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권 제 9장 알비누스가 총독으로 있을 때 야고보가 살해된 것과 아그립바가 세운 건물에 대하여

 


제 9 장



알비누스가 총독으로 있을 때 야고보가 살해된 것과 아그립바가 세운 건물에 대하여



1. 알비누스(Albinus)가 총독으로 임명되다



  [㈜ 참). 병행본문, 전쟁. 2권. 14 : 1(272).]



 가이사는 베스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알비누스를[㈜ 루케이우스 알비누스(Lucceius Albinus), 주후 약 62년 경에 총독으로 임명됨. 그는 군대장관의 지위를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Stein, \”Lucceius,\” no. 11, Pauly-Wissowa, xiii, 1913, p.1559를 보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부터 도착했다. 그는 후에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Mauretania Caesariensis)의 총독으로 일했고, 그곳에서 운명했다. 이에 대해 타키투스의 \’Hist.\’ ii.58-59를 보라)>] 의 총독으로 보내었으나 아그립바왕은 요셉에게서 대제사장직을 박탈하여 아나누스(Ananus)의 아들 아나누스를[㈜ 이곳에 나온 아나누스(Ananus)에 대한 불친절한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전쟁. 4권. 5 : 2(319-321)에서는 찬사를 보내는데, 그곳은 태커레이(Thackeray)가 그의 각주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를 페리클레스(Pericles) 대신으로 기록하였다. 특히 그는 자기의 사적인 이익을 넘어서 공적인 행복을 추구했다는 점과 장군이자 웅변가로서의 그의 능력으로 인해 칭찬받았다. 열심당(the Zealots) 반대하는 그의 용감성은 전쟁. 4권. 3 :9(160) 이하에서 요세푸스의 명백한 공감과 함께 길게 서술되어 있다.] 대제사장직에 명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친 아나누스는[㈜ 참). 고대. 18권. 2 : 1(26)에 대한 각주.]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다섯 명의 아들이 있어서 그들모두 하느님의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고 그 자신도 이전 오랫동안 그러한 영예를 누렸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일은 다른 대제사장에게서는 결코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대제사장직에 임명된 아들 아나누스는 기질이 거만하였고 매우 무례하였다.[㈜ 혹은 \”야만인\”.] 또한 이미 언급된 것처럼[㈜ 참). 고대. 13권. 10 : 6(294). 그곳에서, 사두개인들(Sadducees)을 위해 바리새인들(Pharisees)을 저버렸던 힐카누스왕은 바리새인들에게 그의 어머니가 포로였기 때문에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말한 댓가로 엘르아살(Eleasar)은 무슨 형벌을 받는 것이 좋겠냐고 묻는다. 바리새인들은 채찍질과 결박이면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모함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리새인들은 형벌 문제에 있어서는 관대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보다도 범죄자들을 매우 엄격하게 심판하는 사두개파의 일원이었다. 아나누스는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권한을 행사할 적절한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베수도가 이제죽었고 알비누스는 부임 중에 있었다. 따라서 아나누스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참). 고대. 18권. 3 : 3(63). 사본들은 \”불리우는\”을 생략.] 예수의 형제야고보와[㈜ 예수에 관한 본문<고대. 18권. 3 : 3(63, 64)>과는 달리 야고보(James)에 관한 이 본문의 진정성은 거의 의심받지 않고 있다. 이것에 관하여는 Schurer, I. 546을 보라. 그것이 만일 기독교인이 써넣은 것이었다면, 아마 그것은 야고보에 대해 더 많은 찬사를 하였을 것이다. 헤게시푸스(Hegesippus, 유세비우스가 \’Hist. Eccl.\’ ii,23. 11-18에서 인용함)는 야고보가 성전 꼭대기에서 던져졌고, 돌에 맞았으며, 마침내는 마전장이(피륙 바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역자주)의 곤봉에 맞아 죽었다고 말한다(Thackeray, \’Selecitions from Josehus\’, p.95에서 인용).] 다른 형제들[혹은 그의 동료들]을 산헤드린 앞에세우고 율법 위반자로 그들을 고소하여 돌로 쳐죽이도록 보내었다. 예루살렘 시민들 중 공평하고 율법 위반을 불쾌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나누스가 행한 일을 혐오스럽게 생각하였다.따라서 그들은 아그립바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아나누스가 이전에 행한 일이 의롭지 않기 때문에[㈜ 즉 알비누스(Albinus) 동의없이 산헤드린을 소집하는데 있어, 고대. 29권. 9 : 1(202)에서 설명된 것처럼, 다른 가능한 번역으로는 \”왜냐하면, 아나누스(Ananus)가 정의롭지 못하게 행동했던 것은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행하지 않도록 아나누스에게 전할 것을 아그립바왕에게 요청하였다. 그들중 일부는 여행중에 있는 알비누스를 만나려고 가서 아나누스가그의 허락 없이[㈜ 뷔헬(F.Buchel)은 \”Noch Einmal : Zur Blutgerichtsbarkeit des Synedrions\”, \’Zeitschr. f. d. Neutest. Wiss.\’ xxxiii, 1934, p.86에서 알비누스의 분노로부터 총독들의 통치 기간 동안 대제사장들은 사형을 선고할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추정할 수 있다.]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은 적법한 것이 아님을 그에게 통보하였다. 그러자 알비누스는 그들의 말을듣고 화를 내면서 아나누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아나누스가 행한일에 대해 처벌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아그립바왕은 아나누스로부터 대제사장직을 박탈하였는데 이것은 아나누스가 재임한지 3개월만에 이루어졌고 담나이우스(Damnaeus)의 아들[㈜ 오리겐(Origen, \’켈시우스\’ I.47)과 우세비우스(\’Hist. Eccl.\’ ii.23)는 로마와의 전쟁 동안에 유대인들이 받았던 고통은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보복때문이라고 요세푸스가 주장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요세푸스의 본문에는 그런 기록은 없다. 오리겐과 유세비우스는 요세푸스의 진술을 헤롯에 의한 세례자 요한의살해에 대한 거룩한 복수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대. 18권. 5 : 2(116).]예수(Jesus)를 대제사장직에 임명했다.



