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 고대. 20권. 8 : 1-7(148-178)사이. 참). 병행구, 전쟁. 2권. 12:8(248,249),13 : 1-7(250-270)]
글라우디오가 죽은 후 네로가 정권을 이어받게 된 것과 네로의 야만적 행동, 또한 벨릭스와 베스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발생한 강도살인 사기사건에 대하여
1. 글라우디오(Claudius)의 죽음
글라우디오 가이사는 재임한 지 13년 8개월 20일이[㈜ 수에토니우스(Suetonius)가 \’칼리굴라\’ 58에서 가이우스(Gaius)의 죽은 날짜를 주후 41년 1월 24일로 보고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하다. 그리고 수에토니우스(\’Claud.\’45), 타키투스(\’연대기\’ xii : 69),\’ 세네카(Apoc.?2)와 디오(Ix 34.3)는 클라우디오의 죽은 날짜를 54년 10월 13일로 알려준다. ] 되어 죽었는데[㈜ 주후 54년] 그의 죽음은 아내 아그립피나의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글라우디오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는 타키투스는(연대기 xii.66-67) 아그립피나(Agrippina)가 글라우디오의 공식 맛 감정사인 할로투스(Halotus)에게 황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중 하나인 버섯 안에 천천히 효력을 나타내는 독을 넣으라고 함으로써 글라우디오를 죽이려 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 독을 먹인 후에 그녀는 크세노폰(Xenophon)이라고 불리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글라우디오 목 안으로 급히 번지는 독이 발라진 깃털을 집어 넣는다. 수에토니우스도 \’글라우디오\’ 44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라우디오가 독살 되었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장소와 시간에 대한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할로투스가 그 독약을 주었다고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아그리피나 자신이 연회에서 버섯 반찬에 독을 넣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디오는 Ixi.34.2-3에서 클라우디오는 아그립피나가 독을 넣었던 그 버섯을 먹은 후 밤중에 죽었다고 확정지어 말한다. 그러나, 스크라못자(V.M. Scramuzsa)는\’The Emperor Claudius\’,1940, pp.92-93에서 아그리피나가·글라우디오를 독살했다는 이야기의 증명 여부는 확실치 않치만, 율리우스나 글라우디오황제들 모두 온당치 못한 방법으로 죽었다는 것에 대한 전승은 일치한다고 결론짓는다. 스크라못자가 말한대로, 리비아(Livia)와 50년 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던 아구스도(Augmtus)가 그녀에 의해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타키투스의 풍자를 믿고, 그것으로부터 판단해야 할 것이다. 글라우디오외 죽음에 관한 다양한 설명을 위해서는 W. Kroll, ?De Claudiimorte\”,\’Raccolte Rarnorino\’, 1925, pp.197-198 : A.Momigliarto, Oss-ervazioni sulle fonti per la storia di Caligoia Ctaudie, Nerone\”,\’Rend. d. Accad. d Lincei\’ viii,· 1932, pp293이하 .그리고 R.Apack, Sen-eca\’s Evidence on the Deaths of Ctaudius·and Narcissus, \” \’Class, Wee-kly?xxxvi, 1942-1943, pp.150-151을 보라.] 그녀의 아버지는 가이사의 형제인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였다. [㈜ 그의 전반적인 인기에 관해서는 고대. 18권.6 : 8(206-209)를 보라.] 그녀의 남편은 로마에서 가장 저명한 자들중의 한명인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DomitiusAhenobarbus)였다.[㈜주전 10년의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us Ahenobarbus)와, 마르루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 옥타비아(Octava :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동생)의 딸인 안토니아(Antonia)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Gnaeus Domitius Ahenebarbus). 그의 조부와 증조부도 또한 집정관이었다. 그는 아그립피나와 28년에 결혼했고 32년에는 집정관으로 일했다. 그는 40년에 죽었다. ] 남편이 죽고 아그립피아가 오랫동안 과부로 있을 때 글라우디오는 그녀와 혼인하였다. 아그립피아는남편의 이름과 같은 도미티우스(Domitius)라 하는 아들을 데리고 왔다. 이 일이 있기 전에 글라우디오는 자신의 아내 메살리나(Messalina)를 그녀의 질투심에서[㈜ 타키투스는 \’연대기\’xi. 6에서 메살리나는 쉽게 간통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권태를 느꼈음에도 블구하고 가이우스 실리우스(Gaius Silius)가 메살리나(Messslina)에게 구혼했을 때,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이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메살리나는 곧 동의했고 결혼계약이 증인들 앞에서 실제로 서명함으로씨 이뤄졌다. (타키투스 \’연대기\’ xi. 27 : 수에토니우스 \’글라우디오\’ 26). 