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권 제 1장 가말라가 포위되고 함락된 것에 대하여

 


제 4 권 약 1년간의 사건을 다룸



가말라의 포위공격부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하러 온 때까지



  제 1 장



가말라가 포위되고 함락된 것에 대하여



1. 갈릴리 대부분이 항복했지만 여전히 반역의 기운이 남다



 요타파타(Jotapata) 함락 이후에도 로마인들에게 계속 대항했던 모든 갈릴리인들은 타리카이아(Tarichaeae)가 정복당하자 로마인들에게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기스칼라(Gischala)와 다볼산(Mount Tabor)을 지키던 군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요새와 도시들의 항복을 받게 되었다. 가말라는[㈜ 일반적으로 디베랴(Tiberias)맞은편. 갈릴리 호수 동쪽 근방에 있는 Kul atel Hosn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이곳이 갈릴리 호수 동편 하룻길인 Dechamle라고 주장한다. Schurer, \’G.J.V.\’3판 1:615 이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그립바(Agrippa)의 관리인 빌립(Philip)의 영향으로 로마와 동맹을 유지했다. 자서.11(46-61) ; 그 후 그 지역은 반란자들과 합류했다.] 타리카이아(Tarichaeae) 맞은편, 호수 건너편에 위치했으며 기스칼라와 다볼산의 사람들과 반역에 동참하고 있었다.가말라는 소가네(Sogane)와 셀류키아(Seleucia)와[㈜ Sogane(Gaulan 지역에 위치하여 정확한 위치는 미확인됨. Galilee의 Sogane와 구별된다)와 Seleucia(Selukiyen, Bethsaida Julias의 북동쪽)는 요세푸스에 의해 강조된 장소로서, 자서.37(187), 전쟁2권. 20:6(574)에서도 언급되었다.] 마찬가지로 아그립바(Agrippa)왕국에 속해 있다. 소가네와 셀류키아는 모두 가울라니티스(Gaulanitis)에 속해 있는데 소가네는 상부가울라니티스(Upper Gaulanitis)에 속하고 가말라는 하부 가울라니티스(Lawer Gaulanitis)에 속한 지역이다. 반면 셀류키아는 세메코니티스(Semechonitis)호수[㈜ Baheiret el Huleh, 게네사렛(Gennesaret)북편 작은 호수;전쟁.3권. 10:7(515). 여기에 언급된 호수의 길이는(60 \”Stades\”=거의 7miles)북쪽 늪지대의 일부를 포함한 치수이다. 현대 지도에서의 면적은 4x3miles이다(가장 크게 본다 해도)] 근처에 있다. 이 호수는너비 30퍼얼롱, 길이 60퍼얼롱의 호수다. 호수의 늪지는 다프네(Daphne) 지역까지[㈜ 아마도 Dan(Laish)의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요르단의 한 지류의 원천인 Khurber dufna일 것이다.] 이르고, 여러면에서 멋진 좋은 곳이며 금송아지 신전(temple of the golden calf)[㈜ 여로보암(Jeroboam), 단(Dan)과 벧엘(Bether)에 각각 세워놓았던 두 마리의 금송아지 중 한 마리(대상 12:29)] 아래로 흘러 대 요단강(Great Jordan)으로 합류하는[㈜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지역의 바니아스(Banias)로부터 아래로 흘러가는 동쪽 지류(Banias).] 소위 소 요단강(Little Jor-dan)에 물을 흘러 보내는 샘들을 갖고 있다. 아그립바는 로마인들에 맞선 반역 초기부터 협상 끝에 소가네와 셀류키아를 자기쪽에 연합시켰다.



 2. 가말라의 지리적 특성



 이 도시(가말라)는 요세푸스(Josephus)가 그 주위에 성벽을 쌓고[㈜ 전쟁.2권. 20:6 (574).] 그 아래에 도랑과 동굴들을 만들어 요새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점령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 곳 사람들은 비록 숫적으로는 요타파타 주민들 보다 적었지만 요타파타 주민보다 지역의 특성 때문에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형적 이점을 더 이상 맹신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지역적 안정성 때문에 그곳으로 피해온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에도 그곳을 포위 공격했던 아그립바의 군대[㈜ Aequus Modius휘하의 군대, 자서. 24(114).]를 대항하여 7개월밖에 견디지 못했다.