 2. 대제사장 아나니아(Ananias)의 세도(勢道)



 알비누스는 예루살렘에 오자마자 유대가 평화를 유지하도록 전심전력을 다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수많은 시카리파 사람들을[㈜ 요세푸스가 전쟁. 2권. 14 : 1(272-276)과 현 본문에서 내리는 평가는 시카리(sicarii)를 누르려는 알비누스의 열심에 대해 전쟁. 2권. 14 : 1(272-276)이 생략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일치한다. 그러나 모미글리아노(A. Momigliano)는 \’Camb. Anc. Hist.\’ x, 1934, p.855d서 알비누스가 짧은 재임 기간 동안에 그를 타락시켰다고 비난받은 온건 정책(Apolicy of mildness)을 시작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살해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나니아(Ananias)[㈜ 참). 고대. 20권. 5 : 2(103), 6 : 2(131).]는 영예가 날마다 올라갔고 뛰어난 예절로 시민들의 애정과 존경을 크게 받았다. 왜냐하면 아나니아는 풍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 혹은 \”돈을 버는 육감을 가졌기\”. 리베르만(S.Liebermann)은 \’Greek in Jewish Palestine\’, 1942, p.182, 주 195에서 그가 이 탐욕에 대해 비꼬는 말인 \”Ben Nadbai\”, 즉, \”풍부한 사람\”이라고 불리워 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본문에서 아나니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음을 지시해주고 있어, 탐욕이 그런 정도로 많았을 것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별명을 문자적으로 취하거나 찬사로 보는 것을 막을 근거는 없다.] 때문이었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알비누스와 대제사장 예수에게[㈜ 담나이우스(Damnaeus)의 아들 예수.] 선물을 줌으로써 그들과의 교분을 깊게 하였다. 아나니아에게는 매우 사악한 종들이 있었다. 그종들은 방종한 자들과 상통하여 타작마당으로 가서는 제사장에게 돌아가기로 되어있는 십분의 일의 몫을 폭력으로 탈취하였고 십분의 일을 주지 않는 자를 구타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의 만행을 막지 않았고 제사장들은 종들이 행하는 것처럼 똑같이 행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십분의 일을 늘 받으면서 살아왔던 나이 든 제사장들의 일부는 굶어죽었다.[㈜ 참). 고대. 20권. 8 :8(181).]



