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권 9장 아시네우스와 아니레우스 두 형제 때문에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이 당한 일들에 대하여

 


제 9 장



아시네우스와 아니레우스 두 형제 때문에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이 당한 일들에 대하여



1. 바벨론에 거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그들의 보물을 보관해 둔 성읍, 네아르다(Nearda)와 니시비스(Nisibi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유대인들과 특히 바벨론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무시무시한 재난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전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비교도 안되는 대량학살을 경험해야 했다. 여기서 그들의 재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상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바벨론에 네아르다(Nearda)라는[㈜ 시파르(Sippar)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유브라데강과 나르말카(Nahr Malka-\”왕의 운하\”와의 교차지점에 위치했는데, 이것들은 도시틀 공격하기에 어렵게 만들었다. 참). 바벨론 \’Kiddushin\’70 b,\’Shabbat\’108 b틀 참조하라. 이곳은 탈무드 시대에 추방된 자들의 소재지였고, 3세기애논 사무엘이 이끄는 유명한 학교가 있었딘 네하르데아(Nehardea)와 동일한 곳이다. ] 도시가 있었는데사람이 많이 살았을 뿐 아니라 풍부한 물자와 넓은 지역 그리고다른 유익을 많이 누리는 도시였다. 더구나 그 도시는 유브라데강으로 완전히 둘러 쌓여 있고 성벽이 세워져 있어서, 적의 침입에 쉽게 무너지는 곳이 아니었으며 그 강 유역에는 이와 비슷한조건에 있는 니시비스(Nisvbis)[㈜ 이곳은 분명히 북동 바벨론에 있는 유명한 도시와는 구별되는 곳이다. 왜냐하면, 쉬투름(sturm)의 \”Nisibis\”, no. 3,\’Pauly-Wissowa\’, xvii\’,1936, p.757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요세푸스가 언급한 도시는 네아르다(Nearda) 근처의 유브라데강에 있는 한 섬에 위치한 도시인 반면, 다른 니시비스(Nisibis)는 티그리스강과 유브라데강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 도시가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곳을 천연요새로 출고 그곳에 드라크마를[㈜ 반세겔에 해당하는 돈이 20여년 동안 모든 유대인에 의해서 지불되었다.] 보관해왔다. 그 돈은 다른 헌물뿐 아니라 조상 전래대로 하느님께 드리는 헌금이었다. 즉, 이 도시는 그들의 은행인 셈이었다. 그곳에보관된 헌금은 적절한 시기에 예루살렘으로 보내졌다. 이 돈이 운반될 때는 바벨론을 지배하고 있던 파르티아인의 약탈이 두려워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동원되었다. 거기에는 네르다의 원주민이었던 아시나이우스(Aninaeus)와 아닐라이우스(Anilaeus)라는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그들에게 장막짜는 법을[㈜ 팔레스틴에서의 도제제도의 표준적인 조건들에 대해서는, 크라우스(S. Krauss)의 \’Talmudische Archaologie\’, ii, 1911, p.255~256을 보라.] 배우게 했는데, 직물을 짜는 것은 그 당시에는천한 일로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수치스러운 직업으로서의 직조업에 대해서는 베짜는 사람의 직업 보다 낮은 직업은 없다고 기술하는 미쉬나(Mishnah), \’Eduyoth\’ I. 3과 사용된 단어가 분명히 \”베짜는 사람\”(gerdiov\”)이라는 단어로부터 유추된 바벨론의 \’Baba Batra\’ 21 a를 보라. 일반적으로는, 크라우스(krauss)의 저서 I. 1910, p.149와 560의주, 271~275을 보라. 크라우스는(p.560 주 273) \’Abodah Zarah\’ 26 a에 제시되어 있는 바벨론으로부터 유출되는 격언을 인용한다 : \”일년 동안의 빈약한 수입은 그가 만일 거만한 바보가 아니라면, 베짜는 사람을 변화시킬 것이다(개선시킬 것이다)\”. 프랭크(T. Frank)의 \’An Economic Survey of Ancient Rome\’, iv, 1938, p.191에 나오는 하이헬하임(F. M. Heichelheim)의 \”Roman Syria\”에서는 바벨론의 보르시파(Borsippa)와 네아르다(Nearda)는 많은 양의 아마포(布)와 모직 상품을 생산했다(Strabo xvi. 39를 참조하라. 그는 이 부분을 인용한다) 라틴역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구절을 두 형제가 돛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도제의 일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네이버의교정안). 그러나 돛은 아마포로 만든 것이며, 그리고 탈라시우르게인(talasiougeivn, 짜는)은 오직 모직을 짜는 것만을 언급할 수 있다. 또한 돛을 만드는 일은 고대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독립된 직업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에게 일을 가르치며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이 그들에게 맡긴 일을 늦게 가져오자 채찍으로 벌을 주었다. 그들은 그런 벌에 대해 모독감을 느끼고 지붕에 보관되어 있던 많은 무기를 탈취하여 \”이별의 강\”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으로 도망갔다. 그곳은 좋은 목초지를 이루고 있으며, 푸른 꼴을 겨울 동안 저장할 만큼 충분한 양이 있는그런 곳이었다. 그곳에 있는 젊고 낮은 계급의 무리들이 그들에게 모여들어 두 형제는 그들을 무장시키고 두목 노릇을 했다. 그들이 대항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자, 성을 쌓고 목자들에게 사람들을 보내 그들의 목축으로부터 세금을 내도록 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에 고분고분한 사람들에게는 우의를 표시했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오는 모든 적들로부터 보호해 주었으며 그들이 그들의 제의를 거절할 경우에는 양떼들을 몰살시킨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자 그들의 제의에 동의하고부과된 양만큼 보내주었다. 이것은 그들을 더욱 강성해지게 하고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들을 몰아넣고 약탈을 하곤 했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가 파르티아 왕의[㈜ 아르타바누스 Ⅲ세(ArtabanusⅢ)를 가리킨다. 참). 고대. 18권. 2 : 4(48)이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2. 형제들이 안식일에 파르티아 군대를 퇴패시키다