 3. 베스파시안이 가말라를 포위하다



 베스파시안(Vespasian)은 디베랴(Tiberias) 앞에 있는 아마두스[㈜ Hammam, 디베랴(Tiberias)와 타리카이아(Tarichaeae)사이;참), 전쟁.3권 10:1(462). 또한 온천이었음. 고대. 18권. 2:3 (36).](Ammathus ; 이를 번역하면 온천(warm bath)의 의미며 그곳에 치료에 유용한 온천수가 있기 때문이다) 에 진을 쳤다가, 진을 거두고 가말라로 이동했다. 그런데 그곳의 지리적인 특성상 완벽하게 포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그는 가능한 몇 군데를 선정하여 그곳에 보초병을 배치하여 감시토록 하였다. 그리고 가말라 전체가 내다보이는 산을 점령하였다. 그들의 관례에 따라 군대들이 산위 진영을 요새화하자 베스파시안은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 제방은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탑이있는 지점과 마주보는 동쪽 산 마루에 축조되었는데 이는 15군단에 의해 진행되었다. 제10군단이 도랑과[㈜ 요세푸스가 이전에 팠던 곳. 전쟁. 4권. 1:2(9).] 계곡들을 메우는동안 제5군단은 그 맞은편에 있는 도시의 중심부를 수비하는역할을 하였다. 토성 쌓는 작업이 진행되는 도중에 아그립바왕이 성벽 가까이까지 가서 성벽에 있던 사람들에게 항복하라고 권고하다가 투석기에 의해 오른쪽 팔꿈치를 돌로 맞았다. 그러자 그의 신하들이 곧 그를 에워쌌다. 그러나 같은 동족이고 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충고하는 자에게 이렇게 난폭한 행동을자행하는 사람들이라면 적과 이방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야만스런 행동도 거침없이 하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로마군들은 왕이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과 자신들이 당할 것에 대해 앙갚음으로그들을 무차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4. 로마인들이 가말라로 쳐들어가다가 가공할 결과를 빚다



 제방 쌓는 일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쉽게 익숙해져 제방 쌓는 일을 조속히 끝낸 다음 그들은 공격 무기들을 이동시켰다. 한편 이 도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카레스(chares)와 요셉(Joseph)은 물이나 다른 생활용품들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도시가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병사들을 격려한 다음 그들을 성벽으로 이동시켰다. 그리하여 얼마동안 그들은 병기를 이동하는 로마병사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노포(弩砲)에서 품어대는 불과 투석기에서 돌들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그들은 도시 안으로 후퇴하였다. 로마인들이 공성퇴(부수는 기계)로 성벽의 3곳을 치자 성벽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무너져내렸다. 그러자 그들의 나팔 소리와 갑옷 소리, 고함 소리가 뒤범벅이 된 채 무너져 내린 성벽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런데 처음 로마인들이 성벽으로 들어올 때 얼마동안 가말라인들은 그들을 반격하여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나 숫적으로 우세한 로마군사들은 용기백배하여 그들을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이에 숫적으로 열세인 가말라인들은 사방에서 물밀 듯 밀려오는 로마군사들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시의 고지대로 쫓겨 올라가 추격하는 로마군대에게 포위되었다. 원래 지형이 험하고 비좁아 로마군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틈을 타 가말라인들은 공격해 들어온 로마 군사들을 오히려 비탈길로 밀어 떨어뜨리고 죽이기도 하였다. 로마군들은 완강히 버티는 적을 더 이상 공격할 수없었고 뒤에서 계속 밀려오는 자기편 군사들 때문에 뒤로 물러날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로마군들은 적군의 집 지붕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 집들은 낮았는데[㈜ 그 집터의 \’깎아지른 듯한\’ 형세는 상기되어야 한다. 전쟁.4권. 1:1(7);경사면의 높은 쪽에 접한 지붕의 한쪽 끝은 provsgeio\”(지면과 가까운)일 것이다. 반면에 지붕의 다른 끝은 지면에서 꽤 높은 곳일 것이다.] 지붕 위로 병사들이 몰려들자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집이 갑자기 내려앉아 버렸다. 집 하나가무너지자 그 아래에 있던 집들이 무너져 내리고 또 그 아래 있던 집들은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사고로 많은 로마인들이 죽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곳으로 피할 틈이 없었기 때문에 집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다른 집 지붕위로 뛸 수밖에없었다. 이렇게 무너지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게 되었고 무너진 집 더미에 깔렸지만 그래도 빠져 나오려고 기를 쓰던많은 사람들도 동료들에게 밟혀서 상당수가 죽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집들이 (계속) 무너지면서 발생한 먼지에 의해 질식하여 죽었다. 가말라인들은 이것이 하느님이주신 도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로마인들을 앞으로 계속 밀어붙여 지붕으로 올라가게 했다. 가말라인들은 위에서 계속 불을 던져 넘어진 자들을 죽였다. 집들이 무너진 것으로 인해 던질 돌은 풍부해졌고 죽은 적들로부터 무기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은 적으로부터 칼을 뽑아 거의 반쯤 죽어가는 다른 적들을 해치웠다. 또한 집이 무너질 때 뛰어내린 사람들은 추락하여 죽었다. 도망가는 자들이 도주로를 발견하는 것도 역시 쉽지 않았다. 그들은 길에 익숙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먼지가 너무 자욱하여 동료들 조차도 서로 알아보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 하다가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기도 하였다.



