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권 제 21장 헤롯이 기초부터 세운 (성전과) 도시들에 대하여,또한 그가 건축한 다른 건물들과 그가 외국인들에 나타낸 위엄과 모든 일에 어떻게 행운이 따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제 21 장



헤롯이 기초부터 세운 (성전과) 도시들에 대하여,또한 그가 건축한 다른 건물들과 그가 외국인들에 나타낸 위엄과 모든 일에 어떻게 행운이 따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1. 헤롯의 건축 사업 : 성전 재건축[주전 약20-19년]



 헤롯은 재위 제15년에[㈜ 고대.15권. 11. 1(380)에 따르면 \”제18년\”: 후자가 그일의 정확한 시작 연도인 것 같다(Schurer). 이 일은 주후 약 28년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요 2:20).]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 주위를 성벽으로 둘러쌓았는데 그 대지는 그 전 성전터의 두 배나 되는 면적이었다. 헤롯은 성전 건축 비용으로 엄청난 양의 재정을 지출하였는데 대회랑(大回廊)에 세워진 북쪽의 성전과 성채가 그것을 증명한다. 대회랑은 헤롯이 기초부터 신축한 것이지만 성채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증축한 것이다.[안토니아 요새 건축] 이 성채는 안토니를 기념하기 위해 안토니아(Antinia)라고부른 바로 그 성채를 가리키는데, 다른 궁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왕궁 건축] 그는 또한 상부도시(the upper city)에 두 개의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왕궁을 건축했다. 크기에 있어서는 성전은 비교도 안될 정도이다. 헤롯은 그것을 아주 친한 두 친구의 이름을 본따서 하나는 가이사레움(Caesareum), 또 하나는 아그리피움(Agrippium)이라고 불렀다.



 2. 사마리아에 세바스테를 건축함



 그러나 헤롯은 그들의 이름을 붙인 단지 두 개의 왕궁 건물만으로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려고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전 도시를 할애하려고 했다. 그는 사마리아 지역에 길이 20퍼얼롱 되는 성벽을 매우 아름답게 쌓고 6,000명의 주민을 입주시킨 후 도시 중앙에 가장 좋은 장소를 골라 가이사에게 바치는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였다. 또 신전 주위의 3퍼얼롱 반 넓이의 땅을 성지로 만들고 세바스투스(Sebastus) 혹은 아구스도(Augustus)의 이름을 본떠 세바스테(Sebaste)라고 명명하고, 그 도시의 주민들이 특권을 누리며 살도록 해주었다.



3. 파네이온 (Paneion)의 아구스도 신전



 또한 헤롯은 가이사가 덤으로 준 요단강 근원지 옆 부근에 흰 대리석으로 된 신전을 건축했다. 파네이온(Paneion)이라 불리우는 그 곳은 정상이 한없이 높고 산기슭에는[㈜ 헐몬산, 파네이온, 혹은 파네아스, 후에는 가이사랴 빌립보. 현재는 바니아스(Banias)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는 G.A. Smith의 Hist. Geog. of Holy Land. p.473을 보라.] 캄캄한 동굴이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까마득한 절벽과 흐르지 않은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물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끈을 아무리 늘어뜨려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이다. 외형상으로는 이 동굴의 물이 요단강의 근원이다. 혹자는 실제로도 이 동굴이 요단강의 최초 근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더 상세하게 다뤄보자.[㈜ 전쟁. 3권. 509이하.]



 4. 아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다른 건물들



 헤롯 왕은 여리고(Jercho)에도 역시 건물을 지었다. 그는 키프로스(Cypros)[㈜ 헤롯이 자기 어머니를 기념하려고 세움.(417)] 성채와 예전의 왕궁 사이에 전보다도 더 편리하고 유용한, 여행자들을 위한 건물을 짓고 자신과 지지자들의[㈜ 아구스도와 아그립바] 이름을 본떠 건물 이름을 지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왕국 어디에나 가이사를 기리기 위해 허용되는 모든 장소에 그를 기념하는 건축물을 남겼다. 헤롯은 왕국 곳곳에 가이사를 위한 신전들을 세우는 한편 가이사의 이름을 본뜬 가이사랴(Caes-areas)라는 도시들을 많이 세웠다.