 바벨론의 총독은 이러한 소리를 듣고 그들이 점점 강성해져서더 큰 어려움이 일어나기 전에 그들을 진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총독은 할 수 있는 한 파르티아 군대와 바벨론 군대를 최대한 동원해서 그들을 향해 진군했다. 그의 목적은 그가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그들에게 전해지기 전에 그들을 공격해서 전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늪지대 근처에 진을 치고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다음날은 안식일이었는데 그날은 유대인들이모든 노동으로부터 쉬는 날이었다. 그래서 총독은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이 저항하지 않을 것이므로 전쟁을 하지 않고도 그들을 모두 생포해 감옥에 집어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다음날 총독은 기습공격을 하기 위해 조금씩 진격해 나갔다.[㈜참). 안식일에 아닐라이우스(Anilaeus)를 공격하려는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의 비슷한 계획.] 한편 아시나이우스(Aninaeus)는 무기를 옆에 두고 동료들과 함께 앉아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여보게, 말소리가 내 귀에들렸는데 풀을 뜯는 말소리가 아니라, 고삐 맨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탄 말소리 같아, 적들이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있는 것 같으니 누군가 나가서 살펴보고 정확한 사실을 보고하게. 내 말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말을 하자마자 몇사람이 정찰을 하기위해 나갔다. 그들은 곧바로 돌아와서 말했다. \”적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는 당신의 추측이맞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백성들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목장에 갇혀 있는 동물처럼 덫에 걸려있습니다. 수많은 기병들이 몰려오고 있는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율법의 명령 때문에 우리의 손은 묶여 있습니다.\”그러나 아시나이우스는 그에게 안식일 의무를 요구하는 정찰병들의 견해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어떤 저항도 없이 죽음으로써 적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보다, 율법에는 위반 될지라도 용기를 내어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는 것이 율법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아시나이우스는 스스로 무장을 하고 부하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들은 곧 적들과 전투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마치 먹이를 만난 것처럼 용감히 싸웠기 때문에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3. 파르티아의 아르바타누스왕이 그들의 부대를 자신의 군대에 편입시키다