5. 위험한 상황에 처한 베스파시안



 로마인들 가운데 일부는 어렵게 도시 밖으로 탈출하는 길을 찾아내어 후퇴하였다. 그러나 베스파시안은 곤경에 빠진 병사들 속에 계속 갇히다시피 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의 군대에 의해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는 도시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자신의 안전도망각한 채 엉겁결에 이 도시의 가장 높은 부분에까지 다가간 그는그제서야 자신이 단지 몇 몇 직속 부하와 함께 백척간두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그의 아들 티투스는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스파시안은 티투스를 수리아의 무키아누스(Mucianus)에게[㈜ 수리아의 총독(Kegatus)이며 후에 베스파시안(Vespasian)이 황제가 되도록 강력하게 지지한자들 중의 한명.] 보낸 직후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돌아가는것이 안전하다고 생각지도 않았고 자신의 명예에도 도움이 되지않는다고 판단한 그는 젊었던 시절에 겪었던 고난을 연상하며 타고난 용맹성을 발휘하여 마치 어떤 영감을 받은 것처럼 부하들을 한데 연결하여 그들의 몸과 무기로 방패를 만들어서 도시 정상에서 쏟아지는 적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수없이 많은 적의 숫자와비오듯 쏟아지는 화살의 공격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결과 오히려 적들이 그의 용기에 놀라 공격을 늦추었다. 베스파시안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물러나면서도 그들에게 등을 보이지 않은 채 후퇴하여 도시의 성 밖으로 피신하여 나왔다. 많은 로마인들이 이 전쟁에서 죽었는데 그중 십부장 아이부티우스(Aebutius)라는 사람도 포함되었다. 그는 이번 전쟁뿐만아니라 여러 전쟁에도 참가 했었는데[㈜ Aebutius는 전쟁초기에 갈릴리에서 요세푸스와 작은 접전을 하였다. 자서. 24(115-120). 그리고 그는 \”뛰어난 기력과 능력의 사람\”으로 Jotapata(요타파타)를 포위 공격할 때 특별한 임무를 위해 선발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상당한 용기를 보여주었고 유대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 인물이었다. 그런가하면 갈루스(Gallus)라는 백부장은 전투중에 고립이 되어 있는 다른 10명의 부하와 어떤 사람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식사때 사람들이 로마인들을 어떻게 공격하고 자신들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는 말을 몰래 엿들었다. 갈루스와 그의 부하들은 모두 수리아인들이었다. 그는 밤에 일어나서 그집 식구들의 목을 전부 베고 그의 병사들과 함께 로마의 진지로 안전하게 귀환하였다.