모미글리아노(Momigliano)의 \’Cladius\’, 1934, pp.76, 120에 의하면, 메살리나는 타키투스가 말한대로, 글라우디오에 대항하기 위한 반역을 시작하려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두번째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두번째 남편인 실리우스는 아마 참된 원로원의 원수(元首) 정치를 확립하려 했던 잘 알려진 귀족이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벗어 나고자 살해하였다.매살리나와의[㈜ 발레리아 메살리나(Valeria Messalina). 주후 48년.] 사이에는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와 옥타비아(Octavia)라는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첫 번째 아내 페티나(Petina)와의[㈜ 수에토니우스의 \’글라우디오\’ 26에 의하면 아일리아 파이티나(Aelia Paetina)늘 실제로 글리우디오의 두번째 아내였다. 첫째 아내는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리아(Plautia Urgulanillia)였다. ] 사이에 낳은 맏아들 안토니아(Antonia)가 있었다. 글라우디오는 또한 옥타비아를 네로와 혼인시켰다.네로는 글라우디오가 도미티우스를 양자로[㈜ 참). 타키투스의 \’연대기\’ xii. 25-26. 스크라뭇자는 앞글 p.91에서 이 양자(養子) 입양은 부분적으로, 네로의 조부였던 게르마니쿠스(Germanicus)파들과의 균열을 치료하려는 글라우디오의 갈망에 의해 지시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삼은후 불렀던 이름이었다.[㈜ 네로가 12살이던 주후 50년(타키투스 \’연대기\’ xii. 25). 기어(R.M.Geer)는 \”Notes on the Early Life of Nero\”, \’Trans. of the Am. Philol. Assoc.\’ 1xii, 1931, p.63에서 양자 입양의 가능한 형태들을 조사한 후에 그것은 불규칙적이었다고 말한다.]
2. 네로(Nero)가 황제로 즉위한 경위와 그의 야만성
아그립피나는[㈜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가 성년(成年)이되어 브리타니쿠스(Britannicus)는 당시 14살 이었다.] 부친의 뒤를 이어[㈜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1xi. 1. 1도 또한 그렇다. 그러나 스크라뭇자는 앞글 p.91에서 아버지에서 아들로 왕권이 계승되는 헬라적인 사고를 했던 요세푸스와 디오가, 그 왕권이 글라우디오의 아들 브리타니쿠스에게로 계승되었을 것이라고 본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헌법에는 왕위 세습권과 같은 그러한 법령이 없으며 무엇보다도 자연 세습권이 없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르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글라우디오 황제 살해를 계획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그전에 자신의 아들 네로가 황제의 직위를 장악하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그녀는 즉시 군대 장관 부루스(Bur-rus)와[㈜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Sextus Afranius Burrus). 타키투스는 그를 \’연대기\’ xiii. 2 이하에서 길게 다루고 있다.] 호민관들과 가장 큰 세도를 가진 자유민들을 보내어진(陣)으로 네로를 데리고 가서 그를 황제로[㈜ 타키투스, \’연대기\’ xii. 60에서도 또한 그렇다.] 예우하게 하였다. 네로는 정권을 장악하고서 대중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였다.[㈜ 주후 55년. 참). 타키투스, \’연대기\’ xiii. 16.] 네로는 그후 머지 않아 자신의 모친[㈜ 참). 타키투스, \’연대기\’ xiv. 1-13. ] 아그립피나를 공개적으로 살해한다. 이것이 네로를 낳아주었을 뿐 아니라 양육하여 주었고 계략을 써서 로마 황제의 직위에 오르게 해 준 모친 아그립피나에 대한 네로의 보답이었다.그는 또한 아내 옥타비아와[㈜ 참). 타키투스, \’연대기\’ xiv. 60-64.] 다른 많은 저명 인사들을 반역을 도모한 것처럼 위장하여 살해하였다.
3. 네로의 역사를 기술하는 자들의 다양한 태도
수많은 사람들이 네로의 역사를 기술했으므로 이러한 사건에 대한 더 이상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네로의 역사를 기술한 자들중의 일부는[㈜ 모미글리아노(A. Momigliano)가 \’Camb. Anc. Hist.\’ x, 1934,p.702에서 말한대로, 네로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한 사람은 역사가들 중에 한명도 없다. 따라서 그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설명들도 일방적이다.] 네로로부터 이득을 취하고자 하여 사건의 진실을 벗어났고, 반면 다른 자들은 네로를 중오하여 거짓말로써 그를 적대하여 뻔뻔하게 지껄였으므로 그들은 비난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네로에 관한 그러한 거짓말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네로 이전의 사건에 있어서도 그들의 사건의 장본인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기록에 있어서 진실을 지키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사 서술가들은 사건의 장본인들보다 더 오래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역사를 서술한다. 이러한 식으로그들은 즐긴다. 그러나 직접적인 목표로 삼는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사건과 동떨어진 것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다루고우리 유대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아주 정확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가 겪은 재난과 우리가 저지른 범죄를 서술하는고통을 감수하는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우리와 연관된 사건으로 되돌아 가고자 한다.