 파르티아의 아르타바누스(Artabanus)왕은 이 전투의 소식이 파르티아왕인 자신에게 전해지자 왕은 유대인들의 용감함에 매우 놀라면서 그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신임하는 신하를 보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그대들이 내 영역을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주었음에도 불고하고 나 아르타바누스왕은 그대들의 위업을 가상히 여겨 그대들을 처벌하지 않겠노라.사람을 급히 보내어 엄숙히 서약하여 말하노니 그대들이 여행할동안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노라. 그러하니 속임과 책략없이 진정한 친구로서 그대들이 나를 방문하기를 원하노라. 그대들이 이곳에 오면 많은 선물과 그대들의 위업에 버금가는 직책을 줄것을 약속한다. 그대들에게 큰 유익을 주겠노라.\” 그러나 아시나이우스는 그곳에 가는 것을 미루고 그의 형제인 아닐라이우스(Anilaeus)만 보내면서 많은 선물을 함께 보냈다. 아닐라이우스가 아르타바누스왕 앞에 나아가자 그가 혼자 온 것을 본 아르타바누스는 \”아시나이우스는 왜 오지 않았느냐 그가 두려워서 오지 않은 것을 알고 있노라. 내가 그대들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않겠다고 조상신에게 맹세하지 않았느냐. 또 내가 오른손을 내밀어 화해를 제의한 것은 미개한 방법이기는 하나 방문했을 때에 가장 확실한 안전을 보장하는 표시이다. 오른손을 내밀었다는 것은 결코 사람을 속일 수 없으며, 안전에 대한 보장을 일단받았으면 그가 속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더라도 그를 믿는데주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고 있었는가.\” 이 말을하고 아르타바누스는 아닐라이우스를 설득시켜 아시나이우스와함께 오도록 돌려 보냈다. 왕의 의도는 그 유대인 형제들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 밑에 있는 지방 총독을 견제할 속셈이었다. 그 당시 총독들은 반역을 일으킬 모종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침 아르타바누스는 그들을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가 그들과 전쟁하는데 매달려 있으면 아시나이우스가 점점 강성해져서 바벨론을 능가할지도 모르며 설령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아르타바누스에게 큰 손해를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4. 아르타바누스는 이러한 속셈으로 아닐라이우스를 돌려 보낸 것이다



 아닐라이우스는 아시나이우스에게 와서 아르타바누스가 자기에게 보여준 호의에 대해서 말하고 함께 가자고 말했다. 그래서그들은 함께 아르타바누스에게 갔다. 아르타바누스는 그들을 환영하면서 아시나이우스의 용기있는 행동을 칭찬했다. 아르타바누스는 아시나이우스를 처음보고 그가 작은 체격을 갖었는데도그렇게 용감한데 대해서 놀라워했다. 왕은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아시나이우스는 몸보다 더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오.\”라고했다. 그후 술자리를 베풀고 아르타바누스는 그의 군대장관인 아브다가세스에게 아시나이우스를 소개시키고, 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성을 추켜세우자 아브다가세스(Abdagases)는 아시나이우스를 죽여서 파르티아 지역에 끼친 피해에 대해 보복할수 있도록 해달라고 제안했다. 왕은 말했다. \”안된다. 나의 서약을 믿고 온 이 사람을 해친다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더구나 나의 오른손을 내밀어서 신에게 맹세함으로써 그에게 신뢰를 보여주었는데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네가 진정으로 용감한사람이라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마라. 네가 정말 파르티아의 명예를 더럽힌 그의 침입을 벌주고 싶거든 그가 돌아가는길에 나의 허락도 필요없이 너의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죽여라.\” 아르타바누스는 이렇게 말하고 새벽에 아시나이우스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네. 몇 명의 장군들이 분노를 일으켜 나의 허락도 없이 자네의 생명을 해치려 하네. 내가 바벨론 지역을 그대에게 주노니 약탈도 없고 권력의 남용도 없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게. 나는 그대에게 약속한 것을 지켰으며 그대의 생명을 보호해 주었다.\” 이말을 마치고 그는 아시나이우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곧 그를 보냈다.

 아시나이우스는 그의 영토로 돌아온 후에 요새들을 세우고 순식간에 이전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시켰다. 그만큼 권력을 손에넣기 위해 처음부터 그토록 큰 위험을 무릅쓴 사람은 없었다. 바벨론의 많은 파르티아 장군들조차도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바벨론 사람들이 그에게 표하는 존경심은 그가 받아 마땅한 장점들에 비하면 미약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위엄과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모든 메소보다미아 지역을 좌지우지했으며 15년 동안[㈜ 주후 20~35년.] 번영을 누렸다.[㈜ 드베봐제(Debivoise)는 그의 책, pp.163~164에서, 아닐라이우스(Anilaeus)와 아시나이우스(Asinaeus)의 실질적인 독립은 그 때의 파르티아 제국에서의 위치를 잘 설명해 준다고 언급한다. 왕좌를 위한 계속되는 싸움은 파르티아를 무정부상태의 위험 수위까지 몰고 간다. 아르타바누스는 그의 제국의 넓은 지역에 외견상 독립을 보장하도록 강요를 받았고, 파르티아의 군대들과 관리들은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5. 아닐라우스가 파르티아 장군의 부인과 염문이 생기다