6. 베스파시안이 자기의 군대를 위로하다



 베스파시안은 전쟁의 패배로 매우 상심한 자기의 군대를 격려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전에는 결코 그렇게 패배한 적이 없었고 게다가 자신들의 장군을 절대적인 위험 속에 홀로 내버려두었다는 점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안 자신은 그 점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으려 했으며 어떤 식으로도 그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다음과같이 말했다. \”우리는 남자답게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에 대하여견뎌야만 한다. 그리고 전쟁이란 피흘림이 없이 승리할 수 없는것이다. 왜냐하면 운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변하는 것이다.[㈜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인 palivmpou\”(\”귀환하는\” or \”후퇴하는\”)가 또 다른 단어인 dusuvpoisto\”와 함께 고대. 15권. 208에서 한번 더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요세푸스나 그의 조수가 가다라의 멜레아케르(Meleager of Gadara)가 쓴 경구(\’Anth.Pal.\’ V. 163)를 인용한 것일 것이다.] 결국 그들의 죽음은 너희들이 지금까지 수없이 죽인 유대인의 핏값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를 신에게 드린 것이라고[㈜ 즉 전쟁(혹은 운명)의 신은 피를 요구한다.] 생각하면 된다. 마치 사악한 사람들이 성공을 했을 때 지나치게 자만하듯이 겁많은 사람들은 이와같이 패배할 경우 많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되는 것은 순간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병사는 불행에서도 냉정한 정신을 소유한 자이며 이런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전에 잃었던 것들을 기쁘게 다시 회복하는 자이다. 작금에 일어난 일에 관해서는 유대인들이 용감했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 병사들의 나약함 때문도 아니다. 단지 난공불락의 지형적 요인이 유대인들에게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고 우리에게는 불리하게 작용된 것이 이유라면 이유이다. 이렇게 볼 때 잘못이 있다면 너희들의 열심히 지나쳤다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적들이 처음에 고지로 후퇴했을 때 너희들은 열정을 얻게하고 더 상 그들을 추적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너희들에게 그런 위험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적들을 저지대로 유인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평원에서 전투할 수 있도록 유인했어야 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전쟁에 대한 승리에만 집착하여 몰고 갔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의 안전은 돌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너희들이 그렇게 부주의하고 앞뒤를 가리지 못하며 흥분했던 것은 노련한 기술과 훈련으로 연마되어 지금까지 승리밖에 모르던 우리 로마인답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러한 실수는 야만인들이나 저지르는 실수이고 과거에 유대인들이 번번히 패배한 주된 요인도 바로 거기에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 특유의 용맹성을 다시 회복하고 이러한 불행한 패배에 더 이상 상심해 있기보다 이번의 치욕적인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분발해야 한다. 그러나 최고의 위로는 바로 너희 각 사람의 오른 손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오른 손으로 우리 로마군을 살해한 자들을 복수할 것이고 그들을 죽인 자들을 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일은 매번 전투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 보다 앞서서 적을 대하는 것과 여러분 보다 나중에 후퇴할 것이다.\”



 7. 승리한 가말라 사람들의 형편



 한편 가말라 사람들은 이같이 크게 상상치 못한 성공을 한 것에 잠시동안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들은 로마인들과 화해할 희망도 없게 되고 사방이 차단된 채 그들에게 공급되는 생활필수품이 바닥나기 시작하자 점차 낙심하고 절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신들을 방어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가장 용감한 사람은파괴된 부분들을 지키고, 반면 더 약한 사람은 도시 주변에 아직도 남아있던 성벽에 배치되었다. 로마인들이 토성을 쌓고 두 번째로 이 도시를 공격했을 때 많은 가말라인들은 보초들이 배치되지 않은 곳이나 지하동굴을 통해[㈜ 전쟁. 4권. 1:2(9).] 도시를 빠져 나갔다. 반면잡히는 것이 두려워 그대로 도시에 머물러 있었던 사람은 식량이 부족하여 죽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갖고 있던 식량은 군사들의 양식으로 다 빼앗겼기 때문이다.