 5. 가이사랴와 그 항구



 헤롯의 관심은 해변에 인접한 \’스트라토의 망대\’ (Strato\’sTower)라고 불리는 폐허의 도시에까지 미쳤다. 그는 그 도시의 자연적인 이점을 살려 흰 돌로만 된 멋진 궁전을 세움으로써그 도시를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헤롯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하는 것은 폐허에 가까운 이 도시를 재건한 것 하나만으로도충분히 알 수 있다. 헤롯이 이 도시를 특별히 재건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도라(Dora)와 욥바(Joppa) 사이의 중간 해변에는 마땅한 항구가 없는데 그 이유는 베니게(Phoenicia)에서애굽으로 항해하기 위해선 폭풍이 불어도 피할 항구가 없었고,폭풍 속을 그대로 항해해야만 했는데 이곳은 남풍이 심하게 부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남풍이 조금만 불어도 세찬 파도가 일었으며, 파도가 바위를 거세게 때리고 물러가면 바다는 온통 요동을 치는 듯했다. 그러나 헤롯은 이렇게 불리한 자연의 조건을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아덴(Athens)에 있는 피레쿰(Pyrecum)보다 더 큰 항구를 건설한 것이다. 또 바닷물을 막아 배가 머물 수 있도록 깊은 정박지를 건설하였다.



6. 헤롯이 건설한 항구 도시의 특징



 헤롯이 비록 공사하려고 했던 지역이 아주 불리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건축물이 거센 파도에도 잘 견딜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또 그 건축물의 외관과 장식은 공사 중 아무 불편이 없었던 것처럼 대단히 화려했다. 헤롯은 앞에서 말한 항구와 비교되는 크기로[㈜ 즉, \”피라이우스(Piraeus)보다 더 큼\” 전쟁.1권.21:5(410)] 깊이 20패덤(fathom, 1패덤은 6feet)이나 되는 물 속을 측량한 후에 그 곳에 큰 돌을 넣어 건물을 세웠다. 이 돌들 중에 큰 것은 길이 50피트(feet, 1피트는 30.5cm) 깊이 9피트, 너비 10피트[㈜ \”적어도 18 피트 정도\” 고대.] 가량인데 더큰 것도 있다. 헤롯은 20패덤을 돌로 채워 항구를 건설한 후에도기존의 바다 위에 건설된 벽을 200피트 너비로 증축하였다. 100피트 가량 되는 벽 앞에는 구조물이 있어 방파제 역할을 했는데 그 이름을 첫번째 방파제 즉, 프로쿠마티아(Procumatia)라고 불렀다. 나머지 공간은 돌로 벽을 둘렀다. 이 성벽 위에는큰 망대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 가장 아름답고 중심되는 망대는 가이사의 사위인 드루수스(Drusus)[㈜ 고대.에 보면 \”젊어서 죽었다.\”는 말이 첨가됨. 네로 클라우디스 드루수스(Nero Claudis Drusus)(기원전 38-9). 후에 아우구스투스의 아내가 되었던 리비아(Livia)의 아들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아버지.]의 이름을 본떠 드루시움(Drusium)이라고 불렀다.



 7. [헤롯은 도시 건축의 모든 명예를 가이사에게 돌리고 그 이름도 가이사랴라 함]



 그외에도 항구에는 아아치형으로 된 수많은 선원들 거주지가[㈜ 혹은 \”둥근 천장이 있는 방들\” \”지하실\”] 있었다. 이 건물 앞 주위에는 넓은 부두가 있어서 배를 대고 물건을 하역하였다. 한편 이 곳은 가장 온순한 북풍이 불기 때문에항만 입구는 북쪽에 건설되었다. 항구 입구 양쪽에는 세 개의 거상(居常)이 기둥 위에 세워져 있었고, 항구 왼쪽의 거상은 견고한 망대 위에 세워졌으며, 오른쪽의 거상은 두 개의 커다란 입석(立石)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 입석은 왼쪽에 있는 망대보다 컸다. 이밖에도 흰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항구와 연결되어 연속적으로 지어져 있었다. 좁은 길이 도시에서 항구 쪽으로 나 있었는데 길이가 모두 똑같았다. 항구 입구 건너편 높은 곳에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자랑하는 가이사를 위한 신전이[㈜ 정확히 말하자면 로마와 아구스도의 신전.] 있었다.이 신전 안에는 올림피안 제우스(Olympian Zeus) 거상에 버금가는 가이사의 거상이 놓여 있었으며 로마에 있는 또 다른 가이사의 거상은 아르고스(Argos)에 있는 헤라(Hera)의 거상과 견주어 보아도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헤롯은 항구는 그 곳의 선원들에게 주고, 건축의 모든 명예는 가이사에게 돌렸다. 그곳 이름도 가이사를 본떠 가이사랴라고 했다.