 그들의 번영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서 비극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용맹성은 그들을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을 위반하여 자기 멋대로 하여 율법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그 지역의 장군으로 임명되어 도착한 어떤 파르티아 사람을 만날 때부터 문제는 시작됐다.그 장군은 부인을 동반하고 왔는데 그녀는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며, 특히 그녀의 뛰어난 미모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또는 \”그리고 그녀의 뛰어난 아르다움은 그녀를 칭송하게 했으며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했다.\”] 아시나이우스의 형제인 아닐라이우스는소문으로 들었는지 아니면 직접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을 알고서 곧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의 남편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는 힘을 사용하지 않고는 그녀를 소유할 수없고, 또 그의 욕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녀의 남편을 적으로 선포하고 그와 전쟁을 벌여 그녀의 남편을 죽였다.[㈜ 여기에서 나는 히브리 대학의 아브라함 샬리트(Abraham Schalit)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그는 헬라어의 ajnh;r…ktilivwn은 아람어의 구절, \”gavra ktila\”를 나타낸다고 한다. 아브라함 샬리트 교수가 앞에 나온 논문 각주에서 지적한대로 ajnh;r…ktilivwn이라는 구절은 탈무드(\’Pesahim\’ 110b, \’Sanhedrin\’ 71b, 81a, 85a)에서 여러번 나오는 일반적인 아람이 문구인 gavra ktila(\’살해된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아닐라이우스와 아시나이우스 형제가 파르티아 장군에게 \’죽은 사람\’, 즉 불경건하여 어떤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바벨론 태생 형제들의 이야기에 대해 요세푸스가 사용한 자료는 바벨론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언어인 아람어로 되었음이 틀림없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포로로 잡혀 자기를 열열이 사랑했던 아닐라이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집으로 시집오면서 커다란 재앙을 안겨다 주었다. 그것은 아닐라이우스뿐 아니라 아시나이우스에게 까지도 불행을 끼쳤는데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남편이 죽고난 후 그녀는 포로가 되자 그녀의 남편과 함께 믿던 조상대대로 물려오던 신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집에서 섬기던 신상을 외국에 갈 때도 함께 가지고 가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라헬과 라반의 우상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창세기 31장 19절이하)] 그래서 그녀도 그 풍습에 의해서 몰래 그것을 가져온 것이다. 처음에는 남몰래 그것을 섬기더니 아닐라이우스와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그녀의 전남편이 살아있을 동안 행하던 그런 의식대로 또 전통적인 방법대로 신상을 섬겼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아닐라이우스의 행위가 관습에 맞지 않고 율법에도 위배된다고 비난했다. 즉 그가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그들의 율법에 철저히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가 육체의 욕망으로 인한 방종때문에 하느님의 축복으로 지금까지 이룩해 온 통치권과 권위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의 호소는 소용이 없었다. 아닐라이우스는 자신에게 지나치게 충고적으로 말했다는 이유로 고위급 부하 한 사람을 사형시키기까지 했다. 그는 율법에 충성을 다하며 죽어가면서 아닐라이우스, 아시나이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을 향하여 욕을 퍼부었다. \”아닐라이우스와 아시나이우스, 너희들은 율법을 거역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리고 나머지 친구들 그대들은 내가 율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너희 모두는 적들의 손에 나와 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다.\” 사실 아닐라이우스와 아시나이우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 매우 분노를 느꼈다. 그렇지만 아닐라이우스와 아시나이우스의 용기 때문에 자신들이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닐라이우스의 아내가 파르티아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아닐라이우스가 율법을 범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아시나이우스에게로 몰려가서 아닐라이우스를 다음과 같이 맹렬히 비난했다. \”전에는 아닐라이우스가 백성들의 편의를 위해서 많은것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신과 온 백성들을 멸망시킬크나큰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아닐라이우스는 그 이방여자와 결혼할 때 우리의 동의도 없이 했을 뿐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따르고 있는 율법에도 허락되지 않는 일인 것 입니다. 더구나 그 여인이 우상을 섬기는 행위는 하느님께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아시나이우스는 아닐라이우스의 죄가 어떤 것인지 또 그 죄가큰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같은 핏줄을 타고난 형제라는 이유로 동생을 저지하지 않았으며, 그가 천성적으로 품행이 악하다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 용서해 주려고했다. 그러나 날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들의 요구가강해지자 마침내 아닐라이우스에 대한 일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동생에게 과거의 악행을 꾸짖으면서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했다. 그러나 아닐라이우스는 그말을 듣고도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아닐라이우스의 아내는 자기 때문에 많은백성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 아닐라이우스가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시나이우스를 독살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에 의해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어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급히 아시나이우스를 없애 버린 것이다.



