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17장 유대와 로마가 어떻게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마나헴에 대하여

 


제 17 장



유대와 로마가 어떻게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마나헴에 대하여



1. [아그립바 왕의 충고에 대한 백성들의 비난]



 사람들은 이 충고를 듣고 왕과 버니게(Bernice)와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서 회랑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통치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각기 마을로 흩어져서 세금을 거뒀는데 곧 40달란트가모아졌다. 이것은 세금 총액에 모자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그립바 왕은 위협적이던 전쟁을 곧 멈출 수 있었다. 더 나아가아그립바는 가이사가 그를 계승할 사람을 보내기까지 백성들이 플로루스에게 복종하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백성들의 항의가 더욱 거세어져 왕에게 비난을 퍼붓고 예루살렘밖으로 그를 추방했다. 과격한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까지도 했다. 그래서 왕은 선동가들의 폭력이 제지될 수 없음을 알았고, 그가 받은 모욕에 매우 화가 나서 유대인 지도자들과 유력인사들을 가이사랴에 있는 플로루스에게 보냈다. 그들 중에몇 명이 부과된 조공물을 수집하는 자로 임명되도록 하기[㈜ 조공물을 반대했으나 이미 예루살렘과 인근 지역에서 조공물이 수집되었다. 전쟁. 2권. 17:1(405).] 위해서였다. 그 다음에 그는 그의 통치구역으로 물러났다.



 2. 유대 반란군이 마사다를 점령함[주후 66년]



 이때 전쟁을 일으키기 위하여 백성들을 선동하는 자들이 마사다(Masada)라고[㈜ 사해 근처이며 서해안 중하부에 있는 지역으로 지금의 Sebbeh.] 불리는 요새를 습격했다. 그들은 요새를 취하고 거기 있던 로마인들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의 한패인 사람들에게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엘르아살의 설득으로 가이사를 위한 희생 제사가 거절 됨] 이와 동시에 대제사장 아나니아(Ananias)의 아들이며, 아주대담한 젊은이였던 엘르아살(Eleazar)은, 그 당시 성전의 우두머리였는데[㈜ 즉 \”성전 수비대장\”(행 4:1등) 혹은 서열상 대제사장 다음의 관리인 Sagan.] 제사직을 수행하는 제사장들이 이방인을 위한 어떤 예물이나 희생 제물이라도 받지 못하게 설득하였다. 이것은 로마인들과 실제적으로 싸움이 시작되게 한 행위였다. 왜냐하면가이사를 위한 희생 제사가 거절된 것이었다.[㈜ 아구스도가 제정하여 매일 두 번 봉헌되는 이러한 희생제물(전쟁.2권.10:4(197))은 두 마리의 어린 양과 한 마리의 황소이다(Philo, \’Leg.ag/ Caium\’, 157, 317 Cohn). Philo에 따르면 경비는 황제에 의해 부담되었고,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 국민에 의해 부담된(아피.2권.6(77))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때 많은 대제사장들과 유력인사들이 제사장들을 찾아와서 희생 제사를 빼놓지 말라고 하면서, 제사장들이 그들의 왕들을 위해 제사드려 주는 것이 관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설복되지 않았다. 제사장들이 이처럼 확신있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변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을 전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사장들은 성전의 책임자였던 엘르아살을 가장 의지했다.