8. 가이사랴에서 5년마다 대회가 개최됨



 헤롯은 이밖에도 원형경기장, 극장, 시장들을 그 종류에 따라알맞게 건축하였으며, 매 5년마다 열리는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가이사의 대회(Caesar\’s Game)라고 이름을 붙였다. 헤롯은 제192회 올림피아드(Olympiad)에 푸짐한 상품을 내걸어서 우승자는 물론 준우승자와 3위 입상자까지 수상했다. 헤롯은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해변도시인 안테돈(Anthedon)을재건하고 아그리피움(Agrippium)이라고[㈜ 고대.13권. 13:3(357) 혹은 아그립바;이 마을은 가사(Gaza) 인근에 있었음.] 명명하였다. 더우기 그는 친구인 아그립바(Agrippa)에 대한 각별한 우정 때문에 자신이 직접 신전 안에[㈜ 예루살렘에 위치함.] 세운 문 위에 아그립바의 이름을 새겨 넣기까지 하였다.



 9. 안티파트리스, 구브로, 파사엘의 건축



 또한 헤롯은 누구 못지 않게 부친을 사랑한 효자였다. 따라서그는 부친을 위해 기념관을 만들었다. 헤롯은 그의 왕국 중에서하수(河水)와 울창한 나무로 유명한 평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안티파트리스(Antipatris)라고[㈜ 라스 엘 아인(Ras el Ain). 욥바의 북동쪽에서 내륙쪽으로 약 10마일 정도 떨어진 곳,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는 노상에 위치함.] 이름을 붙였다. 그는 또한 여리고 위에 있는 성채에 성벽을 두르고, 견고하고 훌륭한 건축물을 지은 다음 모친에게 바치고 구브로(Cypros)라고 명명하였다. 게다가 헤롯은 예루살렘에 망대를 하나 세워 형 파사엘(Pha-sael)에게 바치고, 그 이름 또한 파사엘 망대라고 하였다. 이 망대의 구조와 크기와 웅장함에 관해서는 나중에 묘사하기로 하겠다.[㈜ 전쟁. 5권. 4;3.(166-169).] 헤롯은 또한 여리고에서 북쪽으로 난 계곡에 도시 하나를 건설하고 파사엘리스(Phasaelis)라고 명명했다.



 10. 헤로디움이라 불리는 2개의 건물



 헤롯은 가족들과 친구들의 이름을 영원히 남도록 한 것처럼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헤롯은 아라비아(Arabia)쪽의 산 위에 요새를 하나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대로 헤로디움(Herodium)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에서 60퍼얼롱 떨어진 곳에 있는 통통한 언덕에도[㈜ 문자 그대로 \”젖가슴 모습.\”] 같은 이름으로 불렀는데 헤롯은 이 언덕을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해서 아름답게 치장했다.[㈜ 파르티아와 유대 연합군에 대한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짐. 전쟁. 1권. 13:8(265). 베들레헴에서 남동쪽으로 약4마일 떨어진 다른 헤로디움의 터는 확인되지 않음.] 또 언덕의 꼭대기 주위를 성벽으로 둘러싸는 한편 나머지 공간에는 화려한 왕궁들을 지었다. 실내 장식만 화려하게 꾸민 것이 아니라 외부의 벽과 간막이와 지붕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치장하였다. 이밖에도 헤롯은 엄청난 비용을들여 먼 거리에서 많은 양의 물을 끌어들이는 한편 높은 언덕을흰 대리석으로 된 200개의 계단으로 놓았다. 그 언덕 자체가 건물로 꽉차게 되었고, 언덕의 기슭에 가구들과 여러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왕궁들도 지었다. 이 요새에는 없는 것이 없어 하나의 도시처럼 보였으나 터가 작은 관계로 왕궁으로 밖에 볼 수 없다.



11. 헤롯이 이방 도시에 하사품으로 많은 건물을 지어줌



 헤롯은 결코 적지 않은 이방 도시에도 건축물들을 지어줌으로써 그의 관대함을 크게 과시했다. 트리폴리스(Tripplis), 다메섹(Damascus), 톨레마이스(Ptolemais)에 왕궁을 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비블루스(Byblus)에 성벽을 건축해 주었다. 그는 또베리투스(Betytus)와 두로(Tyre)에도 큰 집들, 회랑, 신전, 시장을 지었을 뿐 아니라 시돈(Sidon), 다메섹에도 극장을 세워 주었다. 헤롯은 또한 해변에 사는 라오디게아인(Laodiceans)을위해 수로를 건설했고, 아스글론(Ascalon)의 주민들을 위해서는 목욕탕과 값비싼 수원지와 궁정 주위에 회랑을 지어 주었다.이 건축물들은 모두가 그 크기와 건축술에서 훌륭한 것이었다.헤롯은 또 몇 민족에게는 숲과 목초지를 주었다. 그밖에도 헤롯에게서 땅을 하사받은 도시는 한 둘이 아니었는데 헤롯은 그 땅이 마치 자신의 왕국에 속한 도시처럼 하사해 준 것이다. 그는또한 코스(Cos)처럼 다른 도시들에도 국가 수익으로 경기장 관리인에게[㈜ 경기장을 지키는 자. 그는 축제 경기의 운영과 운동 지도자들의 관리와 급여를 책임짐.] 연간 관리비에 해당하는 공금을 하사했으며 이 영광스러운 자리가 없어지지 않고 확실히 보장되게 해주었다.

