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9장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알렉산더가 스키피오에게 처형된 것처럼 아리스토불루스도 폼페이의 친구들에게 처형된 것과 폼페이가 죽은 후 안티파테르가 가이사와 친분을 맺은 것과 그가 미드리다테스를 도와 전쟁에서 큰 공적을 세운 것에 대하여

 


제 9 장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알렉산더가 스키피오에게 처형된 것처럼 아리스토불루스도 폼페이의 친구들에게 처형된 것과 폼페이가 죽은 후 안티파테르가 가이사와 친분을 맺은 것과 그가 미드리다테스를 도와 전쟁에서 큰 공적을 세운 것에 대하여



1. 율리우스 가이사[주전 40년]



 폼페이와 원로원들이 이오니아 해협(Ionian Sea)을 넘어 도망하자 가이사는 로마를 차지하고 제국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아리스토불루스를 석방했다. 또한 가이사는 2개의 군단을 아리스토불루스에게 위임하여 급히 수리아로 보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불루스가 수완을 발휘해 수리아와 유대에 인접한 지역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시기로 인해 아리스토불루스의 총명과 가이사의 희망은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폼페이 진영에 있는 자들이 아리스토불루스를 독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아리스토불루스의 시신은 매장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왕묘에 묻히기 위해 안토니(Antony)가 유대인들에게 보내기까지 그의 시신은 굴속에 보관되었다.



 2. 알렉산더의 죽음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알렉산더도 처형당했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누를 끼쳤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후 폼페이의 명령으로 안디옥(Antioch)에서 스키피오(Scipio)에게[㈜ 카이실리우스 메텔루스 스키피오(Caesilius Metelus Scipio). 폼페이의 장인이자 수리아의 총독. 주전 46년 다프수스(Thapsus) 전투에서 가이사 율리우스(Julius Caeasr)에게 패배당했다.] 참수당해 죽었다. 레바논 계곡의 칼키스(Chalcis)의 왕인 멘나이우스(Men-naeus)의 아들 톨레미(Ptolemy)는 자기 아들 필리피온(Phi-lippion)을 아스글론으로 보내어 그곳에 있는 알렉산더의 동생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전쟁.1권. 4:8(103)을 보라.] 이에 필리피온은 부친의 명령대로 알렉산더의 아우 안티고누스와 두 여동생을 그 어머니의 수중으로부터 끌어내어 톨레미에게 호송하였다. 필리피온은 이때 알렉산더의 두 여동생 중 알렉산드라라는 여인을[㈜ 또 다른 읽기에 보면 \”동생\”] 좋아하게 되어 마침내 결혼까지 하였으나 부친 톨레미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톨레미는 아들을 죽인 후 며느리와 결혼하였다. 톨레미는 그녀와 결혼한 후 그녀의 형제들을 잘 보살펴 주었다.



 3. 안티파테르는 가이사와 친교를 맺음 [주전 48-47년]



 폼페이가 사망한 후, 안티파테르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어 가이사와 친교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르가무스의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 of Pergamus)가 군대를 이끌고 애굽을 원정하는 중에 펠루시움 근방의[㈜ 혹은 \”나일강의 어귀.\” 펠루시움의 권력자들은 일찍이 그의 통과를 거부하는 공고문을 보냈음에 틀림없다.] 길목에서 저지를 당해 아스글론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되자, 안티파테르는 자신을 지지하던 아라비아인들을 설득하여 스스로 3,000명 유대인 기병대를 이끌고 미드리다테스에게 당도했다. 그는 또 미드리다테스를 돕도록 톨레미와 수리아의 유력인사들을 설득했으며,[㈜ 위에 언급된 사람은 설혹 같은 지역에 살고는 있을지라도 멘나이우스(Mennaeus)의 아들이 아니라 소헤무스(Sohemus)의 아들이다.(고대.14권. 129) 그와 얌블리쿠스(Jamblichus)에 관하여는 더 이상 알져진 바가 없다.] 그의 고향 레바논과 얌블리쿠스(Jamblichus)의 주민들에게 미드리다테스를 돕도록 설득했다. 그리하여 수리아의 도시들이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안티파테르에 의해 얻게 된 원군에 힘입어 미드리다테스는 펠루시움으로 진격을 감행했다. 펠루시움 사람들이 통과를 거절하자 미드리다테스는 이 도시를 포위하고, 안티파테르가 공격하라고 지적해 준 곳을 정복했다. 안티파테르는 자신이 공격하던 성벽의 일부를 무너뜨리고 맨 먼저 군사와 더불어 그성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4. [안티파테르의 도움으로 펠루시움이 함락됨]



 이렇게 해서 펠루시움이 함락되었다. 그러나 미드리다테스 군대가 진격을 하는 중에 오니아스(Onias)라고 불리는 지역의 애굽계 유대인들이 이들을 제지했다.[㈜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망명객인 오니아스가 지었던 유대의 성전에 관하여는 전쟁.7권. 10 : 2(421) 이하를 보라.] 이에 안티파테르는 그들에게 제지하지 말도록 설득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식량까지 제공해 주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멤피스(Memphis)에 살고 있는 자들조차 싸우려 하지 않고 자진해서 미드리다테스에게 가담했다. 미드리다테스는 델타(Delta) 부근까지 진격하여 유대인의 진영(Jews\’ Camp)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애굽인들과 접전하게 되었다. 미드리다테스가 오른쪽 진영과 더불어 곤경에 빠졌을 때 안티파테르는 방향을 바꾸어서 강줄기의 둑을 따라 미드리다테스에게 접근했다. 이전에 안피파테르는 왼쪽 진영에 남아서 적군들을 물리치는 중이었다. 이렇게 해서 안티파테르는미드리다테스를 구한 다음 미드리다테스를 추격하는 적군을 계속 추격하여 그들의 진영도 장악했다. 반면 안티파테르는 그의 수하병사 80명[㈜ 유대 고대사에는 \”50명.\”] 정도를 잃었을 뿐이었다. 미드리다테스는 적군에게 쫓기는 동안 약 800명을 잃었다. 또한 예기치 않게 구출된 미드리다테스는 가이사에게 안티파테르의 위대한 전공을 크게증거하는 자가 되었다.



 5. 안티파테르에게 부여된 영광



 이러므로 가이사는 안티파테르에게 위험한 공격을 하도록 했다. 물론 가이사는 그에게 대단한 칭찬과 후한 포상을 하겠다는 희망을 주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그의 용감성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몸 전체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가이사는 애굽의 문제들을 해결 한 후 수리아로 돌아와 안티파테르에게 로마 시민권과 세금면제, 그리고 찬사와 더불어 우정의 영예를 하사했다. 안티파테르 덕분에 힐카누스는 가이사에게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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