4. 네로가 디베랴(Tiberias)와 타리카이아(Tarichaeae)와 율리아스(Julias)를 아그립바에게 하사하다
네로의 통치 첫해에[㈜ 주후 54년.]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가[㈜ 참). 고대. 7 : 1(139).] 죽은 후 그의 형제인 소하이무스(Sohaemus)가[㈜ 율리우스 소하이무스(C. Julius Sohaemus). 이 소하이무스는 앤더슨 (Anderson)의 \’Camb. Anc. Hist\’ x, 1934, p.758주 3과 매직(Magic)의 앞글 ii. 1412주 41에 의하면, 봉족왕으로 아르메니아에 인접한 지역인 소페네(Sophene)를 네로에 의해 받았던(타키투스, \’연대기\’ viii. 7), 에메사(Emesa)의 영주 소하이무스는 아니다. 소페네와 에메사 두 지역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두명을 동일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슈타인(Stein)의 \”Sohaemus\”, no.4, Pauly-Wissowa, 2. Reihe, iii, 1929, p.797에서도 또한 그렇다.] 왕위를 계승하였고 칼키스의 왕이자 헤롯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에 관해서는 \’연대기\’ xviii. 134, 137 ; xx. 13, 104 ; 전쟁. 2권. 11 :6(221) 13 : 2(252)를 보라. 타키투스는 \’연대기\’ 13.7에서 또한 소 아르메니아(Armenia Minor)를 네로가 아리스토불루스에게 맡겼다고 보도하고 있다.] 소아르메니아(Armenia)의 정권을 네로에 의해 이양받았다. 가이사는 또한 갈릴리(Galilee)의 일부와 디베랴(Tiberias)와 타리카이아(Tarichaeae)를[㈜ 요세푸스에 의해, 특히 그의 자서. 18(96). 26(127)등에서 종종 언급되는 갈릴리 지역의 도시.] 아그립바에게 주었고 그곳 사람들에게 아그립바의 지배에 복종할 것을 명하였다. 네로는 또한 아그립바에게 페라이아(Peraea)의 한 마을인 율리아스(Julias)를[㈜ 요단강 동쪽 베다람프다(Betharamphtha). 참). 고대 18권. 2 : 1(27), 여기에는 아구스도 황제 부인인 율리아(Julia : 리비아, Livia)의 이름을 본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변에 있는 14개의 마을과 함께 주었다.[㈜ 병행본문 전쟁. 2권. 13 : 1(252)에서 네로는 아그립바에게 아빌라(Abila),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음), 페라이아(Peraea)의 율리아스(Julias), 그리고 갈릴리의 타리카이아이(Tarichaeae)와 디베랴(Tiberias) 지역과 함께 4도시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5. 벨릭스가 강도떼와 사기꾼들을 진멸하다
유대인의 정세에 관해서 말하자면 정세는 점차로 악화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유대에 강도떼와 무리들을 기만하는 사기꾼들이 다시 들끓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벨릭스는 매일 강도떼들과 함께 많은 수의 사기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그는 또한 강도떼의 분파를 통합한 디나이우스(Dinaeus)의 아들 엘르아살(Eleazar)을[㈜ 참). 고대. 20권. 6 : 1(121), 전쟁. 2권. 13 : 2(253)에 의하면 엘르아살(Eleasar)이 20년 동안 그 나라를 약탁했다고 한다.] 체포하였다. 이것은 (違約)에 의해서 이루어진 체포였는데 벨릭스는 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보증과 함께엘르아살을 설득하여 자기에게 오게 한 다음 엘르아살이 오자 체포하여 로마로 압송하였다. 벨릭스는 대제사장 요나단(Jon-athan)에게[㈜ 그가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것은 고대. 18권. 4 : 3(95)에, 그리고 해임된 것은 고대. 18권. 5 : 3(123)에 보고되어 있다. 고대. 19권. 6 : 4(313-316)에는 아그립바 I세는 그를 대제사장으로 회복시켜 주겠다고 하나 그는 거절하고 자기 형 마티아스(Mathias)를 추천한다.] 악의(惡意)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요나단이 유대의 무리들로부터 불평을 들을까봐 벨릭스에게 유대정국을 더 잘 다스릴 것을 훈계조로 자주 말하기 때문이었다. 가이사에게 벨릭스를 유대의 총독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은 다름 아닌 요나단이었다. 따라서 벨릭스는 요나단을 제거할 방도를 획책하였다. 요나단은 벨릭스에게는 지속적으로 성가신 상대였는데 그런 계속적인 훈계가 부당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벨릭스는 요나단의 가장 친한친구 중의 한 명이며 예루살렘 주민인 도라스(Doras)에게 말하기를 강도떼를[㈜ 전쟁. 2권. 13 : 3(254)에서 요세푸스는 벨릭스가 성공적으로 그 나라에서 제거했던 오랜 약탈자들과 도시 한가운데서 백주 대낮에 살인을 범했던 \’시카리\'(Sicarii)라고 불리는 새로운 그룹을 구분한다. 요세푸스는 요나단(Jonathan)이 시카리의 첫번째 희생자라고 말하고 있다. 전쟁. 2권 13 : 3.(256).] 