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권
22년 동안의 사건을 다룸
로마 총독 파두스부터 플로루스까지
제 1 장
빌라델비아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난동을 부린것과 대제사장의 예복에 관하여
1.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가 수리아(Syria)총독으로 임명되고, 파두스(Fadus)가 유대 총독으
우리가 앞에서[㈜ 고대. 19권. 8 : 2(350).] 언급한 것과 같이 아그립바왕이 죽은 후 가이사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왕의 명성을 존중하여 마르쿠스(Ma-rcus)의 후계자로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us)를[㈜ 주후 30년에는 집정관, 40년에는 지방 총독이었고, 45년에서 40년까지는 수리아의 총독이었다. 법률가로서의 그의 탁월성은 타키투스(Tacitus)의 \’연대기\’ xii, 12에 언급되어 있다. 그의 법정신에 관한 예를 보려면 \’연대기\’ xiv. 43. 44를 보라.] 보냈다. 아그립바왕은 생전에 편지로 마르쿠스가 더 이상 수리아(Syria) 총독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이사에게 자주 요청했었다. 파두스(Fadus)는[㈜ 주후 44-45년의 행정장관 참). 고대. 19권. 9 : 2(363-366).] 유대에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호전적인 사람들로 가득한 지아(Zia)라고[㈜ 다른 사본에는 \”Mia\” 즉 \”하나\”. 니이제(Niese)에 따르면 그 마을의 이름이 빠져있다. 하버캠프(Havercamp), 투흐(Tuch), 쉬러(Schurer : ii. 146과 주 348)가 따르는 렐란트(Reland)는 지아(Zia)라고 하는데 빌라델비아 서쪽으로 로마 마일로 15마일 되는 마을의 이름이다. 지아에 관해서는 유세비우스의 \’Omom, Sac.\’, Larsow and Parthey 편, pp.200-201을 보라.] 하는 동네에서 경계 문제로 페라이아(Peraea)에[㈜ 페라이아(Peraea)에 대한 설명으로는 전쟁. 3권. 3 : 3(44-47)을 보라. 그것에 의하면 페라이어는 길이로는 마카이루스(Machaerus)에서 펠라(Pella)지역에 이르며, 넓이로는 빌라델비아(Philadelphia)에서 요르단(Jordan)에 이르는 트랜스 요르단(trans-Jordan)지역이다.]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빌라델비아[㈜ 성경적 이름으로는 \”암몬족속의 랍바\”(Rabbah of Ammon)이며, 오늘날의 암만(Amman)으로 요르단 왕국의 수도이다. 그것은 톨레미 Ⅱ세 필라델푸스(Ptolemy Ⅱ Philadelphus)를 본따 붙인 것이다.] 주민들[㈜ 다른 본문에는 \”그들의 적들\”.] 사이에 분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페라이아 유대인들은 자기 지도자들의 동의도 없이 무장하고 많은 빌라델비아인들을 공격한 것이다. 파두스는 이러한 사건의 추이를 통지받고 페라이아의 유대인들이 그 문제를 자기에게 맡기지 않은 것에 대해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따라서 파두스는 이러한 폭동을 일으킨 주동자 세명을 체포하여 가둔 후 그들 중 안니바스(Ann-ibas)라고 불리는 자를 처형하고, 다른 두명 즉 아마라무스(Amaramus)와 엘르아살(Eleazar)을 추방했다. 또한 그후 강도 두목인 돌로마이우스(Tholmaeus)는 구금하여[㈜ \”구금하여\”(in chanins)는 암브로시아(Ambrosia)사본과 발췌문(Epitome)에서만 나타난다.] 처형시켰는데, 돌로마이우스는 전에 이두매(Idumea)와 아랍인들(Ara-bs)에게 재난을 안겨다 주었다.[㈜ 참). 이어지는 사건에 대한 요세푸스의 다른 설명은 고대. 15권. 11 : 4(406, 407)참조.] 이후로 유대는 파두스의 관심과 통치로 인해 강도떼가 일소되었다. 파두스는 이때에 대제사장과 예루살렘의 주요 인사들을 불러 모으고, 황제의 명을 받아서 대제사장 외에는 어느 누구도 입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긴 옷과 성의(聖衣)를 안토니아(Antonia) 망대에[㈜ 대헤롯에 의해 복구되었고 안토니(Mark Anthony)를 기념하여 안토니아(Antonia)로 불려졌다(전쟁. 1권. 21 : 1(401)과 고대. 18권. 4 : 3(92), 전쟁. 5권. (238-247)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두어 이전과 같이 로마의 관리를 받게 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고대. 15권. 11 : 4(406) 참). 