 철학, 특별히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같은 뜻의 단어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사람의 능력안에 내재되어 있는 선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 자체는 포기하지 않는다.[㈜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균형에 대한 동일한 견해가 5 ; 9(172)에서 나오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믿음에 대한 이와 비슷한 견해가 탈무드에도 나온다. \”모든 것은 예견된다. 그러나 여전히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Abot\’ iii. 19).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외에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Berachot\’ 33b). 동일한 점이 또한 다음 절에도 잘 나타나 있다. \’관념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지명된 천사인 라일라(Lailah)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정액(精液)한 방울을 가져다가 영광이 오직 그에게만 계시는 거룩한 분 앞에 가져다 놓고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우주의 통치자시여! 이 정액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으로 인간이 되어 강해질까요\’ 아니면 나약해질까요\’ 지혜로워지겠습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한방울 정액이 악해질 것인가, 의로운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Niddah\’ 16b) 참). 전도서 15 : 11-17, 시편 9 : 7-9등.]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운명이라는 이 양자가 융합하는 것을 기뻐하시며, 선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의지는 그 자체가 운명의 장이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본문은 택커래이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기도 한다(\’Harv. Theol. Rev.\’ xxv, 1932, p.93) : \”모든 것들이 운명에 의하여 결정된다 할지라도, 인간의 의지로 하여금 그렇게 따라 가도록 충동질하는 것은 아니다. 운명과 선악을 가지고 이것과 함께 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인간과의 연합이다.\”] 또한 영혼에는 불멸의 힘이 있으며,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의 행위에 따라 상이나 벌을 받는다고 믿는다.[㈜ 요세푸스는 그의 헬라 독자들을 위하여 다시 한번 구절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의 사회 \’ 종교사\'(A Social and Religions History of the Jews), ii, 1952, pp.344-345, 주 46)에서 바론(S.Baron)은 전쟁. 3권. 8: 4(373-3750에서 요세푸스가 의로운 자의 영혼이 천국에서 최고의 성소(聖所)를 차지하게 된다고 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만일 악하게 살았으면 영원한 감옥에 갇히게 되고, 선하게 살았으면 새 삶을 살 수 있는 관문을 쉽게 통과하게 된다.[㈜ 택커래이는(\’선집\’, p.159) 자살의 부당함에 대한 요세푸스의 장황한 열변이 토해져 있는 전쟁. 3권. 8 : 4(374) (\”그들의 영혼은……하늘에서 가장 거룩한 곳에 가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 있다가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그들은 순결한 육체를 다시 얻고, 새로운 안식처를 갖게 될 것이다\”) 부분에 전후 참조를 제공하고 있다. 전쟁사의 이 구절에 대해 택커래이는 윤회(輪廻)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윤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중심 교리였던 부활 사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참). 마카비2서 7 : 9에 사용되고 있는 단어인 ajnabivwsi\”는 부활을 의미하는 동사 ajnabivow(요세푸스에 의해서 사용된 단어)의 명사형이다.] 이런 교리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예배드리거나 기도[㈜ \’맹세\’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드릴 때나 제사를 드릴 때에는 바리새인들의 지시에 따라서 행했다. 바리새인들은 말과 행동에서 온전한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큰 신뢰를 주고있었다.