 그는 또 원하는 자들 모두에게[㈜ 혹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식량을 주었고, 로데스(Rhodes) 주민들에게 배들을 건조할 비용도 주었다.[㈜ 로데스의 열악한 환경에서의 선박 건조에 관하여는 전쟁. 1권. 14:3(280)을 참조하라.] 또한 그들의 피디안 신전(Pythian temple)이 불에 타 없어지자 자신의부담으로 전보다 더 좋게 재건했다.[㈜ 참).고대.16권. 5:3(147).] 참으로 헤롯이 루기아인(Lycians)과 사모스인(Samos)에게 베푼 친절과 전 이오니아인(Ionia)에게 보인 호의와 또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베푼 것에 대해서는 다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또 헤롯의 하사품이 아덴인(Athenians)과 라케다이모니아인(Lacedaemonians)과 무시아(Mysia)에 있는 페르가무스(Pergamus) 주민들까지도 똑같이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또 수리아의 안디옥에 있는 광장에도 약 20퍼얼롱을 대리석으로 깔아주었다. 전에는 이곳의거리가 불결하고 더러워서 사람들이 다닐 수도 없을 정도였다.헤롯은 그 거리를 흰 대리석으로 장식했을 뿐 아니라 그 거리를 따라 회랑도 건축해 주었다.



12. 올림픽 경기에 헤롯이 기부금을 내다.



 지금까지는 헤롯이 특정한 장소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베푼 호의만을 기록했지만, 그가 엘리스인(Elis)에게 보인 친절은 모든헬라인 뿐만 아니라 올림픽 경기의 영광이 미치는 전 세계인들에게까지도 길이 기억될 그의 업적 중의 하나였다. 헤롯은 고대 헬라의 유일한 전통인 올림픽 경기가 비용의 부족으로 개최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퍽 서운해 하였다. 그래서 그는 5년마다 경기가 열릴 때면 로마로 항해하여[㈜ 그의 2차 로마 방문(주전 12년), 혹은 3차 방문(주전 약8년)(Schurer).] 투사로 그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으며, 그 경기가 영원히 계속될 수 있도록 재원(財源)을제공했다. 헤롯의 투사로서의 명성은 후대에도 결코 잊혀질 수없을 만큼 대단했다. 한편 그밖에도 헤롯이 파셀리스(Pha-selis)[㈜ 루기아(Lycia)의 해안 마을.]와 발라네아(Balanea)와[㈜ 구브로의 맞은 편, 라오디게아와 아라두스 사이에 위치한 수리아 해안에 위치함.] 길리기아(Cilicia)의 작은도시들이 진 빚 혹은 조세를 감면해 준 것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헤롯은 많은 호의를 지배자들보다 주민들에게 더 많이 베풀었고, 또 무슨 일이든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 시달려야만 했다.



 13. 헤롯의 용맹성[㈜ 이 문단은 고대.에 병행구절이 없다.]



 헤롯은 타고난 재능에 걸맞게 신체도 강건하였다. 그는 대단히 훌륭한 사냥꾼으로서 말타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는데 어느날엔가는 40마리의 짐승을 잡은 적도 있었다. 그 지방은 곰 뿐만아니라 숫사슴과 야생 나귀들이 많은 대단히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는 또 어느 누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전사(awarrior)였는데, 그가 힘있게 창을 던져 과녁을 맞추는 모습을본 사람은 이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훈련하는 광경을 본 사람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롯은 정신력 뿐 아니라 체력도 탁월한데다가 운까지 따랐으므로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거의 없었다.[㈜ 고대. 17권. 8:1(191) 이하에 나오는 평가를 참조하고 비교해 보라.] 언젠가 그가 한번 패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그의 잘못이 아닌 그의 부하들의 경솔함과 배신때문에 전쟁에 패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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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권 제 21장 헤롯이 기초부터 세운 (성전과) 도시들에 대하여,또한 그가 건축한 다른 건물들과 그가 외국인들에 나타낸 위엄과 모든 일에 어떻게 행운이 따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21 장