데리고 요나단에게 가서 그를 살해해 달라고 하면서 만일 그렇게 하기만 하면 상당액의 돈을 도라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도라스는 돈에 눈이 어두워져 이 제안을 수락하고 강도떼에게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요나단을 살해하도록 계획하였다. 즉 강도떼 중의 어떤 자들로 하여금 의복 속에 단검을 지니고서 하느님께 예배하려 가는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가서는 무리들 속에 섞여서[㈜ 요세푸스는 전쟁. 2권. 13 : 3(256, 257)에서 이 약탈자들에 의해 연출된 공포는 그들이 저질렀던 실제적인 살인보다 훨씬 더 불안했으며, 사람들은 친구들이 접근할 때도 그들을 믿지 못하기까지 하곤 했다고 말한다.] 요나단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살해로 어떤 보복도 받지 않게 되자 강도떼는 이후로 절기마다 안전에 몹시 신경을 썼다. 그들은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무기를 숨기고서 무리들 속에 섞여서 자신들의 적대자들을 살해했고 돈을 받고서 다른 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예루살렘시의 불경죄를 범한다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성전 안에서도 대담하게 살인하였다. 내 생각에는[㈜ 비슷한 견해가 요세푸스의 전쟁. 4권. 7 : 4(323)과 5권. 1 : 3(19) 그리고 몇 곳에 표현되어 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이러한 자들의 사악함을 미워하셔서 예루살렘을 버리신 이유인 것 같았다. 성전의 경우에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임재하시기에는 더이상 정결한 곳으로 여기지 아니 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시려고 로마군을 끌어들여 불을 지르게 하셨고, 우리와처 자식들에게 로마군을 보내셨다. 하느님께서는 재난을 통해서우리를 더욱 더 현명하게 하고자 하셨던 것ㅇ다.
6. 사기꾼들이 유대인들을 사막으로 끌고 간 것과 애굽으로부터 온 거짓 선지자
강도떼에 의해 자행된 이러한 일들이 온갖 종류의 신성모독과 함께 예루살렘시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사기꾼들과 협잡꾼들은 무리를 설득하여 광야로 끌고가서는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나타날 이적과 기사를 직접 보여줄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현혹된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를 치르었다. 왜냐하면 벨릭스가 그들을 끌고 와서는 처형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자가[㈜ 애굽인 예언자에 관한 기사 형식에 대해서는 그란트(R. Grant)의 \”The Coming of the Kingdom\”, Jour. of Bibl. Lit.\’ 1xvii, 1948, p.300을 보라. 허포드(R.T.Herford)는 \’Christianity in Talmud and Midrash,\’ 1903, p.345 주 1에서 애굽의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육체를 절개하여\”, 즉 절개하였던 자신의 육체 속에 마술적 문구를 새겼거나 삽입하여서 애굽으로부터 마법을 들여온 것으로 탈무드에 기록된 벤 스타다(Ben Stada)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바벨론의 \’Sanhedrin\’ 67a에 의하면 두명의 증인이 그가 룻다(Lydda)에 있다고 들었고, 그를 유대 법정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돌에 맞아 죽었다. 벤 스타다를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로 보게 되는 좀 더 후대의 혼란에 관해서는 드렌부르(J.Derenbourg)의 \’Essai sur I\’histoire et la eographie de la Palestine,\’ I, 1867, pp.468-471과 구트만(T. Gutmann) \”Ben Stada,\” \’Ency. Jud,\’ iv, 1929, p.73, 그리고 골드스턴(M. Goldstein)의 \’Jesus in the Jewish Tradition,\’ 1950, pp.57-62를 보라.] 애굽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와서는 예루살렘 맞은편 5퍼얼롱 가량 떨어져 있는 감람(Olive)산으로 자기와 함께 갈 것을 대다수의 평민들에게 권고하였다.[㈜ 전쟁. 2권. 13 : 5)261)에 의하면 이 거짓 예언자는 3만 명의 추종자를 얻었다. 그는 아마 행 21 : 38의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시카리(sicarii)를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그 애굽인으로, 바울로 착각했던 바로 그 애굽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명하면 예루살렘의 성벽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가를 보여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서 무리들에게 무너져 내린 성벽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입구를[㈜ 전쟁. 2권 13 : 5(252)에서 그 사기꾼은 자신의 경호원으로 행동했었던 사람들과 함께 스스로 전제군주가 되려고 의도했다고 덧붙인다.]