 3. 시키리파들이 성전 관리자인 엘르아살(Eleazar)을 납치하다



 시카리파들은 다가오는 절기 직전 밤중에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서 성전 관리자의 일원인 서기관이자[㈜ 혹은 \”관원.\” 관원이라는 의미로서의 용어는 70인역을 포함해서 애굽 헬라어에서도 발견된다. 참). H.A.Wolfson, \’Philo;, ii. 1947, p.345에서 인용된 G.A.Deissmann, \’Bible Studies\’, 1901, p.110.] 대제사장[㈜ 문자적으로는 \”장군.\” 그러나 추측컨대 그것은 성전 우두머리의 직분을 지시하는 것 같다(131의 각주를 보라).] 아나니아의 아들인 엘르아살을[㈜ 전쟁. 2권. 17 : 2(409)에서 그는 황제와 로마 제국을 위해 드려진 제사를 거절하라고 제사장들을 설득함으로써 로마와의 전쟁의 기초를 놓았던 매우 용감한 젊은이로 묘사된다. 드렌부르(Derenbourg)는 앞글 p.248 주 1에서 그를 그라투스(Gratus)총독의 대제사장이었던<고대. 18권. 2 : 2(34)>엘르아살(Eleazar)로 본다. 하지만 이렇게 동일시하는 것은 의심스럽다.] 결박하여 데리고 갔다. 시카리파들은 아나니아에게[㈜ 다른 본문에는 아나누스(Ananus). 참). Schurer, I. 584, n. 50.]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당신이 알비누스를 설득하여 체포한 열 명의 동료 죄수들을 석방시켜 준다면 서기관을 당신에게 돌려 보내겠소.\” 따라서 아나니아는 알비누스를 설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내 알비누스로부터 허락을 받아 내었다. 이것이 보다 큰 재난을 가져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강도떼들이 계속해서 아나니아의 종들을[㈜ 혹은 \”가족.\”] 납치하려고 획책하였기 때문이었다. 강도떼들은 아나니아의 종들을 살려 두고서 자신들의 동료인 시카리들을 석방할 때까지 돌려 보내지 않았다. 강도떼들은 그 세력이 커지게 되자 점점 기가 올라 유대전체를 유린하고 다녔다.



4. 아그립바가 베리투스(Berytus)에 건조한 건물과 구경거리로 인해 유대인들을 해치다



 이때에 아그립바왕은 이전보다 더 크게 가이샤라 빌립보(Caesarea Philippi)를[㈜ 참). 고대. 18권. 2 : 1(28)과 전쟁. 2권. 9 : 1(168).] 증축하고, 네로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그곳을 네로니아스(Neronias)라고[㈜그 이름은 또한 주화(鑄貨)에도 나타난다. 참). F.W.Madden, \’History of Jewish Coinage\’, 1864, p.116과 \’Coins of the Jews.,\’ 1881, pp.145-146.] 불렀다. 그리고 아그립바왕은 막대한 비용으로 베리투스(Berytus)에 극장을[㈜ 참). 고대. 19권. 7 : 5(335, 336). 여기에는 아그립바의 아버지가 베리투스(Berytus)에게 수여했던 특별한 호위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그것은 \”질적인 아름다움에 있어서 다른 많은 것들을 능가하는\” 극장, 원형극장, 목욕탕, 회랑 등을 포함한다. 헤롯도 또한 베리투스를 위해 회랑, 성전들, 그리고 시장을 제공해 주었다<전쟁. 1권. 12 : 11(422)>.] 건조하여 매년 공연될 구경거리를 보여주었다. 그는 그러한 구경거리에다 수만의 드라크마(drachmae)를 투자하였고 또한 사람들에게 많은 양의 식량을 주었고 기름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아그립바왕은 자신이 기증한 조각들과 고대인들이 만든 진품의 상(像)들로 전 도시를 장식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의 왕국에 있는가장 뛰어난 장식품까지 이곳으로 옮겼다. 이러한 일로 이전보다 더욱 백성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방 도시를 장식하려고 백성들의 것들을 탈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말리엘(Gamaliel)의 아들 예수는 담나이우스(Damnaeus)의 아들예수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는데, 대제사장직은 왕이 다른 제사장으로부터 박탈한 것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대제사장들 사이에 소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대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끌여들여 서로 비나하고 돌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그 밖의 제사장들에게는 아주 힘든 상대였고, 그의 재산으로 아나니아를 용납하고자 한 자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코스토바르(Costobar)와 사울(Saul)은[㈜ 코스토바르(Costobar)와 사울(Saul) 형제는<전쟁. 2권. 20 : 1(566)>. 시민들이 유대 반란군들의 봉기를 초기에 진압하기 위해 아그립바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촉구하기 위해 66년에(전쟁. 2권. 17 : 4(418)) 보낸 대표의 일부였다. 수리아의 로마 총독은 케스티우스(Cestius)의 패주 이후에 그들은 그 도시를 포기하고 로마 군에 입대했다(<전쟁. 2권. 20 :1(556)>.] 많은 수의 사악한 자들을 규합하였는데, 그들이 왕족(王族)이었기 때문에 사악한 자들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백성들에게 폭력을 행세하였고 자신들보다 더 약한 자들을 약탈하려고 하였다. 그때부터 줄곧 예루살렘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만사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5. 알비누스가 유대 죄수들을 석방하자 강도떼들이 유대에 들끓다[㈜ 참).병행본문, 전쟁. 2권. 14 : 1(252



 알비누스는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참). 고대. 20권. 11 : 1(252-258).] 자신의 후임으로 온다는 것을 듣고서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사의(謝意)를 표하고자 하였다. 명백히 사형받을 만한 죄수들을 끌어내다가 사형에 처할 것을 명했지만 어떤 사소한 연유로 투옥된 자들은 돈을 받고서 석방시켜 주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감옥은 비게 되었고 유대에는 강도떼가 들끓었다.