    헤롯이 기초부터 세운 (성전과) 도시들에 대하여,또한 그가 건축한 다른 건물들과 그가 외국인들에 나타낸 위엄과 모든 일에 어떻게 행운이 따르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1. 헤롯의 건축 사업 : 성전 재건축[주전 약20-19년]


     헤롯은 재위 제15년에[㈜ 고대.15권. 11. 1(380)에 따르면 “제18년”: 후자가 그일의 정확한 시작 연도인 것 같다(Schurer). 이 일은 주후 약 28년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요 2:20).]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 주위를 성벽으로 둘러쌓았는데 그 대지는 그 전 성전터의 두 배나 되는 면적이었다. 헤롯은 성전 건축 비용으로 엄청난 양의 재정을 지출하였는데 대회랑(大回廊)에 세워진 북쪽의 성전과 성채가 그것을 증명한다. 대회랑은 헤롯이 기초부터 신축한 것이지만 성채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증축한 것이다.[안토니아 요새 건축] 이 성채는 안토니를 기념하기 위해 안토니아(Antinia)라고부른 바로 그 성채를 가리키는데, 다른 궁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왕궁 건축] 그는 또한 상부도시(the upper city)에 두 개의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왕궁을 건축했다. 크기에 있어서는 성전은 비교도 안될 정도이다. 헤롯은 그것을 아주 친한 두 친구의 이름을 본따서 하나는 가이사레움(Caesareum), 또 하나는 아그리피움(Agrippium)이라고 불렀다.


     2. 사마리아에 세바스테를 건축함


     그러나 헤롯은 그들의 이름을 붙인 단지 두 개의 왕궁 건물만으로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려고 하지 않고 가능한 한 전 도시를 할애하려고 했다. 그는 사마리아 지역에 길이 20퍼얼롱 되는 성벽을 매우 아름답게 쌓고 6,000명의 주민을 입주시킨 후 도시 중앙에 가장 좋은 장소를 골라 가이사에게 바치는 거대한 신전을 건축하였다. 또 신전 주위의 3퍼얼롱 반 넓이의 땅을 성지로 만들고 세바스투스(Sebastus) 혹은 아구스도(Augustus)의 이름을 본떠 세바스테(Sebaste)라고 명명하고, 그 도시의 주민들이 특권을 누리며 살도록 해주었다.


    3. 파네이온 (Paneion)의 아구스도 신전


     또한 헤롯은 가이사가 덤으로 준 요단강 근원지 옆 부근에 흰 대리석으로 된 신전을 건축했다. 파네이온(Paneion)이라 불리우는 그 곳은 정상이 한없이 높고 산기슭에는[㈜ 헐몬산, 파네이온, 혹은 파네아스, 후에는 가이사랴 빌립보. 현재는 바니아스(Banias)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는 G.A. Smith의 Hist. Geog. of Holy Land. p.473을 보라.] 캄캄한 동굴이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까마득한 절벽과 흐르지 않은 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물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끈을 아무리 늘어뜨려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이다. 외형상으로는 이 동굴의 물이 요단강의 근원이다. 혹자는 실제로도 이 동굴이 요단강의 최초 근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더 상세하게 다뤄보자.[㈜ 전쟁. 3권. 509이하.]


     4. 아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다른 건물들


     헤롯 왕은 여리고(Jercho)에도 역시 건물을 지었다. 그는 키프로스(Cypros)[㈜ 헤롯이 자기 어머니를 기념하려고 세움.(417)] 성채와 예전의 왕궁 사이에 전보다도 더 편리하고 유용한, 여행자들을 위한 건물을 짓고 자신과 지지자들의[㈜ 아구스도와 아그립바] 이름을 본떠 건물 이름을 지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의왕국 어디에나 가이사를 기리기 위해 허용되는 모든 장소에 그를 기념하는 건축물을 남겼다. 헤롯은 왕국 곳곳에 가이사를 위한 신전들을 세우는 한편 가이사의 이름을 본뜬 가이사랴(Caes-areas)라는 도시들을 많이 세웠다.