4. 사두개파 사람들
사두개파의 교리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영혼이 몸과 함께 죽는다고 생각하며[㈜ 사두개인들은 구전을 배격하고 성문법(成文法)만 받아들였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양쪽 다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전통이 있었다. 이는 미쉬나와 같은 본문을 보면 알 수가 있다.(\’Makkot\’ I : 6). 그러나 이것들은 일종의 법령의 포고(gexerot, decrees)와 같은 것이었지 구전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었다.] 철저하게 율법에 있는 것만 준수하려고 한다. 그리고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 교사들과 논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다.[㈜ \’Heb. Union Coll. Ann.\’ xxii, 1949, p.243에 나오는 \”랍비의 번역 방법과 헬라의 수사학\”(Rabbinic Methods of Interpretation and Hellenistic Rhetoric)이라는 논문에서 도브(D. Daube)는 사두개인들이 자유로운 찬반토론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헬라의 철학파에서 도입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두개인들과 헬라 학파들간에 접촉이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탈무드(Talmud)도 바리새인들이 논쟁술에 있어서 사두개인들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음을 보여 준다. 요세푸스가 사두개인들이 매우 논쟁적이었다라고 말한 이유는 그가 전쟁. 2권. 5 : 1(66)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사두개인들이 그 자신들과의 관계에 있어서조차도, 행위에는 교양이 없었고 상호 의사소통하는 것도 마치 이방인들이 하듯 예절이 없고 거칠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단지 극소수에 의해서만 이해되어졌는데 그들은 최상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실제적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는다. 그들이 관리직에취임할 때에는 언제든지 바리새인들의 방식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유대인들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 바벨론 탈무드(Babylonaian Talmud)에 나와 있는 그의 아들을 향한 사두개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Yoma\’ 19b) : \”나의 아들아, 우리가 비록 사두개인들이지만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두려워한단다\” 사두개인의 처들이 월경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규칙을 존경심을 가지고 따르고 있었음을 \’Niddah\’ 33b에 보면 잘 알 수 있다.]
5. 에세네파 사람들
[㈜ 에세네파에 대한 충분한 토의를 전쟁. 2권. 8 : 2-13.(120-161)부분에서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상세한 설명들 곧 에세네파의 숫자, 농업인구, 제사와 노예등에 대한 그들의 견해, 그들의 성전 배척 등에 대해서 필로(Philo)의 글을 보면 잘 알 수 있다(\’Quod Omnis probus Liber Sit\’ 75-91). 요세푸스도 이것을 인용, 참조하였다. 참). \’Heb. Union Coll. Ann.\’ xxix, 1958, pp.278-279에 나오는 스미스(M. Smith)의 논문 \”요세푸스의 에세네파에 대한 묘사와 궤변\”(The Description of the Essenes in Josephus and the Philosophumena)과 이 곳에 실린 참고문헌을 참조하라.]
에세네파의 교리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느님의 손에 두고 있다. 그들은 영혼이 불멸하다고 생각했으며, 의(儀)[㈜ provsodon의 의미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휘스톤(Whiston)은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위의 상급은 정직하게 애쓰는 자에게 돌아간다\” 택커래이도 그의 선집(Selection, p.160)에서 \”상급\”(rewards)이라고 번역해 놓고, 주(註)에는 \”수익(revenue)라는 문자적인 의미가 있음을 밝혀 놓았다. 포스트 교수(Prof. post)는 의의 \”수입\”(\”income\” of rithteousness)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의 교리에 의하면, 인간은 10가지의 선행을 기억하고 행하면(\’Shabbat\’ 127a) 그 열매를 오는 세상에서 누릴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즐기게 된다. 그러나 스트러그넬(J.Strugnell)은 \’Jour. of Bibl. Lit\’ 1xxxvii, 1958, p.109에 나오는 그의 논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와 에세네파(Flavius Josephus and Essenes) : 고대. 18권. 1 : 5(18-22)를 본문으로 하여\”에서 행위에 대한 이러한 동기부여를 하는 것 같은 번역은 에세네파의 신념과 맞지 않다고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 더욱이, 요세푸스가 특별히 관심을 쏟은 투키디에스가 단수로 쓰긴 하지만(2권. 97, 3권. 13) \”보답\”(returns)이나 \”수익\”(revenues)이라는 의미로는 거의 다 복수로 쓰여졌다. 