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권 제 6장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간에 싸움이 발생한 것과 글라우디오의 분쟁 해결에 대하여

 


 제 6 장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간에 싸움이 발생한 것과 글라우디오의 분쟁 해결에 대하여



1. 쿠마누스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을 조정하는데 실패하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타키투스는 특히 이 사건은 언급하지 않고, \’연대기\’ xii.54에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the Samaritans)사이에 오래 계속되어 온 갈등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행정장관 쿠마누스와 벨릭스(Felix)를 향한 두 민족들의 경멸 때문에, 그 갈등이 폭발해서 약탈과 일시적 전투로 이어졌다.] 분쟁이 있었다. 갈릴리인들이 절기에 성도(聖都)로 가기 위해서는사마리아 지방을 거쳐서 여행하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다. 갈릴리인들이 여행하는 길에는 사마리아 지경과 대평원(the Great Plain)[㈜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에스드라일론 평원(The Plain of Esdraelon).] 사이에 위치한 기나에(Ginae)라고 불리는[㈜ (Jenin). 이 마을은 고대. 3권. 2 : 3(48)에서는 기나이아(Ginaea)로 불리는데, 그곳은 사마리아의 북쪽 경계에 위치한다고 한다. 전쟁. 2권. 12 : 3(232)에 대한 각주에서, 태커레이(Thackeray)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던 유대인에게 보여주었던 사마리아인의 호의를 나타내주는 눅 9 : 52-56을 언급하고 있다.] 마을이있는데 그 마을의 몇몇 사람들이 갈릴리인들과 싸워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병행본문인 전쟁. 2권. 12 : 3(232)와 몇몇 사본에서는 갈릴리 사람 한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된 반면, 다른 사본들에는 그 본문을 우리 본문과 맞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미움받는 사마리아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단지 한 명만 살해되었다면, 아마 그렇게 많은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아버베치(M.Aberbach)는 \”The Conflicting Accounts of Josephus and Tacitus concerning Cumanus\’ and Felix\’ Terms of Office,\” \’Jewish Quart. Rev.\’ x1, 1949-1950. p.1 주. 1에서 요세푸스가 \’유대전쟁사\’를 쓸 때 종종 반(反)유대적인 로마의 공식 자료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살해된 수를 단지 한 명으로 축소시켰다는 가능성을 제안한다.] 갈릴리를 다스리는 통치자들은 이 일을 전해듣고 쿠마누스에게 달려 가서 갈릴리인들을 살해한 자들을 앙갚음해 줄 것을[㈜ 전쟁. 2권. 12 : 3(232)는 그 탄원을 기각시킨 이유로, 쿠마누스는 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다른 일들에 대한 관심을 제시한다.] 간청하였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쿠마누스에게 돈을 주며 그 일에 관여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이에 갈릴리인들은 몹시 분노하여 노예의 신분 그 자체도 쓰라린 일인데, 이렇게 직접적인 침해를 받았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무장하여 자유를 되찾자고 유대인들을 종용하였다. 갈릴리의 통치자들은 그들을 진정시키고자 애쓰면서 쿠마누스를 설득하여 살해당한 자들의 원한을 갚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들은[㈜ 전쟁. 2권. 12 : 4(234)는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축제 기념을 포기하고, 지휘하는 장군도 없이 사마리아로 돌격했다는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통치자들의 말을더 이상 청종치 않고 무기를 휴대하였으며,[㈜ 발췌문은 \”살륙하였고\”를 덧붙인다. 병행본문 전쟁. 2권. 12 : 3(233)에서 유대인들은 그드릐 지도자들이 미처 쿠마누스에게 가기도 전에 무기를 준비했다고 말하고 있다.] 수년동안 산악에 거주하면서 행인을 약탈하던 강도인 데이나이우스(Deinaeus)의아들 엘르아살(Eleazar)에게[㈜ 전쟁. 2권. 12 : 4(235)는 또 다른 지도자 알렉산더(Alexander)를 덧붙인다. 엘르아살(Eleazar)은 벤 디나이(Ben Dinai)와 동일 인물인데, \’Midrash Rabbah on Song of Songs\’ ii.18에 의하면 너무 일찍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미쉬나의 \’S?tah\’ ix.9에 의하면 그는 아주 많은 살인을 선동해서 알 수 없는 살인자에 대한 속죄 제사가 중단되었고, 그는 벤 하라잔(Ben Harazhan, \’살인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참). 1 : 1(2)이하는 고대. 20권. 8 : 5(161)참조.]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마침내 갈릴리인들은 엘르아살의 도움을 받아 사마리아인들의[㈜ 전쟁. 2권. 12 : 4(235)는 유대인들이 나이를 가리지 않고 사마리아 거주자들을 대학살했다고 덧붙인다.] 마을을[㈜ 이 마을들은 세겜<Shechem, 전쟁. 2권. 12 :4(235) 남동쪽, 아크라바테네(Acrabatene)에 접해있다.] 약탈하였다. 쿠마누스는 갈릴리인들의 약탈 행위를 듣고서 네 개의 보병 연대와[㈜ 요세푸스는 고대. 19권. 9 : 2(365)에서 세바스테인들(Sebastenians)의 기병부대와 다섯 보병 부대(spei\’rai, 레기온(legion)의 10분의 1로서 300명에서 6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역자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사용된 용어, tavgmata는 여러 종류의 군대 단위에 해당하는 일반적 용어로서, 아마 보병부대를 지시하는 것 같으며, 이 부대는 각각 500명에서 6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다.] 세바스테인들(Sebastenians)로[㈜ 참). 고대. 19권. 9 : 2(365)는 그들이 500명 내지 1,000명으로 구성된 기병부대였다고 지시해 준다.] 주둔 군대를 소집하였고, 사마리아인들을 무장시켜서 유대인들에게로 진격하여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중 많은 무리를 살해 또는 생포하였다. 반면 예루살렘의 저명한 지도자들과 일반에게 존경받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들에게 닥친 비참한 현실을 슬퍼하며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뿌린 후에 소요를 일으킨 자들에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간청하면서 설득하여 이르기를 \”우리의 나라가 진멸되고 성전이 불타고 그리고 너희들과 너희 처와 자식들이 노예가 되는것이 바로 목전(目前)에 놓여있다. 이 모든 것들은 너희가 행하였던 일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바꾸어무기를 버리고 장래를 생각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으로 돌아가라!\” 그들의 이러한 설득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유대인들은 흩어졌고 강도떼는 본처(本處)로 돌아갔다. 이 후로 유대 전역에는 강도떼가 들끓게 되었다.