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벨릭스가 이러한 정보를 듣고서 병사들로 무장시키고 많은 수의 기병과 보병도 함께보내어 그들을 대적하고 애굽인들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벨릭스는 그들 중 4백명을 살해하고 2백명을 생포하였다.[㈜ 전쟁. 2권. 13 : 5(262)에서 그 사기꾼은 자신의 경호원으로 행동했었던 사람들과 함께 스스로 전제군주가 되려고 의도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애굽인들은 전장으로부터 도피하여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강도떼들은 또다시[㈜ 전쟁. 2권. 13 : 6(264, 265)에 의하면 약탈자들과 사기꾼들은 로마의 멍에를 벗어 버리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는데 있어서는 함께 단결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들은 부유한 집들을 약탈하고, 주인들을 살해하였다.] 사람들을 선동하여 로마인들과 전쟁을 일으키고는 절대로 복종할 수 없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이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그들의 마을을 방화하고 약탈하였다.
7. 가이사랴에서 유대인과 수리아인 사이에 시민권에 관한 분쟁이 생기다
가이사랴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수리아인들 사이에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동등하게 누리는 권리를 놓고 큰 소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소요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왕 헤롯이 가이사랴의 건설자이고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수리아인들보다 우위의 권리를 요구한데서 발단되었다. 이에 수리아인들은 헤롯에 관한 유대인들의 주장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가이사랴가 이전에 스트라토 망대로[㈜ 헤롯이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를 재건했다는 이야기는 고대. 15권. 9 : 6(3310341), 10 : 1(342-344)에 기록되어 있다. 그 망대는 바벨론 \’Megillah\’ 6a에서 하스모니안(hasmonaeans)가문에 의해 획득된 것으로 언급한 쉬르(Shir, 다른 본문에는 Shed, 즉 \”귀신\”)망대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불리워졌으며 그 당시에는 한 명의 유대인도 그곳에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수리아인들은 전쟁. 2권. 13 :8(266)에서 다른 논중을 제시하는데, 그 도시는 헬라인들을 위해 건축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헤롯이 그곳에다 상(像)이나 성전들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이사랴의 지배자들은이러한 혼란을 듣고 소요를 일으킨 자들중 유대인들과 수리아인들의 주동자를 각각 잡아들여서 채찍으로 벌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동안 그러한 소요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돈이 많았고[㈜ \”육체적으로 강건했으며\”(전쟁. 2권. 268).] 그러한 연유로 수리아인들을 경멸하였기 때문에, 수리아인들을 또 다시 비난하여 자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리아인들이 비록 부에 있어서는 유대인들보다 열세하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로마병사들이 가이사랴와 세바스테에[㈜ 참). 고대. 19권. 9 : 2(365)와 20권. 6 : 1(122).]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유대인들을 똑같이 성토하였다. 그렇게 되자 결국 그들은 쌍방간에 돌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유대인의 승리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양측에서는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그러나 벨릭스는 이러한 소요가 일종의 전쟁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고서 급작스레 그들에게 내려와서는 유대인들을 제지하고자하였다. 