단수일 때는 주로 \”접근\”, \”길\”(approach) \”승인\”(admission)등의 뜻으로 쓰여졌다. 참). 시편 1 : 6, oJdo;n dikaiwvn(\”의인의 길\”), 이 구절은 provsodon pr;o\” to; divkaion이라고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페터슨교수가 나에게 상기시켜준 것처럼, 속격일 때 훨씬 더 쉽게 설명이 될 수 있다. 분리 전치사는 또한 복합 명사의 일부분이다. 만약 사해문서종파와 에세네파가 동일하다는 스트러그넬의 가정이 옳다면, \”접근\”, \”길\”(approach)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그가 인용한 근접 본문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p.109). 1 QH 7 : 15 그리고 1 QS 4 : 21 번역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의로운 자의 길\”(the approach of the rigteousone)이다. 이 번역은 에세네파의 메시야 열망을 강하게 나타내주는 표현이다. 참). 또한 사해 종파의 \”의의 선생\”이라는 결정적인 점들을 나타내 주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provson이라고 교정한다면 그 의미는 \”의의 진전\”(the advance or progress of righteousness)이 될 것이다.]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칠 때[㈜ 발췌본과 라틴역에는 반대의 내용이 있다. 이 본문은 쉬러<E. Schurer,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민족사\'(Geschichte des judischen Volkes im Zeitalter Jesu Christi), ii, 1907, p.663, 주50>; 마이어<E. meyer, \’기독교의 기원과 시작(Ursprung und Anfange des Christentums), ii, 1925, p.397 주4> ; 프리드랜더<M.Friedlander, \’예수시대의 유대교 내부의 종교 운동\'(Die religiosen innerhalb des Judentums Zeitalter Jesu), 1905, p.156>가 취하는 것이다. 다른 사본들은 이 본문을 생략하고 있다. 부정적으로 인용을 하고 있는 작가 중에는 필로가 있다(\’Quod Omnis Probus Liber Sit\’ 75). 그는 에세네파 사람들은 동물을 제물로 드림으로가 아닌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데 힘을 쏟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R. Marcus)는 그의 논문 \”바리새인들, 에세네파 사람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Pharisees, Essenes, and Gnostics), \’Jour. of Bibl. lit.\’ 1xxiii, 1954. p.158, 주에서, 이는 에세네파 사람들이 동물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비난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이 제사가 그들의 경건 수행의 중심이 아니다는 것을 말할 뿐 이라고 주장하였다.스트러그넬은 동일 논문 p.114에서 두 가지의 가능한 번역을 제시 하고 있다. 이중 첫 번째 것은 다음과 같다. \’비록 에세네파가 성전에 ajnaqhvmata(제물)를 보냈지만, 그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즉 \”전혀\”(at all)보다는 \”거기에\”(there)가 좋다). 왜냐하면 사용되는 aJgnei\’ai(정결의식)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가 선호하는 대체역(alternative version)은 역자의 작품의 기초이다. 만약 사해종파를 에세네파와 동일시 하게 된다면, 스트러그넬이 지적한 대로(p.113). 비록 장소는 모르지만 쿰란 사본과 고고학적 증거들이 보여 주고 있듯이 제사가 행해졌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oujk(영어의 not과 같이 사용되는 헬라어의 부정 부사-역자주)를 삽입하기가 곤란해진다. 더욱이 바움가르텐(J. M. Baumgarten)이 \’Harv. Theol. Rev.\’ ,xlvi. 1953, p.155에 나오는 그의 논문 \”사해(쿰란)사본에 나타나 있는 유대종파의 제사와 예배\”(Sacrifice and Worship among the jewish Sectarians of the Dead Sea(Qumran) Srolls)에서 제시한 우리가 근거로 사용한 사본은 영적 제사를 의미한다는 견해는, 어디서도 이러한 의미로 쓰인 예를 찾아 볼 수 없으므로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정결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지기 전에 바리새인들은 붉은 암송아지를 부정을 씻기 위한 번제로 제사장들에게 주문하였다(민 10 : 2이하). 이는 사두개인들이 정결케 되기 전인 해지기 전에 부정한 자들에 의하여 의식이 치러졌다고 비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레 22 : 7) 프랑켈(Z. Frankel)은 그의 논문인 \”Die Essaer nach talmudischen Quellen,\”(\’Monatsschr. f. Gesch. u. Wissensch, d. Jud.\’ ii. 1853, p.65에 수록됨)에서 말하기를 에세네파는 사두개인들의 견해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정결케 하는 방법을 한정 짓게 되었고, 그래서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를 물과 섞어서 시체를 만져 부정케 된자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하였다(민 19:11-13). 