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제 18장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난과 살륙에 대하여

 


제 18 장



유대인들에게 닥친 재난과 살륙에 대하여



1. 가이사랴에서 수리아인들이 유대인을 학살하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로마 병사들이 죽을 때 가이사랴 백성들이 그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죽였다. 이것은 직접적인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일어났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 시간도 안되어 20,0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이제 가이사랴에는 단 한명의 유대인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나마 살아남아 도망친 자들도 플로루스(Florus)의 명령에 의하여 모두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여진 채 조선소로 넘겨져 버렸기 때문이다.유대인들은 가이사랴에서의 일을 듣고 충격을 받았으며 전국적으로 큰 분노에 휩싸였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여러곳으로 흩어져 수리아(Syria)의 마을들과 근접 도시들과[㈜ 다음의 도시 목록은 데가볼리(Decapolis)의 남쪽에서 북쪽 방면을 지나서 갈릴리를 돌아 일반적으로 북쪽으로부터 남쪽에 이르는 해안선을 거쳐 지나간다. 분할 지역은 아마도 페라이, 갈릴리,유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빌라델비아(Philadephia), 헤스본(Heshbon), 거라사(Gerasa), 펠라(Pella), 스구도볼리(Scythopolis), 후에는 가다라(Gadara)와힙포스(Hippos) 등지를 공격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울라니티스(Gaulanitis)를 습격하고 그중의 어떤 도시들을 파괴시키고 불을 지른 후 두로인들(Tyrians)의 영토인 케다사(Kedasa),[㈜ Merom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게데스-납달리(Kedesh-Naphtali)는 항상 갈릴리와 교전중에 있었다(전쟁.4권. 2:3(105)).] 톨레마이스(Ptolemais), 가바(Gaba)[㈜ 대헤롯이 그의 노련한 기병을 위해 갈릴리에 세운 친 로마 도시이다(전쟁.3권. 3:1(36) 자서.24.115)).], 가이사랴(Caesarea)에도 갔다. 세바스테(Sebaste)나[㈜ 사마리아.] 아스글론(Askelon)도 그들이 공격해오는 맹렬함을 대적할 수 없었다.그들은 이 마을들을[㈜ 혹은 주변의 마을들(Reinach).] 완전히 불을 지른 후 안테돈(Anthedon)과 가사(Gaza)도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이 모든 도시들의 주변 마을들을 약탈했고 잡힌 남자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2. 수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하게 된 원인과 형편



 그러나 수리아인들도 자기들이 죽임을 당한 이상으로 많은 유대인을 죽였다. 수리아인들은 그들의 도시에서 잡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품고 있던 증오심 뿐만 아니라 수리아인들이 유대인들과 있으면서 당하게 될 위험을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그래서 수리아 전역은 극도로 무질서하게 되었다. 모든 도시는 양진영으로 나뉘어졌는데, 한쪽 진영의 안전을 위해서는 다른 한쪽을 먼저 공격해야 하는, 곧 공격이 최선의 방어였던 것이다. 그래서 낮에는 피로 뒤범벅이 되었고, 밤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공포에 떨어야 했다. 왜냐하면 수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믿었지만 수리아인 가운데서도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의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리아인들은 그들 중에 있는 중립을 지키는 자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이들을 외국인처럼 두려워하였다. 심지어 오랫동안 가장 온순한자들이라는 평을 받은 자들도 탐욕으로 인해 적을 살해하려는 충동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전쟁터에서 전사한 적들의 몸에서 전리품을 탈취하듯이, 희생된 유대인들로부터 재산을 탈취하여 자기 집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는 피살자의 소유물을 가장 많이 약탈한 자가 가장 성공적인 공격자라는 찬사의 말을 듣게되었다. 그리하여 그 도시는 남녀 노소할 것 없이 살해되어 옷이벗겨진 채 여기저기 내팽개진 시체들의 썩는 냄새로 온통 뒤덮였다. 이와 같이 온 지역이 이런 참혹한 광경에 치를 떨어야 했으나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이미 저질러진 만행보다도 앞으로 진행될 끔찍한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3. 유대인 동료들에 대한 스구도볼리인들의 불신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갈등은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이 스구도볼리(Scythopolis)에[㈜ 성경의 벳산(Bethshan), 요르단의 서쪽, 요르단과 길보아산 사이에 있는 데가볼리의 열 개의 도시들 중 한 도시인 현재의 Beisan임.] 원정을 갔을 때, 스구도볼리 사람들과 한패가 되어 동족인 유대인들과 싸우러 나온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동족 유대인을 생각하기 이전에 그들자신의 안전만을 우선 염려했다. 이들 유대인이 너무 열심히 동족에 대항하여 싸우자 스구도볼리인들은 그들을 의심하였을 정도였다. 스구도볼리 주민들은 자기편을 들고 있는 유대인들이 동족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밤에 자신들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스구도볼리인들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다른 민족인 우리들에게 여러분들의 동맹을 확고히 하고 신실성을 나타내려면 여러분의 가족들을 데리고 도시를 떠나부근 숲속으로 가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아무 의심없이 그들이명한 대로, 스구도볼리인들이 안심하도록 이틀 동안 조용히 숲속에 있었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밤에 스구도볼리인들은 기회를 보아 유대인들의 목을 모두 잘랐다. 유대인들은 경계를 하지않았고, 또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당했다. 스구도볼리인들은 13,000명이 넘는 수를 죽였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약탈하였다.[㈜ 이 사건은 자서. 6(26)에 또 다시 언급되고 있음.]