벨릭스는 유대인들이 자신의 말을 거절하자 병사들을 무장시켜 유대인들을 진압하도록 보내었고 그들중 많은 무리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생포하였다. 또한 벨릭스는 병사들이 재산이 풍부한 일부 유대시민들의 집을 약탈하는것을 허용하였다. 유대인들 중 보다 온건하고[㈜ 혹은 \”존경할 만한 ,\” \”점잖은\”.] 유력한 인사들은 병사들을 두려워하여 벨릭스를 찾아가 병사들에게 퇴각하도록 명할 것과 장래를 위하여 자신들을 살려 줄 것. 그리고 자신들이 행한 것에 대한 뉘우침의 여지를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벨릭스는 그렇게 해 줄 것을 응락하였다.[㈜ 전쟁. 2권. 13 : 7(270)에서 요세푸스는 수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싸움이 계속되었고, 이에 벨릭스는 두 그룹에서 지도자들을 뽑아 네로 앞에서 그들 사건을 따지도록 했다고 기록한다. 요세푸스는 가이사랴(Caesarea)의 유대인들과 수리아인들의 지도자들이 로마에 벨릭스를 고발하러 갔으나, 우리가 들은 대로 이것은 벨릭스가 해임되고, 보르기오 베스도(Porcius Festus)가 후임으로 온 후에 일어났다고 고대. 20권. 8 :9(182-184)에서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8. 대제사장들이 제사장들, 대중 지도자들과 언쟁을 일으키다
이러한 때에 아그립바왕은 파비(Phabi)의 아들인 이스마엘(Ishmael)에게[㈜ 주후 59년에 임명됨. 탈무드 \’Yoma\’ 9a에 의하면 10년동안 재임했다. 요세푸스는 그가 앞에서 이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서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전후(前後)를 참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이스마엘(Ishmael)은 주후 15-16년의 대제사장이었던 이스마엘 벤 파미(Ishmael ben Phabi, 고대 18권. 2 : 2(31)와 동일인은 아마 아닐 것이다. 랍비들은 그를 비느아스(Phineas)의 제자라고 부름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그의 열심을 인정했다(바벨론 \’Pesahim\’ 57a). 유리는 또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100므나(Mina, 므나는 고대 그리이스의 화페 단위로 약 4파운드에 해당한다-역자주)쯤 되는 겉옷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는 그 옷을 개인용으로 사용하다가 공동체에 기증했다.] 대제사장 직분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을 포함하는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양 파벌이 형성되고 그 중에서 가장 무모하게 설치는 사람이 두목이[㈜ 발췌문은 \”그리고 투쟁의 주동자가\”를 첨가한다.] 되었다. 그들은 서로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또한 돌을 던졌다.[㈜ 탈무드 \’Pesahim\’ 57a도 또한 이스마엘의 지지자들이 가한 폭력을 언급한다. 랍비들 중의 한명이 탄식한다. \”아아 슬프도다, 파비의 아들 이스마엘의 가문 때문에, 아, 슬프도다, 그들의 폭력 때문에!\”]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췌문은 \”그리고 싸움은 끝났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혼란은 마치 무정부 상태와 같은 방종의 혼란이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종들을 타작마당으로보내어[㈜ 참). 바벨론 \’Pesahim\’ 57a는 대제사장 하닌(Hanin=Ananus), 카드로스(Kathros=Cantheras), 그리고 이스마엘의 종들이 \”굶주린 사람들을 때렸다\”고 말하고 있다. 제사장들은 타작마당에서 도와주는 것 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도움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십일조를 내도록 유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바벨론 \’Kiddushim\’ 6b).] 제사장에게 돌아갈 십분의 일을 가져오게 하여[㈜ 십일조를 모으는 것에 관련된 실행의 역사에 대한 간결한 설명에 관해서는 벨킨(S.Belkin)의 \’Philo and the Oral Law\’, 1949, pp.72-78을 보라. 그가 pp.73-74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성전으로 가져오기 전에 십일조를 확보할 수 있고, 레위인들에게서 그들의 몫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에, 요한 힐카누스(Johm Hyrcanus)는 십일조의 중앙 수금을 제정했다. 그러나 우리 본문에서 지적된대로 대제사장은 부당 이익을 취했고, 따라서 미쉬나의 랍비들은 다시 한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십일조 수금을 허락해 주었다.] 보다 빈곤한 제사장들이 굶어죽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행했다. 소요를 일으킨 자들의 난폭함이 이같은 정도에 이르기까지 정의와공의가 유린당했다.