 3. 유대인 지도자들의 충고



 이에 주요 인사들은 대제사장들과 지도적인 바리새인들과도 함께 모여 의논하였다. 이는 그들 모두 위기의 상태이고 구제불능의 재난 상태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협의하게 된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대화로써 선동자들을 설득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해뜨는 쪽을 향하여 있는 내부성전(제사장의 뜰)의문인 동문(銅門):bronze gate)[㈜ 고린도의 청동문(전쟁.5권. 5:3(201))은 아마도 여인들의 뜰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며, 행 3:2의 미문(美門)과 미쉬나(Mishna)의 나카노르(Nicanor)문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앞에 백성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에 백성들이 반역을 꾀하는 것과 나라에큰 전쟁을 초래하려는 것에 대해 큰 분노를 표시했다. 또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제사장들의 주장이 모순된다고 말했다. \”우리조상들이 이방인들의 기증품들로써 성전의 대부분을 장식해 왔고 이방들이 우리에게 기증해온 것들을 항상 받아왔습니다. 더우기 어떤 개인의 희생 제물을 거절한 적이 없었으며 그 기증물들은 성전 도처에 놓여 있어 아직도 볼 수 있고, 오랜 동안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로마인들을 들쑤셔 전쟁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에 이상한 혁신적인 것들을 끌어들여 도시를위험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유대인들이 희생 제사와 예배의 권리를 이방인에게는 제한하고 우리 민족에게만 국한시킨다면, 도시가 불경건하다는 비난을 공공연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법이 어떠한 개인에게만 적용되어진다면 그 사람은 이런 비인간적 처사에 매우 분노할 것입니다. 우리 유대인들이 가이사에 존경은 표하지 않고, 봉헌물조차 거절하다간 우리 자신들이 드리는 희생 제사도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빨리 지혜로워져서 전처럼 희생 제사를 복구시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모욕당해 온 로마인들의 귀에 이 보고가 들어 가기 전에 고치지 않는다면 예루살렘은 그 수위성(首位(性)을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4. 그들이 아그립바로부터 지원받음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유대 풍습에 익숙한 제사장들을 내세웠다. 제사장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이방인들로부터 희생 제물을 받아 왔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 사람의 변혁자도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도 예배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전쟁 발발을 준비하는 일만 하였다. 그래서 유력인사들은 그 선동자들을 복종시키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위협은 맨처음 자신들에게 임할 것이므로 자구책으로 사신들을 보냈다.

 플로루스에게는 아나니아(Ananias)의 아들 시몬을 대표로하고 아그립바 왕에게는 왕의 친척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울(Saul), 안티파스(Antipas), 코스토바르(Costobar)를[㈜ 사울(Saul)과 코스토바르(Costobar)는 케스티우스(Cestius)의 패배후 예루살렘으로부터 시기 적절하게 탈출을 한 형제들이었다 : 남아있던 안티파스(Antipas)는 폭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전쟁.2권. 20:1(556)이하. 4권. 3:4(140).] 보냈다. 사신들은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끌고와서 진압하기 너무 어려워지기 전에 반역을 종식시켜 주기를 원했다. 이 엄청난 소식은 플로루스에게는 복음이었다. 전쟁이 터지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으므로 그는 대사들에게 전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반역이 일고 있는 것에 대해서나 전쟁으로 비화되는 것에 대해서나 똑같이 걱정했다. 그는 로마인들이 유대인을 보존해 주기를 간청하고 유대인들에게는 성전과 수도예루살렘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자제하라고 일렀다.

 그는 나라가 소란해지면 그 자신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리라는것을 알고 백성들을 돕기 위해 아우라니티스(Auranitis), 바타나이아(Bataanaea), 드라고닛(Trachonitis)에서 뽑은 기병 2,000명을 보냈는데 기병장군으로 다리우스(Darius)와 야키무스(Jachimus)의 아들 빌립(Philip)을[㈜ 아그립바Ⅱ세(AgrippaⅡ)의 장관인 빌립(Philip)의 계속되는 모험은 자서전(46.등)에서 장황하게 이야기 되고 있다. 그의 부친 야키무스(Jacimus)는 아그립바(아마도 Ⅰ세일 것이다)가 통치할 때 높은 직위(어떤 본문에 따르면 \”분봉왕\”(tetrarch)으로 나옴)를 차지했다 : 그의 조부인 자마리스(Zamaris)는 대헤롯에 의해 Batanaea에서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의 식민지를 맡게 되었다(고대.17권. 2:1-3(23-29)).] 장군으로 파견했다.



 5. 로마군 선발대와 반란자들 사이의 싸움



 로마의 지원군에 의해 용기를 얻은 제사장들과 함께 이 유력인사들과 평화를 원하던 많은 백성들은 상부(시온산)를점령했다. 선동자들은 도시의 하부와 성전을 장악했다. 그래서그들은 돌과 창을 끊임없이 던졌다. 어떤 때는 무리를 지어 몰려나와 접전(接戰)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선동자들은 대담함에서 우세하고 왕의 군사들은 전술에서 우세하였다. 왕의 군사들은 성전을 탈환하고 성역을 오염시키는 자들을 추방하려고 했다. 반면 엘르아살과 반역자들은 이미 점령한 곳 이외에 상부 도시도 빼앗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양편 모두에 끊임없는 살육이 있었으나 어느 편도 그들이 차지했던 곳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6. 시카리파(Sicarii)가 반란자들과 합세함