8. 다볼산에 대한 견제 작전과 플라키두스의 승리



 가말라 사람들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조건)에서도 계속 저항하자 베스파시안은 포위하고 있으면서 다볼산을 장악한 사람들을 정복하는 다른 일을 착수했다. 다볼산은 대평원과 스구도볼리(Scythopolis) 중간에 위치한 산으로[㈜ 만일 \”대평원\”이 여기서 보통 에스드라엘론(Esdraelon)평원을 가리킨다면 위의 기술은 부정확하다. 왜냐하면 다볼(Tabor)산은 그 평원과 이스르엘(Jezreel)계곡을 거쳐 스구도볼리(Scythopolis)로 이어지는 경계선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만일 <자서.41(207)에서 \”나의 막사가 위치한 대평원\”으로 묘사된>아소키스(Asochis)평지를 가리킨다면 그 기술은 다소 정확하다.] 그 높이는 30퍼얼롱이며[㈜ 이 숫자는 부정확하다 : 저상은 에스드라엘론 평원에서 1,843피트의 높이에 위치한다(바닥으로부터1,312피트이다). 정상의 플랫포옴은 길이가 3,000(피트이며 가장 큰 너비가 1,300피트이다(\’Encycl. Bibl.\’ s. v).] 북쪽으로는 올라가기 힘들고 꼭대기에는 26퍼얼롱의 평원이 있으며 사방이 성벽으로 에워싸인 곳이다. 요세푸스는[㈜ 디볼산은 자서. 37(188)에서 확증된 장소 목록 중에 언급되었다.] 이곳에 40일에 걸쳐 성벽을 세웠는데, 주민들이 빗물에만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물을 포함하여 모든 물자를 산 아래에서 공급받았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산에 기거했다. 베스파시안은 600명의 기마병과 함께 그 쪽에 플라키두스(Placidus)를[㈜ 베스파시안(Vespasian)의 도착전<자서.43(213)>과 도착후<위의 책 요세푸스 자신이 요새화한 곳들의 목록에 들어있다. 전쟁.3권. 4:1(59), 6:(110)등>갈릴리에서 근무하였고, 그 후 페라이아를 정복했던 군단 사령관이다(전쟁.4권. 7:4(419)이하.] 보냈다. 플라키두스는 그 산을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민들에게 평화적 협상을 제의하며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권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은 음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플라키두스 역시 음모를 가지고 있었다. 플라키두스는 그들이 평지로 왔을 때 사로잡으려는 목적이 있었고 다볼산 주민들 역시 플라키두스의 제안에 따르는 척하면서 그가 방심했을 때 습격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러나 플라키두스의 꾀가 이기고 말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적개심을 나타내며 공격하자 플라키두스는 도망가는 척하면서 추격하는 유대인들을 평원 깊숙히 유인해 내었다. 그리고 그의 기마병들이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디볼산 주민들을 둘러싸고 공격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쳐서 많은 사람을 살해하고 나머지 많은 사람들의 퇴로를 차단하여 되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볼산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도주했다. 반면 이지역 원주민들은 물이 바닥났기 때문에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는 약속을 받고 플라키두스에게 자신들과 다볼산을 내어주게 되었던 것이다.



9. 가말라의 망대를 무너뜨리다



 그러나 가말라 사람들 중에 용감한 사람들은 도망가서 숨었고 반면 더 약한 사람은 기근으로[㈜ 전쟁.4권. 1:7(52)이하에서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고 있으며 반복하고 있다.] 죽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휘페르베레타이우스(Hyperberetaeus)달, 22일[주후 67년 약 11월 9일]까지 공격을 계속 퍼부었다. 그때 제1군단에서 3명의 병사가 여명이 틀 무렵 맞은 편에 있는 높은 망대 아래로 살금살금 기어가서 비밀리에 탑 밑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사방이 어두웠으므로 지키고 있던 파수꾼들은 그들이 그곳에 접근할 때나 그 탑 아래 있었을 때에도 그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나서 이 3명의 병사들은 가능한 한 소리를 내지 않고 큰 돌 다섯 개를 빼내는데 성공하자 곧 바로 뛰어 되돌아 왔다. 그러자 갑자기 큰소리를 내면서 망대가 무너졌다. 또한 다른 곳에서 보초서고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도망가버렸다.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려던 많은 가말라인들이 로마군에게 살해되었다. 그중에 요셉(Joseph)이있었는데 그는 화살을 맞아 죽었다. 왜냐하면 그가 무너진 성벽을 넘어 도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안에 있던 사람들은 망대가 무너지는 소리에 너무 겁먹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적들이 그들에게 몰려온 것으로 믿고 여기저기로 도망했다. 바로 그때카레스(Chares)라는 의사의 치료하에 있던 환자가 이런 소동으로 겁에 질려 그의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전의 실패에 대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훼페르베레타이우스달(月) 23일까지 도시로 들어가지 않았다.