9. 베스도(Festus)가 벨릭스를 이어 총독이 되고 유대인들이 네로 앞에서 벨릭스를 고소하다
네로가 보르기오 베스도(porcius Festus)를[㈜ 주후 60-62년의 총독. 벨릭스가 그 일과 함께 바울을 떠난 후 바울을 로마에 보낸 것은 베스도였다(행 24 : 27이하).] 벨릭스의 후임으로 임명하자 가이사랴의 유대인들의 지배자들은 벨릭스의 잘못된 행동을 고소하려고[㈜ 유대인들을 향해 호의를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타키투스의 문맥에서 조차, 재임 기간 동안의 벨릭스는 온갖 만행에 탐닉했고, \”노예정신 속에서 왕의 권력을 행사했음\”을 인정한다(\’Hist.\’ v.9). 참). \’연대기\’ xii. 54 : \”벨릭스는……, 시기를 놓친 처방에 의해, 불충성스런 행위를 자극했다.\”] 로마로 갔다. 그 당시 네로가 가장크게 존경하였던 그의 형제 팔라스(Pallas)의[㈜ 참). 고대. 20권. 7 : 1(137).] 성가신 간청을들어주지 않았더라면 벨릭스는 처벌받았을 것이다. 가이사랴 거주 수리아인들의 지배자들 중 두 명이 네로의 가정교사였는데 헬라어 서신 보좌관인[㈜ 헬라의 서신 담당관(ab epistulis Graecis)의 위치.] 부루스(Burrus)에게[㈜ 허드슨(Hudson)을 이어 네이버(Naber)는 bourrovn으로 읽고, 그를 네로의 집정관 경호원 사령관인 아르파니우스 부루스<Afranius Burrus, 고대. 29권. 8 : 2.(152)>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요세푸스에 의해 이곳에 사용된 paidagwgov\”라는 용어와 왕의 참모(rector imperatoriae inventae : 타키투스, \’연대기\’ xiii. 2)를 동등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베릴루스(Beryllus)가 부루스(Burrus)와 앞으로 곧 보게 될 단락에서 철자가 다르게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요세푸스가 아주 좋아하는 전후 참조(cross-reference)를 해야할 것이다. Pauly-Wissowa, iii, 1897, p.319와 카터펠드(Katterfeld)의 \”beryllos-Burrus\”, \’Berl. Philol. Woch\’, xxxiii, 1913, p.59.] 거액의 돈을 주어서 유대인들이 가이사랴에서 향유하였던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취하하도록 황제를 설득하게 하였다. 그래서 부루스는 간청에 못이겨서 서신에 그러한 내용으로 쓰도록 황제의 허가를 받아내었다. 이 서신으로 유대는 다음과 같은 재난을 겪어야 했다. 왜냐하면 가이사랴의 유대인들이 수리아인들에게 보낸 이러한 내용의 서신을 전해 들었을 때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 더 무질서하게 되었고 결국 전쟁을 촉발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10. 베스도와 시카피라(Sicarii)
베스도가 유대에 오자마자 유대가 강도떼에 의해 유린당하는 사건[㈜ 참). 병행본문, 전쟁. 2권. 14 :1(271).]이 일어났다. 모든 마을이 방화되고 약탈되었다. 당시강도떼인 소위 시카피파(Sicarii)는[㈜ 전쟁. 2권. 13 : 3(254, 255). 이 용어(sikarin)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테러리스트들과 관련하여 탈무드 문헌에서 발견된다. 야스트로(Jastrow)의 \’A Dictionary of the Targumim\’, 등, 1903, p.986을 보라.] 증가일로에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단검(dagger)은 길이는 바사의 신월도(新月刀,Scimitar)와[㈜ 헬라어로는 ajkinavkh\”, 라틴어로는 acinaces. 참). 헤로도투스(Herodotus), iii. 118은 바사인 인타페르네스(Intaphernes)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왕에게로의 출입이 문지기와 신하에 의해 거절되자, 그의 신월도(新月刀, ahkinavkh\”)를 가져와서 그들의 코와 귀를 베어 버렸다는 것이다. 또 황금 신월도는 바사왕 고레스(Cyrus)가 시에네시스(Syennesis)에게 주었던 선물들중에 열거되어 있다(Xen. \’Anab.\’i.2.27). 호레이스(Horace)의 \’Odes\’ I. 27. 5-6에 의하면 분명히 그 신월도(acinaces)는 특히 저녁 연회에서 술마시는 도중 일어난 싸움을 그치라고 소리칠 때 사용되었다 : \”메대의 신월도(acines)는 포도주와 전등과는 얼마나 모순되는가!\”] 별 차이가 없었고 다소 굽었으며 소위 로마의 시카이(sicae, 즉 낫)와[㈜ 시카리(Sicarii)라는 용어는 \’Lex Cornelia de Sicariis\’와 키케로의 \’Rosc. Am.\’ 8, 39, 103에서는 약탈자라는 의미로 나오는데, 이것은 헉(Hug)의 \”Sica\”, Pauly-Wissowa, 2 Reihe, ii, 1923, p.2184에서 인용되었다.] 같은 것이었다. 강도떼는 이러한 무기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들의 단체명을 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이 무기로 많은 사람을 살해하였다. 그들은 절기에 무리 속에 섞여있다가 하느님께 예배드리러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무리들 속에서 불쑥나와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고대. 20권. 8 : 5(165).] 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무차별 살해하였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적대자들이 거주하는 마을들을 단도를 지니고서 자주 습격하여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그리고 베스도는 재난으로부터 구원과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던 사기꾼에게 미혹되어 그를 광야까지 따라간 사람들을 기병과 보병을 보내어 진멸하도록 명하였다. 따라서 파견된 병사들은 백성들을 미혹한 사기꾼과 그의 추종자들을 진멸시켰다.