2. 사마리아인들이 수리아 총독에게 호소하여 수리아 총독이 황제에게 그 사건을 위탁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의 통치자들은 당시 두로(Tyre)에 있던 수리아(Syria)총독인 움미디우스 쿠아드라투스(Ummidius Quad-ratus)에게[㈜ 타키투스는 \’연대기\’ xiii.54에서 쿠아드라투스(Quadrtus)가 없었다면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무장 충돌이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까지 확대되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가서 자신들의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던 유대인들을 고소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행한 것 보다는 로마인들에게 행한 모욕을 생각할 때 더 불쾌하며, 또한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에게 어떤 침해를 받는다면, 그피해 정도를 판단한 다음 그들을 통치하는 로마인들의 지시와는관계없이 그 피해에 상응하는 보복을 자행하고야 마는 방약무도한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당한 원한을 갚아 줄 것을 움미디우스 쿠아드라투스에게 요청하였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고소한 사마리아인들의 고소내용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벨리스(Felix) 총독의 사주로<고대. 20권. 8 : 5(162-164)> 약탈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나누스(Ananus)의 아들 대제사장 요나단(Jonathan)이 유대 대표에 포함되어 있었다<전쟁. 2권. 12 : 5(240)>.] 사마리아인들이 이 소요와 전쟁의주범이며 무엇보다도 쿠마누스가 사마리아인들의 뇌물에 매수당하여 유대인들의 살해자들을 눈감아 준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하였다. 쿠아드라투스는 이 소식을 듣고 소송 사건의 심문을 연기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대로 와서 그 사건의 진실에 대하여 좀더 정확하게 단 다음에 판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아무런 소득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쿠아드라투스는 사마리아에[㈜ 전쟁. 2권. 12 : 6(244)에 의하면 가이사랴(Caesarea).] 왔다. 쿠아드라투스는 소송사건을 듣고서 사마리아인들이[㈜ 발췌문은 그가 단지 유대인만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타키투스도 \’연대기\’ xii.54에서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계속되는 다툼에 대해 언급한 후에, 쿠아드라투스는 로마 군인들을 살해할 만큼 용감했던 유대인 몇 명을 사형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병행본문 전쟁. 2권. 12 : 6(241)은 쿠아드라투스가 쿠마누스(Cumanus)에 의해 잡혀온 죄수들-아마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둘 다-을 모두 십자가에 처형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소동이 주범이라고 여겼으나 어떤 유대인들이 개혁을 단행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서 쿠마누스가 생포했던 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할 것을 명했다. 그 후 쿠아드라투스는 크기에 있어서 보통의 도시와 다를 바 없는 룻다(Lydda)라고[㈜ 예루살렘과 텔 아비브(Tel Aviv) 사이에 있는 현재의 룻(Lud).] 불리우는 어떤 마을에 왔다. 쿠아드라투스는법정에서 두 번째로 사마리아인들의 소송사건을 들었고 또한 한사마리아인으로부터 도에투스(Doetus)라고[㈜ 다른 본문에는 \”도르투스\”(Dortus), \”도이투스\”(Doitus).] 하는 유대 족장들 중의 한명과 그와 함께 한 네명의 어떤 다른 반란자들이 무리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대해 봉기를 일으키려고 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코아드라투스는 그들을[㈜ 전쟁. 2권. 12 :6(242)에 의하면 쿠마누스는 자기에게 주어진 정보에 따라 전투에 참여했던 유대인 18명의 목을 베었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고 대제사장 아나니아(Ananias)와[㈜ 참). 고대. 20권. 5 : 2(103).] 성전 경비대장[㈜ 혹은 \”감독자\”(superintendent)가 아마 더 나을 것이다. 추측컨대, 그 언급은 성전을 지켰던 우두머리에 대한 것인데, 그 지위는 눅 22 :4, 52 ; god 4 :1, 5 : 24, 26절뿐 아니라 전쟁. 6권. 5 : 3(294)에도 또한 언급되어 있다. 그는 대제사장 다음에 위치하는 \’사간(sagan, \’성전 맡은자\’)이다. 참). 미쉬나, \’Yoma\’ iii : 1.] 아나누스(Ananus)를[㈜ 사절들(the delegation)이 대제사장 요나단을 포함시켰다고 덧붙이고 있는 전쟁. 2권. 12 : 6(243)에 의하면,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아들.] 결박하여 로마로 이송하여 그들이 행한 일을 가이사 글라우디오에게 설명하도록 하였다. 또한 쿠아드라투스는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지배자들과 총독 쿠마누스 그리고 호민관 켈레르(Celer)를[㈜ 아무런 죄나 혐의도 없는 켈레르(Celer)에게 끔찍한 형벌이 가해지는 것을 보면서, 아버베치(Aberbach)는 앞글 p.12에서 그 군인<고대. 20권. 5 : 3(108-112)>의 음탕함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재앙을 받게 된 그 사람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보통 전후 참조를 살펴볼 때 이러한 악명높은 경우에 있어서는 그럴 것이라고 예상된다. 더군다나 요세푸스는 군대 호민관(護民官)을 단순히 군인이라고 결코 부르지 않는다.] 이달리야(Italy)황제에게 보내어 그가 그들의 소송사건을 듣고서 그들 서로간의 분쟁을 결정할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쿠아드라투스가 다시 예루살렘에 왔을때 유대의 무리들이 혹시 반란을 꾀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지만 예루살렘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하느님께 대한 통례적인 절기들 중의 하나를[㈜ 전쟁. 2권. 12 : 6(244)에 의하면 유월절.] 거행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쿠아드라투스는 유대인들이 어떤 소요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절기를 축하하는 유대인들을 떠나서 안디옥(Antioch)으로 돌아갔다.