고대. 18권. 4 : 3(93). 여기에는 대헤롯을 계승한 아켈라오(Archelaus) 통치 이후 로마인들이 유대 정부를 빼앗았을 때, 로마인들은 대제사장의 의복을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고대. 18권. 4 : 3(90)에 의하면 수리아의 로마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가 주후 36-37년에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의복을 관리하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본문과 병행구인 전쟁. 2권. 11 : 6(220)에서는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가 유대 풍습을 방해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유대민족의 평화를 유지시켰다는 이유를 그를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안토니아에서의 대제사장의 거룩한 의복을 맡기라는 충고는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파두스가 말한 것에 반박하지 않고 파두스와 롱기누스에게 다음과같이 청원하였다(롱기누스는 파두스의 엄한 명령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많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왔다). 먼저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성의를 자신들이 관리하도록 요청하러 그에게 사신을 보내게 해주고 글라우디오가 그들에게 답변할 때까지 기다려 주라고 했다. 이에 파두스와 롱기누스는 사신을 보내게 해주겠다고 답하면서 평화적 행위를 위한 보증으로 그들의 아들을 담보로 내놓을 것을 제안했다. 유대인들은 거기에 동의하고 파두스와 롱기누스가 요구하는 담보를 잡힌 후에 사신들을 보내었다. 그러나사신들이 로마에 도착하였을 때 아그립바의 아들 아그립바 Ⅱ세는 그들이 온 이유를 알고(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대. 19권. 9 : 2(360).] 아그립바 Ⅱ세는 가이사 글라우디오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성의를 보아서 그들의 청원을 승낙하여 파두스에게 전달해 줄 것을 간청했다.
2. 글라우디오(Claudius)가 유대인들에게 대제사장의 의복을 보관할 수 있도록 허용하다
글라우디오는 사신을 불러 유대인들의 청원을 승낙한다고 말하고 아그립바 왕의 간청으로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진 이러한 호의에 대해 아그립바 왕에게 감사할 것을 사신들에게 명했다. 이러한 답변 외에 글라우디오는 사신편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편지를 보냈다. \”백성의 다섯 번째 호민관이요, 네 번째 관선 집정관이요, 그리고 열 번째의 황제요 국부(國父)인 나 가이사 글라우디오 게르마니쿠스가 행정장관과 원로원과 예루살렘 백성과[㈜ 유대 나라 주민들의 중심지로서의 예루살렘에 관하여는 고대. 14권. 4 : 4(74)를 보라.] 유대 전국에 문안한다. 내가 양육하였고 또 현재도 나와 함께 있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나의 친구 아그립바가 너희 사신들을 대표하여 나에게 와서 내가 너희 나라에 베푼 호의에 감사를 표했고, 또 너희 유대인들이 제사장의 성의를 왕관과 함께보관할 수 있도록 진지하고도 정중한 방법으로 나에게 간청하여, 나에게는 매우 소중한 비텔리우스(Vitellius)가[㈜ 고대. 18권. 4: 3(90). 타키투스(Tacitus)는 \’연대기\’, vi : 32에서 비텔리우스는 글라우디오(Claudius)와 친밀한 관계였음을 말한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의 \’자서.\’ 2와 디오(Dio)1x. 21. 2에는 비텔리우스가 정원이 2명인 집정관직을 글라우디오와 함께 맡았고, 글라우디오가 영국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에는 제국을 맡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에토니우스는 또한 그가 글라우디오 뿐만 아니라 글라우디오의 아내들과 자유민들에게 매우 아첨을 했음을 역설한다.] 