그들은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서 물을 사용하였으므로, 점차로 성전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성전출입 외에 정결케 하는 다른 방법인 물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들 모두는 자기들끼리 의식을 지내는 성전의 뜰에 모여서 제사를 드렸다.[㈜ 긴쯔베르크(L. Ginzberg)는 \’알려지지 않은 유대종파\'(Eine unbekannte judische Sekte) Part 1, 1922. pp.99-100에서 사독계열(Zadokite sect)의 병행구를 인용한다. 이 사독계열은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반대자들이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거룩하지 않다고 판단이 들때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의 잘못을 입중해 내려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 중에 하나는 부정함을 타지 않기 위해서 성전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이틀린(S. Zeitlin)은 그의 논문 \”에세네파(The Essenes)\”, \’Hadoar jubileee Vol.,\’ 1957(히브리어로 되어 있다) p.49에서 말하기를 에세네파가 성전에 제물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하스모네안가인 시몬(Simon the Hasmonaean)을 대제사장으로 선출하는데 대한 항의였다고 한다(그는 사독계열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여전히 마카비시대의 하시딤(Hasidm)과 에세네파를 동일시 하는 불명확성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유리가 가진 본문은 에세네파인들이 내쫓겼다고 말하고 있지 스스로 외부와 단절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요세푸스는 evijrgomenoi를 항상 피동태로 사용하였지, 중간태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마르쿠스(R. Marcus0의 \’바리새인들, 에세네파 사람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Pharisees, Essenes, and Gnostics), \’Jour. of Bibl. Lit.\’ 1xxiii, 1954. p.158과 택커래이-마르쿠스의 요세푸스 사전(Lexicon to Josephus, s.v.)을 참조하라).] 한편, 그들의 삶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건실하였으며,오로지 농사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선의 댓가를 요구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존경을 받을 만하다. 그들의이러한 성품은 이전의 헬라인이나 야만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나이가 많아서 그 일을 그만두게 할 때까지 꾸준히 일을하였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과 텍커래이-마르쿠스의 요세프스 사전(Lexicon to Josephus. s. v.)을 참조하라). [㈜ 이 본문도 번역하기가 어렵다. 휘스톤은 다음과 같이 옮겼다. \’그들이 의를(to;divkain) 행함에 있어서, 덕을 세워가는 데에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것이 그들의 모임에 의해서 보여진 것이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한 공용(共用)하였다.\”] 부자라고 해서 재산이 없는 사람보다 재물 때문에 특별히 더 큰 기쁨을 누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수는 4,000명이 넘는다.[㈜ 같은 숫자가 필로에 의해서도 제시되었다. \’Quod Omnis probus Liber Sit.\’ 75.]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노예도 없다. 그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결혼이 사람들에게 가정 불화를 많이 제공해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잠언 25 : 24을 참조하라;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리라\’ 여성 경시 사상은 사해사본에도 나타나 있다. 이는 스트러그넬이 p.110에서 제시하였다. ] 노예를 두지 않는 것은 불의(不義)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그대신 그들은 빵과 음식을 제공해 주는[㈜ 다른 사본에는 \’그들의 보상과 땅의 소산을 받고, 양식과 다른 이들의 음식을 준비하는 선한 사람, 제사장들\’이라 되어 있다.] 제사장과 그들의 세금과땅의 생산물을 받는 적임자들[㈜ 큼란 공동체 안에 참). 스트러그넬 pp. 110-111. 하나는 제사장직이고, 또 하나는 비- 제사장적인이중 지도체제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발췌본에 의거하여 주장하고 있는것이다(그러나 이 발췌본도 아마 사본 A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 거수로 뽑았다. 그들의 삶의 방식에 있어서는 디키아인(Dacian)들이 크티스타이(Ctistae)라고[㈜ \’창설자\’\’대부분의 다카아인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에서\’라는 본문은 영향받은 의미가 아니다. 