6. 아닐라이우스가 생포된 파르티아의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를 놓아주다



 권력을 손아귀에 장악한 아닐라이우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아르타바누스왕의 딸과 결혼한 파르티아의 유력인사인 미드리다테스의 마을을 공격했다. 아닐라이우스는 마을을 공격하여 많은 돈과 포로들과 앙떼 그밖에 많은 재산을 약탈했다. 미드리다테스는 그 마을이 약탈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큰 모욕을 느꼈다. 왜냐하면 먼저 아닐라이우스에게 잘못을 저질러 성나게 한 것도아니고 더구나 자기는 아르타바누스왕의 사위인데 그런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 매우 모욕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미드리다테스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기병을 동원하고 기본 연령에 달한 사람들을 소집하여 아닐라이우스 군대와 전투 준비에 들어 갔다. 미드리다테스는 자기 영토에 속한 한 마을에 진을 치고 다음날 전쟁을 하기로 하고 거기서 휴식을 취했다. 왜냐하면 다음날은 유대인들이 모든 노동에서 쉬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참) 안식일에 아시나이우스와 아닐라이우스를 공격하기 위한 바벨론 총독의 비슷한 계획<고대. 18권. 9 : 2(319)>.] 한편 아닐라이우스는 어느 수리아 사람으로부터 미드리다테스에관한 정보를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미드리다테스가 저녁식사를하는 곳까지 알게 되었다. 아닐라이우스는 일찍 저녁식사를 마치고 야간행군을 했는데 이는 적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동안에 파르티아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밤 4시경[㈜ 대략 새벽 3시.] 아닐라이우스는 그들을 공격하여 잠자고 있던 적군을 살해하고 일부는 패퇴시켰으며 미드리다테스를 생포하여 그를 발가벗겨 나귀에 태운채 데려왔다. 그것은 파르티아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모욕으로 생각되었다. 아닐라이우스가 미드리다테스에게 모욕감을 주기위해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자[㈜ 사본의 기록은 의미가 거의 없고, \”이러한 결심으로\”라는 것을 의미할 수 없으므로 구트쉬미트(Gutschmid)의 교정안이 받아들여져 왔다.] 아닐라이우스의 친구들은 그를 처형시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닐라이우스는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가(王家)와 결혼으로 연결되어 지체높은 파르티아의 첫째가문에 속해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오. 지금까지 그들이 자행했던 것은 충분히 참을만 하오. 우리가 미드리다테스에게 모욕을 끼쳤다 할지라도 그의 생명을 구해주면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우리가 미드리다테스를 고통 중에 죽인다면 아르타바누스왕은 바벨론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 죽일 때까지 분노가 그치지 않을 것이오.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동족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에게[㈜ 바벨론의 유대인들.] 재앙이 닥쳤을 때 그들은 피난처가 없다는[㈜ 이 본문은 어려운 것이다. 포스트(Post) 교수는 \”그들은 패배하는 경우에 피신할 장소를 가질 수 없었으며 ; 반면에 이 사람들은 그들 중에 가장 좋은 것을 풍성히 가지고 있었으므로\”라고 제안한다. \”만약 어떤 재앙이 일어난다면 젊은 나이에 있는 그들(즉,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의 많은 수는 그들(즉, 아닐라이우스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용할 수 없으므로\”.] 사실을알아야 하오.\” 아닐라이우스는 이런식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킨후 미드리다테스를 풀어 주었다. 미드리다테스가 가까스로 살아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그를 호되게 질책했다. \”왕의 사위이며공주의 남편인[㈜ 필사본의 \”그리고 그녀를 복수하는\” 이라는 구문은 여려운 것이다. 이는 \”그녀를 위하여 그 자신을 복수하는\”이란 것을 의미할 수 없다.] 당신이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복수하기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다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유대인에게 포로가되고 또 살아남아서 돌아온 것에 만족하실 수 있습니까. 자, 당신이 용감히 싸워 복수를 하여 명예를 회복하든지 아니면 우리왕가의 신 앞에서 나와 이혼할 것을 맹세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택하세요.\” 미드리다테스는 그의 아내의 심한 질책이 참을 수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매일 퍼붓는 질책과 또 이혼하겠다는 위협에 군대를 동원해 유대인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전에 유대인과의 전쟁에서 생명을 건짐받아 살아남았다는 것에 대해서 심한 심적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7. [미드리다테스가 아닐라이우스를 괴멸시키다]