 제8일은 나무를 가져오는 축제일이었는데, 곧 불이 꺼지지 않고 항상 타기 위해 연료가 절대 부족해지지 않도록 모두가 제단에 쓸 나무를 가져오는 풍습이 있었다.[㈜ 참). 레위6:12이하. 미쉬나, \’Taanith\’ iv:5에 따르면 목재는 그해 아홉번의 분리된 날에 각각의 가족들에 의해 운반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날은 압(Ab)(7-8월)월 15일이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전쟁.2권. 17:7(430)을 보라) 그 전날인 압월 14일에 축제를 한 것으로 보았다.] 그 날이 되자 선동자들은 그 반대파들이 이 종교의식을 지내는 것을 금했다. 선동자들은 연약한 백성들 속에 몰려있는 많은 시키리파(Sicarii, 가슴속에 단검을 넣어 갖고 다니므로 붙은 강도들의 이름)가 합세하여 더욱 대담해지고 더 강력해져서 그 수와 대담함에 있어 왕의군사들을 능가하였다.



 [상부 도시가 포위되고 문서 보관소가 불탐][주후 66년 8 월]

 그래서 왕의 휘하 부대는 강제적으로 상부 도시에서 쫓겨나게되었다. 선동자들은 대제사장 아나니아(Ananias)의 집과 아그립바와 버니게의 왕궁에[㈜ 아마도 아그립바Ⅱ세가 하스모네안(Hasmonaeans)의 옛 왕궁을 증축했을 것이다. 참).고대.20권. 8:11(189)이하.] 불을 놓고, 또 문서가 보관된 궁에[㈜ 기록 보관소 건물은 로마군에 의해 소실되었다.(전쟁.6권. 6;3(354)):Akra(혹은 다윗의 옛 도시로 여겨지는 성)와 (산헤드린의) 회의실과 인접한 것으로 전해짐.] 불을 놓아 채권자들의 계약서를 급히 태워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하여 자신들의 채무를 해결하고 채무자였던 많은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보다 더 안전하게 그들의 반란에 합세하게 하는 데에 더 효과가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그 보관소를 지키는 자는 도망가고 반란자들은 그 건물에 불을 놓았다. 예루살렘의 주요 건물들을 불태우고적들을 공격했다.

 그때 제사장과 같은 유력인사들은 지하통로에[㈜ 혹은 \”하수도\”] 가서 몸을숨겼다. 반면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아그립바 왕에게 보냈던 사절들은 왕의 군사들과 함께 상부 궁으로[㈜ 대헤롯의 궁정이 도시 상부의 고지대에 있었던 것으로 전쟁. 5권. 4:4 (176) 이하에서 묘사됨.] 피하고 곧 문을 닫았다. 반란자들은 불지른 것들에 만족하고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7. 반란자들이 안토니아 요새를 장악하고 헤롯궁에다 로마군과 왕에게 충성하는 시민들을 가두다



 그러나 그 다음날 루스 (Lous)달에[㈜ 히브리의 압(Ab)월과 현재 마게도냐력의 8월달은 대체로 동일하다.] 안토니아(Antonia) 요새를 공격했다. 이틀 동안 그 안에 있0던 수비대를 포위 공격하여 경비병을 죽인 후 요새에 불을 질렀다. 그후 선동자들은 왕의 군인들이 위축되어 도망한 궁으로 진격하고 네 부분으로 갈라져서 성벽을 공격했다.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숫자로 공격을 받기 때문에 아무도 공격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흉벽과 망대에 몸을 숨기고 공격자들에게 각종 무기들을 쏘아대고 휘둘러댔다. 그래서 공격하던 많은 사람들이 벽 아래로 떨어졌다. 밤낮으로 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선동자들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식량 부족으로 곤란해졌으리라고 생각하는 반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선동자들이 진저리나는 공격으로 지쳐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8. 므나헴이 반란군의 지휘권을 받아 공격을 지시하다