11. 아그립바의 왕궁 증축(增築)
이러한 때에 아그립바 왕은 예루살렘 왕궁 현관 가까이에 아주 커다란 식당을 지었다. 이 왕궁은 아사모나이오(Asa-monaios)의[㈜ 하스모니안 사람들. 참). 고대. 12권. 6 : 1.(265).] 자손들에 의해 높은 곳에 세워져서 그 도시를 관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좋은 전망을 제공하였다. 아그립바왕은 이러한 경치가 마음에 들어서 그곳에 누워서 먹으며 성전에서 행하여 지고 있는 일들을 관찰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예루살렘의 유력인사들이 알고는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일 특히 제사에 관한 일을 다른 사람들이 염탐하려 접근하는 것을 유대의 전통이나 율법이[㈜ 암브로시아(Ambrosia)사본과 발췌문은 \”그리고 그 법에도\”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아그립바가 했던 것에 있어서 유대 법에 저촉될 만한 것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 미쉬나, \’Yoma\’ iii. 8은 속죄일에 백성들은 성전의 법정에 섰고, 아마 제물을 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일한 금지사항은 제사장의 직무가 수행되는 동안에 성전에 있는 것이었다.]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전 안쪽의 가장 높은 건물 위에 서쪽으로 향하는 벽을 세웠다. 그러나 이 벽이 세워지자 왕궁이 커다란 식당의 전망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병사들이 절기시 성전을 경계하던 성전의 바깥 뜰에 있던[㈜ 혹은 \”성전 그 자체는 신성하기 때문에\”, 즉 어떤 비 유대인도 성전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회랑의 전망도 방해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아그립바왕과 특히 베스도 총독은 매우 불쾌하였다. 이에 베스도는 그 벽을 허물 것을 그들에게 명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네로에게 사신을 보낼 기회를 달라고 베스도에게 간청하였다. 만일 성전의 일부가 파괴되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베스도는 그렇게 할 기회를 주었고 유대인들은 열 명의 유대 지배자들과 대제사장 이스마엘과[㈜ 고대. 20권. 8 :8(179).] 신성한 보물 관리자인 헬키아스를 네로에게 보냈다. 네로는 그들의 사정을 듣고 그들이 이미 저지른 일을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운 벽을 그대로 둘 것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일은 네로의 아내인 포파이아(Poppaea)를[㈜ 여왕(주후 58년)이며 후에 네로의 아내가 됨(60년), 요세푸스가 생포된 어떤 제사장들을 풀어주도록 하기 위해 64년에 로마에 왔을 때(자서. 3(16)), 그는 그녀의 중재로 임무를 수행했다. 포파이아(Poppaea)는 65년에 죽었다.]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허락되었는데 포파이아는 하느님을 신실하게 믿는 여인이었으므로[㈜ 포파이아는 유대교에 대한 \”지지자\”, 즉 유대인의 관행을 준수했고, 유대교로 실제적인 개종은 안했지만 유대교적 신앙을 지닌 사람으로서 보통 서술된다(예). R.H.Pfeiffer의 \’History of New Testament Times\’, 1949, p.195).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qeosebhv\”(\”하느님을 숭배하는 자\”)라는 용어가 반드시 포파이아를 전문적인 의미에서 \”지지자\”로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클라우스너(J.Klausner)는 \’From Jesus to Paul\’, 1943, p.43에서 포파이아를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Midrash Rabbahon Deut.\’ ii.24에 의하면 유대인들에 대항하는 신조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자살을 했던 그 로마원로원 의원과 비교한다. 그러나 그 원로원 의원은 그가 죽기 바로 전에 실제로 할례받았다는 것이 알려지기 전에 조차,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으며, 그곳에서 사용된 용어는 \”지지자\”에 해당하는 전문적 용어이다. 참). 역자의 \”Jewish \’Sympathizers\’ in Classical Literature and Inscriptions,\” \’Trans. of the Am. Philol. Assoc.\’ 1xxxi, 1950, pp.200-208.] 네로에게 이같은 호의를 부탁한 것이었다. 그리고 열 명의 사신에게는 귀향할 것을 명령했지만 헬키아스와 이스마엘은 인질로 잡아두었다. 아그립바왕은 이러한 소식을 듣자마자 대제사장이었던 시몬의 아들 카비(Kabi)라고 불리우는 요셉(Jeseph)에게[㈜ 아마 로마인들에 대항하는 주후 66년의 전쟁 초기에 여리고(Jericho)에서 지휘하도록 보내진, 시몬의 아들 요셉(Joseph, son of Simon)일 것임.] 대제사장직을 수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