 아닐라이우스는 미드리다테스가 군대를 이끌고 자기를 향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적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는것보다 습지에 숨어 있다가 기습공격을 하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고 그는 많은 군대를 이끌고 나갔는데 이때 전처럼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용감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많은 사람이모여들었다. 더구나 그의 군대는 적들의 재산을 탈취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또 숫적인 우월감으로 적들을 압도하자는 속셈도있었다. 그들이 90퍼얼롱 가량 행군했을 때 물이없는 사막인데다가 한낮이어서 군사들은 목이 말라 지쳐 있었다. 이때 미드리다테스의 군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마실 물도없었고 한낮의 더위 때문에 갑옷과 투구마저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아닐라이우스의 군대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아닐라이우스 군사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미드리다테스의 군사들은 사기가 왕성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전사한사람은 수십만에 달할 정도였다. 아닐라이우스와 그를 호위하는병사들은 숲속으로 재빨리 도망치는 바람에 미드리다테스 군사들이 그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닐라이우스는 한순간 만이라도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면 자신들의 생명을 값싸게 취급할, 가난한[㈜ 또는 \”다루기 힘든\”이라고 할 수 있다. 라틴어 역본에 근거를 둔 허드슨의 교정안은 \”끝없는\”을 의미할 것이다.] 유랑민 무리들을 모아 부족한 병력에 충원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전사당한 병사들과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닐라이우스는 바벨론의 여러 마을을 습격하여 여러지역에서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바벨론 사람들과 이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은 네아르다(Nearda)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사신을 보내 그들이 아닐라이우스를 사로잡아 넘겨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네아르다 사람들은 이러한 요구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를 붙잡아 넘겨 줄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시신들은 유대인들과 평화롭기를 원했다. 유대인들도 평화조약을 맺기 원한다고 답변하면서 아닐라이우스와 협상하기 위하여 바벨론 사람들과 함께 사람을 보냈다. 바벨론 사람들은 아닐라이우스와 그 부하들이 있는 곳을 정찰을 통해서 알아낸 후 은밀히 밤에 그들을 공격하여 술취해 골아 떨어져 있는 그들을 잡아죽이고 아닐라이우스도 역시 죽였다.[㈜ 주후 35년 또는 36년.]



8. 유대인들이 셀류키아로 이주했는데, 그곳의 수리아인들과 헬라인들이 그들을 학살하기 위해 단합했다



 바벨론 사람들은 아닐라이우스에 의한 압박감이 없어지자 그들의 증오심을 유대인들에게로 돌렸다. 왜냐하면 보통 바벨론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반대하기 때문에 항상 그들과 다투어 왔다. 어느 쪽이든 간에 자기 쪽이 더 편안해지기 위해서 상대방을 공격하곤 했다. 따라서 지금은 아닐라이우스와 그 부하들이 없어지자 바벨론 사람들이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사람들의 거만한 행동에 대해 분개했다.그렇다고 그들과 전쟁을 일으켜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그들과 함께 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셀류쿠스 니카토르(Seleucus Nicator)가[㈜ 수리아(Syria)에서의 셀류키드(Seleucid)왕조의 창립자이다. 그는 주전 312년부터 280년까지 다스렸다. 필사본의 철자는 \”니카노르\”(Nicanor)이다. 같은 오류가 고대. 12권. 3 : 1(119)와 13권. 6 : 7(213)에서 나타난다.] 건설한 그 지역의 가장 유명한 도시인 셀류키아(Seleucia)[㈜ 티그리스강 근처에 있다. 참). 고대. 18권. 2 : 4(49).] 도시로 이주해 갔다. 그곳의 주민들은 많은 마게도냐 사람들과 헬라인 그리고 수리아 사람들도 적지 않게 살았다.[㈜ 이 시기의 얼마 후인 1세기의 후반기에, 셀류키아(Seleucia)는 플리니(Pliny)의 \’Hist. Nat.\’ vi. 122에 따르면 600,000명의 거주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숫자는 종종 과장되었다. 그 도시는 타키투스의 진술(\’연대기\’ vi. 42)에서 분명하둣이 미개한 상태로 퇴보하지 않고 창립자인 셀류쿠스(Seleucus)에 충실하게 집착해 있음을 자랑으로 여겼다. 스트라보(Strabo) xvi. 743에서는 셀류키아의 사람을 바벨론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 도시는 바벨론의 본토인들을 매혹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베반(E. R. Bevan)의 \’The House of Seleucus\’, I, 1902, p.253을 보라.] 여기서 유대인들은 정착을 하여 5년 동안은[㈜ 주후 35/36~40/41.]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아왔는데 6년째 되는 해에 셀류키아(Seleucis)로 이주해 왔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 내막은 다음에 말하려고 한다.