 퀴리니우스(Quirinius)가 다스릴 때 유대인들에게 이미 하느님이 계신데도[㈜ 전쟁.2권. 8:1(118).] 로마인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유대인을 꾸짖었던 무서운 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갈릴리인 유다(Judas)의 아들 므나헴(Menahem)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므나헴은 주요인사 몇을 데리고 마사다로 가서[㈜ 전쟁.24권. 17:2(408).] 거기서 헤롯왕의무기고를 쳐부수고 그의 부하뿐 아니라 다른 강도들에게도 무기들을 지급하였다. 그는 호위대를 만들어 왕같이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선동자들의 지도자가 되어 왕궁을 포위하고 이를 진두 지휘하였다. 그러나 므나헴과 그 일당은 전쟁 장비의 열세와 성벽 위에서 쏘아대는 적의 대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불리한 전황이 전개되자 적군의 목전에서 성벽 밑을 허물어 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망대의 한 부분 아래를 먼 거리서부터 굴을 파고 들어갔다. 그들은타기 쉬운 부분에 불을 지르고 나왔는데 망대의 밑받침에 불이 붙어 갑자기 망대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망대 뒤에 세워있던 또 다른 벽을 만났다. 아마 망대 밑을 파고 있어서 흔들렸으므로 포위된 자들은 적들이 굴을 파고 있는 것을 미리 감지하고 다른 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선동자들은 이미 그곳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였다가 크게 낙담하였다. 그러나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므나헴과선동자의 다른 지도자들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왕의 군사들과 자기 민족들의 항복만 받아들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밖으로 나왔지만 홀로 남겨진 로마군들은 절망감에 휩싸였는데, 많은 수를 뚫고 밀어부치는 것도 그들에게 무리였고 협상을 한다는 것도 치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일 그들에게 화친을 청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신뢰할 수도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점령될 것 같은 그들의 진영을 버리고 히피쿠스(Hippicus), 파사엘(Phasael), 마리암메(Mariamme)라고[㈜ 대헤롯에 의해 건조되고 전쟁. 5권. 4:3(161)이하에서 기술된 이 탑은 궁정담의 북편 옛 도시의 성벽에 있었다(176).] 불리는 왕의 망대로 도망했다. 그러자 므나헴과 추종자들은 로마 병사들이 도망하자 그 곳을 습격하였다.병사들이 망대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었으므로 그들중 많은 이들을 살해했고, 그들이 남기고 간 것들을 약탈했으며그 진영에 불을 질렀다. 이 일은 고르피아이우스(Gorpiaeus)[㈜ 히브리력으로는 엘룰월(8-9월).] 6일에 일어났다.



 9. 므나헴의 살인



 그 다음날 대제사장 아나니아(Ananias)는 수로(水路)에[㈜ 궁정 뜰에 있는 수로에 관해서는 전쟁.5권. 4:4(181)을 보라.]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강도들에 의해 그의 형 에제키아(Eze-chia)와 함께 살해되었다. 여기에 선동자들은 적들이 피신한 망대를 감시하여 병사들이 한 명도 도망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힘을 가진 자들을 제거하고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살해한 므나헴은 그 사건에 대해 감히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믿고 자제력을 잃은 폭군처럼 교만하고 야만스러운 자가 되어 버렸다. 엘르아살과 그 일당이 므나헴에 대해 들고 일어났다.엘르아살 일당은 말하기를 그들이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로마에 반란을 꾀하였는데, 유대인 교수형 집행인에게 그들의 자유를 헌납할 수 없고, 심지어 불법도 서슴치 않고 자행하는, 자기들보다도 더 천한 자를 주인으로는 섬길 수 없다고 불평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지도자를 꼭 필요로 한다면 므나헴만 아니면어느 누구라도 좋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들은 성전에서 므나헴을 습격하기로 계획하였는데, 그는 기도하러 다니는 어느 곳이나 위풍당당하게 황복(皇服)으로 늘어뜨리고 무장된 열성분자들의[㈜ 헬라어로는 \”열심당\”(Zealots)임.] 호위를 받고 다녔다. 엘르아살과 그의 추종자들은 맹렬하게[㈜ 모호한 본문과 의미임.] 그를 공격하였는데 나머지 백성들도 일단 므나헴이 쓰러지면 모든 폭동이 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엘르아살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를 향하여 돌을 던졌다. 므나헴과 그의 부하들은 한동안 저항했으나 많은 수가 그들을 덮쳐 오는 것을 알고 가능한한 멀리 피신하였다. 무리들은 잡은 자는 죽이고 숨은 자들을 찾아다녔다. 비밀스럽게 마사다로 숨은 몇몇 중에는 므나헴의 친척인 야리우스(Jarius)의 아들 엘르아살도 있었는데, 후에 마사다의[㈜ 전쟁.7권. 8:2(275)이하. 마사다(Massda)의 포위 공격으로 팔레스틴에서의 전쟁이 끝났다.] 폭군 역할을 맡았다. 므나헴 자신은 오플라스(Ophlas)라[㈜ 도시 남부에 있는 지역인 Ophel(\”융기\”라는 뜻)은 \”성전의 남쪽에 있는 동쪽 언덕 전부이거나 그것의 일부이다.\”(A.Smith, Ferusalem, i:154).] 불리는 곳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몰래 숨었으나 엘르아살의 추종자들이 그를 사로잡아 많은 사람들 앞으로 끌고 왔다. 그는 그곳에서 갖은 고문으로 능욕당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의부하들도 므나헴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던 압살롬(Absalom)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10. 로마 수비대를 장악하고 학살하다



