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실라스, 아그립바왕이 그에게 화를 낸 것, 아그립바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게 된 것, 또한 아그립바가 베라투스 주민에게 베푼 혜택에 대하여
1. 아그립바의 군대장관 실라스가 그의 교만함으로 인해 쫓겨나다
아그립바왕의 군대장관[㈜ 여러 사본들은 \”말의 주인\”으로 나오지만, 실라스(Silas)가 전군(全軍)군의 장관이었음을 고대. 19권. 6 : 3(299)로부터 명백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실라스(Silas)는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거치면서 아그립바왕에게 충성을 다했고[㈜ 참). 고대. 18권. 6 : 7(204)에는 그가 음식과 의복을 샀던 사람들과 함께 있 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아그립바가 로마에 투옥된 동안 아그립바를 위하여 다 른 봉사를 수행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위험을무릅쓰고 가장 위험한 직무까지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것은 상대와 동등한 위치가 아니고서는 확고한 친교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실라스는 왕에게 대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고,[㈜ 혹은 \”그는 식탁에서 왕보다 낮은 자리에 앉지는 않았을 것이다\”일 것이다(Whiston).] 그의 모든대화에 터놓고 끼어들어 참견하였다. 더구나 연회에서 실라스는 과도하게 자화자찬하였고 한때 자신의 헌신을 나타내 줄 기회를 제공했던 과거의 일들을 왕으로 하여금 회상하게 하여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왕을 위하여 헌신했는지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황하게 이야기하였다. 그와 같은 수다스러운 공치사는 왕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고 급기야는 이것이 실라스의 가식없는 솔직함에도 불구하고 왕의 분노를샀다. 왕으로서는 수치스런 이야기를 회상한다는 것은 즐겁지않은 일이고, 자신의 이전 공적을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자는 얼간이이기 때문이다. 결국 실라스는 왕의 큰 노여움을 사게 되어마침내 그의 직책에서 쫓겨나 감옥에 갇혔을 뿐만 아니라 고향으로 보내어져 유배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아그립바왕의 분노는 누그러져서 실라스가 자신을 위하여 감수했던 모든 수고를 고려하여 객관적으로 실라스를 판단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아그립바왕은 자신의 생일을 자축하면서 모든 신하들을 그 즐거운 축하연에 참석케 한 후,그 자리에 그하게 실라스를 초청하였다. 그러나 실라스는 독립적인 기질을 지닌 자였으므로 자신이 화를 낼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고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자기를 데리러 온 사람들에게 감추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호의인가? 아그립바왕은 내가 베푼 충성에 대한 보상을 주기는 커녕 멋대로 빼앗아 가지 않았는가? 아그립바왕은 내가 나의 생각을 말하는 습관을 포기했다고 판단하고 있는가? 그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지니고 있고 심중에 있는 것을 더 크게 외칠 것이다. 내가 그를 건져주었던 모든 사실들과 그의 안전과 직위를 위해 감수하였던 모든 역경을 말할 것이다. 그 댓가로 내가 받은 것은 차가운 쇠사슬과 어두운 감옥이었다. 나는 이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나의 영혼이 나의 육체로부터 분리될 때 조차도 나의 무용(武勇)에 대한 기억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같이 말하고 사신에게 이르기를 돌아가서 아그립바왕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전하라고 하였다. 아그립바는 이 말을 듣고 실라스의 정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2. 아그립바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다가 글라우디오의 제지로 중단하다
[㈜ 참). 병행구, 전쟁. 2권. 11 : 6(218) 성벽은 전쟁. 4 : 2(152)에 또한 언급되었다.]
아그립바왕은 공금으로 새 도시의[㈜ 참). 전쟁. 5권. 4 : 2(151)에서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벳새다(Bezetha)로 알려진 행정구역을 말한다.] 벽면 끝에다 예루살렘 성벽의 넓이와 높이를 확장하여 축조하였다. 아그립바왕은 만일수리아 충독 마루수스(Marsus)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사실을가이사 글라우디오에게 서신으로 알리지만 않았다면 지금까지 인력(人力)으로는 더 이상 만들 수 없는 강하고 튼튼한 성을 만들었을 것이다. 마르수스의 편지를 받은 글라우디오는 반란이 일어나는 것으로 오해하여 아그립바왕에게 편지로 성벽의 축조를 중단할 것을 진지하게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아그립바 왕은 불복종하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순종하였다.