 3. 글라우디오가 아그립바(Agrippa)의 감화에 사의를 표하여 유대인을 지지할 것을 결심하다



 로마로 보내진 쿠나누스와 사마리아의 지배자들은 황제로부터 날을 지정받고서 그들 서로 간에 일어난 분쟁에 대해 소송사건을 변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가이사의 신하들과 그의 친구들은 쿠마누스와 사마리아인들을 열광적으로 편들었다. 당시 로마에 있는 아그립바Ⅱ세가 유대인들의 지배자들이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 황제를 설득하여 그 소송사건을 법률에 따라[㈜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글라우디오\’ 15에서 그는 소송(a suit)에서 단지 한 쪽만 듣고 재판을 했다고 확실히 주장하며, 세네카(Seneca)도 \’Apoc.\’ 12.3에서 다른 한 쪽은 듣지 않고 그렇게 했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스크라뭇자(V.M.Scramuzza)는 \’The Emperor Claudius\’, 1940, pp.46-47에서 이러한 비난에 대항하여 글라우디오를 변호하는데, 법정이 사소한 일들로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글라우디오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the Code of Justinian)에서 후에 인정된 법정 절차를 따를 것을 결심하고, 다른 편이 나타나지 않으면 재판에 출석한 편으로 결정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심문하여 시제 로마 정부에 대한 반란의[㈜ 아버베치는 앞글 pp.11-12에서 그럴듯하게 말하기를 유대인의 소송은 당시에 글라우디오에 대해서 특히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팔라스(Pallas)와 친밀한 동맹 관계가 있었고 비밀스럽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베치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이 사건에서의 팔라스의 지원과 필라스의 동생으로 그후 얼마동안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벨릭스(Felix)의 후원자인 대제사장 요나단에 의한 옹호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주범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줄 것을 왕후 아그립피나(Agrippina)에게[㈜ 안토니아(Antonia)의 손녀. 아그립바 Ⅰ세(Agrippa I)에 대한 그녀의 우정(고대. 18권. 6 : 1(143))은 그녀에 대한 아그립바Ⅱ세의 간청에서 잘 회고되어 진다.] 간청하지 않았더라면 가이사의 신하들과 친구들이 유대인들을 이겼을 것이다. 따라서 글라우디오는 이전에 일의 추세를 너무나 잘 결정하고 있었으므로 그 소송사건을 들은 후 사마리아인들이 그소요의 주모자들임을 알게 되었고 자신을 대항한 무리들은 처단하고 쿠마누스를 추방하도록 명하였다. 그는 또한, 호민관 켈레르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모든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예루살렘을 이리저리 끌고 다닌 후 처형할 것을 명하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josephus, TN-catholicdictionary3-C1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