 내가 말한 대로 지금까지[㈜ 전쟁.2권. 17:9(445).] 백성들이 엘르아살파를 원조했던 것은 그 일이 반란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였다. 그러나 므나헴을 죽인 공모자들은 전쟁 중지를 원하지 않았고, 더 많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전쟁을 계속해나갔다. 이에 로마 수비대장 메틸리우스(Metilius)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되자 성을 포위하고 있는 엘르아살에게 사신을 보내어 단지 그들의 목숨만 살려준다면 그들의 무기와 그들이 가진 것들을 넘겨주겠다고 했다. 반역자들은 그들의 요청에 쾌히응하여 니코메데스(Nicomedes)의 아들 고리온(Gorion)과 사독(Saddok)의 아들 아나니아(Ananias), 요나단(Jonathan)의아들 유다(Judas)를 보내 맹세코 확실한 신변 보장을 해주겠다고 했다. 이에 메틸리우스는 자기의 병사들에게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하였다. 병사들이 무장하고 있는 동안에는 선동자들은간섭하지 않고 배신의 낌새를 채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항복 문서대로 위험에 대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창과 방패를 내려 놓자 엘르아살의 부하들은 그 병사들을 포위 공격하여 그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이에 대하여 로마 군사들은 그들 자신을 방어하지도 동정을 구하지도 않고 약속을 배반한 적들에게 고함만 지를 뿐이었다. 이에 메틸리우스(Metilius)를 제외한 모든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었다. 메틸리우스는 자비를 구했으며 유대인이 되어 할례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메틸리우스 빼놓고는 모두 사라져갔다. 그러나 로마군에게 있어서 이 손실은 경미할 뿐이었고 엄청난 군대에 비한다면 전사자 몇 명을 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 사건이 민족의 파멸이 시작되는 전주곡이 된 불행한 사건이 되어 버렸다. 유대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이제 곧 시작될 것과, 비록 로마인들로부터의 잔혹한 복수는 간신히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얼룩진 예루살렘에 대한 하늘의 심판은 모면할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는 대성통곡하였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눈물바다를 이루었으며, 로마인들을 살해하는 데 가담하지 않았던 온건한 사람들조차도 선동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에 그들이 대량 학살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그날이 범죄 행위는 물론,가장 건전한 노동조차도 멈추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안식일이있다는 데에 범죄의 심각성이 더하였던 것이다.[㈜ 만일 대량 학살을 유대력 Megilath Taanith에서 언급한 사건과 동일시한다면 월일은 아마도 Elul월 17일일 것이다(Gorpiaeus):\”Elul월 17일에 로마군은 유대와 예루살렘을 철수했다\”(vi.(b)in Zeitin\’s edition, Philadelphia, 1922) ; Zeitlin이 그 대량학살 사건을 전쟁.2권. 17:8(437)에 언급된 조건부 항복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그 당시 로마와 어떤 결말도 없었다는 것과 요세푸스가 그 달의 6일에 그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는 두 개의 이론(異論)에 직면한다. 로마군은 11일 이상 동안 대량 학살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카테고리: josephus, TN-catholicdictionary-C2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