 10. 가말라의 함락



 바로 이때에 다시 돌아온[㈜ 그의 방문으로부터 수리아에서의 무키아누스(Mucianus)에 이르기까지 전쟁.4권. 1:5(32).] 티투스는 자기가 부재중에 로마인들이 당한 패배에 분노하여 200명의 기마병을 택하고 보병들을 선발하여 소리내지 않고 이 도시로 잠입하였다. 보초는 티투스가 오는 것을 보자 소리를 지르고 자신들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티투스가 들어오는 것이 도시안에 있던 사람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비통해 하며 성채로 도망갔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티투스를 만나러 갔다가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채로 도망가다가 제지당했다.이들은 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로마감시병들에게 살해당했다. 죽어가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점점 높아지고 피가 위쪽에서 도시의 아래로 흘러 내렸다. 베시파시안은 성채로 도망간 사람들과 싸우는 로마군을 도우러 왔다. 그는 전군을 이동시켰다. 이 도시의 정상 부분은 사방에 돌이 널려 있으며, 오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상당히 높이 솟아 있다.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사방은 깊은 낭떠러지이다.[㈜ 축어적으로는 \”심연이었다\”:비평주(註)를 보라. 전쟁.4권. 1:2(9).]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접근해 오는 로마인들을 차단하였다. 화살과큰돌을 아래로 떨어뜨려 로마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게다가 이들은 아주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적군의 화살이 그들에게 미치기 어려웠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파멸을 갖다 주려는 것처럼 폭풍이 유대인들 정면으로 불기 시작했다. 이 폭풍은로마군의 화살을 유대인 쪽에 이르게 하고 유대인들이 쏜 화살은 되돌아오거나 혹은 빗나가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바람이세차게 불어 절벽에 서 있을수도 없고, 올라오는 로마군을 볼 수도없었다. 그 틈에 로마 병사들은 절벽을 올라가 신속하게 유대인들을 둘러싸고 죽였다. 유대인들의 일부는 저항을 하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싸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첫 번 공격에서 전사한동료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로마병사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향하여 더욱 분을 내었다. 사방에 포위되었던 많은 사람들은 도망갈것을 포기하고 아이들과 부인들을 절벽아래로, 깊은 골짜기 속으로 던지고 자신도 그 아래로 떨어졌다. 그 골짜기는 성채 가까이에 있는 상당한 깊이의 우묵한 곳을 파서 생긴 곳이다. 그러나 로마인의 분노는 포위되어 있던 유대인들의 광기처럼 그렇게 황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4,000명을 죽인 반면,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한 유대인의 숫자는 5,000명 정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빌립(Philip)과 이종 질녀 2명을 제외하고는 한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빌립은 아그립바왕 군대의 장군이었던 야키무스(Jacimus)라 불리는 어떤 유명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전쟁. 4권. 1:1(2)위에 있는 각주 1)과 함께 자서. 11. (46)등, 전쟁.4권. 7:4(421), 9:10(556)을 보라.] 도시가 점령 당했을 때 이들은 로마인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아이들조차도 하나도 그냥 남겨두지 않았으며 심지어 성채밖으로 던져진 아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고르피아이우스(Gorpiaeus)달 24일[약 10월12일]에 첫 반란을 시작하고 휘페르베레타이우스달(月)23일에 [약11월10일] 가말라가 정복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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