 6. 레위지파 성가대원들이 제사장들과 같이 세마포 의복을 입도록 허용받다



 성가대원이자 유대지파의 하나인[㈜ 다른 본문에는 \”파수꾼의 한 사람인.\”] 레위인들은 아그립바왕에게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세마포 의복을 입게 해줄 것을 종용하였다. 레위인들은 아그립바왕이 통치할 동안 이같은 일을 해볼 만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새로운일의 기념비를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원을 성취하였는데, 아그립바왕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의 동의를 얻어서[㈜ Wolfson의 앞글, ii. 346을 보라. 그는 첫째 재판장과 유사(有司)는 유대 전승이나 필로 전승 둘 다에서 왕으로 간주되는 모세에 의해 임명되었다고 말하면서, 따라서 \”각 성에 재판장과 유사를 둘 것이요\”(신 16 : 18)라는 성경의 계명을 수행한 것은 바로 그였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아그립바는 산헤드린을 소집하는데 있어 재판장을 임명하는 성경의 특권을 단순히 수행하고 있었다.] 성가대원에게 이전에 입던 의복을 벗고 그들이 원했던 대로 세마포 의복을 입을 수 있도록 특권을 주었고,레위지파의 일부가 성전에서 봉사할 때 그들이 간청한[㈜ 레위인들은 스 2 : 41-42<라쉬(Rashi)의 주석을 보라>와 느 10 : 28에서 다르게 레위인들이 나열되는데서 지적되는 거서럼, \”노래하는 자들\”과 \”문자기들\”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이 각 그룹들의 자격은 출생시 얻게 된다. 그들 사이에는 \”노래하는 자들\”을 좀 더 낮은 자들로 간주하는 뚜렷한 구분이 있었는데, 탈무드 \’Arakin\’ 11b에서 지적하는대로 아바이(Abaye)는 보고하기를, 전승에 의하면 실제로 동료의 문지기 일을 했던 노래하는 레위인이 죽음의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랍비들은 범죄가 있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 논쟁의 배경에 관하여는 포겔슈타인(H.Vogelstein)의 방대한 연구인 \’Der Kampf zwischen Priestern und Leviten\’, 1889와 비교적 간단하지만 마이어(R. Meyer) 의 \”Levitische Emanzipationsbestrebungen in nachexilischer zeit\”, \’Orient. Literaturzeit\’, x1i, 1938, pp.721-728, 특히 p.727을 보라.] 찬송배우기를 허용해 주었다. 이러한 모든 조치는 유대 율법과는 상충되는 것으로, 이는 그와 같은 그들의 범죄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다.



7. 성전 완공



 성전이 완성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노동자들이 1,800명 이상 실직하였으며 성전에서의 노동으로 연명하였기 때문에 어떤 임금도 받지 못하여 궁핍하게 된 것을 백성들이 알게 되었다. 백성들은 로마 병사들이 강탈해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성전에 두었던 보물로 그들을 마지못해 원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식량을 줄 의사가 있어서 보물들을 소비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들 중 누군가가 한시간 동안만 노동을 하였다 할지라도 즉시 보수를 받았다.[㈜ 참)> 신 24 :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또한 Baba Mezia 111a의 탈무드의 논의를 보라. 참). 저녁이 될 때, 포도원 주인이 그의 품군들에게 말하는 마 20 :8, \”품꾼들을 불러 삯을 주라.\”] 백성들은 동쪽 회랑을 재건하도록그들을 종용하였다. 이 회랑은 바깥 뜰에 부속하였으며 깊은 계곡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이 회랑의 길이가 400규빗에 달하고[㈜ 586피트.] 정방형의 흰돌로 된 벽이 있는데 각 돌의 크기는 20×20규빗이며 각 돌의 높이는 6규빗이었다.[㈜ 길이 약 29피트와 높이 약 8.8피트.] 이 회랑은 처음 전체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왕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가이사 글라우디오에 의해 성전관리를 위임받은 아그립바왕은 건물이 쉽게 파괴되리라는 것과 다시 건조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특히 상당한 시간과 많은 액수의 돈이 소요되는 회랑을 다시 복구하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문제에 대한 유대인들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아그립바왕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흰돌로 포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그들의 의견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가말리엘의 아들 예수로부터 대제사장직을 박탈하여 데오필루스(Theophilus)의 아들 마티아스(Mat-thias)에게 대제사장직을 맡겼다. 마티아스가 대제사장직으로 있을 때 유대와 로마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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