본문에 사용된 오르텔리우스(Ortellius)의 뛰어난 교정을 결혼하지 않고 살았던 크티스타이 (Ctistae)라는 부족을 언급하고 있는스트라보의 포시도니우스(Posidonius in Strabo 7:296)의 본문을 그 근간으로 삼고 있다. 스칼리거 (Scaligor)의 교정인 플리스타이스(Polistai\’\”)는 택커래이가 받아들였지만 (\’선집\’, p.160), 요즘 사용되지 않는다. 이는 문법학자인 플록스(Poliux)와 다른 헬라 작품들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요세푸스가 말한대로(고대 18천. 1 : 5(120)) 에세네파와 같은 의를 소유했던 사람들은 헬라의 어떤 종파나 야만인들 중에서도 없다. 그러나 1 . 5(20)의 비교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결혼을 피하고, 노예를 두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며 나누는 삶의 태도와 정신은 조금은 찾아 볼 수 있다. 듀폰-솜머(A.Dupont-Seurnor)는 논문인 \”에세네파에 대한 요세푸스의 본문에 대해서 고대. 18권:. 1 : 5.(22)\”(On a·Passage of Josephus Relating to the Essenes, Antiq, xviii 22)\’Jour. of Stud.\’ i, 1956, pp.361-366에서 제시하기를 라고 나온 본문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다수\”(the many) 라는 뜻의 ha-rabim(히브리어에는 최상급이 없다)으로 쿰란 공동체의 일원에 대한 익숙한 명칭에 따르는 병행구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다양한 에세네파 단체들이 쿰란 공동체를 아주 유사하게, 그들의 모델로서 따랐다는 것이다. 쿰란 종파들은 스스로를 \”사독의 아들들 \”(the Sons of Zadok)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듀폰-솜머는(p.364) Dakwn에서 Sadwvk까지로 교정하였고, 더 나아가서 아주 Saddoukaiwn이라고 교정하였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다수라 불리우는 사두개인들(통속적인 사두인이라는 의미와는 다르다)의 모범을 가능한한 따랐다\”가 된다. 그러나 Saddoukaiwn이 Dakw\’n으로 변했다는 것은 고문서학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 부르는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고 매우 유사했다.
6. 갈릴리 사람, 유다에 의해 창립된 네번째 집단
유대 철학의 네번째 학파는[㈜ 제 4 철학(the Fourth Philosophy)과 열심당(Zealots)을 동일시하는 것에는 주의하여야 한다. 비록 학자들이 가끔 이렇게 받아 들이기는 하여도 요세푸스의 작품 중 이곳에서나 전쟁. 4권. 3 : 1(121) 이하에서도 이러한 내용은 없다. 무어 (G.F,Moore)도 역시 같은 의견이다(Harv. Theol Rev.\’ xxii, 1929. p.373).] 갈릴리 사람인 유다가[㈜ 참). ,이혼 중서에 통치자의 서명이 들어가야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반대하였던 갈릴리의 이교도였다<Mishna,\’Yadaim\’4 ; 8 : 2는 사두개인으로 불렸다. 그러나 리베르만(S. Liebermnn)은 \”랍비 자료로부터 나은 동굴 두르마] 창시했다.이 학파는 하느님만이 그들의 지도자요 주인이라고 하는 확신을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향한 억누를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바리새파의 견해와 모든 면에서 같다.
그들은 사람을 주(主)로 부르지만 않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친구나 친척들이 죽임을 당해도복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확고부동한 결심은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해 서술한 내용들을 독자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고통을 이겨내는 생생한 모습들을 축소할 것같아 두려운 것이다. 유대인들의 로마 정부에 대한 이런 반항적 기질은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리 에 대한 조명 \”(Light on Cave Scrolls from Rabbinic Sourres), \’Proc. of the Am. Acad, for Jewish Res.\’xx, 1951, pp.401-402에서 추정하기를. 우리가 이미 국가에 대한 사두개인들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서 쓰인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의 이교도이다>.[㈜ 64. 65년에 네로에 외해서 총독들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잔악성과 탐욕에 대해서는 전쟁, 2권. 14 : 2(277-278), 고대. 20권. 11 : 1(252-258)에 잘 설명되어 있다. ]
총독이 되어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기 시작한 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의 무분별한 무법통치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권력남용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로마들에게 결사적인 저항을 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유대인들 중에 있었던 학파 중 네번째 학파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