4. 유대인 변절자 시몬의 영웅적인 죽음



 여기에서 시몬에게 일어났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유대인 사이에서 명성이 있었던 사울의 아들이다.이 사람은 그 신체적 힘과 행동의 대담함이 보통 사람들과는 구별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두 가지 모두를 그의 동족들을 괴롭히는 데 남용했다. 그는 매일 스구도볼리를 공격하러 온 많은 유대인들을 죽이고, 유대인 전군을 패주하게 하여 승리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이 동족에게 행했던 살인에 대한벌이 그에게 떨어졌다. 스구도볼리인들이 숲에 있는 유대인들을 공격할 때 시몬은 칼을 빼들었지만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적의수가 너무 많아 어찌할 수 없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떨면서 외쳤다. \”야, 이스구도볼리 놈들아, 나는 내 죄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나와 동족인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내 목숨을 내놓고 너희들에게 충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너희 이방인놈의 배반을 당하고 또 우리 민족에게 가장 사악한 죄를 저지른 나같은 불한당은 적의 손에 죽는 것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스스로 죽을 것이다. 내가 자결하는 것이 나의 큰 죄악에 대한 벌이기도 하고 내 용기의 증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너희 어느 놈도 시몬을 죽였노라고 자랑하지 못하며 시몬을 쓰러뜨렸다고 나를 모욕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동정과 분노의 눈으로 그의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에게는노부모와 처자식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그의 아버지의 흰머리카락을 잡고 그를 찔렀다. 그 다음은 같은 방법으로 어머니를 죽였는데 그들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후에 전과 같이 그의 처자식들을 죽였는데, 그들은 적에 의해 죽기를 원치 않으므로 모든 가족들이 그의 칼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그리고 그때 그는 그의 가족 위로 높이 올라 가서 모든 사람이볼 수 있도록 그 시신들 위에 섰다. 그는 오른 손을 높이 쳐들고그 자신의 배를 깊이 찔렀는데 모든 사람이 이 광경을 목도했다. 이 젊은이는 그의 힘과 용기 때문에 그의 동족을 대항하고 이방인에게 충성을 다한 대가로 고통받아 마땅했다.



 5. 수리아 전역에 유대인을 대항하는 총봉기가 일어나다



 게다가 스구도볼리의 학살사건에 더해 유대인 학살은 다른 도시에서도 자행되었다. 아스글론(Askelon)의 유대인들은 2,500명, 톨레마이스(Ptolemais)의 유대인들은 2,000명이 죽었고 적지 않은 수가 갇혔다. 두로(Tyro)의 유대인들은 많은 수가 죽고 감금되었다. 히포스(Hyppos)와 가다라(Gadara) 지방에도 용기있는 유대인들은 죽이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감금시켰다. 수리아의 나머지 도시들도 유대인들을 미워하든지 두려워하든지 간에 다른 지방에 따라서 죽이거나 감금했다. 단지 안디옥(Antio-ch), 시돈(Sidon), 아파메아(Apamea)에서는[㈜ 안디옥의 남부 Orontes에 있음.] 그들과 함께 사는 유대인들은 봐주었다. 그들은 그 유대인들을 죽이지도 감금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유대인을 봐준 것은 자기들의 인구가 너무 많아서 몇 안되는 유대인들의 봉기를 무시할 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큰 호의를 베푸는 이유는 아무 반란도일으키지 않게 보이는 사람들을 동정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라사인들도[㈜ 거라사 : 얍복(Jabbok)강의 북쪽, 데가볼리의 남동쪽에 있음.] 그들과 함께 사는 유대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그곳을 떠나기 원하는 사람들을 국경에 이를 때까지 안내하기도 했다.