앞서 행했던 것처럼 이 역시 그 요청을 허락하노라 내가 이렇게 허락하는이유는 첫째로 각국의 법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전통적인 종교를 갖게 하고자 하는 나의 종교 정책적 배려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나에게 신실한 존경을 표하고 너희들에게 진지한 선의(善意)를 베푼 헤롯왕과[㈜ 아그립바 I세(Agrippa I)의 형인 칼키스(Chalcis)의 왕.] 아리스토불루스를[㈜ 칼키스의 왕 헤롯의 아들. 참). 고대. 18권. 5 : 4(134, 137), 20권. 5 : 2(104).] 최대한 기쁘게[㈜ \”나는 위대한 기쁨을 주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초판(editio princeps)에서 나온 것이다. 그 사본은 탈문(脫文)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해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최대한의 우정을 지니고 있고 내가 최상의 존경을 하는 사람들을 익히 알고 있다. 이에 나는이런 문제에 대해 쿠스피우스 파두스(Cuspius Fadus)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었다.[㈜ 고대. 15권. 11 : 4(407). 이곳에는 글라우디오에게 간 사절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황제는 당시 수리아의 사령관이었던 비텔리우스(Vitellius)에게 유대인들이 의복에 대해 관리를 하도록 명령했다고 보고 믿는다.] 너희들이 편지를 내게 가져온 사람들의명단은 이러하다. 케론(Ceron)의 아들 코르넬리우스(Corneli-us), 듀디온(Theuidon)의 아들 트리포(Trypho), 나다니엘(na-thaniel)의 아들 도로데우스(Dorotheus), 요한(John)의 아들요한(John)이다. 이 서신은 루푸스(Rufus)와 폼페이우스 실바누스(Pompeius Sylvanus)가 집정관이었을 때인 7월 초하루 되기 4일전[㈜ 헬라어 사본에는 \”7월\”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것은 라틴어 판의 다소 열등한 사본이다.] 쓰여졌다.\”[㈜ 주후 45년 6월.]
3. 칼키스(Chalcis)의 헤롯(Herod)이 특권을 얻다
고인(古人)이 된 아그립바의 형제로 칼키스(Chalcis)를 통치했던 헤롯 왕은 성전 통치권과 헌금 관리권과 대제사장 임명권을 가이사 글라우디오에게 요청하였고 그에 따라 모든 것을 얻었다. 그로부터 시작되는[㈜ 혹은 \”그 당시로부터.\”] 이런 권한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의 모든 후손들 가운데 계속 되었다. 따라서 헤롯은 마지막 대제사장인 칸데라스(Cantheras)를[㈜ 카메이(Camei)의 아들 요셉(Joseph)이 임명되기 이전에, 요세푸스에 의해 언급된 가장 마지막 대제사장은 칸데라스(Dantheras)가 아니라 칸데라스의 아들인 엘리오나이우스(Elionaeus)이다<혹은 키다이루스(Cithaerus) : 고대. 19권. 8 : 1(342)>. 그런데, 쉬러(Schurer)는 ii. 271-272주 14에서 칸데라스가 엘리오니아우스임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키르소프 레이크(Kir-sopp Lake)의 \’The Chronology of Acts\’와 잭슨(Foakes Jackson)과 키르소프 레이크의 \’The Beginnings of Chistianity\'(v. 1933, p.455)는 다음의 두가지 추정을 제시해 준다 ; ① 칸데라스는 엘리오나이우스의 성(姓)이다. 혹은 ②요세푸스는 칸데라스로 불리는 대제사장을 지적하는 것을 생략했을 것이다. 그는 고대. 3권. 15 : 3(320, 321)을 기초로 이스마엘(Ishmael)이 대제사장이었던 글라우디오가 통치할 때 한 기근이 일어났는데, 요세푸스는 이 이스마엘이 대제사장직을 언급하는 것을 빠뜨렸음을 말하면서, 칸데라스는 성(姓)을 가진 이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탈무드의 \’Pesahim\’ 57a에는, 랍비들 중 한명이 카드로스(Kathros)가문이 공표한 사악한 법령에 대해 통곡했다고 할 때, 그는 칸데라스(Cantheras)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직위 해제하고 후임으로 카무스(Camus)의[㈜ 참). 고대. 20권. 5 : 2(103). 니이제(niese)는 이것은 아마 카미드(Camith)와 같은 이름일 것으로 추정된다(고대. 18권. 2 : 2(34)>. 그리고 쉬러(Schurer)는 그 견해를 좀 더 긍정적으로 본다. 쉬러, ii : 272. 주. 16.] 아들 요셉에게 대제사장직을 맡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