     5. 가이사랴와 그 항구


     헤롯의 관심은 해변에 인접한 ‘스트라토의 망대’ (Strato’sTower)라고 불리는 폐허의 도시에까지 미쳤다. 그는 그 도시의 자연적인 이점을 살려 흰 돌로만 된 멋진 궁전을 세움으로써그 도시를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헤롯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하는 것은 폐허에 가까운 이 도시를 재건한 것 하나만으로도충분히 알 수 있다. 헤롯이 이 도시를 특별히 재건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도라(Dora)와 욥바(Joppa) 사이의 중간 해변에는 마땅한 항구가 없는데 그 이유는 베니게(Phoenicia)에서애굽으로 항해하기 위해선 폭풍이 불어도 피할 항구가 없었고,폭풍 속을 그대로 항해해야만 했는데 이곳은 남풍이 심하게 부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남풍이 조금만 불어도 세찬 파도가 일었으며, 파도가 바위를 거세게 때리고 물러가면 바다는 온통 요동을 치는 듯했다. 그러나 헤롯은 이렇게 불리한 자연의 조건을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아덴(Athens)에 있는 피레쿰(Pyrecum)보다 더 큰 항구를 건설한 것이다. 또 바닷물을 막아 배가 머물 수 있도록 깊은 정박지를 건설하였다.


    6. 헤롯이 건설한 항구 도시의 특징


     헤롯이 비록 공사하려고 했던 지역이 아주 불리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건축물이 거센 파도에도 잘 견딜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또 그 건축물의 외관과 장식은 공사 중 아무 불편이 없었던 것처럼 대단히 화려했다. 헤롯은 앞에서 말한 항구와 비교되는 크기로[㈜ 즉, “피라이우스(Piraeus)보다 더 큼” 전쟁.1권.21:5(410)] 깊이 20패덤(fathom, 1패덤은 6feet)이나 되는 물 속을 측량한 후에 그 곳에 큰 돌을 넣어 건물을 세웠다. 이 돌들 중에 큰 것은 길이 50피트(feet, 1피트는 30.5cm) 깊이 9피트, 너비 10피트[㈜ “적어도 18 피트 정도” 고대.] 가량인데 더큰 것도 있다. 헤롯은 20패덤을 돌로 채워 항구를 건설한 후에도기존의 바다 위에 건설된 벽을 200피트 너비로 증축하였다. 100피트 가량 되는 벽 앞에는 구조물이 있어 방파제 역할을 했는데 그 이름을 첫번째 방파제 즉, 프로쿠마티아(Procumatia)라고 불렀다. 나머지 공간은 돌로 벽을 둘렀다. 이 성벽 위에는큰 망대들이 세워졌는데 그 중에 가장 아름답고 중심되는 망대는 가이사의 사위인 드루수스(Drusus)[㈜ 고대.에 보면 “젊어서 죽었다.”는 말이 첨가됨. 네로 클라우디스 드루수스(Nero Claudis Drusus)(기원전 38-9). 후에 아우구스투스의 아내가 되었던 리비아(Livia)의 아들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아버지.]의 이름을 본떠 드루시움(Drusium)이라고 불렀다.


     7. [헤롯은 도시 건축의 모든 명예를 가이사에게 돌리고 그 이름도 가이사랴라 함]


     그외에도 항구에는 아아치형으로 된 수많은 선원들 거주지가[㈜ 혹은 “둥근 천장이 있는 방들” “지하실”] 있었다. 이 건물 앞 주위에는 넓은 부두가 있어서 배를 대고 물건을 하역하였다. 한편 이 곳은 가장 온순한 북풍이 불기 때문에항만 입구는 북쪽에 건설되었다. 항구 입구 양쪽에는 세 개의 거상(居常)이 기둥 위에 세워져 있었고, 항구 왼쪽의 거상은 견고한 망대 위에 세워졌으며, 오른쪽의 거상은 두 개의 커다란 입석(立石)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 입석은 왼쪽에 있는 망대보다 컸다. 이밖에도 흰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항구와 연결되어 연속적으로 지어져 있었다. 좁은 길이 도시에서 항구 쪽으로 나 있었는데 길이가 모두 똑같았다. 항구 입구 건너편 높은 곳에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자랑하는 가이사를 위한 신전이[㈜ 정확히 말하자면 로마와 아구스도의 신전.] 있었다.이 신전 안에는 올림피안 제우스(Olympian Zeus) 거상에 버금가는 가이사의 거상이 놓여 있었으며 로마에 있는 또 다른 가이사의 거상은 아르고스(Argos)에 있는 헤라(Hera)의 거상과 견주어 보아도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헤롯은 항구는 그 곳의 선원들에게 주고, 건축의 모든 명예는 가이사에게 돌렸다. 그곳 이름도 가이사를 본떠 가이사랴라고 했다.