6. 아그립바 총독이 유대인을 학살하다



 아그립바 왕국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음모가 있었다. 아그립바 왕이 안디옥에 있는 케스티우스 갈루스(Cestius Gallus)에게가 있는 동안 공무를 돌보도록 그의 친구 중 하나인 노아루스(Noarus)를[㈜ 자서. 1(48)이하와 아마도 전쟁. 2권. 12:8 (247)의 병행구절에서는 Varus라고 불려짐.] 두고 갔는데 노아루스는 소아이무스(Soaemus) 왕과[㈜ 전쟁.2권. 18:9(501)에서 로마와 그밖의 다른 곳에 파견대를 보낸 것으로 언급된 Emesa(북 수리아에 있는 Homs) 왕이다. 자서.11(52)에서는 레바논의 분봉왕이었으며, 아마도 타키투스 \’연대기\’ xii:23(주후 49년에 죽음)에서 언급된 Ituraea 왕인 또 다른 Soemus의 후손(손자일지도 모름)으로 언급됨.] 친척이었다. 이때 바타나이아(Batanaea)를 떠나 70명이왕국에 왔는데, 동료 시민들 사이에서도 가문 좋고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바타나이아에서 어떤 소요가 일어날 경우에 이 소요를 충분히 진압시킬 만한 군대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노아루스는 왕의 무장 군인을 몇 명 보내 그 70명을 모두죽였다. 이 잔인한 행동은 왕의 동의도 없이 이루어졌다. 그의한없는 탐욕이, 이 일을 고의로 하게 만들었고, 그의 동족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왕국에도 큰 해를 초래하게 하였다.그는 아그립바가 그의 행위를 알게 될 때까지 이런 야만스런 행동을 자행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소에무스에 대한 예우로서노아루스를 사형에 처하지 않고 그를 해임시켰다.[㈜ 바루스(Varus)가 아그립바 왕을 찬탈하려는 열망과 바루스의 유대인 학살 그리고 그의 대임(代任)에 관한 이야기는 자서. 11(52-61)에서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한편 선동자들은 여리고 위에 있는 키프로스(Cypros)라고[㈜ 대헤롯에 의해 건조되었고, 그의 모친의 이름을 따라 명명됨(전쟁.1권. 21:9(417).] 하는 요새를 점령하고 유격대들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그 요새를 완전히폐허로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마카이루스(Machaerus)에[㈜ 사해의 동쪽 연안 위쪽.] 있는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군 수비대에게 요새를 자기들에게 넘겨주고 그곳을 떠나라고 설득했다. 이에 로마인들은 무력으로 그들이 그곳을 점령할까 걱정스러워서 조건부로 그곳을 떠나겠다고 그들의 제안에 동의했다. 병사들은 원했던 안전을 보장받고 주둔하고 있었던 요새를 마카이루스의 주민들에게 넘겨주었는데 백성들은 자력으로써 이곳을 지켰다.



7.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인과 유대인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곳 주민들 중 과격한 자들이 유대인들을 계속 괴롭혔다. 이것은 알렉산더(대왕)가 애굽을 공격할때 유대인들이 자진해서 도와준 것을 알고, 이런 도움에 보답으로서 헬라인과 같은 특권을 이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준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다.