9. [셀류키아의 헬라인과 수리아인이 연합하여 유대인을 학살하다]



 셀류키아에서는 헬라인과 수리아인들간의 다툼과 혼란이 늘 있었는데 헬라인들이 우세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다툼이 계속되는 그 도시로 이주해 들어와 살자 수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의 도움을 얻어 우위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두려움을 모르고 즐거움으로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열세에 몰린 헬라인들은 이전의 특권을 다시 찾을수 있는 방법이 오직 한가지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유대인과 수리아인 사이를 갈라놓는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서 헬라인들의 여러 모임은 전부터 안면이 있는 수리아인들을 접촉해서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로 살아갈 것을 제의했다. 수리아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동의했다. 이러한 제의가 양쪽에 의해서 합의가 되자 양쪽의 지도자들이 화해를 하고 조약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다. 양쪽이 이렇게 합의를 하고나서 서로에게 신실함을 보여 주는 증거로써 유대인들을 적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한번에 5만명 이상을 살해했다. 친구나 이웃의 배려에 의해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것이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크테시폰(Ctesiphoh)으로 피신했는데,[㈜ 참). 고대. 18권. 2 : 4(49)를 참조하라. 체리코버(V. Tcherikover)는 \’Hellenistic Civilzation and the Jews\’, 1953, p.503 주 74에서 크테시폰(Ctesiphon)은 \”하나의 큰 마을\”이란 말이며, 헬라인들은 그것을 하나의 도시로는 간주하지 않았다는 스트라보(Strabo) xvi. 743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나의 헬라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은 요세푸스의 잘못이다. 유세비우스와 제롬은 그것을 성경에 나오는 갈레(Calne, 창세기 10장 10절)와 동일시하나 이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 파르티아 왕의 겨울 체류지로서 크테시폰(Ctesiphon)에 대해서는 스트라보(Strabo) xvi. 743을 보라. 일반적으로는 보에트거(boettger)의 \’Topographisch-Historiches Lexicon\’, pp. 95~96을 보라.] 그곳은 셀류키아 근처에 위치한 헬라 도시이며 왕이 매년 겨울을 지내는 곳이고 왕의 재산 대부분을 보관해 두는곳이었다.[㈜ 허드슨은 이것을 ajsuvnqeta로 교정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 \”그들은 그곳에 머무르는데 있어서 굳은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비슷한 의미가 리챠드(Richards)와 슈트(Shutt)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그러나 셀류키아인들은 왕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7년 동안(대략 38~44년) 셀류키아인들은 폭동 중에 있었고 파르티아의 대군주권에 대해서는 사실상 독립해 있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xi. 9와 드베봐제(Debevoise)의 책. pp.164~165에서 인용된 화폐의 증거를 보라.] 그들이 거기에 정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제 그 지역의 모든 유대인들은 바벨론 사람들과 셀류키아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든 수리아 사람들과 셀류키아 사람들이 협정을 맺어 유대인들을 공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네아르다(Nearda)와 니시비스(Nisibis)로 집단으로 이주해 갔는데, 그곳은 천연적인 요새였고 더군다나 모든 사람이 싸움을 잘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매우 안전한 지역이었다.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들의 상황은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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