    8. 가이사랴에서 5년마다 대회가 개최됨


     헤롯은 이밖에도 원형경기장, 극장, 시장들을 그 종류에 따라알맞게 건축하였으며, 매 5년마다 열리는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가이사의 대회(Caesar’s Game)라고 이름을 붙였다. 헤롯은 제192회 올림피아드(Olympiad)에 푸짐한 상품을 내걸어서 우승자는 물론 준우승자와 3위 입상자까지 수상했다. 헤롯은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해변도시인 안테돈(Anthedon)을재건하고 아그리피움(Agrippium)이라고[㈜ 고대.13권. 13:3(357) 혹은 아그립바;이 마을은 가사(Gaza) 인근에 있었음.] 명명하였다. 더우기 그는 친구인 아그립바(Agrippa)에 대한 각별한 우정 때문에 자신이 직접 신전 안에[㈜ 예루살렘에 위치함.] 세운 문 위에 아그립바의 이름을 새겨 넣기까지 하였다.


     9. 안티파트리스, 구브로, 파사엘의 건축


     또한 헤롯은 누구 못지 않게 부친을 사랑한 효자였다. 따라서그는 부친을 위해 기념관을 만들었다. 헤롯은 그의 왕국 중에서하수(河水)와 울창한 나무로 유명한 평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안티파트리스(Antipatris)라고[㈜ 라스 엘 아인(Ras el Ain). 욥바의 북동쪽에서 내륙쪽으로 약 10마일 정도 떨어진 곳,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는 노상에 위치함.] 이름을 붙였다. 그는 또한 여리고 위에 있는 성채에 성벽을 두르고, 견고하고 훌륭한 건축물을 지은 다음 모친에게 바치고 구브로(Cypros)라고 명명하였다. 게다가 헤롯은 예루살렘에 망대를 하나 세워 형 파사엘(Pha-sael)에게 바치고, 그 이름 또한 파사엘 망대라고 하였다. 이 망대의 구조와 크기와 웅장함에 관해서는 나중에 묘사하기로 하겠다.[㈜ 전쟁. 5권. 4;3.(166-169).] 헤롯은 또한 여리고에서 북쪽으로 난 계곡에 도시 하나를 건설하고 파사엘리스(Phasaelis)라고 명명했다.


     10. 헤로디움이라 불리는 2개의 건물


     헤롯은 가족들과 친구들의 이름을 영원히 남도록 한 것처럼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 헤롯은 아라비아(Arabia)쪽의 산 위에 요새를 하나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대로 헤로디움(Herodium)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에서 60퍼얼롱 떨어진 곳에 있는 통통한 언덕에도[㈜ 문자 그대로 “젖가슴 모습.”] 같은 이름으로 불렀는데 헤롯은 이 언덕을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해서 아름답게 치장했다.[㈜ 파르티아와 유대 연합군에 대한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짐. 전쟁. 1권. 13:8(265). 베들레헴에서 남동쪽으로 약4마일 떨어진 다른 헤로디움의 터는 확인되지 않음.] 또 언덕의 꼭대기 주위를 성벽으로 둘러싸는 한편 나머지 공간에는 화려한 왕궁들을 지었다. 실내 장식만 화려하게 꾸민 것이 아니라 외부의 벽과 간막이와 지붕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치장하였다. 이밖에도 헤롯은 엄청난 비용을들여 먼 거리에서 많은 양의 물을 끌어들이는 한편 높은 언덕을흰 대리석으로 된 200개의 계단으로 놓았다. 그 언덕 자체가 건물로 꽉차게 되었고, 언덕의 기슭에 가구들과 여러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왕궁들도 지었다. 이 요새에는 없는 것이 없어 하나의 도시처럼 보였으나 터가 작은 관계로 왕궁으로 밖에 볼 수 없다.


    11. 헤롯이 이방 도시에 하사품으로 많은 건물을 지어줌


     헤롯은 결코 적지 않은 이방 도시에도 건축물들을 지어줌으로써 그의 관대함을 크게 과시했다. 트리폴리스(Tripplis), 다메섹(Damascus), 톨레마이스(Ptolemais)에 왕궁을 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비블루스(Byblus)에 성벽을 건축해 주었다. 그는 또베리투스(Betytus)와 두로(Tyre)에도 큰 집들, 회랑, 신전, 시장을 지었을 뿐 아니라 시돈(Sidon), 다메섹에도 극장을 세워 주었다. 헤롯은 또한 해변에 사는 라오디게아인(Laodiceans)을위해 수로를 건설했고, 아스글론(Ascalon)의 주민들을 위해서는 목욕탕과 값비싼 수원지와 궁정 주위에 회랑을 지어 주었다.이 건축물들은 모두가 그 크기와 건축술에서 훌륭한 것이었다.헤롯은 또 몇 민족에게는 숲과 목초지를 주었다. 그밖에도 헤롯에게서 땅을 하사받은 도시는 한 둘이 아니었는데 헤롯은 그 땅이 마치 자신의 왕국에 속한 도시처럼 하사해 준 것이다. 그는또한 코스(Cos)처럼 다른 도시들에도 국가 수익으로 경기장 관리인에게[㈜ 경기장을 지키는 자. 그는 축제 경기의 운영과 운동 지도자들의 관리와 급여를 책임짐.] 연간 관리비에 해당하는 공금을 하사했으며 이 영광스러운 자리가 없어지지 않고 확실히 보장되게 해주었다.