 이런 특권은 그의 후계자들의 치하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다.또 그들은 유대인들을 위해 특별한 장소를[㈜ 그밖의 다른 곳에서 요세푸스는 이 별도의 장소가 알렉산더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각주와 함께 아피.2권.4(35)참). 그러한 특권은 톨레미와 로마인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계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으며, 아피.2권. 4,5(42-64)에서 보다 많이 기술되고 있다.] 할당해 주어서 그들이 전처럼 외국인들과 서로 섞이지 않게 되었다. 또한 더 나아가 그들이 마게도냐인(Macedonians)으로 불리울 수 있도록 특권을 주었다. 로마인이 애굽을 점령했을 때에 초대 가이사(thefirst Caesar)나 그를 뒤이은 어느 황제도 알렉산더 때부터 유대인들에게 부여되었던 특권을 감소시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헬라인과는 충돌이 계속 일어났고, 이 소요는 더욱 커져가기만 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인들이 네로에게 보내는사절에 관해 토론하기 위해 공회로 모인 적이 있는데 이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극장 안으로 몰려들어 왔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유대인들을 보고 그들의 적이라고 갑자기 외쳐대면서 그들을정탐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면서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달려들어 유대인들에게 폭력을 가했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죽였다. 거기서 헬라인들은 유대인 3명을 잡아 그들을 산 채로 화형시키려고 끌고 가자 모든 유대인들이 이를 제지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에게 돌을 던졌으나, 후에는 불을들고 극장 안으로 돌진해 들어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태워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 도시의 총독인[㈜ 애굽 전 영역의 총독임. 전쟁.2권. 11:6(220)과 4권. 10:6(616)을 보라.] 디베료 알렉산더(Tiberius Alexander)가 그들의 감정을 억제시키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디베료 알렉산더는 무력으로써 그들을 깨우쳐 주기보다는 그들에게 몇몇 유력인사를 은밀히 보내어 로마군을 자극하지 말고 자제해 달라고 그들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과격한 자들은 디베료의 간청을 험담하였다.



 8. 로마 병사들이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을 도망치게 함



 디베료는 그들이 큰 재난에 부딪혀야 비로소 난동이 겨우 평정되리라는 것을 알고서 시에 주둔한 두 개의 로마 군단과 우연히 리비아(Lybia)에서 함께 와있던 2,000명의 병사와 함께 유대인을 치러 보냈다.[㈜ 참).전쟁.2권. 16:4(387).] 병사들은 그들을 죽이는 것은 물론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방화하는 것까지 허락받았다.

 이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이 모여 살고 있는 델타(Delta)라[㈜ 알렉산드리아의 5개의 별도 장소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다섯 개의 글자를 따라 명명되었고, 두 개는 유대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Philo, \’In flaccum,\’ 전쟁.2권. 4:1(55)Cohn ; Reinach에 의해 인용됨).] 불리는 도시의 각 부분으로 맹렬히 쳐들어갔다. 그들 편에도 피흘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명령받은 대로 행했다. 유대인들도 전방에 중무장시킨 군대를 배치하고, 오랫동안 저항하였지만한번 무너지자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들판에서 잡히고 다른 이들은 집으로 도망갔다. 로마 병사들은 처음에 집안에 있는 것들을 약탈했고 또 불을 질렀다. 로마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창검을 휘둘러 그곳이 피로 넘치도록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시체가 50,000구나 쌓이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더라면 한 사람도 남지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로마군이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명령을 따르는 것에 익숙한 로마 군인들은 처음 명령에 죽이는 일을 멈추었으나 유대인에 대한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증오는 아주 심하여 좀처럼 유대인을 살해하는 일을 쉽게 멈추려 하지 않았다.



9.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들판을 장악하다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이 당한 비참한 재난들은 위와같았다. 한편 케스티우스(Cestius)[㈜ 수리아 총독, 2권:280등.]는 유대인들이 곳곳에서 무기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제12군단 전체와 그 나머지 군단에서[㈜ 수리아에 4개의 군단이 있었는데, 아구스도 시대 이래로 주둔해 있었다(타키투스 \’연대기\’ iv:5, Reinach에 의해 인용됨) : 즉 Ⅲ Gallica, Ⅵ Ferrata, Ⅹ Fretensis, ? fulminata : Mommsen, \’Provinces\’, ii : 63 참조.] 각각 2,000명씩을 뽑고, 6개 보병대, 4개 기병대와 거기에 더해 왕이[㈜ 주후 38년부터 음모로 인해 그의 왕위를 찬탈당한 72년까지 콤마게나(Commagene)(북부 수리아에 있음)의 왕인 Antiochus Ⅳ(전쟁.7권. 7:1 (219)이하).] 보낸 원군을 데리고 안디옥을 출발하였다. 안티오쿠스(Antiochus)가 2,000명의 기병, 3,000명의 보병과 많은 궁수를 원군으로 보냈고, 아그립바(Agrippa)도 보병 3,000명, 기병 1,000명을 보냈다. 또 소아이무스도[㈜ 에메사(Emesa)의 왕, 전쟁. 2권. 18:6(481)참조.] 그중 3분 1은 기병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궁수인 4,000명과 함께 톨레마이스(Ptolmais)로 진군했다. 또한 전투 기술은 없지만 기술이 모자라는 대신 유대인을 미워하는 열성으로 가득한 자들이 여러 마을에서 부터 모여들어 원군을 자청하였다. 게다가 케스티우스와 아그립바를 따라 도시를 지나 그의 진군을 안내하는 사람과 그들의 행동을 알려주는 참모도 있었다.