3. 아그립바는 대헤롯과 성품이 대조되다
아그립바왕은 본성상 하사품에 있어서는 관대했으며 그것이 이방인에[㈜ 문자적인 의미는 \”국가들\”이다. 그러나 70인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비 유대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고임(goyim)을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 시 2 : 1.] 대하여 고결하다는 찬사를 받게 하였다. 그는 막대한 예산을 지출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드높였다. 아그립바왕은 베풀기를 즐겼고 명성을 좋아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전(前)왕이었던 헤롯의 셩격과는 전혀 달랐다. 헤롯은 본성이 악하여 처벌에 있어서 무자비 했으며 자신이 증오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용서할 줄 몰랐다. 헤롯왕이 유대인들보다는 헬라인들과 보다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헤롯왕은 돈을 기부하여 욕탕과 경기장을 세우고 어떤 도시에서는 신전을 다른 도시에서는 현관을 축조함으로써 외국의 도시들을 장식한 반면에 유대인의 도시를 위해서는 단한차례의 건물 복원이나 기부도 하지 않았다.[㈜ 비록 헤롯이 로데(Rhodes), 아덴(Athens), 스파르타(sparta), 그리고 팔레스틴 외부의 여러 도시들에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돈을 지불했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가장 웅장한 공사가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였기 때문에 유대 도시들의 건물들을 완전히 소홀히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그립바왕은 유순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모든 사람들에게똑같이 인자를 베풀었다. 그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도 호의를 베풀었고 관대함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그는 특히 동포에게보다 관대하고 동정적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즐겼고 그렇게 지속적으로 살았다. 또한 그는 자기 민족의 전통을 세심할 정도로 준수하였다. 그는 어떤 결례의식도 태만히 하지 않았고 하루도 규정된 제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4. 아그립바의 관용적인 성품의 한 본보기
아그립바왕의 성격에 관한 최상의 실례는 다음과 같다. 율법적인 고지식함으로 유명한 시몬(Simon)이라는[㈜ 그의 신원은 달리는 알려져 있지 않음. 그가 힐렐(Hillel)의 아들이며, 가말리엘 1세(Gamaliel I)의 부친일 것이라는 Z. Frankel의 \’Darke ha-Mis-hnah\’. 1859, pp. 58-59에 나오는 추측을 지지할 증거가 없다.] 예루살렘 원주민은 아그립바 왕이 가이사랴(Caesarea)에 없을 때 수많은 백성들이 모인 군중회합에서 왕이 불결하다고[㈜ 문자적으로는 \”부정(不淨)한\”의 뜻임. 그러나 아그립바가 적어도 예루살렘에서는 세심한 관찰자라는 것과 랍비들이 그의 경건을 칭송했다는 사실은 고대. 19권. 7 : 3(331)과 탈무드의 자료(Mishnah, \’Bikkurim\’ iii : 4, 바벨론 \’Pesahim\’ 107 b, \’Ketubot 17\’ a, \’Leviticus Rabbah\’ iii : 5)로부터 명확하다(그러나 이러한 랍비적 언급과 연관된 것이 아그립바 I 세인지 Ⅱ세인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시몬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만을 제의적으로 청결한 사람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왕은 성전으로부터 축출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니이제(Niese)의 교정을 채택했다. 여러 사본들 중의 한 사본은 \”본국 사람들,\” 즉 유대 혈통을 뜻하는 ejggenevsin으로 나온다. 이러한 본문은 토라(Torah)가 왕은 \”동족 출신\”이어야 함을 요구한(신 17 : 15) 반면에 아그립바는 에돔 족속이어서 아그립바는 자신의 가계로 난처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그립바가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Mishnah, \’Sotah\’ vii : 8 ; 그러한 언급은 아그립바 Ⅱ세보다 아그립바 I세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 유대인(Mishnah, \’ Kelim\’ I :8)만 성전에서 쫓겨났다 ; 아그립바(Mishnah, \’Bikkurim\’ iii : 4)는 성전에 들어가서는 제단까지 첫 열매를 가져다 주었다. 더욱이(Mishnah, \’Sotah\’ vii : 8) 랍비들은 신명기로부터 왕의 법령과 관계된 발췌문을 읽는 동안 아그립바가 성전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서있는 것을 허용해 주었다.따라서 랍비들은 아그립바를 비유대인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아그립바는 3 세대이상인 아그립바의 증조부였으며 대헤롯의 조부였던 에돔족속의 안티파스(Antipas)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에돔족속으로 제외될 수 없었다. 에돔 족속은 3세대까지만 이스라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신 23 :8). 따라서 아그립바가 제외되어야만 하는 것을 주장하는 하나의 가능한 이유는 그가 부정하다는 것이다(Mishnah, \’Kelim\’ I : 8). 아그립바가 극장에서 혹은 극장으로 가는 도중에 혹은 극장에서 나올 때 그런 부정한 것과 접촉했다는 것과 아그립바가 극장으로 시몬을 불러서 거기서 율법에서 용납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에게 물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러한 암시는 아그립바가 극장에서 부정한 것과의 접촉을 방지하기 위하여 적합한 조치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그후 그 도시의 군대장관이 아그립바왕에게 서신으로 시몬이 한 연설의 내용을 보고하였다. 이에 왕은 시몬을 불러오게 하였고, 시몬이 경기장 안에서자 자기의 옆에 앉을 것을 명했다. 그때 왕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율법을 위반한 것이무엇인지 나에게 말해보라\” 시몬은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 채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일을 통해서 왕은 격노보다는 온유함이 왕의 자질이라고 생각했고, 신중한 행동이 분노보다는훨씬 더 낫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보다 빨리 시몬과 화해하고 그에게 하사품을 주어 돌려 보냈다.
5. 베리투스에 건축한 아그립바의 건축물
아그립바왕은 다른 많은 장소에서 수많은 건물을 세웠지만 베리투스(Berytus)의[㈜ 현재의 베이루트(Beirut).] 주민들에게 보다 특별한 애정을 베풀었다. 왕은 화려함에 있어서 다른 경기장을 능가하는 경기장을 많은 비용을 들여 그들에게 세워 주었다. 왕은 또한 욕탕과 현관외에 많은 비용을 들여 원형 경기장을 세웠다. 왕은 이러한 건축을 하는데 있어서, 비용을 절약하다가 미(美)나 크기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왕은 또한 건축의 봉헌에 있어서 그의 식량을 관대하게 아낌없이 주었다. 그 경기장에서 왕은 모든 종류의 음악과 당양한 오락물을 소개함으로써 구경거리를 제공하였다. 또한 원형 경기장에서 왕은 많은 검투사들을 부양함으로써 자신의 고상한 관대함을 보여 주었다. 또한 후자의 경우에 수많은 검투사들을 참여케 하여 관객들에게 기쁨을 주기를 원하여 왕은 700명의 검투사들에게또 다른 700명의 사람들을 보내었다. 이 사람들은 처벌을 받고있는 동안에는 전쟁 축연이, 평화시에는 오락원이 될 수 있도록하기 위한 악인들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왕은 이 사람들을 모조리 전멸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