     그는 또 원하는 자들 모두에게[㈜ 혹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식량을 주었고, 로데스(Rhodes) 주민들에게 배들을 건조할 비용도 주었다.[㈜ 로데스의 열악한 환경에서의 선박 건조에 관하여는 전쟁. 1권. 14:3(280)을 참조하라.] 또한 그들의 피디안 신전(Pythian temple)이 불에 타 없어지자 자신의부담으로 전보다 더 좋게 재건했다.[㈜ 참).고대.16권. 5:3(147).] 참으로 헤롯이 루기아인(Lycians)과 사모스인(Samos)에게 베푼 친절과 전 이오니아인(Ionia)에게 보인 호의와 또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베푼 것에 대해서는 다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또 헤롯의 하사품이 아덴인(Athenians)과 라케다이모니아인(Lacedaemonians)과 무시아(Mysia)에 있는 페르가무스(Pergamus) 주민들까지도 똑같이 친절과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또 수리아의 안디옥에 있는 광장에도 약 20퍼얼롱을 대리석으로 깔아주었다. 전에는 이곳의거리가 불결하고 더러워서 사람들이 다닐 수도 없을 정도였다.헤롯은 그 거리를 흰 대리석으로 장식했을 뿐 아니라 그 거리를 따라 회랑도 건축해 주었다.


    12. 올림픽 경기에 헤롯이 기부금을 내다.


     지금까지는 헤롯이 특정한 장소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베푼 호의만을 기록했지만, 그가 엘리스인(Elis)에게 보인 친절은 모든헬라인 뿐만 아니라 올림픽 경기의 영광이 미치는 전 세계인들에게까지도 길이 기억될 그의 업적 중의 하나였다. 헤롯은 고대 헬라의 유일한 전통인 올림픽 경기가 비용의 부족으로 개최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퍽 서운해 하였다. 그래서 그는 5년마다 경기가 열릴 때면 로마로 항해하여[㈜ 그의 2차 로마 방문(주전 12년), 혹은 3차 방문(주전 약8년)(Schurer).] 투사로 그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으며, 그 경기가 영원히 계속될 수 있도록 재원(財源)을제공했다. 헤롯의 투사로서의 명성은 후대에도 결코 잊혀질 수없을 만큼 대단했다. 한편 그밖에도 헤롯이 파셀리스(Pha-selis)[㈜ 루기아(Lycia)의 해안 마을.]와 발라네아(Balanea)와[㈜ 구브로의 맞은 편, 라오디게아와 아라두스 사이에 위치한 수리아 해안에 위치함.] 길리기아(Cilicia)의 작은도시들이 진 빚 혹은 조세를 감면해 준 것은 부지기수로 많았다. 헤롯은 많은 호의를 지배자들보다 주민들에게 더 많이 베풀었고, 또 무슨 일이든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성공에 대한 집착으로 시달려야만 했다.


     13. 헤롯의 용맹성[㈜ 이 문단은 고대.에 병행구절이 없다.]


     헤롯은 타고난 재능에 걸맞게 신체도 강건하였다. 그는 대단히 훌륭한 사냥꾼으로서 말타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는데 어느날엔가는 40마리의 짐승을 잡은 적도 있었다. 그 지방은 곰 뿐만아니라 숫사슴과 야생 나귀들이 많은 대단히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는 또 어느 누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전사(awarrior)였는데, 그가 힘있게 창을 던져 과녁을 맞추는 모습을본 사람은 이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훈련하는 광경을 본 사람은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롯은 정신력 뿐 아니라 체력도 탁월한데다가 운까지 따랐으므로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거의 없었다.[㈜ 고대. 17권. 8:1(191) 이하에 나오는 평가를 참조하고 비교해 보라.] 언젠가 그가 한번 패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그의 잘못이 아닌 그의 부하들의 경솔함과 배신때문에 전쟁에 패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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