[가불을 점령함]

 그래서 케스티우스는 그의 병력을 데리고 급히 갈릴리의 강력한 도시인 가불(Chabulon)로[㈜ 자서. 43(213)등에서의 Chablol(가볼로)로 불려짐, 현 지명은 Kabul(카불); 가불이라는 이름은 솔로몬이 히람(Hiram)에게 선물로 준 지역을 히람이 못마땅하여 붙여준 이름이다(대상.9:13).] 진격했다. 그곳은 사람들의 도시(the City of Men)라고 불리는데, 유대 본국과 톨레마이스의 접경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도망하였기 때문에 도시는 황량했다. 그곳은 온갖 종류의 좋은 물건들로 가득하였고, 두로(Tyre)와 시돈(Sidon), 베리투스(Berytus)에 세워진것 같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경탄할 만한 아름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케스티우스는 스불론을 약탈하게 하고 불까지 지르게 하였다. 또 케스티우스는 인근 지역을 휩쓸고 다니면서 그 마을들에 불을 놓고 약탈한 후 톨레마이스로 돌아왔다.

 수리아인들 특히 베리투스에 사는 수리아인들이 약탈에 여념이 없을 때, 유대인들은 케스티우스가 퇴각한 것을 알고 다시 용기를 내어 남은 자들을 불시에 습격하여 약 2,000명 정도를 죽였다.



10. [욥바, 나르바테네 소왕국 정복]



 한편 케스티우스는 톨레마이스를 떠나 가이사랴로 왔는데 그는 병력 일부를 그에 앞서 욥바(Joppa)로 보내면서 명하기를\”여러분의 힘으로 불시에 습격하여 그 도시를 장악할 수 있으면그렇게 하라. 그러나 주민들이 공격해 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나머지 군사를 끌고 가기까지 우리를 기다려라\”고 했다. 케스티우스 군대의 일부는 민첩하게 해변으로 가고, 일부는 내륙으로 가서 양쪽에서 공격해 들어옴으로 쉽게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다.주민들은 미리 도망할 준비도 못하고 아무 대책도 없이 군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로마군들은 가족을 모두 죽이고 약탈한 다음 도시를 불살랐다. 이에 죽은 수가 8,400명 정도였다. 이와 같이 케스티우스는 가이사랴로 인접한 나르바테네 소왕국(the top-archy of Narbatene)에도[㈜ 참).전쟁.2권. 14:5(291).] 상당한 수의 기병대를 보내 그곳을 함락시키고 많은 주민들을 죽였다. 그들은 이전에도 그랬던것처럼 여기서도 마을들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11. 갈릴리인들에 대한 진압



 한편 케스티우스는 제12군단 지휘관인 카이세니우스 갈루스(Caesennius Gallus)를 갈릴리에 보냈는데 그 왕국을 정복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병력을 그에게 주었다. 갈릴리 최강의 도시인 세포리스(Sepphoris)는 그를 팔을 벌려 환영하며 기꺼이 맞아들였다. 그 도시의 이러한 행동에 나머지 도시들은 잠잠하였다. 이에 반역자 패와 강도들은 갈릴리의 최중심부에 있는 산으로 도망했는데 그 산은 세포리스 맞은 편에 위치한 아사몬(Asamon)이라[㈜ 확인되지 않음.] 불리는 산이었다. 그래서 갈루스는 그들을 공격하러 그의 군사를 보냈으나 그들은 로마군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군에게 쉽게 창을 던질 수 있었다.이에 로마군이 접근하자 그들 중 200명 정도를 죽였다. 그러나로마군은 산을 돌아가서 적들보다 더 높은 위치를 차지했으므로 그들은 곧 패하고 말았다. 반역자들은 경무장 만을 할 수 있을뿐이어서 중무장한 로마군과 싸우는 것은 역부족이었고 또한 도망간다 해도 로마군 기병대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땅이 갈라진 틈에 몸을 숨긴[㈜ 혹은 아마도 \”피하는\”의 의미일 것이다.] 몇 명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그 밖의 약 2,000명은 모두 로마 기병대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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